2020-01-25

빌 게이츠 vs. 트럼프 (그리고 문재인)

"정치가 끼어들 될 수 있다는 건 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 정부일 거라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We always knew there would be politics involved. We never thought it would be out government."

망치를 잡은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빌 게이츠는 순순히 인정한다. 자신의 망치는 기술이며, 세상 모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 한다고.

하지만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세상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승부처인 기후변화와의 싸움 앞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 를 3부까지 다 본 후의 소감이다.

3부는 빌 게이츠가 만든 원자력 벤처 기업 테라파워의 홍보 영상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그럴만도 하다. 사람들이 워낙 싫어하고, 두려워하면서, 정작 알고자 노력하지도 않는 분야가 바로 원자력이기 때문이다.

테라파워에서 설계한 진행파 원자로는 지금까지 '핵폐기물'로 취급하던 사용후핵연료를 연료로 삼는다. 미 정부가 보관중인 '핵폐기물'을 연료로 쓸 수 있고, 지금껏 저장된 '핵폐기물'을 통해 미국 전체가 125년간 사용할 에너지 전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막대한 가능성 앞에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만큼 굉장한 일이다.

물론 본인이 개발한 아이템을 세일즈하는 사람의 말이긴 하다. 그러나 1) 인류 전체가 쓰고 남을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2) 이산화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고 3) 사고가 발생한다 한들 원자로가 자체냉각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개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빌 게이츠는 온갖 천재들을 끌어모았다. 그 중에는 <모더니스트 퀴진> 시리즈로도 유명한 네이선 미어볼트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직접 검색을 해보시라. 아무튼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의 입장은 확고하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원자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는 온갖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진행파 원자로의 개념 설계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완료했다. 2015년 시진핑을 만나 중국에 대량 보급하는 계약을 체결했지만,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문재인이 당선되면서 원전 생산의 생태계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중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다른 모든 발전소와 마찬가지로 인프라 건설 사업이다. 여기서 사업성이 맞으려면 생산과 소비에서 규모의 경제를 갖추어야 한다. 빌 게이츠가 생산과 소비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중국을 찾아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반면 한국은, 중국처럼 막대한 양의 원자력 발전소를 소비해줄 수는 없지만, 지어낼 수 있는 능력은 있다. 테라파워에서 개발한 기술을 얼마나 공유하고 이전할지가 관건이긴 하겠으나, 적어도 현재 표준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경수로의 건설, 유지, 관리 등에 있어서 한국은 독보적인 나라다.

그러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원자력 마피아'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노정태부터 그레타 툰베리까지 모든 인류가 오래도록 안정적인 기후 속에서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가치를 표방하며 당선된 문재인과, 노동계급의 불만을 들먹였지만 결국 미국 사회의 이주민 혐오를 무기삼아 당선된 트럼프는, 그 점에서 큰 교집합을 그린다.

지난번에 <인사이드 빌 게이츠> 1부를 보고 내놓았던 감상과 이 대목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 많은 문제들은 기술로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정치로 수렴한다. 따라서,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류 전체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탈원전은 철회되어야 한다. 순식간에 많은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집단이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는 우리에게 모종의 자아 성찰의 기회까지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01-23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방금 보고 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단순한 레즈비언 연애물인 것처럼 시작해, 마치 유화처럼, 한 겹씩 한 겹씩 레이어를 덧입힌다. 그리하여 소박하면서 웅장하고, 섬세하면서 대범하며, 응시하지만 귀기울인다. 온갖 모순되는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꽉 차있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기생충>이 아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느 심사위원들의 여성혐오를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봉준호의 영화가 소비되고 말았다는 것까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블랙 코미디'를 이루는 것 같기도 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예술 형식으로서의 영화가 죽었다는 말이 헛소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가 왜 존재하는지를, 압도적이면서도 담담하게 입증한다.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말로도 벅차오르는 감동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빌 게이츠와 신뢰의 화장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1화는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과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질없이 목숨을 잃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 문제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지도층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빌 게이츠는 그 문제를 직시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대로, 최선의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해결하려 한다.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가 기술, 테크놀로지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개발도상국의 대도시에는 대체로 하수처리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거나, 마련된다 해도 운영 과정에서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즉 개발도상국 화장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해당 국가의 사회적 자본이나 신뢰 따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가 '선의'로, 그러한 사회적 신뢰를 요구하지 않는 혁신적인 화장실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인도에서는 고철 및 비철금속의 가격이 상승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다. 살인이 늘어나서가 아니다. 맨홀 뚜껑을 뜯어서 팔아먹는 도둑들 때문이다. 가로등이 있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깜깜한 거리에서, 도둑이 뚜껑을 훔쳐간 맨홀에 사람들이 빠져서 다치고 죽는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 게이츠가 인도의 거리에 CCTV를 설치해준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도둑들이 훔쳐가봐야 팔아먹을 수 없는 재활용 플라스틱 따위로 맨홀 뚜껑을 개발해준다면 어떨까? 도둑은 맨홀 뚜껑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멀쩡히 길을 걷던 사람이 땅으로 쑥 꺼지면서 목숨을 잃는 일도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보이지 않는다. 맨홀 뚜껑을 훔쳐갈만큼 극심한 인도의 가난, 그리고 맨홀 뚜껑을 훔쳐가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인도라는 국가의 치안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안 죽는다면 그것은 진보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의 부재로 인해 인프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생길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은 여전히 발생할 것이다.

맨홀 뚜껑 도둑 문제와 하수처리장 유지비 도둑 문제는 결국 같은 것이다. 공공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취하는 자들을 해당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감시하고 처벌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빌 게이츠는 개발도상국에 전기가 필요 없는 화장실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발전기를 돌려서 이미 있는 하수처리장을 가동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공공 의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언론에서 글을 쓰거나 썼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나는 기술결정론자요 기술만능주의자다. 나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19세기에 발견되어 20세기에 상용화된) 기술을 인류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재앙과 맞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 모든 기술의 개발, 발전, 사용은 사회적 신뢰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부럽게도 빌 게이츠는 사회적 신뢰를 중시하는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벌었고, 그 미국인들의 선한 의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모든 사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2020-01-19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

입만 열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하던 분들 중, 지금 청와대와 여당 및 그 지지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해리스 대사 콧수염 일제 순사' 레퍼토리에 똑부러지게 반대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쪽바리'가 혐오발언인 게 분명하다면, 일본계 미국인을 상대로 '일제 순사같은 콧수염' 타령하는 것이 혐오발언이다. 이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우리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도 하다. 어떻게 우리 한국인이 백인과 일본인 혼혈인 미국 대사를 '인종차별'할 수 있느냐는 식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지만, 침착하게 설명해보자. 어떤 발언이 혐오발언이냐 아니냐, 인종주의적 언사냐 아니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속한 국가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 그저 '당사자에게 부여된 어떤 범주를 폄하와 모욕의 근거로 삼느냐'만 따져보면 된다.

가령 우리는 드록바를 '흑형'이라 부르는 게 인종주의적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50센트라던가, 쿤타 킨테라던가, 심지어 버락 오바마를 상대하더라도 '흑형' 타령을 하면 그것은 인종주의적 발언이다. 다시 말해 흑인에 대한 '흑형' 운운은 해당 흑인의 모국과 한국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백인, 혹은 백인 혼혈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 또한 억지다. 한국에서 미군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많은 혼혈인들이 당해온 모욕과 차별을 도외시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드록바한테 '흑형' 하는 거나, 웨인 루니한테 '백돼지' 하는 거나, 둘 다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다. 해리스 대사를 두고 '일제 순사', '조선 총독' 운운하는 게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있긴 한가?

유시민이 만들어낸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미 대륙 원주민은 날씨와 기후의 변화를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이 사안에 대해서도 굳게 입을 다물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차별주의에 반대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들은, 당신들은, 심지어 선량하지도 않다. 그저 차별주의자일 뿐이다.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세력에게 딱지를 붙이고 몰아세우기 위해 인권을 동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일말의 인권에 대한 관심 없이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던 시절에는 당신들이 인권을 적에게 던지기 위한 돌맹이 취급하던 것이 유의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선량함'에 반대한다.

2020-01-12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제목: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2020년 1월 8일, 요헨 비트너(Jochen Bittner) 작성

독일, 함부르크 - 독일인들은 비이성적인가? 스티븐 핑커라면 그렇게 생각할 듯하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핑커는 최근 독일 시사 잡지인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인류가 경제 성장을 멈추지 않으면서 기후 변화를 멈추고 싶다면, 원자력을 덜 쓰는 게 아니라 더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원자력을 몰아낸다는 독일의 결정은 "편집증적(paranoid)"이라고 말이다.

내 조국은 실로 독특한 실험을 감행하는 중이다. 메르켈 정부는 원자력과 석탄 발전소를 모두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독일 최후의 원자력 발전소는 2022년 말에 폐쇄될 예정이며, 최후의 석탄화력발전소는 2038년 문을 닫을 예정이다. 동시에 정부는 친환경적인 전기차 구입을 촉진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에너지 소비는 1990년 이후 10퍼센트 상승했다.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독일이 위험한 경로를 걷고 있다고 우려한다. 화석 연료와 원자력이 빠진 손실을 채워넣을 수 있을만한 신재생에너지가 적절한 시점에 마련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신재생에너지는 독일의 전력 공급 중 4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이상 확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기술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다.

독일의 몇몇 지방에서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풍력 농장"에 진력을 내고 있다. 새로운, 많은 경우 더 큰 풍력 발전기가 주변에 세워지는 것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해안가에서 산업 중심지를 이어줄 송전선이 새롭게 깔리게 될 지역에서도 주민들의 저항이 늘어가고 있다. 공식적인 집계에 따르면, 독일의 "에네르기벤데(Energiewende)", 혹은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송전선의 길이만도 5954킬로미터(3700마일)에 육박한다. 2018년 말 현재 실제로 건설된 송전선은 약 150킬로미터(93마일)에 불과하다.

이 계획은 전력 부족을 야기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석탄 화력 발전소보다 빨리 폐쇄하고 있는 탓에, 독일은 화석 연료에 의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독일은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기후에 피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대는 굳건하다. 60퍼센트의 독일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 놓인 태도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편집증은 정확한 용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는 딜레마와 맞닥뜨렸을 때 얼어붙은 듯 멈춰버리는 대단히 독일적인 특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선한 일이라면 열성적으로 달려드는 독일 같은 국가에게 있어서, 원자력 발전과 기후 변화라는 두 개의 악을 놓고 선택하는 것은 거의 수행 불가능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논의의 시작을 위해 언급하자면, 원자력 발전이 궁극적으로 안전한 것은 아니며, 독일인들은 특히 그 점에 대해 늘 불편함을 느껴왔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아토마우스티에그(Atomausstieg)", 즉 원자력 발전을 단번에 완전히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 왜? 당시 메르켈 총리가 설명한 바는 이렇다. "원자력 발전의 잠재적 위험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위험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에만 용인될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훈련받은 물리학자인 메르켈 총리는 원자력 재앙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같이 고도로 기술이 발전한 나라에서도 그러한 재앙이 발생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바꾸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악인 기후 변화는 어떠한가? 그 재앙은 석탄화력발전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으며 거의 확실하게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에서야 "기후 변화는 우리가 몇 년 전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고 인식했다. 동시에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파리 기후 협약에서 약속한 바를 이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나온 희망찬 숫자를 놓고 보더라도, 2020년 말까지 탄소 배출양의 40퍼센트를 줄인다는 목표치는 달성 불가능하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가 2011년 이후 훨씬 깊어졌으니, 각 국가들은 화석 연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원자력을 폐기하겠노라는 생각을 바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원자력으로 회귀하는 것은 녹색당의 입장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녹색당은 향후 메르켈의 기민당이 연정을 맺어야 할 상대이기도 하다. 녹색당은 1980년대 초 반핵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반핵운동은 녹색당의 DNA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중 구속 상태에 대해 녹색당은 그럴듯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아날레나 베르보크(Annalena Baerbock) 녹색당 공동대표는 독일 국영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석탄 발전소를 더 빨리 폐쇄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더 오래 유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러한 발상 자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우리 이웃의 정원에 원자력 폐기물을 묻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건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가 방사성 폐기물과 기술적 사고의 위험을 사회에 전가시키면서 기업의 배를 불리고 있는 것 또한 맞다. 하지만 석탄 발전소가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계산 또한 참이다.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은 독일의 거의 종교적 반핵 정서가 기술 발전에 따른 논의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미국, 러시아, 중국의 과학자들은 방사성 폐기물을 이용해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사용후 핵연료 보관 문제, 즉 원자력에 반대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인 그것의 해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른바 고속증식로에도 나름의 위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재생 가능 에너지 시대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원자력은 석탄이나 가스 발전소보다는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

일체의 원자력 발전소를 급속도로 폐쇄하면서, 독일은 [원자력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독일은 어쩌면 인류가 본 것 중 가장 안전하고 가장 친환경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기술과의 접점을 차단해버렸다. 독일이 현존하는 원자력 발전소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화석 연료의 사용을 급격하게 줄이는 방안이 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원자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비이성적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은 메르켈 시대가 낳은 최악의 실수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요헨 비트너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토론 지면의 공동 담당자이며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한다.

원문: Jochen Bittner. “Opinion |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The New York Times, 2020년 1월 8일, sec Opinion. https://www.nytimes.com/2020/01/08/opinion/nuclear-power-german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