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6

학자금 대출 탕감은 공정한 정책인가

 미국 진보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학 학자금 대출 때문에 젊은이들이 빚더미 위에서 인생을 시작한다! 국가가 나서서 탕감해줘야 한다!'

별 고민 없이 미국 진보의 레파토리를 수입하곤 하는 국내 진보 계열에서도 많이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정의로운 소리냐, 이런 비판이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대학 진학률이 30% 정도밖에 안 되는데, 대체로 상류층과 어퍼 미들이죠. 그걸 국가가 세금으로 갚아준다? 좀 그렇죠?

앞장서서 '브라만 좌파'라는 용어를 만든 피케티가 그런 소리 하는 것도 웃기다는 지적. 학자금 대출 탕감은 '브라만 구제금융'(brahman bailout)이라는 신랄한 표현을 적어둘만 합니다.

 Zaid Jilani, Canceling Student Debt Would Be a ‘Brahmin Bailout’, Wall Street Journal, 2020년 11월 29일.

조선 후기, 정조 시대의 수학 실력

정조를 '계몽군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절대 말하지 않는 진실.

  1. 임금에게 토지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2. 나라가 무식해져서 수학을 못해서 측량을 못했다.
오히려 조선 전기보다 국가 수준과 국력이 떨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계몽군주 정조' 판타지는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홍재전서>를 보면 정조는 토지 문제를 환히 다 알고 있어요. 그 역시 깊은 고민을 했는데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려면 현재 토지소유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치지 않겠어요. 문제는 그 저항을 압도할 권력적 강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한 고려가 전혀 보이지 않지요. 또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지요. 토지 제도에 손을 대려면 현재 토지 보유 상황을 측량해야 하잖아요. 조선 전기에는 그걸 했어요. 세종 때는 전국적으로 다 했어요.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니까 할 수가 없어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비용 문제입니다. 나가서 토지를 측정하는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하려면 돈이 드는데 재정이 부족하니까 지방에 비용을 물려야 하는데 이것 때문에 파산이 속출한다는 거예요. 관리 말먹이며 점심 값이며. 그래서 토지 측량 하지 말라는 상소가 쏟아지니까 못 한 거예요.

둘째는 수학을 몰랐어요. 토지제도를 바꾸려면 토지를 정확히 측량해야 하고 그걸 하려면 수학을 알아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정조가 결국 하지 말라고 해요.

"[미니북] 나는 왜 조선의 여성을 파고들었던가", 북클럽 오리진, 2017년 1월 25일. https://1boon.kakao.com/bookclub/minibook20170125


2020-12-05

[신동아] '빵투아네트' 정책에 애덤 스미스가 고함

 

'빵투아네트' 정책에 애덤 스미스가 고함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2.05.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⑫] '경제학의 아버지'가 본 文 부동산정책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새워 만들겠다”
●前정부 탓이니 임대주택 주겠다고?
●‘국부론’에 등장하는 푸줏간과 빵집 주인
●생산·소유·교환·거래는 인간 본성 발현
●타인의 경제적 필요와 욕구 판단 금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11월 3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김 장관은 이날 “아파트가 빵이라면 제가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다”고 말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아파트가 빵이라면 제가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11월 30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현안질의에 참석해 내놓은 발언이다. 스스로는 기발한 비유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국민 대다수는 황당하다고 느끼고 있다. 12월 1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페이스북에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로 만든 집 삽화를 게시하며 "김현미 장관님이 마련해주신 집이야"라고 썼다. 시민들도 '현미 빵투아네트' '현미가 쌀이라면 당장 바꿀 것' 같은 패러디로 화답하는 모습이다. 

12월 4일 문재인 대통령이 단행한 개각으로 김 장관은 곧 자리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떠나는 사람의 말이라고 그냥 웃고 넘기기에는 어딘가 개운치 않다. 김 장관이 이 말을 꺼낸 맥락 때문이다. 그는 "2021년과 2022년 아파트 공급 물량이 줄어드는데, 그 이유는 5년 전 아파트 인허가 물량이 대폭 줄었고 공공택지도 상당히 많이 취소됐기 때문"이라며 남 탓을 하다 문제의 '빵 발언'을 내놨다. 주택 가격 상승, 전·월세난 등 지금의 난리통이 박근혜 정부 탓이라는 소리다.

김 장관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공급은 충분하다고 했다. 이제 와서 아파트 공급이 부족하다고 은근슬쩍 인정하면서 화살을 전 정권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대책으로 "(아파트 대신) 다세대나 빌라 등을 질 좋은 품질로 공급하겠다"고 했다. 김 장관 발언 이튿날인 12월 1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개한 '관광호텔 리모델링 임대주택'(‘안암생활')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지향점이 어디인지 잘 보여주는 듯하다 

왜 아파트를 빵에 비유했는지 그의 속내를 모두 알 수는 없다. 본인도 정확한 이유를 대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김 장관의 발언은 자본주의, 더 나아가 인간 사회의 본질에 대해 성찰해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공교롭게도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 등장하는 아주 중요한 통찰과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집 주인

문재인 대통령이 2월 27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청와대 영빈관으로 입장하고 있다.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업자, 빵집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적 온정이 아닌 그들의 자기애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이야기한다." 

독자 여러분도 한 번쯤 접해봤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했으며, 그것이 시장 경제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타심보다 이기심이 사회에 더 도움이 된다.' '이타심을 찬양하는 공산주의보다 이기심을 긍정하는 자본주의가 더 우월하다.' '국부론'은 이런 내용을 담은 자본주의 체제의 홍보물로 간주되곤 한다.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 애덤 스미스가 19세기의 공산주의에 동조했을 리는 없다. 그러니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우월하다'는 해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옳다고 말하는 것도 다소 부적절하다. 이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철학자였던 애덤 스미스의 사상 체계를 협소하게 해석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위에 인용된 문장이 나온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다. 

‘국부론'은 총 다섯 권으로 이뤄진 대작이다. 위에 인용된 문장은 그 중 제1권에 나온다. 제1권은 분업을 주제로 삼는다. 내용은 이렇다. '군집생활을 하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복잡한 방식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분업을 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문명을 이루게 됐다. 분업의 양태가 정교해지면서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게 됐다.' 애덤 스미스는 분업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을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연상시키는 필치로 설명한다. 

"너무도 많은 우위를 제공해주는 노동의 분화는 앞날을 예측하며 전반적인 풍요의 증진을 꾀하고자 하는 인류의 지혜 중 무언가의 영향 하에 나온 산물이 아니다. 분업은 얼핏 보기엔 그리 광범위한 효용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인간 본성이 지닌 특정한 속성이,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발현되어 나온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무언가를 쌓아두고, 맞바꾸고, 거래하고자 하는 경향이 낳은 결과가 분업인 것이다." 

분업은 인간 본성의 결과물이다. 어떤 현자가 떠올리고 퍼뜨린 발명품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물건을 쌓아두고, 남는 것을 남과 맞바꾸고, 시장을 열어 다양한 품목을 거래하고 싶어 한다. 그러다보니 사회라는 것을 구성했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더욱 촘촘한 분업이 이루어진다. 이내 우리가 익히 아는 국가를 이루게 됐다는 것이다. 인류학과 역사학을 넘나드는 인문학적 통찰이다.

시장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모여 살고, 각자의 재능과 취향 등에 따라 서로 다른 일을 한다. 시장에서의 활동을 위해 화폐를 비롯해 다양한 제도와 기구 등이 탄생한다. 즉 시장은 단지 돈벌이만 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그러므로 '국부론' 1권 2장을 '자유 경쟁에 대한 예찬'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 대목에서 애덤 스미스는 김씨네 푸줏간과 박씨네 푸줏간의 경쟁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누군가는 농사를 짓고, 다른 이는 도축을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술을 담그고 그 옆에서는 하루 종일 반죽을 치대며 화덕에 빵을 굽는 공동체 생활을 논하고 있다. 대체 사회는 왜 존재하는가? 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직업을 갖고 협력하며 살아가는가? 이 모든 것이 인간 본성의 산물이자 지금 우리가 아는 시장경제의 바탕을 이룬다는 게 애덤 스미스의 생각이다. 

애덤 스미스가 전제하고 있는 인간관은 무엇일까. 그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라는 철학 사조의 일원이었다. 1707년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합병했다. 스코틀랜드 지식인과 중산층은 이전과 달리 중앙 정치로의 진입이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에딘버러(스코틀랜드)가 중심지였지만 하루아침에 낯선 런던(잉글랜드)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정계에서 소외된 그들은 프랑스 혁명을 동경하며 클럽에 모여 토론을 이어갔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애덤 퍼거슨 같은 사상가뿐 아니라 증기기관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 소설가 월터 스콧 등도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일원으로 평가받는다. 

이들은 초기 자본주의의 활기를 온 몸으로 구현했다. 인간은 운명을 자기 힘으로 개척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게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암묵적 전제였다. 그런 정신은 '국부론'의 바탕에도 도저하게 깔려 있다.

걸인도 시장의 구성원이다

푸줏간 및 양조장과 빵집 주인, 각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시민들의 분업에 대해 이야기한 직후, 애덤 스미스가 다루는 네 번째 직업이 있다. 직업이라는 말이 다소 부적절할 수 있지만, 정답은 '걸인'(beggar)이다. 타인의 호의에 전적으로 기대 생계를 유지하는 걸인에 대한 논의가 푸줏간, 양조장, 빵집 주인의 뒤를 이어 곧바로 등장한다. 내용은 이렇다. 

"걸인이 아닌 다음에야 그 누구도 동료 시민의 관대함에 자신의 삶을 주로 의탁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걸인마저도 그의 삶 전체를 동료 시민에게 기대고 있지는 않다. 여유로운 사람들은 걸인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줄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는 걸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원할 때 줄 수도 있고 못 줄 수도 있다. 따라서 걸인은 그의 필요를 다른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충족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좀 어렵다. 무슨 뜻일까? 남에게 적선을 받아 생활하는 걸인이라고 해도, 분업을 통해 이루어진 촘촘한 사회적 경제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가령 어떤 걸인이 어제는 추워서 모포를 필요로 했지만 오늘은 추위가 가셔서 모포를 원치 않는다고 해보자. 관대한 자선단체는 어제와 오늘 모두 걸인들에게 모포를 나눠줬다. 이 경우 걸인은 두 장의 모포를 손에 넣는다. 둘 다 쓸 수도 있겠으나, 한 장은 자신이 쓰고 다른 하나는 보관할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이와 맞교환하거나 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다른 무언가를 구입할 수도 있다. 

여기서 핵심 원리는 두 가지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 그 사람의 경제적 필요와 욕구를 판단할 수 없다. 제아무리 대단한 자선가라 해도 걸인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직접적인 형태로 곧장 제공할 수는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라 해도 사회적 존재로서 경제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바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은 계약, 물물교환, 거래로 나뉜다. 걸인들 역시 남과 약속을 하고 원하거나 원치 않는 물건을 서로 바꾼다. 구걸을 통해 얻은 돈으로 이것저것 구입하기도 한다. 그 어떤 인간이 모든 판단과 행동을 타인 혹은 국가 등에 의존해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고로 애덤 스미스의 '빵집 주인'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경쟁하자'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의 뜻을 외려 편협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걸인의 경제생활에 대한 대목과 함께 음미할 때 애덤 스미스의 '빵집 주인'은 비로소 온전한 맥락을 갖춘다. 스스로 돈을 벌지 않고 타인의 적선에 의존해 사는 사람도 여전히 사회의 일원이자 시장 경제의 구성원이다. 인간 존재의 바탕으로서 사회가 존재한다. 그 사회는 곧 어떤 형태의 시장이다. 매우 근원적 차원의 논의라고 읽어내야 마땅하다.

식당과 메뉴를 스스로 고를 권리

12월 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아파트 단지. [뉴스1]
2020년의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보자. 김현미 장관은 아파트는 빵이 아니고, 밤을 새서라도 더 만들어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며, 따라서 임대주택을 늘리겠다는 '기적의 논리'를 제시했다. 문재인 정부의 '묻지마 지지자'가 아닌 대부분의 시민들은 본능적인 불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왜일까? 왜 저런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기분이 나빠지는 걸까? 

자신들이 벌였던 온갖 무책임한 정책에 대해 사과는 고사하고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지난 정권을 욕하는 뻔뻔한 모습에 화가 날 수도 있다.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비유를 들이대는 화법에 어딘가 우롱당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터다. 베이킹파우더를 쓰지 않고 이스트를 이용해 발효시키는 빵을 만들 경우,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연 발효종을 만들어서 빵을 굽는 경우, 적잖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그것을 무시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지도 모른다. (만약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일 때 정부 관계자가 저런 말을 했다면, 민주당은 '전국제빵사협회' '빵 만드는 엄마들' 같은 정체불명의 단체를 앞세워 들고 일어났을 거다. 제1야당의 역량 부족을 실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경제적인, 혹은 '인문학적인' 이유를 알고 있다. '국부론'의 한 대목을 꼼꼼히 읽었으니 말이다. 애덤 스미스가 잘 간파했다시피 모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동시에 경제적 동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생산하고 소유하고 교환하고 거래하는 그 모든 행위는 인간적 본성의 발현이다.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의 생산과 거래 등은 공익적 목적을 위해 제한될 수 있지만, 그런 제약은 최소화돼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에게는 경제적 활동의 자유가 곧 인권이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주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 사회에는 주택을 매매의 대상이 아닌 거주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게 옳다고 보는 이들이 적잖다. 불행하게도 현 정권의 의사결정권자들 사이에 그런 이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듯하다. 집은 '사는 것'(매매 대상)이 아니라 '사는 곳'(주거 장소)이라는 그럴듯한 캐치 프레이즈가 그들의 세계관을 잘 보여준다. 장장 3년 5개월 간 국토부 장관을 지낸 김현미, 그 임명권자인 문재인 대통령 역시 같은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볼 때 이런 사고방식은 비인간적이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본능, 시장을 형성하고 거래를 하며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고픈 본능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시혜적인 손길로 '지어준' 집에 세 들어 사는 게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쁘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집을 구입하고 가격의 등락에 따라 매매도 하는 모습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이는 마치 나누어주는 식단 외에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걸인이나 수용자보다는, 식당과 메뉴를 스스로 고를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훨씬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빵과 인간적 삶의 부정

김현미 장관은 아파트를 나라에서 다 만들어주는 것인 양 이야기하고, 제때 원하는 만큼 공급할 수 없는 이유는 지난 정부 탓이라고 화살을 돌리며, 대신 임대주택을 제공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의 발언은 여러 모로 문제적이다. 김현미와 그를 앞세운 문재인 정부는 우리의 인간적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부정하고 있다. 

사람은 무언가를 소유하고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시장에서 거래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된다. 소유와 매매가 가능한 아파트 대신 임대주택을 주겠다던 김 장관은 혹여 우리를 사람 이하의 존재로 바라봤던 건 아닌가.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12-04

퀸스 갬빗, 혹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유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또 재미없다. 퀸스 갬빗도 예외는 아니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창작물들은 늘 그렇다. 데이빗 핀처라는, 이미 닳고 닳은 거장이 만드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다.

그 재미없음에는 특징이 있다. 작품 속에 제대로 된 갈등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퀸스 갬빗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반응을 보면 '이 이야기에는 악역이 없어서 좋다'는 소리들을 한다. 하지만 악역이 없는 것과 갈등이 없는 것은 다르다. 이건 악역이 없는 게 아니라 갈등이 없는 것이다. 그냥 '도자기 인형처럼 예쁜 소녀가 체스하는 모습'만, 적당히 감정이입할 수 있을 정도의 서사 위에 얹어놓은, 스틸컷 모음집이다.

퀸스 갬빗처럼 '잘못된 장소와 시간에서 특출난 재능을 지닌 자'의 이야기를 다룰 때, 사실 악역은 없어도 된다. 무거운 혹은 무서운 재능에 시달리는 존재는 스스로가 이미 주변인들에게 어느 정도는 악당일 수밖에 없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세상도 그의 존재로 인해 소외당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 절대 고립의 감정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혹은 그 절대 고립의 감정을 어떻게 소화해내느냐, 이것이 '동떨어진 천재물'의 핵심 갈등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그런 갈등의 설정에는 꼭 악당이 필요하지가 않다. 가령 체스물의 걸작인 '위대한 승부'(Searching for Bobby Fischer, 1993)에서 잘 다루고 있는 바와 같다. 미국의 체스 신동(이었던) 조쉬 웨이츠킨의 실화를 다룬 이 작품은, 스스로 체스 규칙을 익히고 미국 챔피언십을 순식간에 뚫어낸 천재소년의 유년기를 다룬다. 

부모는 처음에 자식이 지닌 천재성 때문에 행복해하지만, 곧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부모인 스스로가 자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조쉬 역시 부모가 자신을 이해할 수 없고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엄청난 고립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네추럴 본 지니어스' 물의 핵심 갈등이다. 누구도 나를 이해해줄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여기에는 따로 악역이 필요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 규격에서 벗어난 천재 자체가 애초에 인간 세상에 끼어든 옥의 티 혹은 티의 옥 같은 존재이므로, 그의 존재 자체가 갈등이다.

그런데 퀸스 갬빗을 비롯한 최근의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은 어떤가? 뭔가 '특별한'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들이민다. 그런데 그 특별한 존재들이 자신의 특별함 때문에 겪게 되는 특별한 고통을 냉철하게 다루지 않는다. 대신 적당하고 평범하고 '무해한' 성장물로 편입시켜버린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몇몇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또 떠오르지만 일일이 다 거론하지는 않겠다. 하나같이 똑같은 패턴이니 말이다.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성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과 사건을 이끌어가는 대신, 적당히 예쁘고 귀엽고 보기 좋은 인형을 몇 개 만든 후 거기에 설명서만 붙여놓는 방식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적어놓고 보니 내가 시대의 흐름을 못 따라가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성공적인 작품들은 하나같이 제 발로 일어설 수 있는 캐릭터를 안고 있었다. 최근의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은 그렇지 않다. 뭔가 잘못된 트렌드가 오늘날의 창작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20-11-29

[신동아] 가덕도 신공항이 뉴딜? 케인스가 코웃음 칠 일

 

가덕도 신공항이 뉴딜? 케인스가 코웃음 칠 일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9.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⑪]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오독한 진보

●‘정부가 헛돈 쓰면 경제 성장한다’는 사고
●‘일단 이 지역에 돈 쓰겠다’는 건 페론주의
●시장 기능 후퇴, 경쟁 마비, 생산성 추락
●與 선거용 꼼수에 PK 주민들만 속앓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국무총리실 산하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 김수삼 위원장이 11월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해신공항 추진은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검증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몇 년 전 일이다.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중년 남성 몇 분과 식사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는 늘 어렵다. 경기를 되살리는 방법으로 화제가 넘어갔다. 그러자 교수 중 한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는 게 아닌가.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못 하는 거죠." 

"그럼 방법이 뭘까요?" 

나는 궁금한 마음이 들어 물어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이 돌아왔다. 

"지하철 자동개찰기를 없애버리고 옛날처럼 차장이 손으로 개표해주기만 해도 전국에 지하철역마다 일자리가 몇 개가 생기는데요. 그런 식으로 고용을 창출하면 됩니다."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지만 그는 자신이 창출한 가상의 일자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검표용 가위를 들고 차표에 구멍을 뚫는 손놀림을 흉내 내며 입으로 '짤깍 짤깍'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 다시 물었다. 

"그건 사실상 일부러 비효율을 증가시키는 것인데요, 그런 식으로 경제의 효율을 일부러 떨어뜨리는 게 어떻게 경제 성장이 될까요?" 

"케인스가 말한 게 바로 이런 거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일이라도 시키면서 돈을 주면 그 돈이 사회에 풀리고 돌면서 불황이 해결된다는 말이죠."

돈 파묻고 퍼내는 영국 콧수염 아저씨

동남권 신공항 예정지로 거론되는 부산 강서구 가덕도. [부산=뉴시스]
독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하자면 그의 전공은 경제학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과학과도 무관하다. '조국기 부대'도 '태극기 부대'도 아닌 건전한 상식인이다. 본인의 분야에서 두루 존중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 작업물을 여럿 낸 실력자다. 그런 지성인마저도 케인스의 이름을 외치며 사회의 효율을 떨어뜨리면 경제가 살아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것이다. 

나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반문이 돌아왔다. "‘일반이론'에 그렇게 쓰여 있잖아요. 폐광에 돈을 파묻고 사람들이 캐 가게 하면 불황이 해결된다고.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케인스 이론이니까요.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는 거죠."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케인스는 멀쩡히 잘 돌아가는 자동개찰기를 없애고 대신 개찰구마다 직원이 한 사람씩 서서 검표용 가위를 짤깍거리는 것이 불황의 해법이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이렇듯 케인스를,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쓸모없는 일자리, 오히려 사회적 효율을 떨어뜨리는 일자리를 만들면 실업이 사라지고 결국 경제가 좋아진다는 건 케인스의 책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일반이론)'에 등장하는 한 대목을 오독한 결과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식자층 사이에서 케인스란 '돈 파묻고 퍼내는 영국 콧수염 아저씨'다. 좀 길지만 문제의 구절을 읽어보자. 

"만약 재무성이 낡은 몇 개의 병에 은행권을 채워서 그것을 폐광된 탄갱의 적당한 깊이에 묻고, 그 다음에 탄갱을 도시의 쓰레기로 지면까지 채워놓고, 허다한 시련을 잘 이겨낸 자유방임(自由放任·laissez faire)의 원리에 입각해, 개인 기업에 그 은행권을 다시 파내게 한다면 (물론, 이것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은행권이 묻혀 있는 지역의 임차에 대한 입찰에 의해 얻어진다) 더 이상 실업이 존재할 필요도 없어지고, 그 반작용의 도움에 의해, 사회의 실질소득이, 또 나아가서는 그 자본적 부 또한, 그것이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될 것이다."(‘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 번역, 비봉출판사, 2007, 152쪽) 

이 대목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직접 보았거나 누군가가 언급하는 것을 한 번은 접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사람들에게 그냥 돈을 나눠줄 거라면 허공에 뿌려도 된다. 줄을 세워놓고 나눠주면 질서정연한 현금 살포 정책 역시 가능하다. 왜 하필이면 폐광의 갱도에 돈을 파묻은 후 다시 캐는 헛된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떠올리기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인데, 웃기려고 만든 비유일까. 

그렇지 않다. 이유가 있다. 맥락을 알아야 한다. 케인스가 '일반이론'을 펴낸 것은 1936년. 대공황의 한가운데였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금본위제를 유지하던 때다.

풍자를 진지한 조언으로 받아들이다니

케인스가 볼 때 이 공황을 끝내려면 화폐를 더 찍어내야 했다. 그런데 중앙은행들은 금본위제 때문에 돈을 더 찍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금본위제란,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은행에 금괴를 쌓아두고 그것으로 종이에 찍힌 돈의 가치를 보증하는 제도다. 따라서 돈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금을 더 캐야 한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이 금광의 발견과 금괴의 수급에 의해 좌우되는 셈이다.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면 위 인용문이 이해될 것이다. 금광을 발견하고 금을 캐낼 때까지 화폐 증발을 하지 못해 불황을 겪는 그런 상황은 난센스라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저 유명한 '광산에 묻힌 돈다발'의 비유는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앞서 인용한 문구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이 대목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금광으로 알려져 있는 땅 속에 구멍을 파는 형태는, 그것이 세계의 실질적인 부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직 노동의 비효용만을 가져올 뿐인데도 (경기 회복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해결책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다." 

케인스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삽질을 하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한 게 아니다. 금본위제에 묶여 정부 지출로 수요를 진작시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돈을 땅에 묻었다가 다시 캐내라는 기발한 풍자를 했을 뿐이다. 위에 길게 인용한 문단 바로 뒤에서 케인스가 "물론 가옥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것을 건조하는 게 더욱 현명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건 그래서다. 집을 짓고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등 유익한 사업을 벌여라, 그게 안 되면 차라리 광산에 돈을 파묻고 도로 캐내라. 물론 그런 미친 짓거리를 진짜 할 리는 없으니 어서 쓸모 있는 건설 사업을 벌이자, 이런 말이다. 

2020년대의 우리는 케인스가 만들어낸 거시경제학적 관점을 전 세계인이 대부분 알고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케인스가 비판한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세상을 지배한 1930년대와 달리, 이제는 경기가 조금만 나빠질 것 같으면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알아서 금리를 내리고 돈을 푼다. 미국은 허공에서 헬기를 타고 돈을 뿌리자는 농담을 즐겨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붙은 벤 버냉키를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 앉히기도 했다. 즉 2020년 현재 전 세계인은 어느 정도까지는 케인스주의자다. 

그러니 케인스가 '차라리'라는 단서를 붙여서 제안한 것을 진지한 정책 조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땅에 돈을 파묻은 후 캐내거나 피라미드를 짓는 게 차라리 경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케인스가 말했다는 사실 자체는 옳다. 하지만 그 말을 근거로 케인스의 이름을 외치며 대한민국에 진짜로 피라미드를 짓는 것은 미친 짓이다. 

불필요한 공공사업을 벌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기반시설 중복 투자로 인한 예산 낭비를 케인스는 찬성하지 않았다. '일반이론'의 같은 대목에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시피, "두 개의 피라미드, 사자(死者)를 위한 두 개의 미사곡은 하나에 비해 두 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요크까지의 두 개의 철도는 그렇지 않다."

탱자가 된 케인스의 농담

2016년 6월 9일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가덕도 신공항 예정지를 방문해 피켓을 들고 있다. [부산=뉴스1]
문제는 케인스의 저 '돈 파묻고 퍼내기'의 비유가 너무도 강렬하다는 데 있다. 이미지의 힘이 너무 컸다. 마치 기억력 대회에 출전하는 사람들이 괴상하고도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암기해야 할 단편적 정보들을 끼워 맞춰서 기억력을 높이는 것과도 유사하다.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전체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케인스는 돈을 파묻고 퍼내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했다'는, 일종의 '경제학적 밈'이 생겨난 셈이다. 

미국의 풍자 유머 사이트 어니언(The Onion)이 2008년 11월 13일 공개한 가상의 TV 토론 영상을 살펴보자. '정부는 거대한 돈 구덩이를 폐쇄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네 명의 패널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원하는 사람은 정부의 구덩이가 아니라 자기 집 뒷마당에 돈을 묻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없애는 방법은 파묻는 게 아니라 태우는 것이다' '종이 파쇄기에 넣고 분쇄해서 말에게 먹이로 줘야 한다' 등 온갖 방법으로 돈을 없앨 궁리를 한다. 마지막 논객이 던지는 멘트는 일품이다. '당신이 미국을 사랑한다면, 미국의 구멍에 돈을 버리세요.'(https://www.youtube.com/watch?v=JnX-D4kkPOQ)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퍽 많은 사람들이 '돈 파묻고 퍼내기'의 비유를 진지한 경제학적 조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언급한 한 교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 체감 상 거의 모든 식자층, 특히 진보 진영의 식자층은 '정부가 헛돈을 쓰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거나, 그런 믿음을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한 상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경제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만약 케인스의 피라미드 농담이 사실이라면, 전국 방방곡곡마다 세워진 수많은 전시성 조형물 덕분에 각 지자체의 경제는 우뚝 일어섰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 차라리 피라미드를 짓자'던 케인스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와서 저 온갖 '랜드 마크'들을 봤다면 박장대소했을 것이다. 물론 찬성하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2020년은 1930년대와 달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를 선택지에 전혀 두지 않는 세상이다. 중앙은행들은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금리를 인하하고 통화량을 늘려 경기 후퇴를 막는다. 따라서 케인스의 농담을 순수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지자체가 증명하고 있다. 피라미드를 짓는다고 해서 되살아날 만큼 21세기의 경제는 만만하지 않다.

공항은 피라미드가 아니다

가덕도 신공항 논란이 다시 불거진 까닭은 문재인 정권의 선거 전략 때문이다.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다. 화두가 떠오르자마자 부산에 지역구를 둔 야당 의원들은 곧장 찬성 의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여당은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애가 타는 당사자는 날로 침체되는 지역 경제로 속을 앓는 부산과 경남 일대 주민들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선거용 꼼수로 인해 온 나라가 '공항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이미 프랑스의 용역회사를 통해 경제성, 확장성, 기타 입지의 적절성에 대해 판단이 끝난 사안이다. 그럼에도 가덕도에 공항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김해공항이 위험하다거나, 가덕도가 실은 더 확장성이 좋다거나, 도심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때문에 시끄럽다거나 등등. 그때와 달리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 지면은 그런 사항을 다루기에 적합한 곳도 아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 상식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공항은 피라미드가 아니다. 앞서 인용한 케인스의 말을 다시 반복하고 싶다. "두 개의 피라미드, 사자(死者)를 위한 두 개의 미사곡은 하나에 비해 두 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요크까지의 두 개의 철도는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상 그 어떤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공항 같은 사회기반시설의 중복 투자와 건설은 비합리적이다. 국가 예산을 투입해 민간 수요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재정승수 효과를 노린다면 차라리 그 효과를 거두는 게 목적이라고 정직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최선의 사업을 찾는 단계부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공항이라는 키워드에 묶여있을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합리적 해법을 찾아야 하겠다. 

‘일단 이 지역에 돈을 쓰기 위해 합리성이나 타당성과 무관한 사업을 벌인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케인스주의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에 가깝다. 두 경제 사상은 심지어 케인스주의의 옹호자들 사이에서도 곧잘 혼동되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시장이 제 기능을 되찾게 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 반면 후자는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하게 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가로막으며,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면서, 오직 지지율과 정권 유지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케인스주의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계 경제를 부흥시켰다. 페론주의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던 아르헨티나를 단번에 주저앉히고 말았다.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 온갖 '랜드 마크'들을 보면 웃기다 못해 섬뜩해지는 것은 그래서다. 페론주의가 아닌 케인스주의의 관점에서 대한민국 경제를 고민하는 정치를 원한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