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지정생존자’
‘검수완박’과 졸렬한 정치인들
도시환경공학을 전공한 교수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은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가 기획한 공영주택 사업을 대통령이 마음에 들어 해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이 되었지만 정치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 매년 초 치러지는 ‘연두교서’ 발표를 앞두고 ‘지정생존자’로 선정되어 워싱턴 DC의 안전가옥에 틀어박혀 있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내각 구성원, 상하원 의원, 대법원 판사들까지 모두 모여 있는 미 연방의사당을 커크먼은 TV로 지켜보고 있다.
연두교서 발표는 그런 자리다. 미국을 이끄는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런데 만약 그곳에서 큰 사고나 테러가 발생한다면 어떨까? 나라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지정생존자 제도를 운영 중이다. 커크먼처럼 내각의 누군가는 일부러 연두교서 발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생존자’가 되도록 ‘지정’하여, 국회가 폭파되고 대통령이 죽고 내각이 허물어지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연두교서 발표 중계방송이 끊긴다. 창문을 열어 밖을 보자 일명 ‘캐피탈 힐’에서 폭발과 함께 불꽃이 솟구친다. 미 연방의사당은 문자 그대로 무너졌다. 그 속에 있던 이들 중 생존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으로 맥주를 마시던 톰 커크먼은 그 모습 그대로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헌법을 지켜야 하는 자, ‘헌법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정생존자>의 설정은 퍽 과격하다. 아무리 현실에 존재하는 제도라고 해도 그렇지, 입법·사법·행정 3부를 모두 폭탄으로 날려버린 후 시작하는 이야기니 말이다. 하지만 픽션은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법. 어떤 나라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지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존속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그랬다. 1920년대 내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도탄에 빠졌다. 이원집정부제를 택하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정치적 구심점 없이 오작동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헌법의 가치를 누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1931년, 두 사람의 헌법학자가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카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 체제를 공격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비상사태의 권력을 일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선을 통해 꾸려진 연방의회와 총리는 독일 국민 전체의 선택을 받지 않고 간접적으로 뽑힌 이들이므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논리였다.
반면 또 다른 헌법학자 한스 켈젠은 현 체제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켈젠이 볼 때 슈미트의 주장은 옳지 않았다. 헌법 수호는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입법·사법·행정부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 헌법을 지키고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원론적 입장이었다. 특히 켈젠은 헌법재판소에 주목했다. 입법부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기구다. 반면 국회가 ‘입법 폭주’를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도입한 헌법재판소가 그 공백까지 채워넣을 수 있다고 켈젠은 주장했다.
이 충돌은 ‘헌법의 수호자 논쟁’이라 불린다. 헌법과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카를 슈미트가 볼 때 헌법이란 국가 공동체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 중 하나일 뿐이었다. 형식적인 법 논리나 기존의 제도 같은 것은 그저 자의적인 규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흔히 ‘결단주의’라 불린다. 반면 한스 켈젠은 ‘법실증주의’를 택했다. 법은 법의 영역 바깥에서, 정치나 기타 요소에 의해 형성되지만, 법학은 법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훗날 카를 슈미트는 나치에 협력하면서 ‘히틀러의 법학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덕분에 결단주의 대 법실증주의의 대립은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간주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논쟁을 그런 식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다음과 같은 수많은 철학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주권은 어떻게 형성되고 또 행사되어야 하는가? 국회, 법원, 심지어 대통령 같은 헌법 기관이 합법성의 탈을 쓰고 국가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들을 막아설 힘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채 보름도 남지 않았다. 이 와중에 더불어민주당은 ‘검수완박’을 밀어붙이고 있다. 한스 켈젠의 법실증주의적 관점을 따르자면 제도권 내에서 해결할 일이다. 국회 내에서 정치 세력 간 견제가 이루어질 것이고, 명백한 위헌 요소로 가득한 법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헌법의 수호자’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언론인 출신으로 법 전문가조차 아닌 박병석 국회의장이 중재안을 제시하자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단 하루 만에 그것을 덥석 받아들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송 인터뷰에서 검수완박에 대해 사실상 지지의 뜻을 밝혔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릴 것이라 기대할 근거도 희박하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담은 현행 형사소송법 역시 마찬가지로 졸속 처리되었는데, 헌재는 이미 그 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으니 말이다.
국회와 헌재를 벗어나더라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윤석열 현 대통령 당선인은 ‘검수완박은 부패완판’이라며 검찰총장직을 내던지고 대권 경쟁에 뛰어들었던 사람이다. 국민들은 그런 그에게 0.74%p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승리를 안겨주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수완박 타협, 아니 야합 국면에서 윤석열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지정생존자>는 정치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가 응축된 작품이다. 국회의사당에 정치인들을 몰아넣고 폭파해버리고 싶다는 답답함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검수완박 야합을 보는 우리 국민들의 심정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분노가 픽션보다 무서운 현실을 불러오기 전에 국회가, 헌재가, 대통령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