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쟁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라캉의 정신분석을 현재 통용되는 과학이라 보기 어렵다'라는 결론에 참여자들 전원이 동의한 전반부, 그리고 '심리학은...' 으로 시작하여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논쟁이 되어버린 후반부. 전반부에 대해서는 논쟁 참여자인 한윤형의 승복이 있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고, 이제 우리는 후반부에 대해서만 결론을 내리면 될 것이다.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17일)를 다시 펼쳐보자. 앞서 내가 인용했던 바와 같이 한윤형은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a) 분과학문인 심리학의 메타화로 나오지 않는 철학 이론들, 특히 인간의 의식이나 심리에 대한 철학 이론들은 모두 말이 안 된다. 특히 주체 철학 혹은 의식 철학이라 부르는 분류에 들어가는 학자들, 데카르트, 칸트, 독일 관념론, 헤겔, 훗설은 철학이라 볼 수 없다.
b) 우리는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여기서 그 누구도 a)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이나 심리에 대한 철학 이론들"을 "모두 말이 안 된다"고 몰아붙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철학과에 드디어 다니고 있으니 논외로 치고, 그 외의 '과학주의자'들은 '그래도 철학에는 나름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 주장 또한 상식적이다. 대륙철학자들이라고 해서 심리학의 발전을 모르는 바가 아닐테니, 그들 또한 나름의 대비책을 세워서 철학의 입지를 지키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과학주의자'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으므로, 그냥 '아, 그렇군'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윤형은 다음 문단부터 허수아비 논증을 시작한다.
"a)의 결론은 논리필연적이다. 다음과 같은 예상반론이 가능하다. “데카르트나 훗설의 시대엔 심리학이 지금과 같은 데이터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이론은 성립이 가능했다. 그러나 라캉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답변. “지금도 데카르트주의자가 있고 현상학자들이 있다.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 빙빙 돌리지 말고 어서 한번 그렇게 주장해 보시지.”"
이건 과학 논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소양의 문제에 더 가깝다. 철학의 허벅지 칸트로 돌아가보자. 칸트는 신, 영혼, 자유의 개념은 경험세계의 논리를 통해 논박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존재증명 논쟁은 무의미하지만, 신의 존재는 우리의 윤리적 삶을 위해 요청된다는 것이 그의 논법이다. 나머지 두 가지도 그렇다. 여기서 문제는, 적어도 후설이 말하는 '심리학'은 데카르트적 자아, 즉 영혼에 대한 학문에 매우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성찰해야 할 물음은 이제 다음과 같은 것으로 향한다. 즉 어떠한 그리고 어떻게 영혼들-특히 인간의 영혼들-이 세계 속에 즉 생활세계 속에 존재하는가, 따라서 어떻게 영혼들이 물리적 신체에 영혼을 불어넣는가, 어떻게 영혼들이 시간공간성 속에 자리잡게 되는가, 어떻게 각자가 그가 살고 있고 살고 있음을 의식하는 세계에 관한 의식을 가지면서 영혼적으로 살아가는가에 향한다. . .(생략). . .
영혼은 물론 세계 속에 존재한다."(346, 에드문트 후설, 이종훈 옮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7))
하지만 후설은 여기서 자신이 영혼을 연구하는 방식이 자연과학의 그것과 평행을 이루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수학적 자연과학과] 평행하는 학문이라는 과제에 의해, 그리고 심리학의 주제인 영혼이 자연과학의 주제인 물리적 자연과 동일한 의미의 실재적인 것이라는 파악에 의해 미리 멍에가 지어졌다. 여러 세기에 걸친 이러한 편견이 그 모순을 통해 밝혀지지 않는 한, 참으로 영혼에 관한 학문 즉 생활세계-모든 객관적 학문과 유사하게 심리학은 이 생활세계에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로부터 근원적 의미를 갖는 것에 관한 학문인 심리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347, 같은 책)
후설으로부터 시작한 현상학은 하이데거로 이어진다. 그런데 "요즘 회자되고 있는 해체주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철학적 흐름도 그 뿌리를 하이데거의 이와같은 「현상학적 해체」에 두고 있다"(이기상, 옮긴이의 말,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서울: 문예출판사 1994))고 하니, 라캉주의를 제외한 현대 대륙철학의 상당수는 과학적인 검증의 대상이 아니거나 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물론 이것은 '관념론'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화자가 대륙철학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나뉘어진다. 만약 한윤형이 대륙철학의 자기 방어 기제에 대해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런 소리를 했다면, 그는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놓고 그냥 선을 찍찍 그어버린 다음 '전선'을 확보하려고 든 것이다. 반대로 알면서도 저런 소리를 했다면, 그는 내가 지난번에 비판한 바와 같이 '논증이 아닌 자해공갈'을 하려 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논쟁 상대방을 '대륙철학의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는 과학도'로 몰아가고자 하는 정치적 기동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입장은 모두 옳지 않다.
하지만 한윤형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b) 우리는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 후,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지는 않고, 도리어 심리학이 과학인지 덜 과학인지 더 과학인지 등과 같은, 자신이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대해 김재권, 콰인, 쿤 등의 역시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썰'을 풀기 시작한다. 나머지는 우리가 이미 보고 겪어서 알고 있는 진흙탕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논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 논지의 전제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라캉 논쟁'의 후반전은 사실상 벌어질 필요가 없었다. 혹은, 이상한 모자가 내 글
"완전한 몰이해"에서 리플을 통해 말한 바와 같이, 라캉의 이론에 대해 라캉 자신의 텍스트를 통해 공부한 누군가가 그를 방어하면서 촉발되었어야 겨우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어이 논쟁에서 이겨보겠다는 심사의 발로로 인하여 그다지 의미 없는 논쟁은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후설과 칸트와 하이데거를 다시 들춰보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소득이 없다고 말할 것까진 없을 것 같다. 아이추판다님이 올리겠다고 약속한 새로운 글을 기다리며, '라캉 논쟁'의 후반부를 나는 여기서 마무리짓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