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1-18

소액금융, 한국에서 성공하기 힘든 이유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에 트랙백

그라민 은행의 성공 사례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국내에서도 소액금융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 각각은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원인은 간단하다.

소액대출은 그 성질상 신용대출일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신체포기각서라도 받지 않는 한) 채무액에 상당하는 담보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대출로 향할 수밖에 없는데, 그라민 은행이 취한 것 같은 구조는 현재 한국 및 기존 개발국가에서 성립하기 어렵다.

그라민 은행의 신용대출 방식은, 굳이 말하자면 '오가작통법'에 의거하고 있다. 다섯 명의 대출자가 서로 연대보증을 서주는 방식이다. sonnet님이 요약한 내용에 따르면,

그라민은행은 기본적으로 대출 희망자가 나타나면 다섯 명의 대출희망자를 모아 그룹을 조직할 것을 요구한다. 일단 그룹이 결성되면 이들에게 그라민 은행과 그들이 받는 대출에 대해 교육시킨다. 그리고 그룹원 다섯 명을 개별적으로 면접하고 구두 시험을 통해 이들이 내용을 숙지했는지를 평가하여 합격했을 경우에만 대출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은행 측은 개개인의 가난 극복과 자립에 대한 의지를 면밀히 관찰한다. 대출 과정 또한 독특하다. 그라민 은행은 일단 다섯 명 중 한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어 두 사람에게 융자를 준다. 6주 동안 원리금 상환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이 확인되면 마지막 두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 그룹 멤버 전원에 대해 대출이 중단된다.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a quarantine station, 2009년 1월 18일)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런 짓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그룹은 십중팔구 같은 마을에 살거나, 친척이거나, 두 집합의 교집합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혈족의 유대감, 지역 공동체 거주민들끼리의 유대감이 모두 사라져버린 현대 한국에서 위와 같은 구조는 성립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친척이라고 해서 특별히 가까운 거리에 살거나 하지 않는다. '친척에게 연대보증 서주었다가 쫄딱 망하는' 괴담이 횡횡하고 있는 사회가 현대 한국 사회인 것도 사실이다. 친척이란 한 해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만나는 사람들이지, 경제적인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가 아니다.

덧붙여 한국의 산업 구조가 이미 고도화되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유누스가 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가 지금 내 손에 없어서 정확한 인용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책에 등장하는 성공 사례들은 대부분, 한 마리의 암소를 사서 잘 기르거나, 몇 마리의 암탉을 사서 알을 뽑아내거나, 또띠아 포장마차를 열어서 장사를 하는 등, 소농을 포함한 소액 사업들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이미 발전한 산업사회의 경우, 그런 작은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굳이 친척들의 도움과 감시를 필요로 할만한 일이 아니다. 가령 붕어빵틀을 빌리는 것. 수십만원이면 가능하고 그것은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인보증을 요하지 않는 신용대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미 '마이크로 크레딧'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작은 규모의 사업을 해서 그 돈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산업이 고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규모 사업의 수익성은 날로 약화되고 있다. 그것은 자본 투입으로부터 회수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동네 구멍가게라도 하나 차리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한데, 그것은 소액금융에서 염두에 두는 그런 작은 빚의 범주를 넘어선다. 사업을 할만한 돈을 빌리는 것은 이미 소액금융의 범주를 넘어서는 액수에 해당한다.

최근 시작된 '인터넷 대안금융'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것은 확실해진다. 이 기사("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금융'이 떴다", 한겨레)에서 인용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소액금융은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외면하는 이들에게 급한 돈을 빌려주는 ‘현대판 품앗이’"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 인용된 사례는 이런 것이다. 오빠의 수술비를 대야 하는데, 자신이 신용불량 상태에 빠져있어서 사채를 빌렸다. 그 사람이 사채빚을 갚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신이 올린 사연을 보고 평가할 다수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돈을 빌린다.
김씨는 이런 사연과 함께 가계 수입·지출 내역, 자신이 부담할 이자율과 몇 달에 나누어 갚을 것인지를 올렸다.

글을 본 회원들은 김씨가 돈을 제대로 갚을지를 두고 사이버 투표를 벌이고, 게시판을 통해 당사자에게 질문을 하고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회원 38명이 2만~4만원씩 모아 100만원을 빌려줬다. 이 사이트에선 한 사람이 보통 100만~200만원을 빌리지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30~50명이다. 돈을 갚을 능력이나 의지가 의심돼 대출자들을 못 모으면 빌릴 수 없다. 김씨가 다달이 내는 원리금은 사이트를 통해 대출자들에게 분배된다.
"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대출’ 떴다", 한겨레

기사에서 인용된 것 같은 사례에서, 대출자가 그 돈을 갚을 수 있을만한 여력이 있는 경우, 혹은 고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라민 은행이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사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라민 은행의 소액금융은 '급전을 막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의 첫 단계를 시작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한국에서 방글라데시와 같은 그런 소액금융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국 뿐 아니라 여타 산업적으로 이미 발전한 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은 지나친 고액의 부채를 갚기 위한 소액금융인데, 그것 또한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성공적인 소액금융의 구조는, 전통적인 사회 구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2009-01-16

누가 타인의 비극을 평가하는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간인 피해와 그 참상에 대해서는, 이 한 장의 그래프면 충분할 것 같다.


출처: “Is Israel guilty of war crimes in Gaza?: But is it a crime?,” The Economist, January 2009, http://www.economist.com/world/mideast-africa/displaystory.cfm?story_id=12957301&fsrc=rss.

UN 학교에 민간인들이 모여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몰랐을 리가 없고, 또 그곳을 '실수로' 공격했을 가능성도 사실상 없다. 이스라엘을 ICC로 끌고갈 수도 없고 설령 기소한다 해도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정말이지, 끔찍한 범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유태인들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가 과연 그렇게까지 엄청난 비극인가?'라는 식의 비아냥 내지는 회의주의가 없잖아 있는 듯하다. 나는 그런 시각에 절대 찬성할 수 없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과, 그들이 국가 건설 이전에 당했던 비극을 폄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가령 허지웅님의 이 의견을 살펴보자.

또 2차 세계대전 이야기다. 또 유태인 학살 이야기다. 또 유태인을 지켜낸 영웅 이야기다. 어휴 지겨워. 유태인 학살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기억되어야만 할 기록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세계사의 그 숱하게 많은 학살을 다 외면하고 유독 유태인의 희생만 숭고한 듯 꾸준히 복기하는 할리우드의 도덕률은 볼수록 지루하고 의도가 짜증스럽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분쟁, 그리고 미국 정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자면 더욱 그렇다.
"디파이언스, 살아남는다는 사실의 숭고함", ozzyz review, 2009년 1월 16일.


'중요한 사건', '기억되어야만 할 일' 정도의 수식어를 붙여줬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건설하고자 했던 시온주의자들은, 본디 800만명 정도의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최대치로 추산해볼 때) 600만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일은 예상만큼 쉽게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생긴 나라가 아니라, '홀로코스트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나라인 것이다(참고: "이스라엘을 다시 생각한다",《Foreign Policy》, 2008년 5/6월호). 유태인 자본이 영화계에 손을 뻗치고 있고, 그래서 그렇게 지겹게 홀로코스트니 유태인이니 나치의 잔혹함이니 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설명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말 끔찍한 일을 겪고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비극을 논함에 있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인간적인 품위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유독 유태인의 희생만 숭고한 듯 꾸준히 복기하는 할리우드의 도덕률"이라는 표현의 이면에 담긴 정서를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너만 슬퍼? 세상에 당한 사람이 너만 있는 줄 알아?'라고 핏대를 세우는 그런 광경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피해자 정서'라는 것이 있고, 한국인들의 징그러운 질투심은 그 피해자 정서에마저도 적용된다. 나도 피해자인데, 나도 당했는데, 누가 나보다 더 큰 소리로 '힘들다, 괴롭다, 당했다'라고 토로하는 광경을 보면 곱게 넘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너만 괴로운 거 아니야. 유난 떨지 마.'

홀로코스트를 보며 미국 이주민들의 인디언 학살이라거나, 한국전쟁 당시에 자행된 양민 학살, 또는 그 외 세계사의 숱한 학살 사례들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불편해진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으로 인류사에 만연한 학살을 보며 괴로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즐겨 보는 헐리우드 영화에, 유태인'만' 피해자인양 묘사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하고 있을 따름인 것 같다. 게다가 그 유태인들이 세운 인공국가 이스라엘은 세계 최고의 학살 주범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은 좌파적, 진보적, 도덕적이며 심지어 쿨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을 비판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평가'하려고 들고, 다른 비극과의 경중을 논하려 드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벌어진 학살들은 각각의 이유와 전개와 논리와 수수께끼를 포함하고 있다. 일부에 대한 관심이 다른 것에 대해 지대하다 해서, 하나의 가치가 다른 것에 비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이 저평가당하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인 관심과 학문적, 또는 예술적인 관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가자 지구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 사망자 수의 그래프를 인용했다. 나는 현대 국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희생자 정서'를 드러내며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다른 것에 비해 과도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둥, 유태인이라서 그렇게 관심받는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이스라엘의 만행을 비판하고 싶거든, 스스로 먼저 인간의 기본을 지켜야 한다. 가해자로 돌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서 또한 결국은 '피해자 정서'에 불과하다. 자신들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는 이유는,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범죄 단체를 소탕하다가 민간인의 피해가 생기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비일비재했지만, 하필이면 자신들이 유태인이기 때문에 그게 도드라져 보인다, 이런 논리를 구사한다.

유태인이라서 홀로코스트가 더 주목받는다는 논리나, 유태인이라서 가자 지구 폭격이 더 비난받는다는 논리나, 둘 다 인종주의이면서 동시에 발화 주체 각각의 피해자 정서를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한국인들은 (사실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역사상의 학살을 빌미로 유태인들이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저울질한다. 한편 유태인들은 (다소 극화되어 있는) 유태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토대로,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가자 지구의 비극을 가볍게 넘기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누가 감히 타인의 비극을 그런 식으로 저울질한단 말인가?

2009-01-15

하이데거, 스티븐 킹, 앙드레 고르

스티븐 킹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실은 등장한다고들 하는), 외딴 길에서 어두운 밤 자동차가 고장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는 그 순간 문명으로부터 고립되면서, '초자연'의 힘 앞에 노출된다. 그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죽을 만큼의 공포를 느끼면서 죽거나 그냥 죽거나 죽도록 고생하고 간신히 살아나거나 하게 된다.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는 '내가 타고 있는 한 대의 차'가 멈추면서 공포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타고 있는 모든 차'가 멈췄을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수리하고 타이어를 갈아주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를 오가며 일하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동차는 '도구' 중 하나다. 우리가 이동을 위해 사용하는 운송 수단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말이다. 즉 우리는 자동차를 이동"하기 위해" 도구로 이용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둘러봄'이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도구를, 곤충학자가 나비를 관찰하듯 '바라보지' 않는다. 도구 그 자체, 그리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우리의 생활환경을 '둘러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리 손안에 들어와 있는 도구, 그 존재를 의심해본 적도 없는 도구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화기는 발명되어 있었고, 자동차도 발명되어 있었다. 그것이 전파된 시점은 각기 다르겠지만, 아무튼 '신기한' 물건은 아니다. 자동차튼 타고 다니는 도구, 전화기는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도구, 기타등등.

문제는 그 도구가 사용 불가능해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이다. 가령 망치를 들었는데 못이 없는 경우, 우리는 비로소 손 안에 들어있는 망치의 존재를 살펴보게 된다. 망치는 '있다', 하지만 못은 '없다'. "이러한 사용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눈에 띄게 된다."(106쪽) 자동차를 뽑긴 했는데 같이 타고 다니면서 으스댈 여자친구가 없다고 해보자. 자동차라는 도구는 아주 눈에 잘 띄게 된다.

그렇다면 도구가 고장나서 원래의 사용관계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 때, 비로소 '망치로 못을 박아야 했던 집', 즉 세계를 인식한다.

하 나의 도구가 사용 불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하기 위한'이 '그것을 위한'을 가리키는 그 구성적 지시가 방해를 받고 있음이 놓여 있다. 그런데 지시의 방해 속에서--어디에 사용할 수 없음에서--지시가 명백해진다. . . . 지시가 그때마다의 '그것을 위한'을 가리킴을 일깨워주는 이러한 둘러봄과 더불어 이 '그것을 위한' 자체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작업연관이, 전체 "작업장"이, 그것도 그 안에서 배려함이 언제나 이미 체류하고 있는 그곳으로서 시야에 들어온다. 도구연관이 그전에 한번도 보아진 적 없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둘러봄에서 항시 애초부터 이미 보아진 전체로서 빛나게 된다. 이러한 전체와 더불어 세계가 자신을 알려온다.(108-109쪽)


자동차에 대한 애초의 논의로 돌아와보자. 자동차가 고장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막대한 산업의 복합체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의 3장에서 인용해보자.

자동차의 역설은 이렇다. 겉보기에 자동차는 그 주인에게 무한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자동차 덕분에 차 주인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으로, 기차와 같거나 더 빠른 속력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자율성의 이면에는 근본적인 의존이 도사리고 있다. 말이나 수레나 자전거를 탄 사람과 달리 자동차를 탄 사람은 에너지 공급을 위해, 그리고 조금만 파손이 되어도 수리를 위해 카뷰레터(기화기), 윤활장치, 조명, 표준 부속품의 교환, 이런 분야들의 전문가와 상인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의 옛날 주인들과는 달리 자동차 주인은 형식상으로는 자기 소유인 차에 대해 소유자 즉 주인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제3자만이 공급할 수 있는 수많은 유료 서비스와 산업제품들을 소비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차 주인의 자율성은 실상 이렇게 근본적인 의존을 내포하는 것이다.
80쪽,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


말이 죽거나 자전거 바퀴가 완전히 휘어버리면 마찬가지 아니냐, 이런 반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저기서 말하는 건 그게 아니라, 자전거나 동물과 달리 자동차는 그 뒤에 엄청난 양의 '산업'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가 고장나버리면, 자연 혹은 초자연속에 버려진 스티븐 킹의 주인공은 불현듯 '인간 문명' 자체를 실감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문명으로부터 동떨어진, 동시에 스스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법칙 속에 내던져진 자신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공포의 시작이다.

문제는 그러한 공포가, 앞서 말한 것처럼,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데 있다. 환경과 에너지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미리 대책을 세워놓지 않으면, 우리는 사라져버린 '운송 수단'으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 환경' 자체의 존재를 뼈저리게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급작스레 '삶'이 파괴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이데거의 전체적인 철학적 구도 안에서 '환경 보호'는 아예 성립할 수도 없다. 앞 포스트를 쓰다가 앙드레 고르의 자동차에 대한 논의를 인용하는 가운데, 갑자기 하이데거의 도구성 논의가 떠올라서 짤막하게 남겨 보았다. 이것은 거친 스케치에 가까운 논의이므로, 혹시라도 '하이데거가 환경운동 했다'는 말로 이해하시진 마시길.


존재와 시간 - 10점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까치글방

추운 겨울, 환경과 에너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1. 흔히들 '환경'에 대한 논의라고 한다면, 당장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 혹은 정치 경제적으로 어설픈 지식 하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환경'문제의 범주를 조금 더 넓혀서, 현재 사용하는 에너지와 그 대체 에너지에 대한 것까지 포괄한다면(그러면 이미 환경에만 국한될 것은 아니겠지만), 대단히 실감나는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파이프라인이 막혀서 나무를 떼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의 사진 중 하나를 골라봤다. 크로아티아, 2009년 1월 중순. 이미지 소유권은 Getty에 있고, 원본 주소는 여기.

그 래서 예상 외로 중국은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수단 같은 나라의 민주주의를 다 망가뜨려가며 석유를 독점 수입하고자 하는 것과 별개로, 에너지 문제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주도적으로 펼치는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다.


2.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를 다 읽었다. 좋은 책이다. 특히 3장, 「자동차의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착착 와닿는다. 마르크시즘 이론에 대해 논하는 2장은 별로 재미가 없는데, 이건 내가 그런 '이론'적 토론에 큰 흥미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3장은 정말 최고다.

자동차의 역설은 이렇다. 겉보기에 자동차는 그 주인에게 무한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자동차 덕분에 차 주인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으로, 기차와 같거나 더 빠른 속력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자율성의 이면에는 근본적인 의존이 도사리고 있다. 말이나 수레나 자전거를 탄 사람과 달리 자동차를 탄 사람은 에너지 공급을 위해, 그리고 조금만 파손이 되어도 수리를 위해 카뷰레터(기화기), 윤활장치, 조명, 표준 부속품의 교환, 이런 분야들의 전문가와 상인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의 옛날 주인들과는 달리 자동차 주인은 형식상으로는 자기 소유인 차에 대해 소유자 즉 주인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제3자만이 공급할 수 있는 수많은 유료 서비스와 산업제품들을 소비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차 주인의 자율성은 실상 이렇게 근본적인 의존을 내포하는 것이다. (80쪽)

문명 속에서가 아니라, 문명의 요소가 '없음'을 실감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그 '산업문명'의 본질이 떠오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설명하기로 하자. 아무튼 이 책은 3장만으로도 구입할만한 가치가 있다.


3. 생태주의자들은 현실의 문제에 대해 둔감하고, 특히 실물경제에 어둡다는 식의 비판이 있어 왔다. 나는 생태주의자를 자처할만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을 뿐이다.

하지만 프랑스 생태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드레 고르는, 오랜 세월 다양한 매체의 국제면과 경제면을 담당해온 전문 저널리스트로, 대단히 명민한 현실 인식을 해왔던 사람이다. 그는 2005년에 세계가 부동산 거품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 거품이 다른 거품으로 채워지지 않을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올 것임을 예상했다.

로버트 브레너의 「새로운 붐인가, 새로운 거품인가」에서 인용된 로베르트 쿠르츠의 말이다. 쿠르츠는 자본주의의 변모와 자본주의의 현재 위기에 대한 최고의 비판이론가로서, 최근 저서 『세계자본』의 상당부분을 금융거품이 자본주의 존속을 위해 담당하고 있는 역할에 바치고 있다. 금융거품은 금융자산을 부풀려 형성된다. 쿠르츠의 표현을 따르자면, 금융거품은 "신기한 화폐제조기"이다. 새로운, 보다 커다란 거품이 형성되지 않는 한, 거품은 가라앉으면서 종국에는 연쇄파산을 불러오고야 만다. 이리하여 주식시장의 거품을 인터넷 거품이 이어갔다. 인터넷 거품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역사상 최대의 거품"인 부동산 거품이 이어가고 있다. 3년 동안, 이러한 거품으로 부동산 주가는 20조에서 60조 달러가 상승했다. 그 누구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거품이 클수록, 거품이 가라앉을 경우 발생할 금융시스템과 화폐시스템의 붕괴가 더욱 무시무시해질 것이다. 각주 43. 157-158쪽.

이 내용은 에콜로지카 5장에 수록되어 있다. 2007년 아내와 함께 자살한 그가, 살아서 오늘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반드시 환경 문제나 생태주의가 아니어도, '읽을 만한 책'을 찾고 있다면 『에콜로지카』를 권하고 싶다.


에콜로지카 Ecologica - 10점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생각의나무

2009-01-11

어떤 마감 하나

대학원 수업 기말 레포트를 6시 30분쯤 다 써서 보냈다. 1월 10일 마감이었는데 11일 새벽에 완성을 했다. 나는 갑자기 조금 센티멘탈한 기분이 들어서, 연애시대 OST중 '보내지 못한 마음'을 찾아서 듣고, 너저분하게 필기된 노란 종이들을 정리한 다음, 바닥에 누워있는 가을이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지금도 가을이는 칸트의 철학적 신학 강의를 베고 누워 있다. 나도 이제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