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03

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

2008년 6월 10일. 100만이 넘는 인파가 서울 시내 중심가에 모였다. 그들의 요구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결같았다. 정부는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하여 세종로 사거리의 북쪽을 틀어막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것은 이른바 '명박산성'이라고 불리웠고, 집회 현장에 나온 사람들은 분노와 허탈함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명박산성을 어찌해야 하는가를 놓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견이 갈렸다. 당시에는 자신들이 그 스티로폼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극구 부인했지만, 사실 그때 명박산성 앞에 쌓였던 스티로폼은 이른바 '연석회의'에서 마련한 것이었다(고 나는 알고 있는데, 확인된 정보는 절대 아니다). 문제는 컨테이너 박스 앞에 스티로폼을 쌓아놓고 올라가자는 그 단순한 발상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 등을 이유로 '비폭력'을 외치며 오래도록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6월 10일은 지나갔고, 우리는 지금까지 왔다.

당시 나는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거의 매일 촛불시위 현장에 나갔다. 촛불시위에 대한 그 모든 비판은 대체로 타당하다.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비전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민주주의와 비폭력 같은 선한 가치들이 고삐 풀린 채 돌아다니며 독재와 폭력보다 더 큰 해악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놈의 '비폭력'에 대한 억압을 떨쳐버리고 진작에 명박산성 위를 점거했더라면, 어찌어찌 방법을 찾아 광화문 사거리 너머까지 진출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바더 마인호프>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각별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는다. 1968년 부활절 휴가 무렵, 독일 학생운동의 리더였던 두치케는 극우 청년단체 회원의 총에 맞아 의식을 잃는다. 그에 항의하기 위해 학생들은 <빌트>를 찍어내는 독일의 미디어 재벌 슈프링어 그룹의 사옥으로 쳐들어간다. 신문 수송 차량을 습격해서 갓 나온 신문을 불태우고, 자동차를 때려 부수고 불을 지른다.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 마인호프는 체포될 뻔하지만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경찰 덕분에 유치장 신세를 면하고 더욱 급진적인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조선일보 사옥 근처에 앉아서 신문 수송 차량의 진행을 방해하던 수십 명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토론을 하다가 결국 그 차를 보내줬다. 우리도 독일처럼 그렇게 '선진국형 시위'를 했어야 했던 것일까?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바더 마인호프>는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독일을 방문하던 당시의 풍경에서 출발한다. 경찰은 이란 청년들이 피켓을 뜯어 만든 각목으로 학생 시위대를 구타하는 모습을 뒷짐 지고 바라보고만 있다. 기마경찰과 전투경찰이 투입되어 오직 학생 시위대만을 두들겨 패고 진압한다. 이 오프닝을 통해 '지금 여기'는 곧장 '그때 그곳'이 되어버리고 만다. 조선일보 신문 운송 트럭에 불을 질러야 했을까? 더욱 과격한 행동만이 새로운 정국을 이끌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까? 문제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질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게 된다는 데 있다.

나는 철이 들기 전부터 나 자신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나는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고, 한 가지를 저지르기 전에 열 가지를 고민한다. 스스로의 행동성에 일관성이 있는지 없는지 돌이켜보지 않으면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고, 그로 인해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산다.

적군파 1세대를 도와준 변호사에게 리더인 바더는 '저 할머니의 지갑을 훔쳐오라'고 지시한다. '순전히 말 뿐이군'이라는 비아냥을 덧붙이면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변호사는 미국인 관광객인 척하면서 슬쩍 지갑을 훔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킬킬거리는 '급진주의자'들은 그러나,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소유권에 대해 급진적으로 저항하는 아나키스트가 결코 아니다. 비록 변호사 자신은 바로 그런 '원칙'을 떠올리며 할머니의 지갑을 훔쳤겠지만, 그 도둑질을 지시한 바더는 누군가 자신의 차를 훔쳐가자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저주를 하며 욕을 퍼붓는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혁명가였고, 단지 잘못된 시대에 잘못된 공간에 살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기본적으로 철부지였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철부지들의 우발적 폭력에 이른바 '인텔리'들이 끼어들면서 적군파 운동은 지능화되고 또 심화된다. 마인호프가 가담하기 전까지 바더와 그 일당들은 조잡한 시한폭탄으로 텅 빈 백화점에 불이나 지르는 잡범들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경험이 많고 선동적인 글을 쓰는 재주를 지녔던 마인호프가 가담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테러 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게 되고, 그에 걸맞는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다. 재판을 기다리며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적군파 1세대들은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는데, 그 과정에서 한 명이 목숨을 잃는다. 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쏟던 변호사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적군파 2세대에게 기관단총으로 가득 찬 가방을 건넨다.

이 영화는 그 누구의 입장도 대변하지 않고, 동시에 그 누구의 행동도 미화하지 않는다. '일관성'을 지키고자 마인호프는 자신의 두 딸을 팔레스타인의 고아원으로 보내버리려고 하고, 바더와 그의 여자친구는 그러한 비인간적인 선택을 부추기면서 즐거워한다. 독일의 조선일보사라 할 수 있는 슈프링어 그룹에 폭탄을 설치한 바더 마인호프 일당은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직장에서 직원들을 대피시키라고 경고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전혀 설득력 있는 화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 작전의 책임은 내부 정치 투쟁 끝에 결국 마인호프가 전부 걸머지게 되며,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서서히 미쳐가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마인호프에게 더 감정이입을 한 채로 이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적군파에 가담하게 된 것은 결국 '무언가 해야 하는데...'라는 불안과 초조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에서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그 잘난 칼럼을 쓰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쌍용자동차 현장에서 고립된 노동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고, 정부와 사측은 여론몰이를 통해 그들을 해고하거나 진압할 궁리에 골몰하고 있다. 철학과 대학원생 연구실에 앉아 『순수이성비판』을 읽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언가 해야 한다는 죄책감이 나를 조여오지만, <바더 마인호프>는 바로 그런 죄책감에서 비롯한 '참여'가 낳는 비극적 파국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참여와 실천과 투쟁을 권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처해야 했던 상황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갈 따름이다.

이 영화의 원제가 '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바더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 즉 되는대로 저지르고 자신이 낳은 결과에 대해 그리 큰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으며, 다만 느끼는대로 저항할 뿐인 그런 사람들의 내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도 그들을 저항의 길로 이끄는 무언가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을 터이다. 그 모든 동기와 불만과 폭발을 수렴할 수 있는 어휘는 오직 '컴플렉스' 뿐이다. 우리는 그 컴플렉스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유효한 말도 할 수 없다.

오늘 밤까지 재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찰은 평택 공장에 대한 진압작전에 돌입할 가능성이 크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을 위해 조선일보에 처들어가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의 '컴플렉스'가 그때의 '컴플렉스'보다 더욱 거대하고 끔찍해진 것은 바로 이렇게 확인된다. 이제 우리는 '연대를 위한 폭력'이라는 개념을 상상하지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적군파는 제3세계를 위해 테러를 벌였다. 용산에서 경찰은 그저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향해 대테러부대를 투입하였다. 이 사실을 돌이키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분노와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용솟음치지만, 그것은 어떤 유의미한 지점으로 향하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만다. 컴플렉스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독일어 단어 komplex는 '단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Baader-Meinhof Komplex'는 '바더 마인호프 조직'이라는 뜻에 더욱 가깝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 단어가 갖는 다른 의미에 주목하였음을 밝힌다.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철학'이라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아무나 내키는대로 만들어서 인생사의 이런 저런 문제에 대입하는 세계관 철학. 말하자면 개똥철학. 둘째, 이미 철학사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텍스트와 그에 대한 연구. 이럴 경우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주제를 연구하거나 특정 철학자의 텍스트에 몰입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셋째, 그 누구도 다다른 적 없는 진정한 '철학'.

유독 철학에 대해서만큼은 두 번째 층위, 즉 전문적인 연구의 성과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층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에도 엉터리 과학이 있으며 과학적 연구를 통해 나아가야 할 진정한 지식이 궁극적 목표로 존재하지만, 그러한 엉터리 과학 그 자체를 자신의 신조나 인생관으로 삼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말하자면 '개똥과학'의 문제는 비교적 손쉽게 반박될 수 있는 편이다.

철학의 경우에는 문제가 훨씬 복잡해진다. 가령 누군가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것은 기원전 300년부터 제기되었고 반박되고 있는 회의주의일 뿐이다. 하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이라고 반박하기 시작하면 '너는 훈고학, 나는 진정한 철학, 너는 상아탑의 노예, 나는 거리의 철학자~ I say 철, you say 학~'같은 병맛나는 대응의 퍼포먼스가 즉각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이유는 그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같은 원시적인 명제를 들먹거리며 자신이 적당히 대충 쓰는 블로그 게시물 따위를 옹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지적'으로 다져진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일종의 인생관의 선언에 가깝다.

문제는 그러한 개똥철학이 가지는 이중적인 태도에 있다. 그들은 강단철학의 성과와 가치를 무시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권위에 기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몇 권의 책을 체계 없이 읽고 대강 두들겨 만든 엉성한 사고의 구조물이 인류적 가치를 지니는 텍스트의 그것과 일치하거나 유사하다는 것을 자기 주변의 전공자들로부터 확인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 가령 칸트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도 정작 그 칸트의 텍스트를 다른 사람보다 많이 본 누군가가 해석상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을 제시하면 '철학이라는 것에 정답이 있는 걸까' 같은 싸구려 회의주의로 도피하는 모습을 나는 최근에 모처에서 보았다. 그런데 만약 철학적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존재할 수 없다면, '칸트는 ...하게 생각했다'는 식의 서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관 철학자들은 그런 초보적인 내적 모순 따위에 결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들은 'crank'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연구 수준은 대단히 미비하다. 그러나 그 사실로부터 우리가 개똥철학에서 곧장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주장을 이끌어내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 철학적 사유의 역사 또한, 과학처럼 엄격한 수준은 아니어도, 역사상 앞서 나간 누군가에 대한 연구와 반박을 통해 형성되어왔다.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라는 어구는 철학에도 마찬가지로 통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국내의 연구 수준은 개별적인 학자의 종아리나 허벅지까지 기어오르는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우리도 거인의 어깨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등장은 독일 강단철학의 유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을 예로 들어 고전적인 철학 텍스트에 대한 독해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없지 않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매일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철학과 중세철학의 접점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아직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 철학의 거장이다. 하이데거의 현란한 그리스어 분석과 해석은 독일어권에서 행해진 그리스 로마 고전 연구의 성과가 없다면 성립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철학'은 바로 그렇게 이루어진다.

2009-07-23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커다란 이슈에 맞서는 작은 민주주의

미디어법이 통과되어버린 이 시점에 ‘작은 민주주의’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왠지 부적절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또한 한나라당에 의해 저질러져버린 미디어법 개정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이 지면의 존재 이유는 그것을 성토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두 개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1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3리터의 물이 소요된다. 1리터는 병 속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2리터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그 물을 슈퍼마켓까지 운반하고 냉장고에서 차갑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250밀리미터의 석유가 필요하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생수만큼 식수를 비효율적으로 생산•운반•보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국내에서는 한나라당에 의해 수돗물을 병에 담아서 파는 것을 허용하는 방침이 추진되고 있지만, 해외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시민들이 생수를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호주의 New South Wales 지방의 한 마을인 분다눈(Bundanoon)의 350여명 주민들은 마을 회관에서의 투표를 통해 생수를 금지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BBC는 ABC의 보도를 인용하여, 오직 한 사람만이 금지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는데, 그 사람은 생수 업체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대체 왜 주민투표까지 벌어지게 된 것일까? 시드니에 위치한 한 생수 업체가 분다눈 인근의 수원지에서 물을 가져다가 생수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분다눈에 판매할 것이라는 계획이 주민들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 물을 퍼다가 우리 동네 주민들에게 팔아먹겠다는 것이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으로 보자면, 그런 경우 생수 자체를 금지할 필요는 없다. 수자원 사용에 대한 보상금을 타낸다거나, 이익금의 일부를 지역사회에서 받아가는 식으로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다눈의 주민들은 생수 자체에 대한 전체적인 금지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 브랜드의 생수 뿐 아니라 모든 생수의 유입과 판매를 금지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생수가 환경 파괴에 일조한다’는 인식이 없다면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구적인 이슈에 맞서는 한 지역의 작은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우르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수아레즈(Suarez)에서는 마을 광장의 가로등을 LED로 전부 교체했다. 이것 역시 지역 의회에서 결의하여 추진된 일이다. LED 가로등은 일반 가로등에 비해 70에서 최고 90퍼센트까지 에너지 효율이 높다. 게다가 그 가로등 위에는 태양 전지 패널이 부착되어 있다. 낮동안 내리쬔 햇빛으로 밤의 거리를 밝히는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에너지 위기에 맞서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시도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지역 의회가 앞장서서 고효율 에너지 소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이 친환경정책과 더불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BBC는 한 지역 의회 의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아레즈가 LED 가로등 완제품을 수입하는 대신 부품만을 수입하고 그 조립은 인근 업체에 맡김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고, 동시에 전 지구적 문제에 대응하며, 그 과정에서 ‘작은 민주주의’를 하나씩 실천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7월 22일 한나라당에 의해 ‘민주적’으로 통과된 미디어법과 금산분리법 등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계는 지금 전 지구적 이슈와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특정 재벌 및 언론사가 방송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에 모든 정치적 자원을 소비하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작은 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국회 점거와 질서유지권 발동 따위만 난무한다. 더운 여름, 어지러운 정국이다.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민주주의는 국회만의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지구적 인식을 바탕으로 지역적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들의 작은 민주주의를 희망한다.

2009-07-20

예수전: 김규항의 '불온'한 예수

예수전 - 8점
김규항 지음/돌베개


이 서평을 쓰기에 앞서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김규항의 신작 『예수전』에 대해 몇 가지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따름이다. 내가 말하는 신학적 사항들에서 오류가 있다면 누구라도 주저없이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예수전』은 입문서이지만 그리 좋은 입문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 개의 복음서 중 마르코복음을 강독하는 방식 자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 책을 선택하는 이유가 "예수의 말과 행적을 담은 네 개의 복음서,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쓰이고 그만큼 첨가도 적"(12쪽)기 때문이라면 그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르코복음이 작성되기 시작한 시점을 아무리 멀리 잡아도 기원후 60년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이 기원후 33년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이미 한 세대가 지난 시점에 그의 말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네 복음서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고, 심지어 때로는 상충되는 인물을 보여주기도 한다. 직접 성경을 '책으로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가령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 말하는 예수의 탄생 설화는 서로 다르다. 반면 마르코복음은 다짜고짜 '복음 시작'이라고 선언하면서 출발할 뿐, 그의 탄생에 대한 신비화를 수행하고 있지 않다. 문제는 김규항이 이런 점들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마르코복음을 일종의 '정전' 혹은 '원전'으로 간주하고, 마태오와 루카에는 '종교적 첨가'가 지나치게 많다는 성경 해석관을 견지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전제가 정당한 것일까? 마르코복음이야말로 예수의 말을 듣기 위한 가장 좋은 경로이며, 그 외의 복음서와 여타 신약성경의 내용은 '종교적 첨가물'일 뿐인가?

그러나 복음서들이 단순한 전기적 바탕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허물어지게 되었다. 복음서들은 교묘하게 다듬어진 신학적 구성물이 며, 어느 하나도 세칭 그 저자들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지은 것이 없다. 모든 복음서에는 둘째, 또는 셋째, 또는 넷째, 손을 거친 이야기들이 자료로 사용되었다. 모든 복음서는 바울 서신이 나온 이후 사반세기에서 반세기 동안에 저술되었다.

우리가 원래의 예수 공동체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좋은 증인은 바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는 훗날 신약성서가 될 문서들을 가장 먼저 쓴 저자이다. 실제로 신약성서 문서들 중에서 그의 진정 서신들만이 그 저자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20쪽, 게리 윌스, 김창락 옮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이 마르코를 주요 참고 자료로 삼아 기술되었다고 해서, 마르코복음은 '종교적 문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복음서는 당대에 떠돌던 '모든 구전'을 담아낸 책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 이후 유대교 공동체 등에서는 온갖 형태의 구전 설화들이 오가고 있었다. 루카나 마태오(라고 불리는 무명의 필자)가 기록한 탄생 설화들도 그 중 일부분이다. 이것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어떤 종교적 의도, 혹은 의도까지는 아니어도 배경을 나타내는 표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종교적인 복음서/ 비종교적인 복음서'를 나누는 것은 타당한 시각이라 보기 어렵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규항은 이 책에서 일관되게 '비종교적인 예수'를 찾고자 노력한다. 그러한 시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다음 구절이다.

알다시피 오늘 대개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도 유다에서 온 메시아도 아닌 '교리 속에서 온 메시아'다. 그 연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325년 최초의 기독교인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에 있는 제 별장에 세계의 주요한 주교들을 모아 놓고 회유와 협박으로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당시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은 자유로운 편이었는데 대체로 예수가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는 의견보다는 예수가 사람보다는 높지만 하느님보다는 낮은 존재라는 견해가 우세한 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엔 그런 신학 논쟁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내 예수가 하느님의 지위를 얻으면 자신의 지위도 함께 격상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교리의 통일을 통해 자신의 통치력을 한껏 강화할 수 있다는 점도.

그런 정치적 의도로 내려진 결정은 더 이상 다른 견해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정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뼈대가 되었다. 그후 오늘까지 거의 모든 지식과 신앙에서 예수는 교리 속의 주인공으로 출발한다.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가 정말 어떤 생각을 헀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왜 죽임을 당했는지 따위는 모조리 생략한 채, 그를 단지 교리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한다. 정말 예수는 단지 교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그 고단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이성으로든 신앙으로든, 예수를 '갈릴래아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교리 속에서 온 사람'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지표가 된다.(24-25쪽)


문제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의의 깊이와 폭이 이렇게 '정치적 선택'이라는 단어 하나로 결정될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김규항이 말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니케아 공의회가 아리우스파, 즉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의 견해를 배척한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만약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한 위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유대교의 한 예언자와 다를 바 없는 누군가가 되어버린다. "사람보다는 높지만 하느님보다는 낮은 존재"는 예언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지 않는가? 유대인들은 '예언자'에 대한 사랑만으로 예수를 기억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비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예수가 유대교의 예언자와 마찬가지인 위격을 갖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거의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정립은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엄연한 신학 논쟁이며 그 차원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예수가 기독교의 예수가 아닐 수 있을까? 한 자연인으로서 살고 죽었던 예수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그를 거론하는 역사적 기록이 대단히 편중되어 있다는 것은 막대한 당혹감을 불러온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본이 존재하는 고대 문헌이다. 그런데 성경 외의 다른 문헌에서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와는 정 반대로 세례자 요한의 경우에는 '요제푸스'를 비롯한 당대의 역사적 문헌에서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에게 세례를 배풀어놓고도 쩔쩔 매는 것으로 묘사되는 '겸허한 스승'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것은 실제 역사 속의 예수라는 청년이 당대의 큰 물의를 일으킨 누군가가 아니었을 가능성,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듣보잡'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예수의 운동은 그의 생전 당시만 해도 변변찮은 촌놈 한 무리의 난동에 가까웠고, 궐기다운 궐기도 해보지 못한 채 진압당했다. 그 부하라는 자들 또한 스승이 죽자 뿔뿔이 흩어지고 심지어는 자신이 우두머리 제자였다는 사실마저도 세 번씩 부인한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건'이 터졌고, 갈릴리 촌놈들은 머리에 후광을 뒤집어쓴 채 사도로 돌변한다. 대체 그게 무슨 일인가? 네 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부활'을 결정적 사건으로 제시한다. 김규항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기독교도들은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며 굳세게 예수의 부활을 주장한다."(261쪽) 문제는 기독교가 없었다면 우리가 대체 어떻게 예수에 대해 알고 말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실재하였던 한 사람으로서의 예수'가 진정 의도했던 바를 추구하고자 하는 김규항의 시도는 바로 그 점에서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네 복음서중 오직 하나만을 '특별'한 것으로 삼고(부활한 예수가 승천하는 이야기를 담은 마태오복음의 결말을 그는 배격한다. "어쨌거나 이 부분은 '가장 먼저 쓰인, 그래서 예수의 모습을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복음서'라는 「마르코복음」의 특별한 의미와는 무관하며, 따라서 우리가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마르코복음」을 특별히 여기는 이유와도 무관하다."(266쪽, 강조는 인용자)), 그 속에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예수의 진짜 의도'를 찾아내어, 그것이 김규항 자신이 말하는 '불온'한, 진정한 진보 담론과 합치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런 작업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다.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이단 마르키온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및 바울서신만을 남기고 다른 신약성서를 지워버렸다.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복음서에서 스토아 철학자를 발굴하고자 했다. 김규항 자신이 치열하게 비판하는 대형 교회의 목사들도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예수는 베버주의의 가장 속물화된 버전을 몸으로 구현해낸 누군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가 복음서 중 어떤 것은 털어내고 어떤 것에는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여 '나의 예수전'을 쓰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역사 속의 예수'는 내게 유리한 말을 했다, 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게리 윌스의 다른 책을 인용해보자.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성서 밖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성서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 단 한 가지의 이유는 바로 부활에 대한 성서 집필자들의 믿음 때문이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예수'를 확인하기 위해 구문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은 퇴비 더미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태평양 바닥에서 뉴욕 시를 찾아내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논리가 뒤엉켜 혼재되어 있는 전혀 엉뚱한 담론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예수는 바로 믿음의 예수다. 그러한 믿음을 거부한다면 성서 속의 이야기들을 믿을 이유가 전혀 없다. 성서 속의 예수는 말씀을 전하고 부활했던 바로 그 예수다. 그가 이끈 신비로운 무리의 구성원들이 품고 있던, 그의 영속적인 활동에 대한 믿음이 성서에 대한 기독교적인 믿음의 기반이다. 그것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예수에 대해 왈가왈부 성가시게 할 필요도 없다.
25쪽, 게리 윌스, 권혁 옮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그런데 앞서 말했다시피, 삼위일체 교리가 없다면 유대교의 전통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는 실패한 듣보잡 '불온'분자일 뿐이며, 유대교 전통에 익숙하다 해도 죽었다가 살아난 예언자 중 하나일 뿐이다. 예수에 대한 네 편의 장대한 전승을 보존해온 집단의 믿음은,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교리에 기반하고 있다. 하필이면 그 한 사람만이 하느님과 동일한 위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기도 했다는 그 억지 논리 말이다. 심지어 그것이 공식 교리가 되는 과정에는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고, 반대파들은 폭력적으로 탄압당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가 아니라면 우리는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이 실로 예수의 '부활' 그 자체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대체 '부활'이 무엇이었을까? 어떤 제자들은 몸으로 살아난 예수를 만났다. 바오로와 같은 이방인들은 주로 환영이나 환시를 통해 예수의 부활을 목격했을 것이다. 혹은 성령의 역사함 속에서 예수의 부활을 체험했을 수도 있다. 성삼위가 하나가 아니라면 예수의 부활은 집단 히스테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할 위험에 직면한다. 2천 년의 역사를 통해 다져진 교리는 그 기간동안 빚어진 신앙의 역사적 증거이자, 동시에 신앙 그 자체이기도 하다.

김규항의 '불온'한 예수상이 갖는 또 다른 문제점은, 과연 그렇게 구성해낸 '역사적 예수'가 실재의 증거와 어느 정도 합치하느냐 하는 것이다. 김규항은 예수가 태어나고 자란 갈릴래아를 오늘날의 팔레스타인과 서슴없이 등치시킨다.

가 난과 차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갈릴래아 사람들의 저항의식은 늘어만 갔다. 끊임없이 소요와 봉기가 일어났고 대개의 갈릴래아 청년들은 과격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또 죽어 갔다. 예수는 바로 그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성장했다. 예수는 마치 오늘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에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의 소년처럼, 동네 형들과 삼촌들이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다 줄줄이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22-23쪽)

예수는 오히려 폭력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갈릴래아에선 크고 작은 봉기가 셀 수 없이 일어났다. 예수는 그런 현장을 외면할 수 있는 특권계급이 아니었다. 예수가 형 혹은 삼촌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갔고 나중엔 친구와 동생들이 죽어 갔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오늘 이스라엘로부터 압살당하는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의 청년들과 같다.(237쪽)


김규항이 묘사하는 예수는 완벽한 운동권 청년인데, 그것은 다름아니라 예수의 내면에서 이른바 NL과 PD가 완벽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점령 지구의 청년들이라면 계급모순보다 민족모순에 먼저 눈을 뜨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계급적 인식이 반드시 그들에게 수반한다고 볼 수는 없단 말이다. 그런데 김규항이 말하는 예수는, 심지어 산업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은 시점인데,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층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랬다는 것만으로도, "예수는 요즘 말로 '계급적 관점'을 가진 셈"(137쪽)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계급적 관점'을 이런 식으로 규정한다면, 김규항 자신이 이 책에서 역시나 신랄하게 비난하는 자들, 바리새인에 비견된다고 말하는 '명망가'들도 계급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은 예수만의 일도 아니다. 팔복(八福)에 대한 해설을 하며 테리 이글턴은 "예수의 격언은, 부패한 지배계층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던 구약 예언자의 전통을 따른 것"(31쪽, 대한성서공회·김율희 옮김 『예수-가스펠』(서울: 프레시안북, 2008))이라고 설명한다. 김규항이 말하는 계급적 의식은 역사상 훌륭한 '스승'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따지고 드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허한 개념의 놀음'에 지나지 않을테니 여기서 우리는 다시 '팔래스타인 예수'로 돌아가보자. 앞서 인용한 책에서 테리 이글턴은 예수가 그렇게 가혹한 탄압을 어려서 경험해보지 못했으리라는 쪽에 한 표를 던진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의 고향 갈릴리에는 로마군이 공식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가 원한에 사무친 반제국주의자 부모의 품에서 자랐을 리는 없다. 예수가 어렸을 때 로마 군인들을 봤다면 그건 아마 휴가를 즐기러 나온 군인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죽은 유대에 주둔한 로마군의 규모는 매우 작았다.
11쪽, 서문, 예수 그리스도 지음, 테리 이글턴 서문, 대한성서공회·김율희 옮김 『예수-가스펠』(서울: 프레시안북, 2008)


이 글을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나는 신학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갈릴리에 로마군이 공식으로 주둔했다는 이글턴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로마의 대외 지배 방식을 고려해볼 때 이글턴의 설명이 더욱 사실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극소수의 미군이 주둔하는 대한민국에서 극소수만이 원한에 사무친 반제국주의자가 되는 것을 연상해볼 수도 있다. 특히 그 청년이 엄격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해보면(예수의 구약 인용은 자주 틀리기로 유명한 반면, 랍비로 훈련받은 바오로의 인용은 완벽에 가깝다), 본래 민족주의란 그 민족 내에서 많이 배운 자들이 외세에 대해 품는 감정이므로, 그가 팔레스타인 청년의 마음으로 로마와 싸웠을 것 같지는 않다.

가장 '교리'에 따른 가필이 적다는 전제 하에 마르코복음을 선택하고, 그중에서도 어떤 내용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반면 어떤 내용은 우의적으로 해석하며, 그래서 결국 결연한 민족주의자면서 동시에 계급적 문제의식을 갖추고 있었던 불온분자로 예수를 재탄생시키는 것은 이 시점에서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한국의 교회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가시화되고 있다고 쳤을 때, 과연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불온한 예수'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김규항의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우리는 정치적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248쪽) 김규항이 제시한 예수가 얼마나 '불온'한지도 결국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될 것이다. 과연 주류교회는 이 책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까지는 (훌륭한 판매량과 달리) 그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온다. 혼자만 불온하면 무슨 재민겨...


참고문헌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10점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돋을새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 10점
게리 윌스 지음, 김창락 옮김/돋을새김


예수 : 가스펠 - 10점
예수 그리스도 지음, 테리 이글턴 엮음, 김율희 옮김/프레시안북

2009-07-13

[시론] 신장 유혈 사태, 타인의 비극과 우리의 미래 사이

7월 8일 우름치에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면서 신장 지구의 유혈 사태는 제압되었다. 중국 공안은 금요일에 메카에 모여 집회를 하는 이슬람교도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종교 행사가 폭력 시위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접한 어떤 국가의 경찰을 연상시키는 대목인데) 모스크를 한시적으로 폐쇄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장 지구 유혈 사태는 진정되어가고 있다.

‘해외’라는 단어를 들으면 ‘시장’ 내지는 ‘자원’을 떠올리는 국내 언론의 속성상, 신장 지구 유혈 사태의 보도 방향도 대부분 그쪽으로 편향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신장 지구에서 개발된 유전이 있고, 그 유전의 개발권을 한족이 독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위구르인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있다가 한 장난감 공장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신장 지구 유혈 사태를 이렇게만 묘사할 경우, 위구르인들의 폭력 행사 이후 역으로 한족들이 위구르인들에 대해 자행한 무차별적인 폭력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국내 언론의 통상적인 설명은 신장 지구의 민족 갈등을 ‘자원 수탈자’와 ‘선량한 토착인’으로 치환시켜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 7월 7일자 3면.  
 
물론 한족들이 세운 거대한 에너지 기업이 자원 개발에서 나오는 이익을 독식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일부 기업만이 진출해 있고 그 기업들만이 문제였다면, 위구르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후 극소수의 부유한 한족들이 쫓겨나거나 대피하는 쪽으로 사태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실제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800만의 위구르인들은 해당 지역 인구의 40%를 점하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 60%는 중국 각지에서 건너온 한족들이며, 그들 중 대다수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해온 하층민이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 중앙정부는 동부로 밀려드는 미숙련 노동자들을 처리하고 동부와 서부의 불균형한 발전을 해소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이주 정책을 추진했다. 서부를 개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4대강 유역을 개발한다는 말이 한국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솔깃하게 들릴 수밖에 없듯이, 서부 지역을 개발한다는 말은 중국의 저소득층에게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약속으로 들렸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뉴욕타임즈》의 에드워드 왕(Edward Wong)은 위구르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한 중국인 이민자 가족의 사례를 통해 그들의 열악한 생활 수준을 보도했다. 매일 아침 8시에 리어카를 끌고 행상을 나가 한밤중에 집에 들어온다. 벌이가 쏠쏠하다 해도 미화 300불 수준에 머물고, 그러면 가까스로 생활비를 맞출 수 있다. 서부 개발의 노다지를 노리고 들어온 한족 이민자들에게도 막연한 불만은 팽배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서로 막연히 품고 있는 삶에 대한 불만이 특정한 계기로 터져나올 경우, 그것은 눈 앞에 보이는 다른 민족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치환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앞서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폭력 사태의 계기가 된 장난감 공장 살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저소득층 위구르인과 한족들은 그럭저럭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씨가 튀자 그들은 서로 갈라져 몽둥이를 들고 폭력을 휘두르며 서로의 변변찮은 재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폭동을 벌인 위구르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다민족 ‘포용’ 정책이 실상은 해당 문화의 압살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구르인들은 이민자의 증가로 인해 다수에서 소수로 변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문화와의 연결고리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위구르인은 하루 다섯 번의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이것은 이슬람인들의 취업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족 사장들은 메카 순례를 위해 긴 휴가를 쓰고 싶어하는 위구르인, 라마단을 지키고 낮 동안은 금식하고자 하는 이슬람 신자들의 사정을 신경쓰지 않는다.

종교 뿐 아니라 언어에 대해서도 제도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우름치에 위치한 신장대학교에서는 오직 위구르 시(詩)에 대한 강의만이 위구르어로 이루어진다. 1990년대부터 대학 교육에서 위구르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신장 지구 내 한족의 불만이 경제적인 문제에서 출발한다면, 위구르족의 불만은 경제적인 문제와 문화적인 차원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중앙 공산당 정부는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댓가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 G8 행사에 참여하고 있던 후진타오 주석이 급히 귀국한 것은 그러한 의지를 특히 대내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위구르의 유혈 사태가 더 악화되어 국제 사회가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확산된다면, 인접한 티벳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도미노 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중앙정부가 강력한 제압 의지를 보인 것은 그러나, 적어도 현지인들의 생존권 측면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 이 폭력 사태는 ‘돈 많은 한족’과 ‘가난한 위구르인’의 대결이 아니다. 위구르인들은 (국내 언론에서 너무도 자주 언급되는) 석유 회사가 아니라, 자기 주변의 한족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족들의 대항 시위도 마찬가지이다. 중앙정부의 이주 정책에 대한 불만을 그 정부를 향해 풀어내지 못하고, 대신 이웃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혈 사태가 지속되는 것은 그 어떤 문제의 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종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곳을 ‘개발’하는 것으로 국내의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려 하는 중앙정부가 있다면, 당연히 저소득층은 생활을 위해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위구르의 관계를 식민지와 제국의 그것으로 당장 치환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마치 영국이 식민지배를 시작한 이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제국』에 따르면, 영국이 제국으로 성립해있을 당시 영국의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보다 영국에서 식민지로 넘어간 이민자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일거양득이다. 식민지를 개발하면서 국내의 불만 세력이 될 수 있는 저소득층을 먼 곳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신장과 티벳에서 바로 그러하듯이, 원주민보다 이민자의 수가 많거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가면 문화적, 인종적 단일성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분리 독립운동의 추진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는 신장 지구를 포기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동에서 서로 건너간 이민자들이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신장 위구르 유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서 ‘거지떼’가 내려와 우리 모두 거지가 될 것이라고. 어쩌면 맞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북한의 체제가 얼마나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남한과 하나의 정치 단위를 구성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지금처럼 어느 정도의 국가 형태가 존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고위층과 남한의 자본이 결탁하여 이북 지역에 대한 대규모 ‘개발’이 시행된다면, 마치 중국 동부와 서부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대규모 이주의 물결은 북에서 남이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향하게 될 수도 있다. 위구르에 사람이 없어서 한족들이 건너간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한의 양극화가 심해져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일용직 노동자층이 크게 늘어나고, 북한에 이른바 ‘개발 특수’가 시작된다면, 남한의 저소득층은 당연히 북한으로 이주할 것이다.

비록 혈통상으로는 같은 민족이지만 이미 남과 북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다른 형태의 집단이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북이 서로의 이민자를 포용해야 하는 문제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결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북한이 망하고 남쪽으로 ‘거지떼’가 몰려올 상황에 대해서만 걱정하지 말고, 북한이 개방되고 남쪽에서 ‘노가다’들이 몰려가 에스닉 그룹을 형성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리 걱정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신장 지구 폭력 사태라는 ‘타인의 비극’을 바라보며 우리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 비윤리적인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이 조만간 우리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중국이 대한민국을 삼켜버릴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인구와 경제력을 놓고 볼 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다. 우리는 그보다는 북한 사람들을 중국이 위구르족 대하듯이 취급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피해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덩치가 커져버렸지만, 아직 자신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국인들이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될 때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노정태/Foreign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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