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09

2010년 독서 목록

  1. 20100106 - 수디르 벤카테시, 김영선 옮김, 『괴짜 사회학』(서울: 김영사, 2009).

  2. 20100113 - 마이크 데이비스, 정병선 옮김, 『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서울: 이후, 2008).

  3. 20100113 - 도모노 노리오, 이명희 옮김, 『행동경제학』(서울: 지형, 2007).

  4. 20100115 - 로버트 레브나스코니, 변광배 옮김, 『How to Read 사르트르』(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8).

  5. 20100123 - 강양구, 강이현, 『밥상혁명』(서울: 살림터, 2009).

  6. 20100124 - 비외른 롬보르, 김기응 옮김, 『쿨잇』(경기도 파주: 살림, 2008).

  7. 20100128 - 카토 요시코, 강현정 옮김, 『내 고양이 오래 살게 하는 50가지 방법』(서울: 해든아침, 2009).

  8. 20100202 - 트와일라 타프, 노진선 옮김,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서울: 문예출판사, 2006).

  9. 20100214 - 로빈 킨로스, 최성민 옮김, 『현대 타이포그라피 - 비판적 역사 에세이』(경기도 용인: 스펙터프레스, 2009).

  10. 20100216 - 강영안,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09).

  11. 20100217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문화와 가치』(서울: 책세상, 2006).

  12. 20100227 - 마크 에론손, 장석봉 옮김, 『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서울: 이후, 2002).

  13. 20100303 -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경기도 파주: 나남출판, 2007).

  14. 20100303 -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경기도 파주: 나남출판, 2006).

  15. 20100306 - 심송용, 강희모, 『아름다운 수식문서작성 프로그램 – LaTeX (I) 기초편』(서울: 교우사, 2009).

  16. 20100306 - 심송용, 강희모, 『아름다운 수식문서작성 프로그램 – LaTeX (II) 활용편』(서울: 교우사, 2009).

  17. 20100328 - Debra Cameron, James Elliott, et al., Learning Gnu Emacs (3rd. ed.), (Sebastopol, CA, USA: O'Reilly, 2005).

  18. 20100417 - 앨버트 허쉬먼, 김승현 옮김, 『열정과 이해관계』(서울: 나남출판, 1994).

  19. 20100517 - 클레어 베상, 박슬라 옮김, 『캣 위스퍼러』(서울: 보누스, 2006).

  20. 20100530 - 캐스 선스타인, 이기동 옮김, 『루머』(서울: 프리뷰, 2009).

  21. 20100610 -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서울: 한겨레신문사, 2003).

  22. 20100702 - 헌터 S. 톰슨, 장호연 옮김,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서울: 마티, 2010).

  23. 20100702 - 플라톤, 이정호 옮김, 『메넥세노스』(서울: 이제이북스, 2008).

  24. 20100706 -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7).

  25. 20100708 - 손석춘, 『신문 읽기의 혁명 2』(서울: 개마고원, 2009).

  26. 20100713 - 아우구스띠누스, 성염 역주, 『자유의지론』(대구: 분도출판사, 1998).

  27. 20100713 - 살바토레 세티스, 김운찬 옮김, 『고전의 미래』(서울: 길, 2009).

  28. 20100715 - 그레고어 쉘겐, 김현성 옮김, 『빌리 브란트』(서울: 빗살무늬, 2003).

  29. 20100720 - Terry Eagleton, Reason, Faith, and Revolution —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30. 20100722 - 조지 오웰, 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서울: 민음사, 2001).

  31. 20100725 - 김혜나, 『제리』(서울: 민음사, 2010).

  32. 20100810 - 프란츠 파농,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서울: 인간사랑, 1998).

  33. 20100811 - 니콜라스 시라디,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서울: 에코의서재, 2009).

  34. 20100828 - 버락 오바마, 이경식 옮김,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35. 20100829 - 로버트 미지크, 서경홍 옮김, 『좌파들의 반항 - 마르크스에서 마이클 무어에 이르는 비판적 사고』(경기도 파주: 들녘, 2010).

  36. 20100905 -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옮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서울: 바오, 2009).

  37. 20100910 - 로버트 라이시, 형선호 옮김, 『슈퍼자본주의』(서울: 김영사, 2008).

  38. 20100913 - 알레시오 레오나르디, 얀 미덴도르프, 윤선일 옮김, 『한 줄의 활자』(서울: 안그라픽스, 2010).

  39. 20100920 - 얼 쇼리스, 고병헌·이병곤·임정아 옮김, 『희망의 인문학』(서울: 이매진, 2009), 개정판.

  40. 20100921 - 마이클 샌델, 이창신 옮김, 『정의란 무엇인가』(서울: 김영사, 2010).

  41. 20100929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실천이성비판』(서울: 아카넷, 2002).

  42. 20101225 - Malcolm Gladwell, What The Dog Saw(New York: Little Brown, 2009).

  43. 20101227 - 제임스 트레필, 정주연 옮김, 『산꼭대기의 과학자들』(서울: 지호, 2003).

  44. 20101227 - 장 자크 루소, 김중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서울: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2010-10-11

입대합니다

2010년 10월 11일부터 2012년 7월 18일(예정)까지, 카추사로 군복무할 예정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기간동안 이 블로그에 정치·사회·시사적인 내용의 글은 올라오지 않습니다. 훈련소 주소 등 신상과 관련된, 외부에 공개해야 할 정보는 꾸준히 업데이트됩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대단히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무운까지는 바라지 않고, 군복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원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안녕히.

2010-10-01

죽은 시민의 사회

죽은 시민의 사회

이론적으로 따져보자면 우리는 슈퍼맨이 되어 있어야 한다.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볼 때, 우리는 비교를 불허하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그것을 곧장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트위터나 페이스북 따위로 자신의 생각을 떠벌릴 수 있으며, 서 있는 위치에서 반경 5백 미터 안에 숨은 맛집을 찾아내는 것도 식은 죽 먹기다. 이 편리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한없이 똑똑해지고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현실은 정 반대다.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자신,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는 볼록해지면서 점점 스파이더맨이 되어가는 모습. 온갖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에서 떠들어대며 “당신 자신이 되세요, 화이팅”이라고 떠벌리지만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산다. 한 시간짜리 점심시간에 잠깐 짬을 내 은행 또는 증권사 매장에 앉아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면서, 왜 이렇게 초라하게 살고 있을까 한숨을 내쉴 즈음, ‘딩동’하고 벨이 울리며 한 여성이 당신을 부른다. “275번고객님!”

이 세상의 정체, 그 속에서 당신이 처한 위치를 알고 싶다면, 남들이 당신을 부르는 호칭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아침에 눈을 떠 휴대전화에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면 적어도 한 통 이상의 스팸 문자가 와 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 판매자는 당신을 ‘고객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침에 눈뜨기 전부터 고객님이고, 잠들 때까지 고객님이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고객님, 스마트폰을 2년 약정으로 노예 계약한 고객님, 특급배송 서비스로 이것저것 결제하신 고객님, 실시간 스파이웨어 감시 프로그램이 꼭 필요하신 고객님. 이 무기력한 세상은, 당신을 ‘고객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기력해진 이유는 MB 때문이 아니다. 7월에출시되었어야 할 아이폰 4가 9월에 출시되어서도 아니고, 아이폰 대항마라는 딱지를 붙여가며 모 국내 전자업체가 집요한 언론 플레이를 펼치기 때문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이 통째로 ‘고객님’의 삶이 되어버렸다는 것, 주체적인 삶의 양식 없이 그저 소비자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선택을 하든, 당신은 그저 고객님이다. 손님이 그냥 왕이라면 고객님은 ‘킹왕짱’이어야 하겠으나, 실상을 놓고 보면 우리는 결국 다른 고객님을 상대하면서 번 돈 몇 푼을 주머니에 넣고,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선택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그런 하잘것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약정하는 사람과 개통해주는 사람만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점점 질서정연하게 무기력해지고 있다. 날마다 새로운 상품이 쏟아지고, 앱스토어에는 수십만 개의 어플이 다운로드를 기다리며, 맞춤형 서비스가 속속 생겨나는 이 세상에서 왜 정작 ‘고객님’은 무기력해질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자유로운 의사 결정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선택은 객관식이다. 시장을 통해 모든 것을 공급받는 우리로서는, 그 시장에서 공급해주는 것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뿐이다. 예컨대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되기 전까지 선택의 자유라는 말은, 적어도 스마트폰을 구매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자유는 시장에서 공급하는 물건의 종류만큼, 딱 그 수준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시장에서 무언가를 공급해주지 않을 경우, 고객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역시 아이폰을 예로 들어보자. 스티브 잡스가 프리젠테이션을 하던 올해 7월, 아이폰 4가 출시되는 국가 목록에 대한민국이 빠지자 수많은 사람이 충격에 빠졌다. 인터넷 공간은 순식간에 이런 저런 음모론으로 뒤덮였고 비명과 절망과 탄식이 와이파이망을 타고 날아다녔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한국 애플 본사 앞에서 시위라도 할 것인가? 단식투쟁을 벌이면 스티브 잡스의 마음이 바뀔까?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이론상 우리는 국가가 우리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은 우리에게 뭔가를 마땅히 제공해야 할 의무가 없을뿐더러, 그것을 요구 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횡포에 대해서는 촛불시위를 하고 서명운동을 하고 칼럼을 쓰고 투표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의 전횡에 대해 일개 고객님인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기껏 다른 기업의 고객님이 되는 게 저항의 전부다. 그런데 이용하는 주유소를 A사에서 B사로 바꾼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긴 한가? 민주주의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원리에 잠식되어 갈수록, 즉 우리가 시민에서 고객님으로 변해갈수록, 우리는 무력해진다. 번호표를 뽑고 얌전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국내에 아이폰 4가 출시될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하고, 예약 판매를 받는 서버가 다운된 것이 풀릴 때까지 그저 기다려야 한다. 할 일이 없다. 약정기간이 덜 끝난 휴대 전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아보고, 쉴 새 없이 클릭하며 최저가 탐색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면, 불현듯 허탈해진다. 이것이 삶에 무슨 의미일까. 결국 수많은 불량품 중에 개중 나은 것을 찾으려 방황하고 있을 뿐 아닐까.

촛불시위 이후 정치적으로 맥이 빠져버린 한국 사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촛불시위는 수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정치적인 주제를 놓고 토론하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자의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컷 MB를 욕하고 나서, 결국 투표 잘하자며 집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가 정치인들 앞에서 고객님이 될 수 있는 기회, 즉 선거는 너무 멀리 있었고, 경찰은 컨테이너를 쌓고 버텼다. 촛불시위의 실패 이면에는 이미 고객님으로 길들여진 시민들의 무기력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의 정치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죽은 자식 고환 애무하듯, 선거 때 간신히 정치에 대한 관심이 솟고, 이후 곧 죽어버린다. 우리는 정치적 의제를 생산하고 실천하는 시민이 아니라, 정치인을 쇼핑하는 고객님으로 전락했다.

어떻게 하면 ‘죽은 시민의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정도의 해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돈을 벌되, 벌어서 ‘시간’을 사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평화를 얻으라는 것이다. 똑똑한 소비자가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바보가 된다. 소비자는 어차피 기업이 짜놓은 판 위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 시간을 이용해서 고객님이 아닌 누군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당신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부모님, 학생이라고 부르는 선생님, 동지라 부르는 당원, 아저씨라고 부르는 옆집 소녀 등, 눈을 돌려보면 생각 외로 우리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많다. 바로 그 세계, 진짜 우리의 삶이 촘촘히 얽혀 들어간 세계에 충실하는 것, 그것만이 죽은 시민의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GQ 2010년 10월호 

2010-09-30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 실천에서의 다수결 맹신

현재까지 한국 보수정치는 줄기차게 '중도주의'를 표방해왔다. 누가 봐도 대충 '옳으신 말씀'을 하면서 최대한 넓은 범위의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전략이 즐겨 사용되어왔다는 것이다. 현 정부도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라고 말하는데, 강남에서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들도 곧죽어도 자신들을 '중산층'이라고 칭한다는 것을 놓고 보면, 이건 그냥 '다들 행복하게 잘 살자'는 수준의 표어밖에 안 된다. 한국의 정치는 가장 넓게 그물을 펼치는 전략을 선호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넓은 정치'가 '힘의 정치'와 곧바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쌍끌이 어선끼리 어장 경쟁을 하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그 민주당을 비판하는 외곽 세력들이나, 이념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뿐더러 애초에 어떤 '이념성'을 지니려고 하지도 않는다. 특정한 핵심 지지층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최대한 넓은 범위의 유권자들에게 단번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하려다보니, 결국 정치는 한낱 쪽수 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 선거에서 단일화 국면을 떠올려보자. 만약 각 정당들이 특색에 따라 확고한 지지층을 지니고 있고 그 충성도가 높다면 애초에 단일화 논의가 잘 거론되지도 않을 뿐더러 명확한 '거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사에는 계급정당이 제대로 출현한 바 없었고, 그나마 유권자들을 묶어놓는 끈은 지역주의 뿐이었다. DJP 연합이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충청도 표를 주면 너는 나에게 총리직을 주고 내각제 개헌을 한다, 이건 '거래'가 된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진보정당의 확실한 표밭으로 구성된 비율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 진보정당들과 민주당 및 민주당 계열들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거래가 성사되기 어렵다. 서로 주고 받기 위해서는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필요한데, 민주당과 그 계파들은 애초에 대중추수에 급급했고, 진보정당들의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민주당 계열들은 진보정당과 정당한 거래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힘으로 빼앗는 게 더 빠르고 정확할 테니까. 쪽수로 밀어붙이고 여론조사 결과로 압박하면, 사표 방지 심리로 진보정당의 핵심 지지층도 상당수 끌려간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역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당들, 특히 보수양당이 지니고 있는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와 '실천에서의 다수결 맹신'은 이렇듯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다수결-쪽수로 밀어붙이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좋은 소리'만 한다. 그렇게 막연한 수사로 다수를 동원한 후, 스스로의 이념과 지향성을 지닌 정치집단들을 다수결에 의해 굴복시킨다.

전직 배우, 현직 정치인 문성근이 주도하는 '국민의 명령'은 이와 같은 경향성이 극대화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어떤 구체적인 내용도 제시하지 않고, 그냥 '합쳐라, 모여라'만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이념으로서의 대중주의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령은 처음부터 만들지도 않았다. 실천에서의 다수결을 맹신하므로 백만 명을 모아서 야당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발상을 이마에 써붙이고 다닌다. 구체적 강령이나 지향성 따위 없는, 함성을 위한 함성. 기의는 없고 기표만 남은 껍데기로서의 정치. 한국의 정치를 허깨비로 만드는 두 개의 큰 경향성이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어 이와 같은 기괴한 대중정치운동이 출현한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경향성에 맞서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서구 민주주의는 선거권의 점진적 확대와 더불어 계급정당이 출현하고 그들이 핵심 지지층으로 구성되는 역사적 맥락 속에 성립하였지만, 한국에서는 해방 후 보통선거권이 그냥 주어졌고 갓 시작된 계급정당이 철저하게 와해되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진보정당이 10%대의 득표율을 올린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북한의 3대 세습을 외부에서는 비판할 수 없다는 개또라이들이 당을 집어삼키면서 그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있는 중이다.

진보정당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치들은 대부분 '대중성 강화'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대중성이란 이와 같이 이념적 탈색과 더불어 힘의 정치에 대한 숭배를 동시에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노선을 택할 때 진보정당은 존재의 의의를 상실할 뿐더러 다수결이 민주주의라고 믿는 자들의 공세 앞에 더욱 무력해진다. 그러므로 진보정당의 지지자는 와해되고 있는 계급에 호소하거나,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는 새로운 대중성에 호소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2010-09-19

김규항 - 진중권 논쟁 (3) : '자유주의자'라는 욕설

김규항은 자신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르는 행동이 말 그대로 '사실적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김규항 본인 혹은 김규항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발언 속에서 이와 같은 입장은 수없이 반복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라는 단어 자체가 어떤 도덕적 평가를 담고 있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때, 그것이 비난이나 평가 절하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의 의미는 그 사용 속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는 맥락에 따라, 그 어떤 단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욕설 비슷한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령 누군가에게 '이런 세종대왕 같은 새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발화의 상대방이 고기와 여색을 밝히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야 이 이순신 같은 놈아'라는 표현은 그 발화의 상대방이 대단히 꽁하는 성격이며 자신과 불화하는 자를 매일 일기장에서 씹고 심지어 섹스 파트너와의 성관계 횟수를 일기에 적기도 하는 편집증적 성향을 지닌 것임을 지적하는 문장일 수 있다는 것이다.

'너는 자유주의자'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발화자와 그 상대방 모두 진보정당의 가치에 동의하고 그것의 성장을 바라고 있다는 전제 하에,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결국 진보정당들에게 '비판적 지지'를 강요했다는 역사를 함께 고려해볼 때, 그와 같은 딱지붙이기는 당연히 욕설 혹은 심한 비판 내지는 비하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김규항이나 김규항의 옹호자들은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이 그저 사실의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화술을 지닌 사람 혹은 집단이 '진정한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대중들은 어떠한 정치 집단 속에서 그와 같은 '배제'의 화법이 자연스럽게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면 조용히 발걸음을 돌릴 뿐이니 말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과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욕설로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후자를 피하면서도 전자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고, 자신이 전자를 수행한다고 착각하면서 후자에 지나지 않는 행태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진보정당의 구성원, 혹은 그러한 정치적 결사체를 위해 발언하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오류에 빠져들지 않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