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9

[북리뷰] 북한의 새해는 우리보다 늦게 온다

달력과 권력
이정모, 부키, 1만2800원.

새 해가 시작되는 이맘때, 달력은 일상 속의 사물을 넘어 하나의 사유 대상이 된다.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은 인위적으로 단절되고 그것이 하나의 개념들을 이루어내며, 그 개념의 내용을 보기 좋게 편집하고 구성한 사물이 바로 달력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본에 체류중이던 생화학자 이정모는 도서관에서 독일의 과학 잡지 <게오(GEO)>를 펼쳐들었다. 1999년 1월의 일이다. 새로운 천년이 다가온다는 기대감에 전 세계가 들떠있던 시절이다. '지난 천년은 총 며칠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본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윤년 규칙을 조합해 답을 내놓았지만, 결과는 그가 내놓은 정확한 계산보다 열흘이나 적었다. "율리우스 달력과 그레고리우스 달력의 윤년 규칙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열흘이나 틀린 것이다."(5쪽) 그 결과에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독일의 공립도서관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참고 문헌의 바다를 헤엄치며, 달력의 과학적 측면 및 그에 얽힌 사회 문화 권력의 이야기를 담은 한 권의 책을 펴냈다.

<달력과 권력>이 탄생하게 한 문제는 바로 이런 것이다. "1582년 10월 5일부터 10월 14일까지 로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19쪽) 정답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 한 건의 살인 사건도 없었고, 그 누구도 물건을 사고 팔지 않았다. 아무도 농사짓고 밥짓고 집짓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칙령에 의거해, 그동안 사용하던 율리우스(카이사르) 달력의 오차를 바로잡고자 열흘을 통째로 빼버린 탓이다.

1582년 10월의 로마 달력에는 5일부터 14일까지가 빠져 있다. 하지만 이 달력은 잘못 인쇄된 것이 아니다. 또는 못된 폭군이 재미 삼아 백성들에게 어처구니없는 달력을 강요한 것도 아니다. 이 달력은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한 달력으로, 제대로 된 달력이었다. 어쨌든 이 달력에 따라 사람들은 1582년 10월 4일 목요일 밤에 잠들어 다음 날인 금요일 10월 15일 아침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20쪽)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유럽의 열흘. 그것은 고대 로마부터 중세 유럽을 거쳐 당시까지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 달력의 오차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달력과 계절이 맞지 않았다. 그 결과 농사에 지장이 왔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춘분을 기점으로 삼아 계산하는 부활절의 날짜 또한 맞지 않게 되었다. 부활절을 기준으로 삼는 온갖 기독교 행사들의 날짜가 어그러졌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유럽은 제 시간을 되찾았고, 기독교를 믿는 유럽이 세계를 재패하면서, 그레고리우스 달력은 오늘날 세계의 표준 달력이 되었다.

<달력과 권력>은 흥미진진하면서도 아쉬운 책이다. 율리우스 달력을 거쳐 그레고리우스 달력이 확정되기까지의 문화사가 책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분량을 차지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의 혁명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담아 만든 달력들을 소개하고 그 실패를 곱씹어본다. 그러나 이후 온갖 고대 문명의 달력들과 조선 세종때 만들어진 칠정산 등을 소개하는 대목으로 넘어가면 책의 구성에 일관성이 사라진다. 그레고리우스력을 개혁하려던 온갖 시도들이 그 뒤를 잇는데, 그 자체는 재미있지만, 책의 탄력은 이미 떨어진 상태가 되어버린다.

북한의 새해는 우리보다 30분 늦게 밝는다. 최근 시차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달력을 만들고 공표하는 것은 결국 권력의 본질 중 하나다. 모든 사회 구성원의 시간을 자신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추는 것이니 말이다. <달력과 권력>은 이러한 주제를 다룬 첫 번째 책이다. 새해에는 더 많은 과학 교양 저자들이 시간과 힘의 문제를 다뤄주면 좋겠다.


2016.01.12ㅣ주간경향 115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2-28

[별별시선]여자를 뭘로 보고?

2015년 현재 세계를 가르는 가장 큰 균열은 이른바 ‘게이 디바이드’(gay divide)라 불리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에 따라 국가들을 분류해볼 수 있고, 그 경우 넘을 수 없는 간극이 관찰된다는 말이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는 동성결혼이 법제화됐거나 되어가는 중이다. 반대로 이슬람국가(IS) 점령지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법에 의해 처벌당하고,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국가가 동성애자들에 대한 린치를 사실상 방관하고 있다. 세계는 ‘동성애자 인권’이라는 지표를 두고 반으로 쪼개지고 있는 중이다.

‘게이 디바이드’라고 하지만, 그 격차는 여성 인권을 소재로 삼더라도 거의 동일하게 유지된다. 다시 IS의 사례를 들어보자. 그들은 공공연히 여성을 성노예로 사고팔면서, 그 과정에서 남자들이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국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사기꾼을 처벌하기까지 한다. 세계 어딘가에서는 동성혼이 법제화되어 있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여성 노예 매매가 합법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간극을, 본인이 소수자에 속하지 않는 이성애자 남자 지식인들은 ‘문화적 차이’로 일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다양한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표현하고 목소리를 낸다. 젊은 진보, 새로운 진보를 떠받쳐줄 새로운 세대의 지지자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다른 사람들의 문화에 대해 훨씬 관대하다. 동시에 그들은 명백한 야만과 폭력이 ‘문화적 다양성’의 탈을 쓰고 유포되는 것에 대해 단호한 반대의 뜻을 표한다.

2015년의 가장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였던 페미니즘의 부활, 혹은 ‘새로운 페미니즘’의 가시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덕분에, 혹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포함한 여성들에게 폭언을 퍼붓는 팟캐스트를 녹음해놓고도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문제 삼기 전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개그맨 장동민을 디딤돌 삼아, 사람들은 SNS를 통해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며 그동안 한국의 진보 진영이 소홀히 해왔던 가장 큰 사회적 쟁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터넷에는 여성혐오적 표현이 넘쳐나고 있다. 소라넷처럼 단지 언어 표현을 넘어 몰카와 ‘도촬’을 공유하며 강간 모의를 하고 실행에 옮기는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그뿐 아니라 적잖은 남성 중심 웹사이트들은 오히려 소라넷을 문제 삼는 여성 커뮤니티들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다시 말해 2015년 이전까지,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의 여성 혐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혹은 눈길이 닿더라도 ‘인터넷 하위문화라서 그렇다’는, 일종의 문화상대론적 입장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너무도 명백하게 여성과 성소수자를 억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정체성 중 일부로 삼는 무장집단이 국가를 참칭하고 있다. 더군다나 동성애자들의 인권이 눈에 띄게 신장되고 있음에도, 특히 한국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를 포함한 사회적 차별이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젊은 여자들에게 ‘애 낳아서 출산율을 끌어올리라’며 성화를 부린다. 그래놓고는 어린이집 이용 시간을 줄이고,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불이익당하는 것을 방관하며, 취업 및 승진에서 남자에게 특혜를 주는 기업 관행을 묵인하고 있다. 여자, 특히 젊은 여자를 뭘로 보는 걸까? 지금까지 여성들의 불만이 터져나오지 않았던 것이 더욱 이상한 일 아닌가?

올해는 긴 터널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여성혐오에 맞서는 사람들이, 이전에는 그냥 참아왔던 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불편’을 표현한 덕분이기도 하다. 시간은 절로 흐를지 모르지만, 역사는 바로 그렇게, 맞서 싸우는 이들 덕분에 진보한다. 2015년은 페미니즘의 해였다. 이런 움직임이 진보 진영을 넘어 한국사회를 이끄는 동력이 되기를 희망한다.


입력 : 2015.12.28 21:36:35 수정 : 2015.12.28 22:11: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282136355&code=990100#csidxda5a5459543056bb7b074ed5614c976

덧붙임: 내가 편집국에 보낸 제목은 "2015년, 페미니즘의 해"였다.

2015-12-17

[북리뷰] 기후변화, 이제는 '회의'할 시간이 없다

6도의 멸종
마크 라이너스, 세종서적, 1만6천원


2010년대에 들어서 멸종된 종(種)은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온난화 회의론자'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들의 세력은 건재한 것처럼 보였다. 대기 중 탄소 농도와 지구의 평균 기온이 거의 확실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에 거의 모든 진지한 과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소수 온난화 회의론자들은 태양 흑점이나 통계의 오류 등을 운운하며 언론의 과도한 관심을 받아왔던 것이다.

지난 12월 12일 파리에서 막을 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자총회(COP21)를 보더라도 그렇다. 전 세계 195개국의 대표단이 모였다. 그 모든 나라의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할 게 아니라면, 이제는 더 이상 온난화 회의론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인간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및 온실가스의 위험성에 대해, 늦게나마 전 세계가 눈을 떴다. 이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초점을 맞춰야 할 시점이다.

국내의 여론 동향은 그런데 좀 이상하다. 기후 변화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책보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던가 <쿨 잇> 같은 온난화 회의론자의 책이 더 잘 팔리는 그런 나라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겪게 될 위기가 무엇인지 아직도 실감을 못 하고 있다. 과학 저널리스트 마크 라이너스가 쓴 <6>을 펼쳐보자.

이 책을 대중에게 설명하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기온이 2˚C, 4˚C, 6˚C씩 올라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과 낮의 기온차가 15˚C씩 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변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 목요일의 기온이 수요일보다 6˚C 높다는 것은 외투를 집에 두고 나오면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지만 지구의 평균 기온이 6˚C 상승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23쪽)

지금보다 지구기온이 6도 낮았던 그 시절을 우리는 빙하기라고 부른다. 지금보다 5도 이상 높았던 시절도 지질학적으로 발굴되어 있다.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PETM)'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PETM은 지질학적 기록 중에서 지금처럼 화석연료를 태워댄 탓에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는 현상과 가장 가까운, 자연의 실제 사례"(247쪽)라고 저자는 그가 참고한 수많은 과학 논문 중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그 시절 지구는 우리가 아는 지구가 아니었다. 바다는 뜨겁고 끈적한 산성 액체였고, 해수면의 온도가 높은 탓에 엄청난 토네이도가 얼마 남지 않은 육지를 후려쳤다. 뉴욕, 런던, 상하이 등 중요 항구 도시들이 있어야 할 곳은 진작에 물에 잠긴 상태다. 물론 인류에게는 지능과 기술이 있으므로 모든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을 결코 유지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동식물들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사라지고, 대신 수렵과 채집 및 작은 규모의 농업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동물'로서의 인간만 남게 되는 것이다.

지구기온이 평균 3도 이상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탄소 배출량을 아무리 줄인다 한들 소용이 없다. 이미 배출된 탄소가 지구 기온을 높이고, 그로 인해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을 포함해 많은 곳에 묻혀있는 탄소가 더욱 배출되는, 이른바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허리케인 카타리나, 2010년 러시아의 산불, 미국 서부의 극심한 가뭄 등으로 지구기온 평균 1도 상승의 쓴맛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온난화 회의론자들에 의해 낭비된 세월이 안타까울 뿐이다. 올바른 정보가 유통되고 여론이 형성되기를 희망한다.


2015.12.29ㅣ주간경향 115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2-03

[북리뷰] 그 가스등을 보라

가스등 이펙트
로빈 스턴, 랜덤하우스코리아, 1만4천800원


'데이트폭력'의 핵심은 '데이트'가 아니라 '폭력'에 있다. 하지만 그 폭력이 적용되고 발현되는 양태는 다른 폭력과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적으로 친밀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속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양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로빈 스턴은 미국에서 20여년간 심리상담가, 교사, 우드헐리더십연구원 등으로 일하며 수많은 상담을 진행해온 리더십 강사 및 컨설턴트다. 그는 데이트나 결혼 등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며 결국 파국으로 몰아가는 '가스라이팅'을 발견하고 이론화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다 알지만, 이름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던, 또 다른 폭력이다.

'가스라이팅'에 대해 알아보자. 고전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드먼이 연기하는 젊은 가수 폴라는 나이 많은 남자 그레고리와 결혼한 후 자신감을 잃고 회의에 빠진다. 그레고리와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집안의 물건이 없어지고, 위치가 바뀌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그레고리의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폴라는 점점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이 사실인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히스테리에 빠진다. 그레고리가 서랍을 뒤지기 위해 가스등을 켤 때, 가스의 압력 때문에 자기 방에 켜둔 가스등은 불빛이 약해지는데, 그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결국 창밖에서 그 가스등이 흐릿해지는 현상을 목격한 형사의 증언을 통해 폴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접고 그레고리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괴롭힘은 성별과 무관하게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남자들은 이른바 '신병'으로 부대에 갓 배치될 무렵 비슷한 일을 겪는다. 뻔히 다 아는 것을 일부러 틀리게 물어본다거나, 반대로 절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을 물어본 후 상대가 당황하면 윽박지르는 식으로, '갈구는' 것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스라이팅'은 남녀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나는 수많은 상담 사례를 통해 가해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고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22쪽) 그 남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자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한다.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가 로맨틱한 이벤트를 연출하는 남자? 그 남자는 상대방 여자에게 억지 감동을 뽑아냄으로써 상대방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원치 않는 일을 하게 하는 남자 역시, 상대방의 가스등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하물며 그 여자를 때리는 남자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가스등 이펙트>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책이다. 데이트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가령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입버릇처럼 '뚱뚱하다'고 놀리는 게 어떠한 종류의 폭력인지 우리는 아직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짓궂은 애정도 관계의 미숙함도 관심의 표현도 아니다. 상대방의 자아를 흔들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려는 폭력적 영향력 확장, 즉 가스라이팅이다.

이 책은 너무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본다. 책의 대부분이 피해자의 심리 분석과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의 논지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피해자 탓하기'로 향할 우려가 있다. 그러한 비판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단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저 흔들리는 수많은 가스등을 보라. 그것은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이 명백한 폭력들을 우리는 지적하고 바꿔나가야 한다.


2015.12.15ㅣ주간경향 115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1-29

[별별시선]청와대로 가지 말자

요즘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2008년의 나는 촛불시위에 열심히 참여했는데, 그럴 때마다 큰 아쉬움을 느꼈다. 왜 우리는 저 버스를 당장 넘어서 청와대로 돌격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이렇게 평화적인 투쟁에만 집착하고 합법적인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을까.

반성이 시작된 것은 비슷한 시기 태국에서 벌어진 사태 때문이었다. 노란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나서서 정권이 뒤집히면, 이번에는 빨간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정부를 끌어내린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군부는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갔고 태국의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내려앉은 상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된 수많은 나라에서 민주화는 비슷한 방식으로 좌초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규모 시위가 폭동으로 이어지고 정권이 뒤집히면서 민주적 권위가 쇠약해지면, 군부가 총칼로 안정을 제공한다. 당장 경제 성장을 원하는 중산층은 일단 군부를 지지한다. 하지만 중산층은 서서히 더 많은 자유를 찾아 군부가 아닌 민주 세력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그 시점, 다시 말해 1987년에, 성공했다. 물론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의 두 축이 견고하게 버텨냄으로써, 그중 한쪽이 군부와 살림살이를 합치는 역사적 퇴행이 벌어졌을 때에도 민주적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민주화 세력과 군부 독재가 1 대 1로 맞붙는 경우, 민주화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급속하게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선거로 뽑혔지만 군부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압살한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12월5일로 예정된 제2차 민중총궐기에 2008년 촛불시위의 기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뜨거운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다. 큰 집회가 있을 때마다 광화문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경찰과 맞서지만 세상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대규모 집회를 통해 ‘세력 과시’를 하는 일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하지만 매번 집회가 열릴 때마다 마치 정해진 식순처럼 경찰버스를 훼손하고 캡사이신 섞인 최루액을 맞으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적당히 늦은 시간이 되면 집에 간다. 그 과정에서 부상자가 나오고 경찰의 폭력이 벌어지지만 여론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7년째다.

설령 어쩌다가 경찰 버스를 뛰어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을 개척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청와대로 가서 대체 뭘 어쩔 것인가? 대통령이나 그 외 중요 인사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순간 시위대는 경찰의 주장대로 ‘폭도’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청와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반면 그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쪽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대규모 집회를 조직해 세력을 과시하지 않으면 단 한 번의 눈길조차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집회가 커지고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되면 모든 언론은 일제히 ‘폭력’에만 초점을 맞춘다. 결국 지금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는 한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목소리’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상대가 짜놓은 외통수 속으로 걸어들어가지 않는 것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을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외신 기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인이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우리 스스로의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더 많은 국민들에게 시위의 쟁점들을 알리고 지지를 끌어내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때다.

‘청와대로 가지 말자. 대신 방향을 돌려,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자.’ 2008년 촛불시위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인국 신부가 시위대의 방향을 불타버린 남대문으로 돌리면서 한 연설의 내용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단 한 명의 권력자 대신, 수많은 이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행동을 이끌어낼 해법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입력 : 2015.11.29 20:56:16 수정 : 2015.11.29 21:02: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11292056165#csidxdce0acec71fddcda0123b58627a37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