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01

블로그에 쓰는 블로그에 대한 생각

2017년에는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블로그에 글을 쓸 생각이다. 나는 이전까지는 읽고 있는 책, 다 읽었지만 내용을 온전히 갈무리하지 못한 책, 읽었지만 그 의미를 곱씹는 중일 뿐인 매체 기사 등에 대해 공개적인 장소에서 언급해오지 않았다. 완결되지 않은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결과 지난 몇 년 동안 블로그는 업데이트가 대단히 뜸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쩌면 트위터 시대가 시작된 후 많은 블로그 사용자들이 겪은 현상일 것이다. SNS로서의 페이스북과 달리 트위터는, 처음에는 그들 스스로도 SNS인줄 알았지만, '마이크로 블로깅' 서비스였고 결국 블로그 시대에 활발하게 글을 쓰던 이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그게 뭐 나쁜 일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특히 한국어권이라는 작고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이전의 블로그 시대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이 트위터 덕분에 가능해졌다. 하지만 나처럼 읽고 쓰는 것이 직업인 이들에게 트위터는 일종의 '담배'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흡연자가 아니므로 상상적 비유를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많은 생각과, 독서와, 레퍼런스들이 허공으로 후우 하고 뿌려졌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여보자. 트위터는, 특히 페이스북에 비하면, 굉장히 축적에 유리한 매체다. 일단 본인의 타임라인을 시계열적으로 훑을 수 있고, 자신이 쓴 트윗 전부를 다운받을 수 있다. 계정 백업이 언제라도 가능하며 그것을 오프라인 상태에서 웹브라우저나 텍스트 에디터로 읽어서 검색하는 일 또한 가능하다. 굳이 지난 트윗들을 다운받지 않아도 검색어 조작을 잘 하면 이전에 떠올렸던 단상이나 읽었던 웹문서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렇게 '저장되어' 있는 것과, 내 머릿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기사를 읽은 후 적당한 구절을 인용하여 트위터에 올리면 기억을 할 수 있다(그게 내가 트위터를 이용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가공하여 원고에 활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1차 단계인 수집에서 2차 단계인 인용으로 넘어가기까지에 장벽이 없지 않다. 짧더라도 독립된 글을 써서 정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이유로 '비밀글' 기능을 제공하는 다른 블로그 서비스를 사용할까, 혹은 설치형 블로그를 운영해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잠시'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고,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이것저것 만져보고 몰래 실험도 해봤다. 하지만 뭐랄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언제나 그러한 탐색은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 외에는 블로그 그 자체에 대해 그 무엇도 연구하거나 고민하거나 탐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끝난다.

그러자면 뭐가 됐건 설치형이 아니라 가입형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일단 언제 서비스가 종료할지 모르는 국내 블로그 서비스는 모두 뺀다. 드롭박스에 텍스트 파일을 올려놓으면 블로그 형태로 뿌려주던 서비스도 있었고 뭐 그런 식의 다양한 실험은 늘 존재해왔는데, 그 또한 결국 지속성에 문제가 있다. 결국 남는 선택지는 200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블로그를 운영하는 하드코어 블로거들이 우글우글한 blogger.com과, 이제는 일종의 표준이 되어버린 워드프레스 뿐이다.

워드프레스는 무료 가입자들에게 형편없이 낮은 기능만을 제공한다고 불평하고 싶지만, 사실 기능이 부족한 것으로 따지면 구글이 옛날옛적에 인수한 blogger.com은 wordpress.com의 무료 계정보다도 더 뒤떨어진다. 가장 단적인 예로 '비밀글'이 없다. '비밀댓글'도 없다. 모든 원고는 완성되어서 공개되거나 완성되지 않았기에 초고의 형태로 비공개된다. 댓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비밀댓글'의 부재는, 유독 그 기능을 사랑하는 우리 한국인들이 blogger.com의 사용 뿐 아니라 구독마저 꺼리게 만드는 중요한 'dealbreaker'로 작동해왔다. 하지만 구글은 그런 기능을 제공할 생각이,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듯하다.

그래서 블로그를 옮길까 말까 오래도록 고민하고, 데이터를 익스포트해서 옮겨넣어보기도 하고, 여러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다 집어치우기로 했다. '블로그를 한다'는 건, 어쨌건 꾸준히 한 계정에 게시물을 업데이트한다는 의미이며, 그 외의 것은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글 블로그가 제일 편하게 느껴진다. 이전에 잠시 한 개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블로그를 운영했던 적이 있는데, 그 홈페이지의 운영자는 내가 여러 차례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자료를 내게 돌려주지 않았다(새해가 밝았으니 조만간 다시 메일을 보내볼 생각이다). 설치형 웹서비스라는 게 이렇게 위험하다. 계속 본인의 자원을 투입할 생각이 없다면 어딘가 '큰 배'에 탑승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인터넷에서 가장 '큰 배'는 구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나는 그냥 계속 이 계정에서 이 블로그를 사용했어야 했다.

결국 하던 블로그 계속 하겠다는 것인데 왜 이렇게 설명이 길까? 몇 가지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게시물에 태그를 붙이기로 했다. 이것은 대단히 큰 변화다. 애초에 blogger.com으로 블로그를 옮겼던 이유 중 하나는 카테고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글을 분류하지 않았으며, 분류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서비스(예컨대 티스토리)를 가장 먼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왔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일단 카테고리식 분류는 '중첩되는 분류'를 다루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그에 대해서는 이 게시물을 참고해도 좋겠다. 이 또한 blogger.com을 이용하는 사용자가 작성했다는 점에 주목할 것). 라벨 또한 붙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검색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오래도록 생각해왔다. 그런데 라벨이라는 것은 세밀하게 붙이면 붙일수록, 그리고 그 라벨의 대상이 되는 게시물이나 사진 등이 쌓이면 쌓일수록, 도움이 안 된다. 따라서 아예 시작도 안 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수년 동안 지켜왔던 것이다.

결국 나의 불친절한 블로그 운영은 '독자 입장'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 블로그를 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하고 있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나 또한 내 블로그의 독자라는 것 말이다. 물론 라벨은 결국 특정 검색어를 미리 지정해서 눈에 잘 띄도록 끄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그 검색어'를 떠올리지 못할 가능성이 늘 상존한다. 혹은 생각하지 않고 있던 검색어가 미리 지정되어 있는 라벨을 클릭하여 정렬된 게시물들을 읽고 이전의 내가 쓴 글이나 스크랩해둔 자료를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블로그에 글을 쓴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축적되고 나면, 바로 그런 기능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태그 기능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주제별로, 혹은 소재별로 세분하여 라벨을 붙이지는 않고, 일종의 '대분류'에 해당하는 항목들만을 추려서 붙인다. 그것은 독자들 뿐 아니라 내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가령, 연말이기 때문에 쉬었지만 다음주부터 재개할 '뉴스 정리'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까지 총 7차례에 걸쳐서 주말마다 그 주의 가장 중요한 뉴스들을 몇 개 꼽아 글로 정리했다. 그런데 '미리 제시된 검색어'로서의 라벨이 없다면, 심지어 나 자신 또한 내가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고, 과거의 내가 남긴 기록으로부터 도움을 얻기도 어려워진다. 지금은 다르다. 바로 이렇게 '뉴스 정리' 라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간 경향신문의 '별별시선'에 기고했던 칼럼들 역시 마찬가지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간단한 것을 나는 지금까지 하지 않았고, 수많은 독자들이 내 블로그에 흥미를 잃었는데, 그 중 가장 흥미를 잃었던 독자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이제는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둘째, 현 시점에서 중요하거나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게시물을 따로 뽑아서 오른쪽 사이드바에 올려놓을 것이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선언까지 하나 모르겠지만 기왕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으니 마저 이야기하자는 취지에서 말을 한다. 그 내용은 당연히 수시로 달라질 것이다. 셋째, 내가 작업한 책들의 링크 역시 사이드바에 접근성 있게 제공할 것이다. 이걸 오늘 다 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빨리 완성된 형태를 갖추어야 하겠다.

지속적으로 원고를 생산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교류하여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자신과 꾸준히 대화를 나누어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올해부터는 블로그에 더 자주 글을 쓰기로 했다고, 블로그에 쓴다.

2016-12-31

독서 목록(2016)

  1. 20160103 - 후지타 야스노리 감수, 우메야시키 미타 그림, 무라카미 유이치 스토리 원안, 유주현 옮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만화로 완전 정복』(경기도 파주: 이콘, 2015)
  2. 20160103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손영미 옮김, 『여권의 옹호』(경기도 고양: 연암서가, 2014)
  3. 20160108 - 김영란,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4. 20160112 - 조너선 패터봄, 이상국 옮김, 『트리니티』(경기도 파주: 서해문집, 2013)
  5. 20160117 - 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사피엔스』(경기도 파주: 김영사, 2015)
  6. 20160119 - 조형근, 김종배, 『섬을 탈출하는 방법』(서울: 반비, 2015)
  7. 20160121 - 문흥호, 주리시, 『한국-타이완 관계사(1949~2012)』(서울: 폴리테이아, 2015)
  8. 20160123 - 페드로 리에라 글, 나초 카사노바 그림, 엄지영 옮김, 『인티사르의 자동차 - 현대 예멘 여성의 초상화』(경기도 파주: 미메시스, 2015)
  9. 20160127 - J. M. 바스콘셀로스, 박동원 옮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경기도 파주: 동녘, 2003), 초판 1982년.
  10. 20160128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최필원 옮김, 『액스』(서울: 그책, 2011)
  11. 20160131 - 윤일구, 『함무라비 법전: 고대법의 기원』(경기도 파주: 한국학술정보, 2015)
  12. 20160201 -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김명남 옮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13. 20160203 - 로브 레이블로, 박성실 옮김, 『동물 쇼의 웃음 쇼 동물의 눈물』(서울: 책공장더불어, 2013)
  14. 20160204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김수정 옮김, 『죽어가는 자의 고독』(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2). 개정판.
  15. 20160206 - 앨버트 허쉬먼, 김승현 옮김, 『열정과 이해관계: 고전적 자본주의 옹호론』(서울: 나남, 1994)
  16. 20160210 - 유광수, 『가족 기담: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2)
  17. 20160212 - 이시윤, 『민사소송법입문』(서울: 박영사, 2016)
  18. 20160215 - 에릭 브린올프슨, 앤드루 맥아피, 이한음 옮김, 『제2의 기계 시대』(서울: 청림출판, 2016)
  19. 20160217 - 월터 아이작슨, 이덕환 옮김, 『아인슈타인: 삶과 우주』(서울: 까치, 2007)
  20. 20160217 - 로버트 F. 케네디, 박수민 옮김, 『13일: 쿠바 미사일 위기 회고록』(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12)
  21. 20160223 - 이종훈, 『사법시험 국제법』(서울: fides, 2015)
  22. 20160223 - 홍중기, 『국제법을 알아야 논쟁할 수 있는 것들』(경기도 파주: 한울, 2013)
  23. 20160302 - 장 폴 사르트르, 박정태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서울: 이학사, 2007)
  24. 20160303 - 하퍼 리, 김욱동 옮김, 『앵무새 죽이기』(서울: 문예출판사, 2002)
  25. 20160313 - 조윤민, 『두 얼굴의 조선사』(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6)
  26. 20160316 - 게르트 기거렌처, 안의정 옮김, 『생각이 직관에 묻다』(서울: 추수밭, 2008)
  27. 20160322 - 마이클 돕스, 김시현 옮김, 『하우스 오브 카드』(경기도 파주: 푸른숲, 2015)
  28. 20160328 - 브뤼노 라튀르,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경기도 일산: 사월의책, 2012)
  29. 20160328 - 계승범,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경기도 일산: 역사의아침, 2011)
  30. 20160329 - 스르자 포포비치, 박찬원 옮김,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6)
  31. 20160403 - 아오야마 모토오, 김정환 옮김, 임옥택 감수, 『자동차 구조교과서』(서울: 보누스, 2015)
  32. 20160407 - 네이트 실버, 이경식 옮김, 『신호와 소음』(서울: 더퀘스트, 2014)
  33. 20160407 - 에리히 프롬, 황문수 옮김, 『사랑의 기술』(서울: 문예출판사, 2006), 제4판
  34. 20160408 - 스탕달, 이규식 옮김, 『적과 흑 1』(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09)
  35. 20160409 - 스탕달, 이규식 옮김, 『적과 흑 2』(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09)
  36. 20160416 - 토마 피케티·이매뉴얼 사에즈, 박나리 옮김, 이정우 감수, 『세금혁명』(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6)
  37. 20160422 - 기무라 히데아키, 정문주 옮김, 『관저의 100시간』(서울: 후마니타스, 2015)
  38. 20160424 - 조엘 바칸, 이창신 옮김, 『기업에 포위된 아이들』(서울: 알에이치케이코리아, 2013)
  39. 20160428 - 라종일, 『장성택의 길』(서울: 알마, 2016) 
  40. 20160501 - 게르트 기거렌처, 강수희 옮김, 『지금 생각이 답이다』(경기도 파주: 추수밭, 2014)
  41. 20160502 - 전인권, 『남자의 탄생』(서울: 휴머니스트, 2003)
  42. 20160508 - 엘프리데 옐리네크, 정민영 옮김, 『욕망』(서울: 문학사상사, 2006)
  43. 20160509 -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44. 20160514 - 피터 템플, 나선숙 옮김, 『브로큰 쇼어』(서울: 영림카디널, 2008)
  45. 20160526 - 손정목, 『손정목이 쓴 한국 근대사 100년』(경기도 파주: 한울, 2015)
  46. 20160530 - 바버라 에런라이크, 최희봉 옮김, 『노동의 배신』(서울: 부키, 2012)
  47. 20160603 - 권혁범,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서울: 또 하나의 문화, 2006)
  48. 20160605 - 에멀린 팽크허스트, 김진아·권승혁 옮김,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서울: 현실문화, 2016)
  49. 20160605 - 하인리히 뵐, 김연수 옮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서울: 민음사, 2008)
  50. 20160605 - 윤보라·임옥희·정희진·시우·루인·나라,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서울: 현실문화, 2015)
  51. 20160606 - 재레드 다이아몬드, 김진준 옮김, 『총, 균, 쇠』(서울: 문학사상사, 1998)
  52. 20160610 - 전희경, 『오빠는 필요없다』(서울: 이매진, 2008)
  53. 20160613 - 레이첼 카슨,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침묵의 봄』(서울: 에코리브르, 2011)
  54. 20160617 - 귀스타브 플로베르, 김화영 옮김, 『마담 보바리』(서울: 민음사, 2000)
  55. 20160619 - 막스 베버, 김덕영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서울: 길, 2010)
  56. 20160621 -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이상임 옮김, 『이기적 유전자』(서울: 을유문화사, 2010), 전면개정판
  57. 20160625 - 토마 마티외, 맹슬기 옮김, 『악어 프로젝트』(서울: 푸른지식, 2016)
  58. 20160626 - 피터 싱어, 김성한 옮김, 『동물 해방』(경기도 고양: 연암서가, 2012)
  59. 20160702 - 정민구·김상태 사진, 노정태·안인용·이진·정현·함영준·현시원 글, 『Cherry Blossom』(서울: 시청각·G&Press, 2016)
  60. 20160703 - Hayao Miyazaki, trans. Eugene H. Saburi, Laputa The Castle in the Sky(Bellevue, WA: Tokuma Shoten Publishing, 1992)
  61. 20160704 - 이범준, 『헌법재판소, 한국 현대사를 말하다』(서울: 궁리, 2009)
  62. 20160709 - 모신 하미드, 안종설 옮김,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경기도 파주: 문학수첩, 2016)
  63. 20160709 - 박성규·오승호, 『뻐근하게 아픈 몸, 참지 말고 셀프 마사지』(서울: 북돋움라이프 X 롤링다이스, 2016)
  64. 20160711 - 정유정, 『종의 기원』(서울: 은행나무, 2016)
  65. 20160711 - 리아드 사투프, 박언주 옮김, 『미래의 아랍인 2』(서울: 휴머니스트, 2016)
  66. 20160714 - 작자 미상, 정창권 옮김, 『박씨전』(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67. 20160801 - 리처드 도킨스, 이용철 옮김, 『눈먼 시계공』(서울: 사이언스북스, 2004)
  68. 20160801 - 강명관, 『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서울: 휴머니스트, 2016)
  69. 20160807 -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서울: 봄알람, 2016). 2판.
  70. 20160807 - 박정희,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서울: 걷는책, 2011)
  71. 20160809 - 앨버트 O. 허시먼, 강명구 옮김,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서울: 나무연필, 2016)
  72. 20160810 - 헨리크 입센, 안미란 옮김, 『인형의 집』(서울: 민음사, 2010)
  73. 20160814 - 오미일,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서울: 푸른역사, 2015)
  74. 20160818 - 박경신, 『진실유포죄』(서울: 다산초당, 2012)
  75. 20160822 - 존 스튜어트 밀, 최명관 옮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서울: 도서출판 창, 2010). 개정판.
  76. 20160823 - 우에노 지즈코, 이선이 옮김,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서울: 현실문화, 2014)
  77. 20160829 - 피에르 부르디외, 김용숙 옮김, 『남성 지배』(서울: 동문선, 2000)
  78. 20160903 - 다카바타케 마사유키, 김보화 옮김, 『궁극의 문구』(경기도 파주: 푸른숲, 2016)
  79. 20160907 -  노나카 이쿠지로 , 스기노오 요시오, 데라모토 요시야, 가마타 신이치, 도베 료이치, 무라이 도모히데, 박철현 옮김, 이승빈 감수,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인천: 주영사, 2009)
  80. 20160907 - 문유석, 『판사유감』(경기도 파주: 21세기북스, 2014)
  81. 20160909 - 로버트 해리스, 조영학 옮김, 『어느 물리학자의 비행』(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14)
  82. 20160912 - 스티븐 킹, 이은선 옮김, 『미스터 메르세데스』(서울: 황금가지, 2015)
  83. 20160913 - 토니 포터, 김영진 옮김, 『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서울: 한빛비즈, 2016)
  84. 20160913 - 오찬호,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서울: 동양북스, 2016)
  85. 20160917 -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송섬별 옮김, 『죽음의 스펙터클』(서울: 반비, 2016)
  86. 20160920 - 막스 베버,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소명으로서의 정치』(서울: 폴리테이아, 2011)
  87. 20160922 - 윤원화,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6). 도미노 총서 2
  88. 20160923 - 박세진, 『패션 vs. 패션』(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6). 도미노 총서 3
  89. 20160923 - 노정태, 『탄탈로스의 신화』(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6). 도미노 총서 1
  90. 20160923 - 대릴 커닝엄, 권예리 옮김, 함병주 해설, 『정신병동 이야기(증보판)』(서울: 이숲, 2014)
  91. 20160925 - 플로르 바쉐르, 권명희 옮김, 『조직된 한패』(경기도 파주: 밝은세상, 2016)
  92. 20160926 - 에르네스트 만델, 이동연 옮김, 『즐거운 살인』(서울: 이후, 2001)
  93. 20160927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옮김, 『문명화과정 I』(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6)
  94. 20160927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옮김, 『문명화과정 II』(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9)
  95. 20160930 - 후루이치 노리토시, 한연 옮김, 『아이는 국가가 키워라』(서울: 민음사, 2016)
  96. 20161001 - 윤세상, 『땅 사서 지을까 집 사서 고칠까』(서울: 한겨레출판, 2016)
  97. 20161002 - 최낙언, 『식품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법』(서울: 예문당, 2016)
  98. 20161005 - 앤드류 포터, 노시내 옮김,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서울: 마티, 2016)
  99. 20161009 - 이민경,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서울: 봄알람, 2016)
  100. 20161010 - 찬호께이, 강초아 옮김, 『13·67』(서울: 한스미디어, 2015)
  101. 20161010 - 린 헌트, 전진성 옮김, 『인권의 발명』(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9)
  102. 20161017 - 고바야시 히데오, 임성모 옮김, 『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서울: 산처럼, 2004)
  103. 20161022 - 윌리엄 그릴, 박중서 옮김, 『커럼포의 왕 로보』(서울: 찰리북, 2016)
  104. 20161026 - 김시덕, 『일본의 대외 전쟁』(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16)
  105. 20161028 - 댄 포인터, 여인혜 옮김, 『나이든 고양이와 살아가기』(경기도 파주: 포레, 2013)
  106. 20161102 - 김시덕,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서울: 메디치, 2015)
  107. 20161104 - 임상혁, 『나는 노비로소이다』(서울: 너머북스, 2010)
  108. 20161108 - 전인권, 정선태, 이승원, 『1898, 문명의 전환』(서울: 이학사, 2011)
  109. 20161116 - 박경신, 『진실유포죄』(서울: 다산북스, 2012)
  110. 20161120 - 아메노모리 호슈, 김시덕 옮김, 『한 경계인의 고독과 중얼거림』(경기도 파주: 태학사, 2012)
  111. 20161123 - 조엘 바칸, 윤태경 옮김, 『기업의 경제학』(서울: 황금사자, 2010)
  112. 20161129 - 조성주,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서울: 후마니타스, 2015)
  113. 20161130 - 마크 라이너스, 이한중 옮김, 『6도의 멸종』(서울: 세종서적, 2014), 개정판
  114. 20161204 - 베네딕트 캐리, 송정화 옮김, 『공부의 비밀』(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6)
  115. 20161206 - 에릭 브린올프슨, 앤드루 맥아피, 이한음 옮김, 『제2의 기계 시대』(서울: 청림출판, 2016)
  116. 20161214 - 스티븐 핑커, 김명남 옮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서울: 사이언스북스, 2014)
  117. 20161228 - 김한민, 『비수기의 전문가들』(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6) 
  118. 20161231 - 홍춘욱, 『환율의 미래』(서울: 에이지21, 2016)
  119. 20161231 - John Patrick Shanley, Doubt, A Parable(New York: Dramatists Play Service, Inc., 2007)

2016년 1월 1일부터 2016년 12월 31일 사이, 표1부터 표4까지 통독한 책들의 모음. 중간중간 뒤적거린 책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총 119권. 2016년은 매우 다사다난했고, 큰 성취를 이루기도 하였으나, 때로 힘겨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을 해내야 했는데, 그 중에는 아직 끝내지 못한 것도 있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롭게 결의를 다져본다.

2016-12-27

[북리뷰] 그래도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6만원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약 470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후, 미국은 큰 병력 손실이 예상되는 일본 본토로의 상륙 작전 대신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전의를 꺾는 쪽을 택한다. 그 후의 역사도, 강대국끼리의 무력 충돌만 없다 뿐이지, 피로 점철되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중국과 미국의 대리전이기도 했던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간중간 벌어진 온갖 끔찍한 테러까지. 우리가 아는 20세기 이후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과 기술, 사회적 관습과 제도가 인류를 가장 효율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며 살해하는 대량살상기계로 둔갑해 인간을 옥죄어온 시대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스티븐 핑커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바로 그와 같은 비관론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미 핑커는 『빈 서판』을 통해 '인간의 본성은 빈 서판과 같으며 올바른 양육, 즉 교육을 통해 모든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진보 진영의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들었던 전례가 있다. 그런 그가 인류 역사 전체를 무대로 삼아 실증주의적 논박의 포문을 열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최악이다'라는 선언적 전제가 왜 문제인가? 그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나태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방부제일 뿐, 당장 우리들 중 그 누구도 100년 전은 고사하고 1970년대로 돌아가 살라고 해도 거부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문제는 이러한 비관주의적 관점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이 너무도 크다는 것이다. 명백히 확인되는 과학적 사실을 거부하고, 인류 역사 진보의 원동력이자 결과물인 근대성을 부정하며, 이성에 의한 인간의 폭력적 욕구 통제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개인주의, 세계주의(cosmopolitanism), 이성(reason), 과학의 힘이 가족, 부족, 전통, 종교를 잠식하는 현상으로 규정되는 근대성(modernity)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이런 변화의 유산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곧 오늘날의 세상을 범죄, 테러, 집단 살해, 전쟁의 악몽으로 보느냐 아니면 역사적 기준으로 보아 유례없이 평화적인 공존과 축복의 시기로 보느냐에 따라, 참으로 많은 문제가 결정된다."(14쪽)

중앙집권적 궁정사회의 출현이 개인에게 에티켓을 강요하면서 그들에게 현대적 도덕을 내재화하고 중세인들을 순치시켰다고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을 통해 주장했다 핑커는 그 거인의 어깨 위에서 '문명화 과정'이 실제로 남의 총이나 칼 혹은 도끼나 망치 등에 맞아 죽은 사람의 숫자를 줄이는 결과를 불러왔음을 숫자와 그래프로 그려낸다. "유럽은 도시화, 세계주의, 상업화, 산업화, 세속화를 겪을수록 점점 더 안전해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현상을 유효하게 설명하는 유일한 이론, 즉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견해를 떠올리게 된다."(137쪽)

특히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를 다른 대형 사건들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대화'하는 등의 작업은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암울하면서 우스꽝스러운 대목을 통과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지금, 아주 묵직하고 두툼한 위안이 된다.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특히 이성의 힘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복받쳐오르기 때문이다.

2016.12.27ㅣ주간경향 1207호

2016-12-18

20161211 - 20161217: 알레포 함락, 새누리당 원내대표 선출, 두테르테의 살인 자백

* 현지시각 12월 15일, 시리아의 거점 도시 알레포에서 반군이 완전히 철수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간접적 지원을 받는 시리아 반군은, 러시아의 직접적 지원을 받는 아사드의 정부군에게 알레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이로써 2011년부터 진행된 시리아 내전은 다시 한 차례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시리아는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정권을 잡은 후, 그 아들인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이어받은 독재국가였다.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인해 대규모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대대적인 유혈 진압이 뒤를 이었으며, 시위 그 자체는 진압되었지만 시리아는 내전의 구렁텅이로 빨려들어갔다. 러시아의 비호를 받는 아사드는 물러나지 않았고, 독가스 살포 등으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무릅쓰면서도, 끝내 버텨냈고 알레포를 수복했다.

이것은 이라크 전쟁 이후 해외에 대규모 육상 병력을 파병할 원동력을 상실한 미국, 영국, 그 외 서방세계의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시리아 내전이 악화되면서 발생한 대규모의 난민이 유럽의 극우주의를 부추겼고 그러한 국제적 기류 속에서 미국 대선이 치러졌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리버럴'의 정치적 패배였다. 오바마 행정부가 빚어낸 최악의 실패다.


* 12월 16일,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정우택 의원이 선출됐다. 충북 청주상당을 지역구로 하는 4선 의원인 정우택은, 김종필 전 총리에게 발탁되어 자유민주연합에서 정치 이력을 시작한 충청도 정치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2012년 이후 친박으로 분류되는 여당 의원이라는 사실이다.

새누리당 소속 의원 119명이 참석한 의원총회에서 친박계 후보인 정우택은 62표, 비박계를 대표해 나온 나경원은 55표를 얻었고 2표는 기권이었다. 과반을 넘긴 탓에 재투표 없이 곧장 원내대표가 결정되었다. 새로운 친박 원내지도부가 구성되자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그 외의 여당 지도부와 함께 곧장 사퇴 의사를 밝힘으로써, 새로 선출된 원내지도부에 힘을 실어주는 행보를 보였다.

탄핵안 가결 이후 민주당의 지지율은 국민의 정부 이후 최초로 40%대에 진입하는 고공행진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여당인 새누리당은 친박계가 굉장히 단단한 결집력을 과시하면서 비박계의 탈당이 예측된다. 3당 합당 이후 어색한 동거를 이어가던 TK와 PK의 분화가 본격화될 조짐이다. '우리가 남이가'의 시대가 비로소 끝난 것인가? 참고로 정우택을 찍은 62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에 반대한 56표, 무효표를 낸 7표를 더한 숫자인 63표와 거의 비슷하다.


* 12월 12일,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대통령궁에서 사업가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다바오시에서 마약 용의자들을 개인적으로 살해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12월 14일 현지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에 대해 조시 어니스트 미 백악관 대변인은 '매우 우려된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 외에 달리 어떤 반응을 보일 수가 없는 것이, 이미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전통의 우방인 필리핀에 북한 전문가인 성김 전 대북특별대표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한편 비탈리아노 아기레 필리핀 법무장관은 두테르테의 발언을 "자신의 메시지를 이해시키"기 위한 과장법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화법과, 그에 대한 미국 보수 진영의 합리화를 당연히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테르테는 이미 "시장 재직 초기에 중국인 소녀를 유괴, 성폭행한 남성 3명을 직접 총살한 적이 있다고 지난 대선 때 인정"한 바 있기에, 이러한 살인 고백을 그저 '블러핑'으로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대통령이 사람을 죽였다고 떠벌여도 탄핵당하지 않는 나라가, 비행기로 4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별별시선]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한 장면을 펼쳐보자. 백정인 꺽정이는 양반인 덕순이와 죽이 좀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서로 존대와 하대를 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일 임꺽정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존대와 하대에 대해 논쟁이 오가던 중, 머리 깎고 병해대사가 된 갖바치 선생이 꺽정이의 성정을 좀 다스려 보려 한다. “우리말에 층하가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겠지. 그렇지만 어른 아이는 고사하고 양반이니 상사람이니 차별이 있는 바에야 말이 자연 그렇게 될 것 아닌가.”

계급 차별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꺽정이의 반론에 대해 병해대사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응수한다. “벌써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에 차별이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임꺽정이 아니다. “못쓸 차별을 없애려면 영을 내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설령 영을 내린다 한들 그 차별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겠는가? 그러자 결국 임꺽정은 본인의 명성에 걸맞은 대답을 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면 될 것 아니오.” 병해대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대화는 마무리된다.

이 대화에서 임꺽정과 병해대사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없다. 그게 바로 민주공화국의 본질이다.

우리 대한국민은 모두 같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 차별적 특권 계급의 존재는 용인되지 않고, 모든 이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누리며 동시에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할 의무를 진다. 그리고 그 법은 국민의 대표 기관인 입법부에서 만들고, 행정부에서 실행에 옮기며, 사법부를 통해 갈등을 법적으로 해결하도록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은 결국 동일하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결합된 법치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박근혜 게이트는 왜 문제인가?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믿음을 뒤흔들었다는 점이 가장 심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가정을 깨뜨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 사건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 박근혜의 뒤에 ‘선출될 생각도 없었던 권력’인 최순실 일당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설령 최순실이 ‘착한 비선 실세’였다고 해도 사안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국민은 박근혜를 뽑았지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순실이 기밀로 취급되는 대통령 연설을 주무르고, 온갖 인사에 개입한 것은, 그 자체가 민주공화국의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는 법의 지배를 ‘당하는’,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복종’하는 임꺽정 같은 신분사회의 피지배계층이 아니다. 우리는 울화가 터진 꺽정이처럼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는 식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헌법, 법률, 조례, 규칙 등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움직이고, 필요하다면 유권자를 대의하는 기관인 의회에서 법규를 바꾸거나 새로 만든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아니라 ‘비선 실세’의 뜻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으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그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은 그러므로 혁명이 아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본 원리가 온전히 작동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민란’이나 ‘혁명’보다 급진적인 사건이다. 드디어 우리는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입력 : 2016.12.18 20:37:01 수정 : 2016.12.18 20:4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