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6

[시사철] K방역, 부동산.. 한국은 지금 '문재인 쇼' 절찬 방영 중

 

K방역, 부동산.. 한국은 지금 '문재인 쇼' 절찬 방영 중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 12. 26. 03:10 수정 2020. 12. 27. 10:45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데카르트와 트루먼쇼
일러스트=안병현

보험 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는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시 헤이븐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소 공포증과 물 공포증이 함께 있어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게 아쉽다.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한 이웃을 만날 때마다 하루 인사를 한꺼번에 건넨다.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잇.’

언제부턴가 트루먼의 일상이 삐걱거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무대 조명이 떨어지지 않나, 자기 머리 위에서만 비가 쏟아지지 않나, 심지어 어린 시절 보트 사고로 죽은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노숙자를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 노숙자를 버스에 태워서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나. 트루먼은 점점 의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진짜’일까?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아실 그 이야기, ‘트루먼 쇼’의 설정이다. 트루먼의 인생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쭉 그랬다. 사상 최대의 리얼리티 쇼이면서 PPL인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지만,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른다. 평생을 보고 듣고 접해온 모든 것이 가짜인 셈이다.

‘트루먼 쇼’는 1998년 개봉 당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보면 어떤 부분은 시대에 뒤처져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기 일상을 생중계하는 ‘자발적 트루먼’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몇 주제 의식은 여전히 빛난다. 자기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트루먼의 모습은 서양철학의 근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코기토 명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어떤 전능한 악마가 나를 속이기 위해 내가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을 악마 뜻대로 조종한다고 해보자. 영화 속 ‘트루먼 쇼’의 연출자 크리스토프처럼 모든 경험과 인간관계를 조작하는 차원을 넘어, 상식과 감각조차 뒤바꾸는 것이다. 불을 만져도 뜨겁지 않고 물을 마셔도 시원하지 않고, 빨간색이 파랗게 보이고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1+1=2가 아니라 3이 정답이라면?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나의 모든 인식이 잘못되었다 해도, 인식하고 있는, 즉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다. 악마가 나를 아무리 철저히 속인다 해도, 속이는 대상인 내가 ‘있어야’ 속일 수 있다. ‘트루먼 쇼’의 모든 것이 가짜여도 트루먼만은 ‘진짜’여야 ‘트루먼 쇼’가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데카르트 저서 ‘성찰’의 한 대목.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 악마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참일 수밖에 없는 절대 진리를 찾아내, 선언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시는 인류의 지적 역량이 다방면으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모든 지식과 도덕적 판단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 신학은 더 이상 ‘제1 학문’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할 철학이 과연 보편적 합리성을 보증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반드시 옳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밝혀낸 후, 그 위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괄한 모든 학문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마치 트루먼이 ‘트루먼 쇼’의 세트장 밖으로 나간 것과 같다. 인류는 종교와 관습이 아닌 이성의 힘으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하는 법.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트루먼 쇼’가 절찬리 방영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가장 가까운 예부터 들어보자. 지난 11일, 문 대통령이 경기 화성시 LH 동탄 공공 임대주택을 방문했다. 그는 44m²(옛 13평형)와 신혼부부용 41m²(12평형)를 둘러본 뒤 “공간 배치가 아늑하고 아주 아기자기하다” “신혼부부에 아이 한 명은 표준이고 어린아이 같은 경우는 두 명도 가능하겠다” “굳이 자기 집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임대주택이 충분히 좋은 주택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등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흡족해했다.

LH 측이 야당 요청으로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그 두 채는 ‘세트장’이었다. 3300만원을 들여 가구를 구입한 후 공임비 650만원과 부가세까지 포함해 총 4290만원을 들인 초호화 세트장이었다. 보증금 6000만원에 월세 20만원 수준인 임대주택에 보증금과 맞먹는 비용을 들여 만든 일종의 ‘가상현실’이었던 것이다.

어디 부동산 정책뿐일까.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역시 돌이켜보면 일종의 ‘트루먼 쇼’였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평양에서 냉면을 먹고,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 ‘쇼’를 열심히 하면 평화가 올 것처럼 바람을 잡았다. 현실은 정반대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향이 없다. 북측 해역으로 흘러 들어간 우리 국민에게 총을 난사하고 시신에 불을 붙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K방역’이라는 ‘문재인 쇼’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 영국, 심지어 일본도 확보한 백신이 한국에만 없다. 겨울과 함께 하루 감염자가 1000명이 넘는 대유행이 시작되었는데 병상 확보조차 제대로 안 되어 전전긍긍이다. 비교적 감염자가 많지 않았던 지난여름과 가을 정부는 대체 무엇을 했던가? ‘덕분에 캠페인’을 벌이며 도리어 의사들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문재인 쇼’의 청구서는 결국 국민이 감당할 몫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트루먼 쇼’가 계속된 것은 시청률 때문이었다. 시청자가 있으니 쇼가 계속되었고, 트루먼은 섬에 갇힌 노예나 구경거리로 살아갔던 것이다. ‘문재인 쇼’도 마찬가지다. ‘우리 이니’가 화면에 멋지게 등장하면 그만이라는 40%의 고정 시청자들이 리모컨을 꽉 쥔 채, 대한민국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로 몰아가고 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얻은 결론이다. 그 성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다. 권력은 온갖 ‘쇼’로 국민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참 길고 힘겨웠던 한 해의 끝. 더 많은 국민이 스스로 생각하며, 주권자로서 존재하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K방역, 부동산… 한국은 지금 ‘문재인 쇼' 절찬 방영 중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데카르트와 트루먼쇼
일러스트=안병현
보험 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는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시 헤이븐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소 공포증과 물 공포증이 함께 있어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게 아쉽다.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한 이웃을 만날 때마다 하루 인사를 한꺼번에 건넨다.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잇.’

언제부턴가 트루먼의 일상이 삐걱거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무대 조명이 떨어지지 않나, 자기 머리 위에서만 비가 쏟아지지 않나, 심지어 어린 시절 보트 사고로 죽은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노숙자를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 노숙자를 버스에 태워서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나. 트루먼은 점점 의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진짜’일까?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아실 그 이야기, ‘트루먼 쇼’의 설정이다. 트루먼의 인생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쭉 그랬다. 사상 최대의 리얼리티 쇼이면서 PPL인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지만,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른다. 평생을 보고 듣고 접해온 모든 것이 가짜인 셈이다.

‘트루먼 쇼’는 1998년 개봉 당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보면 어떤 부분은 시대에 뒤처져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기 일상을 생중계하는 ‘자발적 트루먼’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몇 주제 의식은 여전히 빛난다. 자기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트루먼의 모습은 서양철학의 근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코기토 명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어떤 전능한 악마가 나를 속이기 위해 내가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을 악마 뜻대로 조종한다고 해보자. 영화 속 ‘트루먼 쇼’의 연출자 크리스토프처럼 모든 경험과 인간관계를 조작하는 차원을 넘어, 상식과 감각조차 뒤바꾸는 것이다. 불을 만져도 뜨겁지 않고 물을 마셔도 시원하지 않고, 빨간색이 파랗게 보이고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1+1=2가 아니라 3이 정답이라면?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나의 모든 인식이 잘못되었다 해도, 인식하고 있는, 즉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다. 악마가 나를 아무리 철저히 속인다 해도, 속이는 대상인 내가 ‘있어야’ 속일 수 있다. ‘트루먼 쇼’의 모든 것이 가짜여도 트루먼만은 ‘진짜’여야 ‘트루먼 쇼’가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데카르트 저서 ‘성찰’의 한 대목.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 악마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참일 수밖에 없는 절대 진리를 찾아내, 선언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시는 인류의 지적 역량이 다방면으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모든 지식과 도덕적 판단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 신학은 더 이상 ‘제1 학문’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할 철학이 과연 보편적 합리성을 보증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반드시 옳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밝혀낸 후, 그 위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괄한 모든 학문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마치 트루먼이 ‘트루먼 쇼’의 세트장 밖으로 나간 것과 같다. 인류는 종교와 관습이 아닌 이성의 힘으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하는 법.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트루먼 쇼’가 절찬리 방영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가장 가까운 예부터 들어보자. 지난 11일, 문 대통령이 경기 화성시 LH 동탄 공공 임대주택을 방문했다. 그는 44m²(옛 13평형)와 신혼부부용 41m²(12평형)를 둘러본 뒤 “공간 배치가 아늑하고 아주 아기자기하다” “신혼부부에 아이 한 명은 표준이고 어린아이 같은 경우는 두 명도 가능하겠다” “굳이 자기 집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임대주택이 충분히 좋은 주택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등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흡족해했다.

LH 측이 야당 요청으로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그 두 채는 ‘세트장’이었다. 3300만원을 들여 가구를 구입한 후 공임비 650만원과 부가세까지 포함해 총 4290만원을 들인 초호화 세트장이었다. 보증금 6000만원에 월세 20만원 수준인 임대주택에 보증금과 맞먹는 비용을 들여 만든 일종의 ‘가상현실’이었던 것이다.

어디 부동산 정책뿐일까.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역시 돌이켜보면 일종의 ‘트루먼 쇼’였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평양에서 냉면을 먹고,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 ‘쇼’를 열심히 하면 평화가 올 것처럼 바람을 잡았다. 현실은 정반대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향이 없다. 북측 해역으로 흘러 들어간 우리 국민에게 총을 난사하고 시신에 불을 붙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K방역’이라는 ‘문재인 쇼’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 영국, 심지어 일본도 확보한 백신이 한국에만 없다. 겨울과 함께 하루 감염자가 1000명이 넘는 대유행이 시작되었는데 병상 확보조차 제대로 안 되어 전전긍긍이다. 비교적 감염자가 많지 않았던 지난여름과 가을 정부는 대체 무엇을 했던가? ‘덕분에 캠페인’을 벌이며 도리어 의사들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문재인 쇼’의 청구서는 결국 국민이 감당할 몫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트루먼 쇼’가 계속된 것은 시청률 때문이었다. 시청자가 있으니 쇼가 계속되었고, 트루먼은 섬에 갇힌 노예나 구경거리로 살아갔던 것이다. ‘문재인 쇼’도 마찬가지다. ‘우리 이니’가 화면에 멋지게 등장하면 그만이라는 40%의 고정 시청자들이 리모컨을 꽉 쥔 채, 대한민국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로 몰아가고 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얻은 결론이다. 그 성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다. 권력은 온갖 ‘쇼’로 국민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참 길고 힘겨웠던 한 해의 끝. 더 많은 국민이 스스로 생각하며, 주권자로서 존재하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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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5

[신동아 좌담 下] "문재인은 반동적, 노무현은 역동적"

 

"문재인은 반동적, 노무현은 역동적"

고재석 기자 입력 2020. 12. 15. 10:01
['한때 좌파' 4人의 쾌도난마②] 문재인 시대㊦

●“황우석 편들던 유시민·김어준, 지금도 어용”(나연준)
●“좌파, 盧를 보수정치 희생양으로만 삼아”(노정태)
●“진보 교수들, 혁명 논하다 뒷날엔 부동산 구입”(민경우)
●“진중권 안 좋아했는데 ‘진짜배기’더라”(봉달호)
●“韓보수, 보편적으로 갖는 정서는 불안감”(나연준)
●“국민의힘, 당사에 김대중·노무현 사진 걸어야”(노정태)
●“검찰 문턱도 안 가본 사람들이 검찰 악마화”(민경우)
●“‘기승전 反共’이 ‘기승전 검찰개혁’으로”(봉달호)

‘한때 좌파’ 네 사람이 12월 7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 모였다. 왼쪽부터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 봉달호 편의점주. [박해윤 기자]
나라가 분열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간에 이렇게 살벌한 대치선이 있었던가. 여야는 독재, 횡포, 독선 따위의 단어를 주고받고 있다. 어제의 '민주 투사'들이 국정을 책임지고 있으나 세상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통합 대통령이 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던 문재인 대통령의 일성은 풍등처럼 어디로 날아가 버렸나. 

난세에는 이해관계를 초월한 진단서가 필요하다. 현재 권력과 불화(不和)하되 과거 권력, 그러니까 전통적 보수진영의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들을 물색했다.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에서 97세대(90년대 학번·70년대 출생), 밀레니얼 세대(1980년 이후 출생) 등 세대도 안배했다. 네 사람의 이력부터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은 1965년생이다.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지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NL(민족해방) 계열 핵심 이론가였다. 

봉달호 편의점주는 1974년생이다. 92학번이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해 구력은 길다. 주체사상을 공부했으나 후에는 비(非)NL 계열로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은 1981년생이다. 한국 근현대사 정치사상사를 전공하는 역사학도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는 1983년생이다. 딴지일보 온라인 에디터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을 지냈다. 1980년대생을 대표하는 진보 논객으로 불렸다. 

‘신동아'는 12월 7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으로 네 사람을 초청했다. 서로의 글은 즐겨 읽지만 이날 처음 보는 사이도 있다고 했다.

"지금은 노무현 100% 인정"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은 “지금은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100% 인정한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요새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비교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투쟁 선봉에 선 민경우 소장은 두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민경우 | 노무현과 문재인은 매우 달라요. 저희 때는 노무현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광적으로 좋아한다기보다는 예의 바르게 좋아했다고 해야 할까. 

기자 | 좋아하더라도 남에게 '너 왜 노무현 안 좋아해?' 하며 윽박지르지는 않는다? 

민경우 | 그렇죠.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사상적 공백 상황이었어요. 그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등장해 민족문제 대신 참여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사회를 굉장히 역동적으로 끌고 갔어요. 2000년대가 되면 미·중 양강 체제로 국제질서가 재편됩니다. 노 전 대통령이 한미 FTA를 추진했는데, 변화하는 국제질서를 고려한 문제의식이었거든요. 나는 이라크 파병에 반대했고, 한미 FTA 반대 범국민운동본부에서 정책팀장을 했지만 지금은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100% 인정합니다. 훌륭한 대통령이에요. 

2010년대 미·중 양강 체제가 더 심화했습니다. 한국의 다음 과제가 무엇일지 고민할 시기에 유시민 같은 사람이 사회 분위기를 과거사, 적폐청산 등으로 몰고 갔어요. 이 사람들이 주축이 돼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고요. 노무현 정부는 냉전 이후 한국을 젊고 역동적으로 이끌면서 좌파 신자유주의 같은 논쟁도 벌였다면 문재인 정부는 시대를 완전히 거꾸로 몰고 갔어요. 

노정태 |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직접 댓글을 단 적이 있어요. 체통도 그렇거니와 너무 노골적으로 정치편향 행위 아니냐고 막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죠. 돌이켜보면 진짜 '인터넷 대통령'이었던 거예요.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에게 완전히 사라진 존재가 됐습니다. 휴가를 썼다고 하는데, 휴가를 쓴 것과 안 쓴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반면 노 전 대통령은 굉장히 거칠고 투박했지만 굵직굵직한 움직임을 보여줬단 말이에요.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에 참여함으로써 한국이 얻은 건 무엇이고 잃은 건 무엇인지 논하면서 노무현 시대를 이해해야 하는데, 노무현의 상징자산을 통째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회피하죠. 우파는 노무현을 입에 담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 얘기하지 않고, 좌파는 노무현을 보수정치의 희생양으로만 만들고 싶어 하니 얘기하지 않아요. 

봉달호 | 인간 노무현은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면 지지자들이 또 화를 내겠지만, 이분이 대체 조직에 대한 관념이 있는 분이었나 싶어요. 본인은 개인이 아니라 조직을 추스르는 사람이거든요.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치욕적이라고 느꼈을 테지만 혼자 운명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죠. 거기서부터 우리나라 정치가 참 많이 뒤틀렸어요. 복수의 정치가 생겨났고, 폐족을 자처한 사람들이 그 죽음으로 다시 일어섰고요. 

기자 | 진보 지식인 이야기를 해보죠. 먼저 논객이 떠오르는데요. 진중권, 강준만, 유시민, 김어준 씨가 대표적이죠. 하지만 문재인 정권 들어 이 중 일부가 어용화(御用化)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논객시대' 저자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노정태 | 진보 논객들이 발전담론, 성장담론을 죄악시하거나 설계하지 못하니 퇴행적으로 복수나 과거사에만 집착하는 겁니다. 10년 전부터 감을 잡은 게 있어요. '안티조선운동'은 박세길이 쓴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마지막 챕터에 조선일보를 끼워 넣고 '이것은 친일의 잔재'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이었다는 걸요. 진보 논객이란 사람들이 운동권 시절부터 배워서 익힌 '내러티브'를 새로운 적을 찾아 끼워 넣는 방식으로 계속 활용한 거죠.

황우석 사태라는 試金石

나연준 | '황우석 사태' 때 황우석 씨 편을 들던 사람들은 지금도 어용화돼 있어요. 유시민, 김어준 씨 같은 사람이요. 

노정태 | 굉장히 중요한 시금석이죠. 

나연준 | 반면 황씨를 비판한 진중권 전 교수는 여전히 비판적 지식인의 입지를 갖고 있고요. 같은 진영처럼 보이던 논객들이 86세대가 권력을 차지하면서 갈린 겁니다. 한쪽은 권력을 결사옹위 대상으로 삼고, 다른 한쪽은 20년 전과 똑같이 비판적 지식인으로 남았죠. 

봉달호 | 무슨 '주의자'가 되려면 일관돼야 하잖아요. 밖에서는 굉장한 페미니스트로 자처하는데 집에서 부인이나 딸을 막 대하는 사람은 가짜 페미니스트죠. 마찬가지로 정권이 바뀌어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그 사람은 '주의자'죠. 사실 진중권 씨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최근 활동을 보면서 '와 멋지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사람은 박근혜 정권에 들이댄 잣대를 문재인 정권에 똑같이 들이대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배기죠(그의 '어용화 진단'이 이번에는 권부를 향해 달려갔다). 현 정권에 속한 사람들 눈에는 권력을 잡았을 때 얻는 떡고물이 너무 잘 보이는 거죠. 권력을 빼앗겼을 때 배고팠던 경험도 있고요. (민주당이) 지방권력을 잡으니까 당 조직이 튼튼하게 강화돼 움직이고 있다고 해요. 결국 조직력은 돈에서 나오거든요. 어용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여담인데, 노무현 정부 때 아는 선배가 청와대에 들어갔어요. 어느 상가에서 만났더니 '청와대에 연못이 있는데 거기를 돌려면 몇 분이 걸리고' 이런 얘기를 해요. '이 사람들이 뭔가를 알아가는구나'라고 느꼈어요. 천박한 권력의 맛이죠.

‘거지끼리 자루 찢는 격'

봉달호 편의점주는 “현 정권이 ‘기승전 반공’을 ‘기승전 검찰개혁’으로 바꿔버렸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이 대목에서 기자는 화제를 진보 성향 대학교수로 돌려봤다. 교수들과 협업할 기회가 많던 민 소장에게 먼저 물었다. 

기자 | 민 소장은 이른바 진보 교수들을 두고 "말만 과격하고 운동은 치열하게 하지도 않았다"고 꼬집은 적이 있죠. 

민경우 | 진보 교수들은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자예요. 노무현 정부 때 한미 FTA 반대 운동하면서 교수들과 같이 활동했어요. 이분들은 굉장히 사변적이고 관념적이죠. 허황된 주장을 많이 하는데, 그 산물이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열풍입니다.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 나라에 있나 싶을 정도로 과격한 얘기를 많이 해요. 나는 부동산 갖지 않고 평생 운동하겠다고 생각했어요. 혁명 얘기하다가 그 뒷날 부동산 사는 일은 안 했어요. 그런데 진보 교수들은 버젓이 부동산으로 돈을 벌더라고요. 황당했어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고 그 사람들이 청문회에 나오는 걸 보는데 하나씩 퍼즐이 맞춰졌어요. 한미 FTA 싸움은 전부 농민들이 한 거예요. 농민 2만 명이 지방에서 트랙터 몰고 서울에 와서 집회했어요. 그러려면 돈도 많이 들어요. 그런데 교수들은 코빼기도 안 보여. 나는 농민들과 집회를 주도하다가 뒷날엔 교수들하고 토론한 뒤 근사한 술집 가서 술 마셨어요. 

나연준 | 제 전공이 역사학인데, 역사학과는 1년에 한 번씩 역사학 대회를 엽니다. 2014년 제57회 역사학 대회의 주제가 국가권력과 역사 서술이었어요. 역사학 교수들이 모여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를 비판하는 학술 프로젝트를 했습니다. 지금 문재인 정부 들어 역사와 관련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게 '5·18 역사 왜곡 처벌법안'인데, 이걸 비판하는 역사학 교수들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정말 당파적이에요. 이 세대가 대체로 86세대예요. 지식인이 아니고 그냥 직업이 교수인 사람들이죠. 

기자 | '우리 진영'에 맞는 지식인만 찾고, 만약 진영의 이해관계에 해가 되는 말을 하면 속된 말로 '좌표'가 찍히죠. 

노정태 | 그러니 분위기를 봐서 얘기하는 게 요새 트렌드죠. 방송 같은 공식 채널에서 배제된 보수 유튜버들은 '거지끼리 자루 찢는 격'으로 자기네끼리 욕하고 저격하잖아요. (일동 웃음) 그래야 후원금이 더 들어오니까요.

보수의 헛발질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은 “한국 보수가 보편적으로 갖는 정서는 불안감”이라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최근 전국 단위 선거에서 보수정당이 4연패했습니다. 왜 보수가 약체가 됐을까요. 

노정태 | IMF 위기를 기점으로 발전·성장·군사 담론이 완전히 확 무너졌어요. 보수가 이를 되살릴 기회는 놓치고 '노무현 팬덤 정치'가 이기니 박근혜라는 새로운 아이콘을 데려와 팬덤 정치로 맞섰어요. 담론을 경신하지 않았던 겁니다. 

나연준 | 저희 세대는 유시민, 강준만, 진중권 등 이른바 논객들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반면 사회운동이나 정치에 관심 없는 친구들은 자기계발서를 읽었고요. 저는 자기계발서의 존재야말로 우파 담론이 실패한 증거라고 봐요. 좌파는 어쨌든 자기 담론을 생산했는데, 우파는 국가 발전 담론을 대중화하는 데 실패한 겁니다. 자기계발서에는 국가 담론이 없어요. 모든 문제를 개인화해 버려요. 각자도생이란 말이에요. 자기계발서를 보던 친구들이 나중에는 삶이 힘드니까 복지 담론에 가장 취약해져요.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직을 던지고 나오면서부터 우파가 패배했다고 하는데, 그건 패배의 결과였어요. 복지 담론에서 밀렸고 대안 담론이 없으니까 무릎 꿇고 읍소하다가 던지고 나와버린 거거든요. 아직도 우파 지식인들이 베스트셀러를 못 내놓잖아요. 

봉달호 | 보수가 대안 담론을 제시해야 하는데, 자꾸 부정선거 주장하고 이젠 미국 대선까지 부정선거라고 하고 있어요. 어처구니가 없는데…. 

노정태 | 대체 한국 사람들이 미국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뭔지…. 

봉달호 | 문제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보수진영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보수에 새로운 대안이 나오지 않고서는 이런 문제가 풀리지 않을 거예요. 보수진영 사람들을 만나 기본소득 이야기를 꺼내면 그냥 무조건 싫다고 해요. 미래 사회가 어떻게 변모할지에 대해 대화 자체를 안 하려고 해요. 소위 진보에 대한 안티테제로만 존재할 뿐이지, 정권을 잡으면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이냐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어요. 여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작은 정부나 감세론을 얘기해요. 그러면 그냥 계속 태극기 흔드는 사람일 뿐이죠. 

나연준 | 한국 보수가 보편적으로 갖는 정서는 불안감이에요. 선거에서 계속 졌고 다음 선거에서도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는 겁니다. 불안함이 커질 때 증상이 여럿 있잖아요. 그중 하나가 음모론에 빠지는 겁니다. 또 보수에 감별사가 너무 많아요. 너는 진짜 보수고 너는 가짜 보수라면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감별해요. 

노정태 | 그게 진보가 패배할 때 했던 행동이에요. 

나연준 | 맞아요. 1980년대 운동권들이 누가 레닌에 가까운지 경쟁한 것과 비슷해요. 불안하기 때문에 내부에서 인정투쟁이 심해지죠. 1980년대 운동권들에게 레닌이 하던 역할을 지금 우파에서 하는 인물이 이승만, 박정희예요. 이승만, 박정희 모두 훌륭한 인물이죠. 그런데 지금 한국 보수는 이승만, 박정희를 영웅주의 서사 속에서 보고 있어요. '이 사람들 없으면 우리는 망했고, 깡통 찼을 거고, 배곯고 있고….' 이승만과 박정희는 당시 시대 과제를 해결한 사람들이에요. 지금 한국 보수는 훈고학적이에요. 옛날얘기만 하면서 이승만, 박정희처럼 시대 과제를 내세우는 일은 하나도 못 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너 김영삼 좋아해? 그러면 가짜 우파야' 이러고 있어요. 

기자 | 보수도 사림 논쟁 중이군요. 그럼 무엇을 해야 합니까. 

노정태 |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사과하는 것보다 보수에 더 중요한 건 김대중·노무현 두 사람을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거예요. 지금 국민의힘이 해야 할 건 당사에서 이승만·박정희의 사진을 떼는 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의 사진을 거는 겁니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모든 대통령을 모두 인정하고 국가 전체를 끌어안는 세력이라는 점을 보여줘야 해요. 김대중·노무현은 뭘 해도 안 되고 용납 못 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중도를 포용할 수 없어요. 

주사파였던 민 소장이 이즈음 간략히 '보수 혁신론'을 폈다. 

민경우 | 나는 보수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생활형 보수운동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의사파업이나 탈원전, 최저임금 문제 등 먹고 사는 문제를 다루는 생활형 보수와 몽상가 운동권 정권으로 대치선을 치면 어떨까 해요. 이념형 보수로는 답이 없어요. 나는 보수 유튜브 채널을 보면 정말 기겁하겠더라고요.

검찰개혁의 민낯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는 “여야 모두 검찰의 불기소 처분 권한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문재인 정부 들어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어가 '검찰개혁'인데요. 이른바 '추-윤' 정국을 어떻게 봤나요. 

민경우 | 먼저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1999년 30일, 2004년 30일 간 검찰 조사를 직접 받았어요. 

기자 | 당시 구속됐죠. 

민경우 | 네. 검찰을 마치 거대 악처럼 생각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거대악은커녕 늘 보는 아저씨들이에요. 

봉달호 | 직장인이죠.(웃음) 

민경우 | 검찰 수사의 전 과정을 관통하는 건 '팩트(fact)'예요. 나는 검찰에서 맞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검찰에 간 첫날 혀 깨무는 연습부터 했다니까요. 하지만 그냥 팩트에 기초해 드라이하게 수사했어요. 1980년대 운동권이 보기에 그 정도면 사랑스러운 검찰이죠.(웃음) 그런데 지난해부터 주변에서 '너 검찰이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 알아?' 이렇게 말해요. 그럼 '나 검찰 조사 60일 받아봤어. 넌 무슨 조사 받았는데'라고 되묻죠. 당연히 받아본 일이 없겠죠. 검찰 문턱에도 안 가본 친구들이 검찰을 악마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한국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화되고 현대화됐어요. 검찰에 다소간 흠결은 있겠으나 검찰개혁이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인 시대는 한참 전에 지나갔고요. 

봉달호 | 지금 검찰이 절대로 기소권·수사권 못 내놓겠다고 하는 상황이 아니에요. 검찰 전체가 나서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를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요. 여권이 자신들에 대한 수사가 들어오니 검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검찰을 '조지고' 있단 말이죠. 어처구니가 없어요. '기승전 반공'을 '기승전 검찰개혁'으로 바꿔버린 셈인데, 과거 자신들이 당했던 걸 그대로 이용하는 겁니다. 

노정태 | 1987년 민주화는 검찰이 군부를 이긴 결과예요. 군부독재의 하수인인 경찰이 사람을 죽였는데 검찰이 다시 조사했잖아요. 자칭 민주화 세력은 검찰이 축소수사를 했다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검찰이 나서지 않았으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하고 넘어갔을 사안을 검찰이 들고일어나 조사한 겁니다. 민주주의와 민중주의를 자꾸 혼동하는데요. 민주화는 민중의 힘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엘리트 내부의 균열로 이뤄졌습니다. 엘리트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 중 하나는 자존심 강하고 사실과 법을 존중하는 훈련이 돼 있는 검찰이었어요. 검찰을 새로운 악으로 부추기는 건 탈역사적 행위이자 거짓말에 입각한 세계관입니다. 

나연준 | 사실 일반인이 웬만큼 잘못하지 않으면 검찰한테 조사받을 일은 없거든요. 

기자 | 민경우 소장은 많이 잘못했나 봐요.(웃음) 

노정태 |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는 게 일종의 신분 증명이잖아요.(웃음) 

나연준 | 검찰개혁을 이렇게 의도적으로 띄우는 이유는 86세대가 검찰에 불려 갈 만한 행동을 차곡차곡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여요. 검찰개혁이 마치 전 국민에게 급박한 담론인 것처럼 얘기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이라는 상징이 동원된 거죠. 또 다른 형태의 '노무현 장사'입니다. 검찰개혁은 아무 의미 없는, 그냥 주문이에요 주문. 우리 편 모으는 깃발이죠.

‘국민의 영웅'과 '악당' 사이

이 대목에서 화살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향했다. 

노정태 | 한국 검찰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검찰이 사건을 덮을 수 있다는 겁니다. 즉 불기소처분이 가능한 건데, 독일 검찰도 수사권은 있어요. 다만 기소를 안 할 권리가 없어요. 그러면 무조건 법정에 가니까 사건이 드러나요. 미국에서는 검찰에 수사권이 없는 대신 FBI나 지방경찰 등 경찰 조직이 여럿 있어요. 사건이 올라오는 걸 검사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어쨌든 또 법정으로 갑니다. 즉 검찰의 권력을 빼는 방법은 검찰이 사건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정작 불기소 처분에 대한 얘기를 아무도 안 해요. 국민의힘에서도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면 현재 검찰 제도를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별 얘기 안 하고요. 

봉달호 | 검찰을 키운 건 정치인들이에요. 대화로 풀 수 있는데도 서로 고소·고발하잖아요. 정치가 실종됐죠.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정말 검찰개혁 하려고 했다면 1년차에 했어야죠. 써먹을 땐 '국민의 영웅'이라더니 4년차가 되니 검찰을 '악당'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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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4

[신동아] 文 탈원전 밀어붙일 때, 바이든 "원자력 규제→투자"

 

文 탈원전 밀어붙일 때, 바이든 "원자력 규제→투자"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 12. 14.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⑬] 이상주의자도 국정운영 나서면 국익 따져

●바이든, 1980~1990년대 원자력 규제 주창
●지난 대선에서 ‘차세대 원자력 개발’ 공약
●기후변화·셰일 혁명으로 美 민주당 정책 변화
●‘反원자력’ 존 케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논란보다 중요한 것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11월 9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게시판. 녹색원자력학생연대가 월성 1호기 조기폐쇄 의혹에 관해 정부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게시했다. [뉴스1]
1994년 미국 델라웨어 강 하류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긴급 정지했다. 관리 실수로 인한 비상 정지였다. 발전소가 자리 잡은 곳은 행정구역상 뉴저지 주. 하지만 델라웨어 주가 바로 인접해 있었다. 

델라웨어 주의 젊은 상원의원이 즉각 반발했다. 그는 언론 앞에서 외쳤다. "저는 10년 넘게 살렘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관리, 감독,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원자력 관리 위원회가 되풀이되는 심각한 안전 문제를 눈감아주고 있다며 강한 비난을 쏟아냈다. 원자력 발전에 대해 확고한 반대 의견을 지닌 그 상원의원의 이름은 조셉 바이든 주니어였다. 

조셉 바이든, 그러니까 '조' 바이든은 사반세기가 흐른 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세월 동안 바이든의 큰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바이든은 자신보다 훨씬 젊고 카리스마 넘치는 흑인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역임했다. 본인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샜다. 달라진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생각도 180도 바뀌었다. 

한때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관리, 감독,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던 그가 지금은 차세대 원자력 기술 개발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선 공약이기도 했으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홈페이지에도 기재돼 있는 사실이다. 

한국 원전업계는 환영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비판적이던 보수 야당도 긍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특별한 반응이 없다. 탈원전에 우호적이던 진보 언론들은 바이든의 변화를 모른 척 하려 드는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바이든의 원자력 포용 정책은 단지 한 대통령의 태도 변화가 아니다. 50여 년간 지속돼온 미국 민주당의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반대가 찬성으로 돌아섰다는 것을 뜻한다. 초강대국 미국이 거대한 방향 전환을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계바늘을 수십 년 전으로 돌려보자.

1972년 미국 민주당의 새 정강정책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가운데)이 11월 24일(현지시간) 미국 델라웨어 주 윌밍턴 퀸극장에서 차기 외교안보팀 지명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인물이 존 케리 기후특사 지명자. [윌밍턴=AP 뉴시스]
1972년 텍사스 철도 위원회(Texas Railroad Commission)가 중대 발표를 했다. 그 전까지 위원회는 미국의 석유 가격을 규제했다. 가격 통제를 포기하고 원유 가격을 오직 시장 논리에 의해 결정하겠다는 게 발표의 골자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석유 수요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텍사스산 원유만으로는 미국 내 석유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경제가 부흥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가 석유에 목마른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는 단순히 값싼 외국산 석유를 수입하면 될 일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석유는 가장 중요한 전략 물자다. 안정적 석유 공급 라인을 확보하는 것은 국가 안보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장주의의 나라 미국에서도 텍사스 철도 위원회 같은 조직이 석유의 가격과 공급을 어느 정도 통제했으나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 

미국은 중동, 특히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 정권 보위에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중동 문제에 단단히 얽혀버린 셈이다. 그때만 해도 사암(砂巖) 암반층에서 셰일 가스를 추출할 기술력은 부재했다. 미국은 중동에 코가 꿸 수밖에 없었다. 지구 반바퀴 너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뒤섞인 갈등 구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새로운 에너지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1972년 7월 11일 발표된 민주당의 새 정강정책(party platform)을 보자. 1972년부터 1976년까지의 운영 방향을 제시하는 문서에서, 민주당은 원자력을 새롭고 긍정적인 에너지 유형의 일부로 소개하고 있다. 

"지구의 천연 자원은 일시적으로는 풍족하고 무한히 공급받을 수 있을 것 같이 보일지라도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길 수 없다. 미국은 특히 에너지 공급 패턴에 있어서 중요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전통적인 정책의 재조정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1980년이 되면 미국은 대서양 동쪽에서 수입되는 석유에 전체 석유 소비량 중 30~50%가량을 의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원자력, 태양광, 지열 발전 같은 새로운 유형의 에너지의 연구 및 보급은 뒤쳐져 있다." 

중동산 석유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문제이므로 원자력을 더 개발하고 활성화하자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논의다. 1972년까지는 미국 민주당 역시 원자력에 대해 긍정적 태도였던 것이다. 1973년 오일 쇼크를 겪으면서 원자력을 긍정적으로, 혹은 필요악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한층 더 커졌다.

지미 카터의 등장

1976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지미 카터가 1977년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달라진다. 그는 도덕주의로 대중적 인기를 모으며 정치적으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신임 대통령의 반핵(反核)주의 관점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원자력 연구에 치명타를 입혔다. 당시 한창 연구 중이던 고속증식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상업용 원자로는 우라늄-235를 연료로 삼는다. 반면 고속증식로는 자연계에 더 흔하게 존재하는 우라늄-238과 플루토늄을 섞어 연료를 만든다. 우라늄-235의 핵분열로 에너지를 내는 통상적 원자로와 달리, 고속증식로는 플루토늄의 핵분열로 우라늄-238을 플루토늄으로 바꾸고, 그 플루토늄이 핵분열을 하는 연쇄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서 플루토늄이 '늘어나기' 때문에 고속‘증식'로라고 불린다. 

카터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플루토늄은 핵무기의 재료로 쓰일 수 있는데, 그게 더 늘어난다고? 반핵, 반전주의자 카터는 그와 같은 기술 발전의 방향을 용납할 수 없었다. 1979년 발생한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미국 원자력 산업의 관 뚜껑에 못을 박았다. 새로운 기술을 연구·개발하지도 않고, 기존 기술로 만들어진 발전소를 더 늘리지도 않은 채, 그저 이미 건설된 발전소를 유지·보수하는 데만 만족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이 선회했다. 

앞서 말했듯 1970년대는 오일쇼크가 전 세계 경제를 강타한 시대였다. 원자력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해 보급할 수 있는 경제적 유인 동기가 충분했다. 하지만 카터의 개인적 성향, 그의 탄탄한 지지층이던 민주당의 젊은 고학력 베이비부머 세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자력은 곧 핵무기이고, 핵무기는 나쁜 것이므로, 원자력을 당장 없앨 수는 없어도 더 키우지는 말아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러한 경향은 1990년대까지도 쭉 이어졌다. 1994년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은 미국 최후의 고속증식로 연구를 중단했다. 이 또한 정책적 판단이기 이전에 정치적 결정이었다. 여러 차례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하면서 민주당 중진으로 자리 잡은 조 바이든, 훗날 미국 국무장관을 지내는 존 케리 등이 원자력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섰다.

기후 변화와 셰일 혁명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원자력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은 미국 민주당의 행보를 과연 '반핵'과 '평화'라는 도덕적 가치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얼핏 보면 그럴싸하지만 실상은 좀 더 복잡하다. 

에너지, 안보, 지정학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앞서 말했듯 1970년대 이전까지 미국은 세계 최대 산유국 중 하나였다. 1970년대 이후에도 중동 정세에 깊숙이 개입하며 안정적인 석유 공급로를 확보한 나라였다. 미국이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는 것은 미국 처지에서 약점이다. 하지만 미국 말고도 세계 모든 나라가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는데, 미국이 중동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면, 미국에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니다. 

모든 마을 사람이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우물을 마셔야 한다고 해보자. 미국은 원래 자기 집에 있는 우물만 마시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로 부족해 물통을 들고 집 밖에 나와야 한다. 다른 자들과 함께 마을의 우물을 마셔야 한다. 이 상황 자체는 불편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물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한, 마을 사람들 전체의 목줄을 쥐고 있을 수도 있다. 우물을 없애고 집집마다 수돗물을 놓기 위해 투자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다. 

패권국가 미국으로서는 석유 시대를 종식시켜야 할 특별한 동기가 없었다. 반면 고속증식로는 한번 완성하고 상용화하면 해당 기술을 보유한 국가의 에너지 문제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극비리에 개발했던 원자폭탄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에 유출되고 결국 전 세계로 퍼졌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 고속증식로를 비롯한 차세대 원전 기술 역시 미국이 영원히 독점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릴 거야'라는 명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독점할 수 없는 기술이라면 만들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째, 기후 변화가 가시화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유권자들의 압력이 늘어났다. 물론 정치인들은 일단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겉보기에 그럴듯한 '신재생에너지'의 편을 들었지만, 해가 지고 바람이 멈추면 돌아가지 않는 태양광과 풍력은 처음부터 에너지 문제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는 결국 원자력을 늘려야만 하는 것이다. 

둘째, 셰일 혁명이 시작됐다. 모래가 아주 단단하게 굳은 사암층에 갇힌 원유를 채굴하는 방법이 2008년 조지 미첼이라는 텍사스 석유 사업가에 의해 개발됐다. 셰일 가스의 매장량 및 채굴 기술에서 미국은 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셰일 가스의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농담이 오갈 정도다. 2010년대 이후, 미국은 석유를 위해 중동의 정치에 목을 매달 필요가 없게 됐다. 오히려 영세 셰일 가스 개발 업체의 부실 경영 및 부채가 국가적 골칫거리다.

"원자력, 갑시다!"

12월 3일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원전 관련 부서 모습. 이튿날 검찰은 월성 1호기 원전 관련 내부 자료를 삭제하거나 이를 지시한 혐의 등으로 산업부 공무원 2명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뉴스1]
이에 따라 미국 민주당의 정강정책 역시 근본적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한국 언론에 잘 소개되지 않았으나, 그 변화는 2010년대부터 가시화됐다. 1994년 빌 클린턴의 명을 받아 고속증식로 연구에 종지부를 찍었던 존 케리만 해도 그렇다. 그는 2017년 1월 9일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을 방문해 45분에 달하는 연설을 했다. 

"저는 1970년대부터 원자력에 반대해 논쟁해온 사람입니다. 원자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의 도전에 직면해 있고, 4세대 원자력 기술의 잠재력이 있습니다. 갑시다(Go for it).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듭시다." 

멋진 연설이다. 이 연설을 한 존 케리가 누구인가? 오바마 행정부 시절 이란 핵협상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란 핵협상이란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봉쇄를 풀고 군사적 대립을 완화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석유 때문에 중동에 매달리지 않는' 21세기 미국의 대전략 중 하나인 것이다. 

트럼프뿐 아니라 바이든 역시 적극적으로 4세대 원자력 발전 연구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래서다. 1970년대와 달리 지금은 미국이 아닌 중국 같은 나라가 먼저 고속증식로 및 4세대 원전 상용화를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기술력이 평준화됐으니, 미국은 기술 유출이 아니라 기술 낙후를 두려워해야 할 상황이기도 하다.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석탄 석유 등 화석연료를 버리고 4세대 원자력 발전에 집중하겠노라는 미국의 정책 전환은 그러므로 단순한 에너지 정책이 아니다. 중동뿐 아니라 전 세계에 직접 군사 개입을 하는 '세계의 경찰' 역할을 줄이고, 원자력으로 값싸고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해 산업 경쟁력을 회복하며, 중국이나 인도 등 경제적 잠재력을 지닌 인구 대국에 탄소 배출 절감을 요구하며 압력을 넣기 위한 다목적 포석으로 봐야 한다. 그야말로 '파워'(power) 게임이다. 

월성 1호기의 폐쇄 과정에서 불법적인 압력이 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다. 에너지 정책을 국가 안보 및 국제 정세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에너지 정책은 전기 안 끊기게 하고 전기 요금 깎아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경제의 근간이며 안보의 핵심이다. 초당파적 관점에서 오직 국익만을 바라보며 접근해야 할 사안이다.

막강한 원전 경쟁력 활용할 때

빌 클린턴과 존 케리, 조 바이든 등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우드스탁 록 패스티벌에서 춤추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월남전에 반대하던 바로 그 세대라는 점이다.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카터의 이상적 도덕주의를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적 무기로 삼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국가를 책임지고 운영할 때가 되자, 미국의 국익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원자력을 더 활용하고 발전시키는 것 말이다. 

한국은 왜인지 이제는 철이 들어야 할 사람들이 철들지 않는다. 지금은 3세대 원전의 개발과 건설에서 대한민국이 지닌 막강한 경쟁력을 적극 활용해야 할 때다. 그렇게 국부를 쌓으면서 4세대 원전을 향한 경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망국적 탈원전을 멈추고, 그 과정에서 권한남용이나 비리 등이 있었다면 낱낱이 드러내 바로잡은 후,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12-13

[신동아 좌담 上] "나꼼수 분열은 '대깨문'과 '소깨문' 싸움"

 

"나꼼수 분열은 '대깨문'과 '소깨문' 싸움"

고재석 기자 입력 2020. 12. 13. 10:01 수정 2020. 12. 14. 17:39
['한때 좌파' 4人의 쾌도난마①] 문재인 시대㊤

● “민주 질서 무시 文정권 리더들은 레닌주의자”(민경우)
● “86세대, 20대 때부터 민주주의 부재 상태”(나연준)
● “조국 속한 집단 전체가 나르시시즘”(봉달호)
● “체제 뒤엎으려던 80년대 대학생, 민주화운동가 아냐”(노정태)
● “촛불혁명은 86세대가 韓 무혈점령한 것”(민경우)
● “한반도에서 北 빼고 가장 저질 팬덤이 문빠”(나연준)
● “文 비판하니 욕설 세례, 내 밥줄 끊으려 해”(봉달호)
● “97세대의 文 지지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노정태)

‘한때 좌파’ 네 사람이 2020년 12월 7일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 모였다. 왼쪽부터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 봉달호 편의점주. [지호영 기자]
네 사람 모두 반문(反文)이다. 문재인 정부에 날 선 칼날을 들이댄다. 여기까지라면 별 흥미가 없다. 친문(親文)이 그렇듯 반문도 차고 넘친다. 이건 어떤가. 네 사람 모두 '한때 좌파'였다. 그러면서도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 97세대(90년대 학번·70년대 출생), 밀레니얼 세대(1980년 이후 출생)가 섞여 있다. 네 사람의 이력부터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은 1965년생이다.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지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NL(민족해방) 계열 핵심 이론가였다. 

봉달호 편의점주는 1974년생이다. 92학번이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해 구력은 길다. 주체사상을 공부했으나 나중에 비(非)NL 계열로 총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은 1981년생이다. 한국 근현대사 정치사상사를 전공하는 역사학도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는 1983년생이다. 딴지일보 온라인 에디터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을 지냈다. 1980년대생을 대표하는 진보 논객으로 불렸다. 

‘신동아'는 2020년 12월 7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으로 네 사람을 초청했다. 서로의 글은 즐겨 읽지만 이날 처음 보는 사이도 있다고 했다.

"전쟁 끝났어, 빨리 나와"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장은 “문재인 정권의 리더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레닌주의자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민경우 소장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는데요. 민주화운동의 상징자본이 파산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민경우 | 조국 사태 이후 친구들과 전혀 대화가 안 돼요. 과거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이 지금 국민들이 보기에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얘기를 하고 있어요. 검찰개혁을 주장하는데,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상태가 전혀 아니에요. 

기자 |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 중 일부만의 일탈이라는 반박도 가능할 텐데요. 

민경우 | 문재인 정권에 민주화운동의 중심 세력이 있기 때문에 정권이 대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건 민주화운동의 실패라고 볼 수 있죠.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나 서민 단국대 교수처럼 민주화운동 세력에서 부분적으로 이탈한 사람들은 있죠. 저도 거기에 속하고요. 하지만 그 규모가 크지는 않잖아요. 

나연준 | 민주화운동 세력은 민주주의를 몸에 각인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지하조직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조직 보위가 운동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어요. 타인을 자신과 동일한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거나 절차적 정당성을 준수해야 한다는 훈련이 안 돼 있죠. 그 사람들이 20대 때는 별로 가진 게 없잖아요. 50대가 되면 쥔 것도 지킬 것도 많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기득권화됐어요. 여기에 20대 때부터 이어진 민주주의의 부재 상태가 결합한 겁니다. 

봉달호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0년쯤 지났을 때 태평양 어느 섬에서 일본군 장교가 하나 발견됐는데, 전쟁이 끝난 것도 모르고 혼자 투쟁하고 있었어요. '전쟁 끝났어. 빨리 나와' 이러는데 본인은 안 끝났다는 거예요. 

노정태 | 이것은 우리를 항복시키려는 적의 계략이라고 본 건가요.(웃음) 

기자 | 봉달호 편의점주는 "반미, 종북이 본질이던 우리 운동을 민주화운동이라 부르는 것은 도둑질하려고 은행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은행 강도를 잡은 도둑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형국"이라고 쓴 적 있죠. 

봉달호 | 권력을 쥐었는데도 아직 거악과 싸우고 있다는 착각이 이 사람들에게 있어요. 요새 사람들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해 비아냥거리면서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조 전 장관이 속한 집단 자체가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어요. 

과연 과거에 우리가 민주화운동을 했었을까…. 저는 자주민주통일(자민통) 운동을 했던 것 같긴 한데, 거기서 민주는 '후순위채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운동권 문화가 전체주의적이었고 그 안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내면화된 신념 없이 분노나 당위성에 따라 운동했는데 지금도 반복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6월 항쟁 때 反美 외치니 '그러지 마' 하시더라고요"

봉달호 편의점주는 “86세대에게 이념은 허울이나 명분일 뿐이었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최근 민경우 소장이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여권의 압박을 레닌의 폭력혁명론에 빗댔는데, 봉달호 편의점주 의견과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네요. 

민경우 | 1980년대 중반 배운 민주주의론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어요. 칸트나 로크, 미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운동권 안에서) 토론해 본 적이 없어요. 레닌주의부터 얘기했고, 그조차 이론보다는 행동주의로 받아들였죠. 우스갯소리로 '당을 만들어 무기고를 접수해야 한다'는 얘기를 1984~1985년에 대학교 2학년들이 했다고요. 레닌도 자기를 민주주의자라고 하고, 주체사상도 민주주의라고 하니까 민주주의라는 워딩은 있었죠. 문재인 정권의 리더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레닌주의자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검찰이라는 거대악이 있고 쟤들은 민주적 질서를 거치지 않고서 제거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바로 레닌주의예요. 

기자 | 여권이 많이 쓰는 표현이 '민주적 통제'인데요. 

민경우 | (레닌주의와) 똑같죠. 

노정태 | 저는 민주화운동이 파산했다기보다는 이제야 진상이 보인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혁명운동하고 반체제운동한 사람도 포용하는 국가는 민주국가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란 말이에요. 1980년대 김영삼(YS), 김대중(DJ)이라는 정치 지도자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YS, DJ 찍었을 때 받게 될 멸시와 배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찍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자에 가깝죠. 대학가에 모여 체제를 통째로 들어 엎자는 모의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 민주화운동가는 아니었습니다. 요새 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도가 많잖아요. 태국에는 야당 지도자가 없어요. 민주화운동이 작동할 만한 대안이 되는 정치세력, 즉 지도자가 부재하니 대학생들이 왕정 폐지를 주장해도 아무런 힘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기자 | 민주화 과정에서 양 김씨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주장인데, 민경우 소장도 동의하나요. 

민경우 | 5·18과 관련해서도 DJ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어요. 5·18 이후에는 부산이 운동의 중심이었는데 1983년 김영삼이 단행한 23일간의 단식이 부산 시위를 촉발했어요. 야당이 선전한 1985년 2·12 총선이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였죠. 그때 서울대 총학생회를 비롯해 대학생들은 '뻘짓'하고 있었어요. 주체사상, CA(제헌의회)그룹 같은 이상한 소리를 했어요. 정치적 의미에서 대학생의 민주화운동은 터무니없이 과장됐습니다. 

나연준 | 1987년 6월 항쟁 때 CA그룹에서는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었죠. NL(민족해방) 계열은 '독재타도'를 표면적으로 내걸었지만 원래 하려던 말은 '반미자주'였어요. 6월 항쟁에 대해 86세대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당시 현장에서 86세대가 외치고 싶었거나 실제 외친 구호는 민주화가 아니었습니다. 

나연준 편집위원의 '돌직구'를 민경우 소장은 저항 없이 순순히 맞았다. 그러고는 경험담을 꺼냈다. 

민경우 | 넥타이부대가 판을 깔아주니 대학생들이 거리에서 활개를 친 거죠. 6월 항쟁 후에 대학생들은 조국통일론으로 확 빠져버렸어요. 학생운동의 주요 동력은 이미 1986년 자주통일운동이 돼 있었어요. 이걸 일시적으로 반독재투쟁으로 전환했다가 1988년 본궤도로 돌아온 거죠. 사실 제가 그랬어요. 6월 항쟁 때 거리에 나가서 반미(反美)를 외쳤어요. 어느 날 명동성당 앞에서 넥타이 매신 어른이 절 부르더니 '너 그러지 마' 하시더라고요. 나는 학교에서 늘 하던 소리니 괜찮겠지 하고 한 거죠.

文의 콘크리트 지지층 97세대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은 “민주화운동 세력은 민주주의를 몸에 각인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그 유산이 90년대 학번으로 이어집니다. 1990년대에도 자주통일운동이 학생운동의 중추 아니었습니까. 봉달호 편의점주가 이 중 유일한 97(90년대 학번, 70년대 출생)세대인데요. 

봉달호 | 저는 거창하게 얘기하면 1996~1997년 전향했어요. 더는 NL이니 PD(민중민주)니 ND(민족민주)니 이런 말은 안 하겠지 했는데 지금도 같은 말을 하고 있잖아요. '세상이 왜 이래'(웃음). 저는 고등학생이던 1989년 운동을 시작했어요. 1980년대 학생운동은 그나마 고민이 있던 것 같아요. 1990년대 학생운동은 주입식이었어요. 김정일이 쓴 '주체사상에 대하여'는 거의 외우다시피 했죠. 1990년대 중반이 되면 정통을 따지면서 북한에서 나온 원서가 아니면 보지도 않았습니다. 굉장히 교조화한 거죠. 1990년대 대학에는 상반되는 세력이 공존했어요. 전체주의 문화를 가진 운동권이 있던 반면, 서태지와 아이들에 빠진 대학생들이 있었어요. 두 집단이 대학에서 어울렸는데 지금은 똑같은 정치 성향을 보이니 참 그로테스크(grotesque·기괴)해요. 

기자 | 나연준 편집위원은 "97세대는 팬덤과 같은 자신의 문화 경험을 정치로 확장했다"고 쓴 적이 있잖아요. 

나연준 |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한 사람 상당수는 제도 정치권 진출에 성공했고 안착했어요. 반면 1990년대 학생운동은 계속 실패하면서 역량을 소진했어요. 90년대 학번은 자기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정치세력을 세대 내에서 못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윗세대를 지지하죠. 지지를 만들어가는 방식에서 두 세대 사이에 차이가 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2년 데뷔했어요. 90년대 학번들에게는 누군가를 공적으로 좋아하는 첫 경험이 팬덤이었던 겁니다. 팬덤이 정치 영역으로 확장하면서 '노무현 바람'에서 '안철수 현상'까지 흐름이 이어졌죠. 

노정태 | 1930~1940년대 독일인들이 왜 자발적으로 나치를 지지했을까. 당시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란 속에서 (불안해하는 독일인들에게) 히틀러가 '나에게 종속되는 게 너에게는 좋다'는 식으로 대중을 설득했어요. 에리히 프롬이 전체주의를 분석하며 꺼낸 '자유로부터의 도피'입니다. 97세대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자유로운 대중문화를 만끽한 세대입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재정립하지 않고 의탁할 수 있는 또 다른 존재를 찾아 헤매고 있었고, 노무현의 출현 및 비극적 죽음과 맞물려 유사종교화 된 게 아닌가 싶어요. 

나연준 | 러프(rough)하게 정의하자면 팬덤은 정서와 서사의 공동체예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순위 프로그램에 나가면 팬들이 손가락 부서져라 ARS를 눌렀어요. 저도 그중 한 명이었죠.(웃음) 그렇게 해서 1등 만들어놓으면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 식의 서사를 정치인에게도 투여한 거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과정이 굉장히 극적이었잖아요. 돌아가시는 과정도 상당히 비극적이고요. 여기에 완전히 매몰돼 있거든요. 이 서사의 특징은 스스로 늘 선한 세력으로 규정한 뒤 악마와 싸우는 겁니다. 가까이는 노무현에 머물지만 멀리는 토착왜구 운운하면서 식민지 시기까지 올라가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가 '추억 열차'를 타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노정태 | 서태지와 아이들과 1위 경쟁을 하던 트로트 가수가 있었는데…. 누구였죠? 

나연준 | 2집 때 가장 치열하게 경쟁한 가수는 김수희 씨죠. '애모'. 

기자 | 나연준 편집위원은 진짜 팬이셨네. 

노정태 | 서태지와 아이들 팬으로서 자아를 형성한 세대에게는 김수희 씨 같은 구세대와의 경쟁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아마겟돈처럼 느껴질 거예요. 97세대의 의식세계 속에는 어릴 때 느낀 문화적 답답함이 남아 있어요. 걸핏하면 음악 검열을 했던 기성세대가 아직까지도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하지만 97세대를 억눌렀던 사람들은 나이 먹고 은퇴했어요. 이제는 97세대가 사회적으로 어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여전히 공부 안 하고 콘서트 가다 걸려서 부모님한테 혼나던 시절의 마인드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文 대통령은 허물로만 있고요"

97세대가 난타당하자 기자는 지긋이 봉달호 편의점주를 쳐다봤다. 그가 눈치껏 운을 뗐다. 

봉달호 | 요새 욕먹는 97세대로서 자기반성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웃음). 우리 세대는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우니 X세대라고 불렸어요. 앞 세대와 달리 저희 세대에는 동질감이 없었어요. 이제야 뒤늦게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우리는 축복받은 세대예요. 소비자본주의의 혜택을 가장 먼저 받았고,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했죠. 대학 진학률도 높았고 대학 내에서 다양한 의견을 관철할 수 있었죠. PC통신을 통해 정보통신 혁명의 세례도 누렸고요. 

40대가 문재인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현상을 두고도 과도한 정치적 해석을 할 필요는 없어요. 현 정부를 지지하는 분들에게 물으면 '지금 코로나 상황이잖아. 힘들 때는 뒤에서 장수한테 뭘 꽂는 거 아니야.' 이러거든요. 40대는 안정이 가장 중요해요. 40대가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건 진보적 사고가 아니라 오히려 안정성을 희구하는 보수적 사고예요. 우리 세대를 대표할 만한 지도자가 나온다면 얼마든지 뒤집히고 열광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민경우 | 지금의 40대가 20대이던 1990년대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이 나왔어요. 기업 담론이 역동적으로 한국 사회를 장악했을 법했는데, 당시 20대에게 거의 영향력이 없었어요. 대신 유시민 같은 논객이 담론의 공백을 메웠어요. 

기자 | 그렇다면 봉달호 편의점주는 86세대 기득권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봉달호 | 노무현 정부 때는 86세대가 기관장 할 나이가 아니었죠. 지금은 딱 기관장을 할 나이예요.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는 선배들이 있는데, 나중에 보면 다 어디 들어가 있어요.(웃음) 아주 쉽게요. 1990년대 후반 어떤 선배가 저한테 운동을 왜 하느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순진하게 '민중을 사랑해서 합니다'라고 답했어요. 선배가 하는 말이 '그래? 나는 권력을 잡으려 하는데'였어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돌이켜보면 (그들에게) 딱 맞는 말이에요.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면서 이해관계에 얽히고, 그러면서 하나의 그룹을 형성해 가는 거예요. 이념은 허울이나 명분일 뿐이었던 거죠. 

기자 | 86세대인 민경우 소장이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겠는데요. 

민경우 | 민주화운동 세력이 적이라고 불렀던 집단은 2010년 즈음에 다 돌아가셨어요. 마침 노무현 정권 때 30대 중반이던 사람들이 40대 중후반이 돼 한자리할 수 있는 나이가 됐죠. 운동권만이 아니더라도 기업이나 법조계 등에서 중견 간부 지위에 올라갔습니다. 2016년 촛불시위는 보수가 물리적으로 퇴장하고 사회를 장악한 민주화운동 세력이 (한국을) 무혈점령한 거예요. 문재인 대통령은 이와 같은 구조 위에 허울로만 있고요. 

구(舊)조국, 신(新)조국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는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이제야 보인다”고 했다. [박해윤 기자]
기자 | 이야기를 다시 팬덤으로 돌려볼까요. 팬덤 하면 '문빠'를 빼놓을 수 없죠. 

노정태 | 최근 '나꼼수'(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멤버들이 분열한다고 하던데요. 편의적으로 단어를 붙이면 대깨문(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자)과 소깨문의 싸움 혹은 구깨문과 신깨문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데….(일동 웃음) 

기자 | 구(舊)조국, 신(新)조국 있듯이….(웃음) 

노정태 | 네. 적과의 싸움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이건 인간의 본능에 가까워요. 스포츠처럼 그냥 즐기려고만 하면 안전하기도 하고 그 나름의 휴먼 드라마도 탄생합니다. 문제는 이 본능을 정치에 대입해 버린 거예요. 자신들이 움직이면 결과가 나온다는 걸 눈으로 확인해 버리니 멈출 수 없게 된 겁니다. 고작 수백, 수천 명이 악플 단다고 정치인이 말 바꾸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정치가 사람들의 본능을 악용하고 있는 겁니다. 

나연준 | 아이돌 팬덤은 아주 예의 바르게 행동해요. 불우이웃도 돕고 기부도 하고 나무도 심잖아요. 

노정태 | 연예인 이름으로 대신 기부하잖아요. 

나연준 | 그렇죠. 선행을 하면서 우상의 이미지 제고를 꾀한단 말이에요. 발산하는 방식이 건강하잖아요. 같은 팬덤이더라도 '대깨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는 아주 결이 다릅니다. 저는 한반도에 존재하는 팬덤 중 '북쪽' 빼놓고는 가장 저질 팬덤이 대깨문이라고 생각해요. 

기자 | 노무현 전 대통령도 노사모라는 팬덤이 있었는데요. 

나연준 | 노사모와 문빠의 본질은 같다고 생각해요. 노사모가 한창 활동할 때 제가 민주노동당에 있었습니다. 선거만 있으면 노사모가 민주노동당(2010년 지방선거 때는 진보신당) 게시판에 단체로 몰려와서 후보직에서 사퇴하라고 도배를 했어요. 

기자 | 민주당과 야권 단일화를 하라고 요구했죠. 

나연준 | 남이 나와 똑같은 참정권을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민주주의 훈련이 덜 된 거예요. 그들은 자신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걸 두려워합니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어요. 진보진영에서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는데, 당시 노사모는 FTA 해야 한다고 주장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 체결한 한미 FTA를 이명박 정부 때 비준하려 하니까 반대했어요. 그러면서 내세운 슬로건이 '노무현의 FTA는 착한 FTA, 이명박의 FTA는 나쁜 FTA'였습니다. 정책을 선악으로 나누는 겁니다. 스스로도 설명이 안 되면 생각을 바꿔야 하는데, 나꼼수나 '김어준의 뉴스공장' 같은 데서 매일 소스를 던져주잖아요. 

민경우 | 1988년부터 1997년이 매우 중요한 시기예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고 있었어요. 또 여대생 비율이 급격하게 올라갑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총학생회장이 주로 남자였어요. 1990년대 후반이 되면 여성 총학생회장이 대거 등장해요. 1987년 6월 항쟁 이후 NL은 통일운동으로 많이 갔어요. 8·15가 되면 범민족대회를 했는데, 대학이 해방구 같았어요. 세상에 서태지가 있건 말건 대학 내에서 10만 명이 축제를 벌였어요. 축제의 키워드는 통일운동이었죠. 그게 팬덤과 유사했어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거칠 수가 있을까"

봉달호 편의점주가 얕은 한숨과 함께 말을 받았다. 

봉달호 | 문 대통령을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정서가 강하게 깔려 있는 것처럼 보여요. 문제는 그 정서가 공격적으로 표출된다는 거예요. 제가 팔자에 없이 '신동아'에 칼럼을 쓰는데, 한번은 하루에 100개 넘는 욕설 메일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제가 편의점을 하잖아요. 프랜차이즈 본사에 전화해 '이런 사람이 이런 글을 쓰는데 왜 가만히 놔두느냐'고 해요.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거칠 수가 있을까. 생각의 차이를 이유로 누군가의 밥줄을 끊어버리겠다는 거잖아요. 중국 문화대혁명(문혁) 때와 너무 똑같아요. 문혁에 대한 기록을 보면 스승을 마당에서 두드려 패고 고깔을 씌웠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중·고등학생이고 순진한 사람들이었단 말이에요. 이 말을 들으면 문 대통령 지지하는 분들이 기분 나쁘겠지만, (그분들은) 역사적 상황이 문혁 때처럼 주어지면 똑같이 행동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노정태 | 최근에 역사 강사 설민석 씨가 박정희 정권이 몰락한 이유 중 하나로 2차 오일 쇼크(파동)를 들면서 경제가 거꾸러지자 부산·마산 민심이 이반했다고 말했어요. 사람들이 이 설명을 못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박정희를 쫓아낸 것은 우리 위대한 민주화운동의 결과'이지 무슨 석유값 같은 걸 들먹이느냐는 거죠. 그러면서 설씨 아버지가 박정희 정권 때 청와대 경호실에 있었는데 후에 민주당으로 갈아타 국회의원을 했다며 설씨를 공격해요. 박정희가 오일 쇼크의 직격탄을 맞은 건 사실이고, 그때 무너진 정권이 굉장히 많거든요. 하지만 (정치)소비자들이 '우리가 갖고 있는 정의로운 역사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압력을 주는 거죠. 

*‘한때 좌파' 4人의 쾌도난마 문재인 시대②로 이어집니다.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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