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6

K방역, 부동산… 한국은 지금 ‘문재인 쇼' 절찬 방영 중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데카르트와 트루먼쇼
일러스트=안병현
보험 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는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시 헤이븐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소 공포증과 물 공포증이 함께 있어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게 아쉽다.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한 이웃을 만날 때마다 하루 인사를 한꺼번에 건넨다.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잇.’

언제부턴가 트루먼의 일상이 삐걱거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무대 조명이 떨어지지 않나, 자기 머리 위에서만 비가 쏟아지지 않나, 심지어 어린 시절 보트 사고로 죽은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노숙자를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 노숙자를 버스에 태워서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나. 트루먼은 점점 의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진짜’일까?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아실 그 이야기, ‘트루먼 쇼’의 설정이다. 트루먼의 인생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쭉 그랬다. 사상 최대의 리얼리티 쇼이면서 PPL인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지만,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른다. 평생을 보고 듣고 접해온 모든 것이 가짜인 셈이다.

‘트루먼 쇼’는 1998년 개봉 당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보면 어떤 부분은 시대에 뒤처져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기 일상을 생중계하는 ‘자발적 트루먼’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몇 주제 의식은 여전히 빛난다. 자기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트루먼의 모습은 서양철학의 근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코기토 명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어떤 전능한 악마가 나를 속이기 위해 내가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을 악마 뜻대로 조종한다고 해보자. 영화 속 ‘트루먼 쇼’의 연출자 크리스토프처럼 모든 경험과 인간관계를 조작하는 차원을 넘어, 상식과 감각조차 뒤바꾸는 것이다. 불을 만져도 뜨겁지 않고 물을 마셔도 시원하지 않고, 빨간색이 파랗게 보이고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1+1=2가 아니라 3이 정답이라면?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나의 모든 인식이 잘못되었다 해도, 인식하고 있는, 즉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다. 악마가 나를 아무리 철저히 속인다 해도, 속이는 대상인 내가 ‘있어야’ 속일 수 있다. ‘트루먼 쇼’의 모든 것이 가짜여도 트루먼만은 ‘진짜’여야 ‘트루먼 쇼’가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데카르트 저서 ‘성찰’의 한 대목.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 악마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참일 수밖에 없는 절대 진리를 찾아내, 선언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시는 인류의 지적 역량이 다방면으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모든 지식과 도덕적 판단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 신학은 더 이상 ‘제1 학문’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할 철학이 과연 보편적 합리성을 보증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반드시 옳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밝혀낸 후, 그 위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괄한 모든 학문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마치 트루먼이 ‘트루먼 쇼’의 세트장 밖으로 나간 것과 같다. 인류는 종교와 관습이 아닌 이성의 힘으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하는 법.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트루먼 쇼’가 절찬리 방영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가장 가까운 예부터 들어보자. 지난 11일, 문 대통령이 경기 화성시 LH 동탄 공공 임대주택을 방문했다. 그는 44m²(옛 13평형)와 신혼부부용 41m²(12평형)를 둘러본 뒤 “공간 배치가 아늑하고 아주 아기자기하다” “신혼부부에 아이 한 명은 표준이고 어린아이 같은 경우는 두 명도 가능하겠다” “굳이 자기 집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임대주택이 충분히 좋은 주택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등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흡족해했다.

LH 측이 야당 요청으로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그 두 채는 ‘세트장’이었다. 3300만원을 들여 가구를 구입한 후 공임비 650만원과 부가세까지 포함해 총 4290만원을 들인 초호화 세트장이었다. 보증금 6000만원에 월세 20만원 수준인 임대주택에 보증금과 맞먹는 비용을 들여 만든 일종의 ‘가상현실’이었던 것이다.

어디 부동산 정책뿐일까.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역시 돌이켜보면 일종의 ‘트루먼 쇼’였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평양에서 냉면을 먹고,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 ‘쇼’를 열심히 하면 평화가 올 것처럼 바람을 잡았다. 현실은 정반대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향이 없다. 북측 해역으로 흘러 들어간 우리 국민에게 총을 난사하고 시신에 불을 붙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K방역’이라는 ‘문재인 쇼’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 영국, 심지어 일본도 확보한 백신이 한국에만 없다. 겨울과 함께 하루 감염자가 1000명이 넘는 대유행이 시작되었는데 병상 확보조차 제대로 안 되어 전전긍긍이다. 비교적 감염자가 많지 않았던 지난여름과 가을 정부는 대체 무엇을 했던가? ‘덕분에 캠페인’을 벌이며 도리어 의사들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문재인 쇼’의 청구서는 결국 국민이 감당할 몫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트루먼 쇼’가 계속된 것은 시청률 때문이었다. 시청자가 있으니 쇼가 계속되었고, 트루먼은 섬에 갇힌 노예나 구경거리로 살아갔던 것이다. ‘문재인 쇼’도 마찬가지다. ‘우리 이니’가 화면에 멋지게 등장하면 그만이라는 40%의 고정 시청자들이 리모컨을 꽉 쥔 채, 대한민국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로 몰아가고 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얻은 결론이다. 그 성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다. 권력은 온갖 ‘쇼’로 국민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참 길고 힘겨웠던 한 해의 끝. 더 많은 국민이 스스로 생각하며, 주권자로서 존재하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네이버에서 조선일보 받아보기
당신의 맞춤뉴스 '뉴스레터' 신청하세요
조선일보 로그인하고 영화 공짜로 보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