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25

청해부대 집단감염 쇼크..'촌놈들' 떠오르는 국가경영

 

[노정태의 뷰파인더㊸] 안보 구멍 났는데도 靑은 "文이 특별지시"

● 청해부대가 호르무즈 해협까지 간 까닭
● 동아시아 국가의 사실상 ‘석유 공급로’
● 해외파병, 이미 韓의 상수가 됐다
● 파견국 협조 등 임기응변도 없었다니
● 이 와중에 文 혼자 멋져 보이는 ‘K-홍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7월 20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청해부대 장병들이 버스를 타서 이동하고 있다. 청해부대 장병 전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집단감염 발생으로 이날 전격 귀국했다. [뉴스1]
청해부대 소속 34진 문무대왕함에 타고 해외 파병 중이던 해군 장병 301명 가운데 270명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전체 승조원 중 90%에 가까운 인원이 코로나19에 감염됐다. 2020년 3월 이후 최악의 집단 감염 사례 중 하나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일본의 크루즈선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집단 감염과 비교하기도 한다. 배라는 고립된 환경, 병이 퍼지는 것을 제때 발견하고 대처하지 못해 집단 감염으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 사건은 방역의 차원을 넘어서는 질문거리를 던진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공식 인정한 선진국이다. 하지만 정신세계는 일제 식민지 시절, 혹은 한국전쟁 직후 미군 원조에 매달리던 저개발 시대에 머물러 있다. 청해부대 코로나19 집단 감염은 그러한 정신적 미숙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역만리로 간 문무대왕함

근본적인 질문부터 던져보자. 대체 청해부대 34진 문무대왕함은 왜 이역만리 아프리카 동부 해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걸까. 때는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말리아 해역에서 해적 활동이 급증했다. 2008년 6월 결의안 1816호를 통해 유엔은 소말리아 해역에서의 무역 사용을 허용하고 각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의 경우 2009년 3월 2일 국회에서 '국군부대의 소말리아 해역 파견동의안'을 통과시켰고, 3월 13일 청해부대를 소말리아 아덴만에 파병했다.

2004년 이라크 전쟁 파병에 이어, 21세기 들어 또 다시 해외 파병이 시작될 참이었다.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2011년 삼호주얼리호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되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아덴만 여명 작전'이 성공리에 진행돼 반대 여론은 급격히 불식됐다. 청해부대는 그 후에도 계속 해적 소탕 등의 작전을 수행하다가, 2020년 1월부터는 호르무즈 해협의 한국 선박 호송까지 작전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청해부대의 작전 범위가 넓어진 것은 변화한 국제 정세 때문이다.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 패권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 가시화했다. 중국의 영토 내에도 석유가 나오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국 내 수요를 절대 충당할 수가 없다. 이에 중동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하기 위한 공급로 확보가 중국 처지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호르무즈 해협은 바로 그 '석유 공급로'라고 할 수 있다. 해상으로 거래되는 석유의 35%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의 석유는 거의 대부분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 '항행의 자유'의 기치를 내걸고 호르무즈 해협의 제해권(制海權, Command of the Sea)을 확보하려 하며, 그 과정에서 한국의 도움을 요청하고, 우리가 기꺼이 참여하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다. 이에 호르무즈 해협의 청해부대는 소말리아 해적으로부터 한국과 다른 나라의 상선을 수호하는 역할을 넘어, 그 자체로 전략적 의미를 지니게 된 셈이다.

석유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미국은 점점 '세계의 경찰' 노릇에서 손을 떼고 있으며, 중국은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앞으로 청해부대 뿐 아니라 더 많은 해군력을 더 먼 바다에 보내고 작전을 수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막연한 가능성이 아니라 눈앞에 다가온 미래다. 청해부대는 그런 면에서 '미래의 척후병'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안보' 관련 사안이다

청해부대 내 코로나19 집단 감염 사태를 일본의 크루즈선 집단 감염과 비교하면 안 되는 이유를 이제 독자 여러분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크루즈선은 승객이 많고 항해 기간이 길다 해도 민간인이 타는 유람선에 불과하다. 감염병이 창궐하거나, 사고가 발생한다 해도 그것은 '안보'와 관련된 사안이 아니다. 반면 청해부대 코로나19 집단감염은 안보 사항이다. 이는 21세기 대한민국 시스템에 근본적 결함과 문제가 있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대결을 통해 체제를 형성하고 성장한 나라다. 1945년 해방, 1948년 건국 이후 지금까지 유지돼온 시스템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흔히 '병영국가 체제'라고 비난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하면 20세기 대한민국의 시스템이 군대, 특히 육군을 핵심 모델로 삼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

아무리 기계화, 자동화, 첨단화된다 해도 육군의 본질은 인력, 즉 '맨 파워'에 있다. 많은 병력을 확보하고, 명령 체계를 갖추며, 내부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게 조율하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훈련해야 한다. 지금도 총 50만 명에 근접한 육군 병력은 휴전선에서 북한을 노려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이 땅'을 지키는 것, 그것이 육군의 본령이다.

해군은 북한의 위협에 맞서 우리의 영해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 점에서는 육군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해군은 안보 여건의 변화로 인해,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페르시아만에서 시작해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말라카 해협을 지나 우리에게 오는 석유의 바닷길을 지키는 과제가 북한의 위협에 맞서 휴전선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안보 사항이 됐다.

원하건 원치 않건, 이제 한국은 해외 파병을 국가 운영의 변수가 아닌 상수로 놓고 있어야 한다. 익숙하고 안전한 땅 위에서 기존에 해왔던 식으로 휴전선을 지키는 역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낯선 여건에서 우리 군대는 한국과 세계의 평화 질서 유지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뜻이다.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

서욱 국방부 장관(가운데)이 7월 20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청해부대 집단감염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 하고 있다. 서 장관은 이날 “해외바다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해 온 청해부대 34진 장병들을 보다 세심하게 챙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국방부 제공]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선박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감염병은 쉽게 퍼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실전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세계 최강의 미군 역시 감염병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2020년 4월 발생한 핵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호 내 코로나19 집단 감염 사건뿐만이 아니다. 지난 7월 19일 '동아사이언스'에 실린 '사상 초유의 청해부대 집단감염…선박은 왜 코로나에 취약할까'라는 기사에 따르면, 선상 호흡기 감염병 집단 감염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발생해온, 해양 작전의 상수다.

"전문가들은 선박의 규모와 관계없이 선박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활할 경우 코로나19 전파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코로나19뿐만 아니라 인플루엔자, 노로바이러스 등 사람 간 전파가 잘 이뤄지는 감염병은 어김없이 선박 내에서 전파가 쉽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밀폐된 선상 환경은 계속해서 호흡기 감염의 원인이 되고 있다. 선상 호흡기 감염병은 1966년 미 해군 구축함에서 350명이 결핵에 감염된 것을 시작으로 2009년 대형상륙함에서 H1N1 인플루엔자에 3000명이 감염되는 등 코로나19 이전에도 꾸준히 발생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고, 남에게 옮길 수도 있다. 밀집된 생활을 하는 해군 함정 내에서라면 병이 옮을 위험은 더욱 커진다. 해군 함정 내에서 감염병이 크게 번지는 이런 종류의 사건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병에 걸릴까 두려워 해외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은 21세기 한국에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다. 앞으로 한국은 같은 위험에 수없이 노출될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바다로 나가야 한다. 이 사안을 제대로 갈무리하고 교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정작 해군은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일관했다. 날씨가 덥고 운송 거리가 길어 문무대왕함에 백신을 공급할 수 없었다고 한다. 청해부대 작전 범위 내에 미군 부대가 다수 존재하고 있는데, 미군에 백신을 요청하고 나중에 갚는 식의 임기응변은 애초에 떠올리지도 않았다는 소리다. 남수단에 파병된 한빛부대는 바로 그렇게 파견국 등의 협조를 통해 백신 접종에 성공했다. 청해부대 코로나19 집단 감염은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라고 볼 수밖에 없다.

더 한심한 건 청와대의 대응이다. 지난 7월 21일, 박수현 대통령비서실 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라디오에 출연해 "문 대통령이 공중급유수송기를 보내 청해부대 승조원을 귀국시키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향후 우리 안보에 가장 약한 고리가 될 수 있는 사안이 드러나 버린 이 시국에도 'K-홍보'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

웃을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작태를 바라보며 문득 '촌놈들의 제국주의'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란 경제학자 우석훈 성결대 교수가 2004년 이라크 파병을 보며 만들어냈던 신조어다. "제국주의이고는 싶으나 미국 눈치를 살펴야 하고, 또 아무도 한국 같은 엉성한 나라에게 기꺼이 식민지가 될 턱이 없는 이 기묘한 현상을 우리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촌놈들의 제국주의' 49쪽)

파병 장병들에게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하지 못해 작전 중이던 300여 명의 승조원을 급거 귀국시켜야 하는 나라. 그것이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그 와중에 해군은 변명을 늘어놓고, 청와대는 대통령 한 사람만 멋져 보이는 식으로 홍보에 치중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글로벌 선진국이 됐는데,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은 여전히 '촌놈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듯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청해부대 승조원들의 쾌유를 기원한다.

#청해부대 #코로나19확진 #해외파병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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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4

[노정태의 시사哲] 세계가 삼성 폰으로 K팝 듣는 시대.. 日과 유치한 자존심 싸움은 이제 그만!

 

[아무튼, 주말] 도쿄올림픽 2020에 듣는 '수궁가'와 '범 내려온다'

용왕의 병을 치료할 약을 구하기 위해 자라는 뭍으로 올라왔다. 멋진 경치를 쓱 둘러본 자라 눈에 육지 짐승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윗자리에 앉아야 마땅한지 상좌(上座)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옳거니, 저기 가면 토끼가 있겠거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털이 북슬북슬한 짐승 쪽으로 말을 붙여 보았다. “토생원 아니시오?”

먼 바닷길을 헤엄쳐 오느라 힘들었던 자라의 입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호생원 아니시오?”라고 내뱉고 만 것이다. 산에서 가장 힘센 짐승이지만 남이 자신을 ‘생원’이라고 높여 부르는 일 따위는 영 없어서 서운했던 호랑이, 그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여 자라를 향해 달려갔다. 자라는 화들짝 놀랐지만 도망갈 틈이 없다. 엇모리장단에 맞춰 소리꾼이 목청을 뽐낼 차례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일러스트=유현호

퍽 친숙하게 들린다면, 그렇다. 밴드 이날치의 노래 ‘범 내려온다’가 바로 이 대목을 따서 현대적 감각으로 재창작한 것이다. 마치 판소리의 한 대목이 ‘힙’한 유행가로 탈바꿈했듯, 우리는 이 옛이야기 한 토막 속에서 ‘자존심’과 ‘자존감’이라는 오늘날 키워드를 찾아볼 수 있다. 호랑이는 자존심을 앞세워 우쭐대다 큰코다친 반면, 자라는 자존심을 굽히고 자존감을 되찾아 힘센 상대를 이겨내는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에 대해 가치 평가를 내린다. 그 ‘무언가’ 중에는 당연히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나는 소중한 사람인가? 고귀한 존재인가?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와 같이 다양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매 순간 스스로 가치를 평가하고 답을 제시하는데, 그것을 심리학에서는 ‘자아 존중감(self-esteem)’이라고 부른다. 그 개념이 일상적 대화와 심리 상담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자존감’이라는 약칭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존감은 자존심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취급된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무관하게 나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하는 긍정적 가치를 자존감이라고 하는 반면, 타인과 경쟁하거나 서로 평가하면서 얻는 자기만족 등을 자존심이라 부르는 화법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심리학 용어가 대중적으로 정착되면서 학술적 의미를 넘어 그 나름의 용례를 갖게 된 셈이다.

이와 같이 자존감과 자존심을 대립시킨다면 자존감은 자존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의 너 자신을 긍정하라’는 말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존감과 자존심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키워야 하는 양자택일 관계가 아니다. 자존심을 적절히 채우거나 필요한 시점에 확보하지 못한다면 자존감을 기르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다시 수궁가의 그 대목으로 돌아가 보자.

호랑이는 자존감이 부족하고 자존심만 강한 캐릭터다. 동물들은 누가 더 어르신이고 윗자리에 앉아 대접받아야 하는지 논쟁을 벌인다. 내 나이가 더 많다며 목에 힘을 빳빳이 주고 다툰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많은 대본에서 호랑이 역시 그 틈에 껴 있다. 다른 동물들에게 높은 대접 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 자라가 실수로 ‘호생원’이라고 불렀을 때 호랑이는 그 말이 너무도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갔다.

반면 자라는 자존심을 버렸다. 호랑이가 입맛을 다시며 달려들자 “나는 자라가 아니라 두꺼비”라고 둘러대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제는 죽기 살기로 싸워봐야 할 때. 여기서 ‘수국 전옥주부공신(典獄主簿功臣) 사대손 별주부’라는 자라의 자존심은 자존감과 용기의 원천이 되어준다. 목을 쭉 빼서 내밀고 호랑이의 가랑이 사이 ‘밑 주머니'를 물어뜯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2021년 7월 현재, 대한민국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선진국이다. 국제사회라는 동물 모임 중에서도 그 나름대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그에 걸맞은 국가적 자존감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말초적 자존심 싸움에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특히 일본을 상대로 한 자존심 싸움은 곧잘 우스꽝스러운 수준으로 굴러떨어지곤 한다.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습니다” “쇠퇴하는 일본 ‘선진국’ 격상 대한민국”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 같은 문구를 떠올려보자. 중학생, 아니 요즘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이렇게 유치하게 자존심을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소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한민국의 공식 채널에서 튀어나온다. 정말이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갓 개막한 도쿄올림픽을 순수한 마음으로 즐기기 어려운 이유도 그런 것이다. 코로나로 한 해 미뤄지고 지금도 확진자가 나오는 어려운 여건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의 올림픽 운영은 퍽 미숙해 보인다. 손기정 선수를 굳이 ‘일본 금메달리스트’라 표기하고, 일본 자위대 깃발인 욱일기를 대회장에서 사용하겠다고 고집하는 등, 논란을 자초하는 모습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손뼉도 맞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 올림픽은 전 세계 모든 나라와 함께하는 평화와 우정의 한마당이다. 그걸 마치 전쟁이라도 되는 양 일본과 벌이는 자존심 싸움으로 끌어내리는 우리 정부의 모습은 어른스럽지 않다. 한반도 모습을 한 호랑이 그림과 함께 ‘범 내려온다’고 써서 내건 것도 마찬가지다. 수궁가의 원래 맥락을 떠올려보면 이건 코미디다. 그 호랑이는 한입 거리도 안 되는 자라를 상대로 자존심을 찾다가 망신만 호되게 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21세기의 20여 년간 일본을 상대로 우리는 많은 영역에서 자존심을 회복했다. 한때는 한국 청소년들이 소니 워크맨으로 J팝을 듣고 자랐다. 지금은 전 세계인이 삼성전자 스마트폰으로 K팝을 듣고 있다. 우리의 자존심은 새로운 시대의 자존감으로 업그레이드되어야 마땅하다.

‘범 내려온다’는 산에서 내려온 허세 가득한 호랑이를 위한 노래가 아니다. 바다에서 올라와 자존심을 넘어 자존감을 찾은 자라 이야기다. 흥겨운 가락을 흥얼거리며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전을,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파이팅을 외쳐본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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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1

능력주의는 ‘갑질 면허증’인가

[노정태의 뷰파인더㊷] 마이클 샌델 ‘능력의 폭정’ 제대로 읽기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한국식 착각 

● 훨씬 급진적인 샌델의 주장

● ‘공정한 능력주의’조차 비판

● 보수 하이에크와 진보 롤스의 공통점

● 시장이라는 거대한 운의 산물

● 도덕 탈 쓰고 사람 깔보는 ‘가붕게’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감을…

●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과 ‘갑질 면허증’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2022학년도 수능 첫 모의평가가 실시된 지난 6월 3일 서울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 [뉴스1]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2022학년도 수능 첫 모의평가가 실시된 지난 6월 3일 서울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있다. [뉴스1]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품고 있는 착각을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샌델은 ‘더 나은 능력주의’, ‘더 착한 능력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능력주의 그 자체에 극복할 수 없는 결함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능력주의를 들어 엎어버리기 위해 책을 썼다.

그 목적의식은 책의 제목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능력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 ‘폭정’은 두 번 고민할 필요 없이 나쁘다. 불가피하다면 폭력 시위와 저항 운동을 통해서라도 벗어나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전복해야 할 무언가다. 현행 시스템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더 공정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하버드대 교수라는 간판과 온화한 말투 덕에 잘 감춰져 있지만, 샌델의 주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급진적이다.

이는 책의 서론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를 놓고 이뤄진다. (중략) 그러나 이 논쟁은 능력주의의 문제가 더 뿌리 깊은 것일 수 있음을 돌아보지 않는다.”(33쪽) 그 뿌리 깊은 문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199쪽)

‘자연 귀족정’과 ‘인위적 귀족정’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쓴 ‘공정하다는 착각’. 원제는 능력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이다. [미래엔 제공]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쓴 ‘공정하다는 착각’. 원제는 능력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이다. [미래엔 제공]

최근 국내에 불평등, 공정, 능력주의 등에 대한 담론이 많이 오갔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 역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렵잖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능력주의는 혈통이나 부에 따른 차별에 반대한다. 하지만 불평등 그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두뇌나 육체의 운동 능력, 예술적 감각 등 소위 ‘재능’이라 부르는 것과, 그 재능을 만개하게 해주는 ‘노력’을 합친 결과물인 ‘능력’(Merit)에 의한 차등 대우는 적극 찬성하는 게 능력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이는 기본적으로 능력주의에 기반을 둔 신생 독립 국가인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토머스 제퍼슨이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급진적인 공교육 체제를 주장하면서 한 말을 샌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제퍼슨은 재능과 미덕을 갖춘 ‘자연 귀족정’을 이야기했고, 그런 체제가 ‘부와 출생에 근거한 인위적 귀족정’을 압도하기를 바랐다.”(254쪽)

능력주의, 혹은 ‘자연 귀족정’은 완벽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공정한 여건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논쟁은 대부분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은 옳다고 전제한 후, ‘더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자’는 식으로 마무리되게 마련이다. 이는 엄밀히 말해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이 아니다. 능력주의의 ‘보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앞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의 현실 뿐 아니라 이상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안타깝게도 이 책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제목이 달라졌고, 그러한 ‘급진적’ 맥락은 감춰지고 말았다. 심지어 표지에는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는 샌델의 문제의식과 거리가 있다. 샌델은 아주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해졌다고 치자. 모든 아이에게 학교에서, 작업장에서, 그리고 인생에서 경쟁하는 데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치자. 그러면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진 것인가?”(198쪽)

‘신동아’를 비롯해 다양한 지면에서 능력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몇 편 썼을 때 내게 돌아온 반응은 대체로 싸늘했다. 격렬한 반발을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좌우를 막론하고 통용되는 일종의 종교적 힘을 갖고 있다. 그러니 샌델의 이와 같은 급진적(radical)인 비판을 도드라지지 않게 배치한 출판사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점을 뭉뚱그려버리면 ‘공정하다는 착각’은 반쪽짜리 책이 되어버리고 만다. ‘공정한 능력주의’도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논증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설령 모두에게 완전히 공평한 기회를 준다 한들 능력주의는 옳지 않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하이에크에게도 시장은 필연적 당위 없어

아무리 공정한 시스템을 설계해도 지능, 재능, 근성, 체력, 건강, 인맥 등 수많은 요소가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여기까지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퍽 친숙한 주장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그런 상투적인 비판을 넘어서는 책이다. 오래도록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지만 논의 수준은 평범한 대중 교양서를 넘어서고 있다.

샌델은 두 철학자를 언급한다. 본인이 평생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온 존 롤스, 그리고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지적 수호성인으로 여기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샌델은 하이에크의 입장을 ‘자유 시장 자유주의’로, 롤스의 입장을 ‘복지국가 자유주의’로 이름 붙인다. 두 철학자가 자유 시장에 대해 내놓는 결론은 확연히 다르다. 롤스는 국가가 나서서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하이에크는 아주 최소한의 것을 제외하고 나면 국가의 개입은 없어야 마땅하다는 편이다.

모든 사람이 완전히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여 생산, 소비, 거래하는 자유 시장을 떠올려보자. 능력주의의 목적은 바로 이런 완전한 자유 시장을 만들고, 유지하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자유 시장에 대한 긍정적 기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공정한 시장과 공정한 기회가 있다면 공정한 결과가 나오는가? 혹은, 그렇게 나온 결과를 우리는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시장경제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을 철학적 목표로 삼고 있던 롤스는 ‘아니오’라고 했다.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이에크 역시 ‘시장에서의 승패는 능력에 따른 보상이며, 따라서 능력주의는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입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샌델이 인용하는 바, 하이에크는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 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207쪽)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소년이 축구를 잘 하는 재능을 지니고 영국에서 태어났다면 고국에서 엄청난 스타가 될 수도 있지만,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적어도 자기 나라에서 그만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어렵다. 방탄소년단의 멤버들이 1821년에 태어났다면, 물론 각자의 재능과 노력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을 수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팝 스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유로운 대중문화와 시장경제라는 전제조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떠올려볼 수 있다.

하이에크가 볼 때 시장에는 필연적인 이유나 당위가 없다. 샌델에 따르면 여기까지는 롤스 역시 같은 생각이다. 다만 두 철학자는 시장이라는 거대한 운의 산물과 그에 대한 불평등에 대한 입장이 다를 뿐이다. 롤스는 그 불평등한 결과를 정부 혹은 상위의 권력이 개입하여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반면 하이에크는 시장 자체가 도덕과 무관하므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시장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다.

롤스와 하이에크를 명료히 다듬다

2014년 12월 3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로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동아비즈니스포럼 2014’에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치유할 대안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2014년 12월 3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로 쉐라톤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동아비즈니스포럼 2014’에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치유할 대안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두 입장에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이 있다. 아무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공정한 기회’를 보장한다고 해서 능력주의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이 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을 두 명, 아니 세 명의 철학자가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샌델 역시 ‘시장의 우연성’이라는 논제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샌델이 해석하고 인용하는 바, 보수적인 하이에크와 진보적인 롤스 모두 능력주의에 반대했다. 샌델은 본인의 능력주의 비판을 그러한 맥락 위에 배치하고 있다.

27세에 최연소로 하버드대에서 철학 교수가 된 샌델의 실력은 바로 이 대목에서 빛난다. 그는 두 거물 철학자의 까다로운 논의를 평이한 문장으로 명료하게 다듬어 자신의 논지에 맞도록 제시한다. 그 과정에 롤스나 하이에크의 사상을 어느 정도 ‘왜곡’하고 있는지 따져 묻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 중요한 건 ‘공정하다는 착각’이 능력주의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비판을 담은 책이라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샌델은 능력주의의 개선이 아닌 극복을 주장하고 있다.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논의가 퍽 오래도록 오가고 있음에도 이 점을 언급하는 서평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능력주의가 현실적으로는 잘못될 수 있지만 본래의 취지는 옳다는 확고한 믿음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샌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볼 때 능력주의는 ‘원론적으로 옳지만 현실적으로는 미흡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능력주의는 아무리 선한 목적으로 도입하고 잘 운영해도 결국은 공동체를 해치고 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 그 본질적 속성은 교정 불가능하다. 책의 원제가 ‘능력의 폭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샌델에게 능력주의는, ‘악’이라고 말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사회적 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혈통이 아닌 재능에 따라 부와 지위를 나누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쁘다는 말인가? 이 지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서평과 인용을 통해 많이 논의된 바 있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감을 안겨준다. 그런 오만한 태도는 민주주의를 논하기에 앞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인간의 본성에 반한다.

앞서 말했듯 샌델은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운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장의 존재나 크기 역시 운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의 성공이나 실패에는 거들먹거리며 내세울 것도 없고, 위축되고 쪼그라들 것도 없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점령하고 세계적으로도 번져나간 능력주의 신봉자, 테크노크라트, 고학력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을 본인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자신들과 같은 ‘능력’을 지니지 못한, ‘스마트’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멸시의 시선을 보낸다.

서울대 청소노동자와 ‘능력의 폭정’

이는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누구는 ‘가재 붕어 게(가붕게)들은 용이 되지 않고도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며 시혜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기도 한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것보다 이렇게 도덕의 탈을 쓰고 사람을 깔보는 게 때로는 더 모멸적일 수도 있다는 점을 몰라서 그러는 걸까.

한국이건 미국이건, 능력주의를 노골적으로 찬성하건 겉으로는 비판하는 척하면서 그 지배적 위치를 즐기건, 능력주의의 승리자들이 하는 행동은 비슷하다. 자식들을 어떻게든 명문대에 입학시켜 ‘능력’을 입증하려 들고, 고학력 엘리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세상의 규칙을 바꿔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능력의 폭정’이며, 이는 개선이 아닌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다.

적잖은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어느 정도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능력주의를 완전히 폐기하면 대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자는 것인가? 단순한 신분제 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샌델은 추첨을 통한 대학 입학,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기회의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이 아닌 ‘조건의 평등’ 같은 답을 제시하지만 모두 독자를 만족시키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대체로 그렇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현실의 해법을 강하게 외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공정하다는 착각’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 반대로, 우리는 이 책의 근본적인 비판에 귀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다. 지난 6월 26일 서울대 기숙사 청소노동자였던 59세의 이 모씨가 사망한 사건을 생각해보자.

청소노동자를 관리하는 안전관리팀장은 새로 부임한 후 청소부를 대상으로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관악학생생활관’을 영어 혹은 한자로 써라, 대학 건물에 붙은 숫자와 명칭을 대라, 각 건물의 준공연도를 적어라 따위가 문제의 내용이었다. 고인의 유가족에 따르면 안전관리팀장은 청소노동자에게 이런 시험을 보게 한 후 점수가 낮으면 공개적으로 무안을 주었고, 그것은 고인에게 큰 스트레스를 안겼다. 건물을 청소하는 능력을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지필시험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직 사안의 전모가 밝혀졌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이것은 ‘능력의 폭정’이다. 본인들은 시험을 잘 봐서 정규직, 사무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이들이, 청소노동자를 ‘능력’이 부족하고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하며 모멸감을 줬다. 적어도 고인은 그렇게 느꼈고 고통을 가족에게 호소했다.

고작 시험 몇 개 잘 봤다고…

능력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능력주의의 횡포에 대해 비판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비단 이번에 발생한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 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고작 시험 몇 개 잘 봤다고 평생 으스대고 남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능력주의는 ‘갑질 면허증’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순간 능력주의는 순식간에 타락한다. 신분제에 비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장점마저 순식간에 잃고 만다. 우리는 그 어떤 시험을 봤건, 떨어졌건, 무슨 일을 하건 누구의 자식이건, 존엄한 존재로서 겸허한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공정 #능력주의 #마이클샌델 #서울대청소노동자사망 #신동아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1-07-10

[노정태의 시사哲] 미군이 점령군? 낡은 역사 판타지에 빠져 '백 투 더 조선' 외치지 마라

 

[아무튼, 주말] 영화 '백 투 더 퓨처'로 본 이재명 대한민국 건국 논쟁
일러스트=유현호

미국의 작은 도시 힐 밸리에 사는 평범한 고등학생 마티 맥플라이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번 주 토요일 밤으로 예정된 댄스 파티에서 조지와 로레인이 키스하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티뿐 아니라 마티의 형과 누나의 목숨이, 아니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마티가 원래 살던 1985년이 아니라 1955년. 마티는 괴짜 과학자 브라운 박사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왔다. 본의 아니게 조지와 로레인의 첫 만남을 방해해버렸다. 문제는 조지와 로레인이 마티의 부모님이라는 것. 게다가 로레인은 조지가 아닌 마티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다. 마티는 로레인의 관심을 피하면서, 조지를 더 남자답게 만들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정해진 날 정해진 장소에서 키스를 하게 해야 한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내용이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이야기의 역사는 짧지 않다. 영국의 소설가 H G 웰스가 ‘타임머신’을 출간한 18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시간 여행 그 자체에 대한 물리학적, 철학적 고찰이 시작되려면 천재 두 명이 더 필요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불완전성의 원리’로 유명한 수학자이며 논리학자 쿠르트 괴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빠르게 움직이거나 강한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는 물체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중 한 사람은 지구에 남고 다른 한 사람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이동하는 우주선에 탑승한 후 수십 년이 지나 지구로 돌아온다면, 지구에 남아있던 쌍둥이는 노인이 되겠지만 우주선을 탄 쌍둥이는 나이를 거의 먹지 않은 채 돌아올 것이다.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이다. 가령 인공위성의 시계는 중력의 영향을 덜 받지만 워낙 속도가 빨라서 지표면의 시계보다 느리게 작동한다. 인공위성은 미세하게나마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오차를 꾸준히 보정해주지 않으면 스마트폰과 내비게이션의 위치를 확인해주는 GPS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상대성이론 속에 살고 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두 유대인 천재는 프린스턴 대학의 고등연구소에서 만났고 곧 단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괴델이 아인슈타인에게 말했다. “제가 일반 상대성이론을 이용해서 새로운 우주 모델을 만들어 봤습니다. 그 우주에서는 특별한 상상력을 동원한 장비 없이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죠.” 철학자이며 과학 저술가인 짐 홀트의 책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괴델 우주’를 검토하고 오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심란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괴델 우주가 출현하면서 시간 여행은 과학에 근거를 둔 논리 퍼즐이 되었다. 그것을 ‘타임 패러독스’라 부른다. ‘백 투 더 퓨처’도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작품이다. 스스로를 태어나지 못하게 만든다면? 아직 발표되지 않은 히트곡을 원작자에게 들려준다면? 어떤 스포츠팀이 이길지 결과를 미리 다 알아놓고 도박을 해서 돈을 번다면?

영화와 창작물의 세계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타임 패러독스를 피해간다. 그 퍼즐 게임을 보는 것이 시간 여행물의 재미 중 하나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논리적 분석은 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괴델 우주에 살고 있지 않고,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 당연한 소리다. 어떤 식으로건 과거에 영향을 준다면 같은 미래에 도달할 수 없고, 같은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면 시간 여행자의 존재가 부정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 위에 세워진 현재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김원웅 광복회장은 1945년 해방 정국에서 미군이 점령군이었고 소련군은 해방군이었다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한 발 더 나아가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 등 일부 지식인은 미국의 공식 포고령에서 ‘점령(occupy)’이라는 단어를 썼으니 그저 ‘팩트’를 말했을 뿐이라며 편을 들었다.

분명한 사실부터 이야기해보자. 미군이 스스로를 ‘점령군’이라 칭한 것은 공문서의 어휘다. 반면 소련군이 스스로를 ‘해방자’라 부른 건 선전용 문서에서 나온 말이다. 미군의 표현이 증명사진이라면 소련군의 표현은 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위해 필터를 잔뜩 먹인 셀카와 마찬가지다. 소련과 북한의 ‘쌩얼’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이들은 이승만이 단독 정부를 수립하지 않았거나, 혹은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과 유엔군이 패배하는 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면, 우리의 역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거라는 망상을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낡은 역사책에 기반한 일종의 시간 여행 판타지에 푹 빠져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리하여 진정한 민족국가를 세울 수만 있다면!

1945년, 남과 북의 조건은 거의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미군에게 ‘점령’당한 반면, 북한은 소련을 통해 ‘해방’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76년이 흐른 지금 두 나라는 완전히 다르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쌍둥이 실험을 보는 것만 같다. 미국이라는 로켓을 타고 넓은 우주로 나간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선 반면, 소련을 통해 ‘해방’되고 중국의 품에 안긴 북한은 세계 최악의 인권 탄압 독재 국가로 주저앉아버렸다. 우리는 미국에 ‘점령’되면서 자유를 얻었고, 북한 주민들은 소련을 통해 ‘해방’된 후 압제에 시달린다. 누가 점령군이고 누가 해방자인가.

풍요로운 대한민국에서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마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처럼 묘사한다. 그들 소원대로 미군이 ‘점령’하지 못했다면 그들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은 존재할 수도 없었다. 전형적인 타임 패러독스다. 다 큰 어른들이 그들만의 역사 판타지 속에 허우적거리며 ‘백 투 더 조선’을 외치고 있다. 사상의 자유는 존중하지만 본인들이 낡고 후지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를 바란다. 국민은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백 투 더 퓨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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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4

아동용 카시트 의무화와 출산율 감소 - 1970년대 미국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출산율 감소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 아동용 카시트 장착을 의무화하면서, 평범한 승용차에는 애 셋을 태울 수 없게 된 시점과, 셋째 아이 출산 포기 가정이 늘어난 시점이 맞물린다는 분석.

물론 오비이락일 수 있겠지만 흥미로운 관찰이긴 합니다. 중요한 건 이런 연구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 0.8까지 떨어진 출산율을 회복해야 한다며 제대로 된 분석 없이 허구한날 여자 욕만 하고 개허접한 캠페인이나 하는 한국 사회와 여러모로 대조된다고 하겠습니다.

https://www.economist.com/science-and-technology/2020/11/26/child-safety-laws-may-reduce-the-birth-r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