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2

숫자놀음 취한 윤석열·홍준표, 이것은 노무현의 유산이다

 

[노정태의 뷰파인더㊿] 대선판 좌우하는 여론조사 중독증

● ‘조국기 부대’ 충성심 건드린 질문
● ‘조민 부산대 의전원 입학취소’ 찬반
●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의 추억
● 역선택은 20여 년 전에도 있던 현상
● 의제·담론·시대정신 압도하는 여론조사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9월 7일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체인지 대한민국, 3대 약속’ 발표회에서 예비후보들이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왼쪽부터 윤석열, 홍준표, 박진, 하태경, 유승민, 원희룡, 장기표, 최재형 예비후보.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대선 경선 여론조사에 '역선택 방지' 문항을 넣을지 여부를 두고 국민의힘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후보마다 찬반이 갈렸다. 결국 지난 9월 6일 역선택 방지 문항 대신 '본선 경쟁력' 문항을 넣는 것으로 갈등은 봉합됐지만, 여론조사에 따라 춤추는 정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역선택을 하는 사람들, 역선택하는 유권자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역선택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역선택은 실재하는 현상이다. 누군가는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오면 역선택을 한다. 문제는 역선택 등 여론조사 교란 행위를 원천 봉쇄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하는지, 또 이런 논란이 벌어지는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에 있다.

‘조국기 부대'의 충성심

지난 8월 27일부터 28일까지, 데일리안 의뢰로 여론조사공정(주)이 진행한 '데일리안 국내현안 정기 여론 조사 결과 보고서'를 살펴보자.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평가 비율, 정당지지율, 차기 대선후보 선호도, 여야 양자대결 등 정기 여론 조사라면 빠지지 않는 질문들이 등장했고, 답변은 통상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 중에는 여당 지지층, 특히 이른바 '조국기 부대'의 충성심을 건드리는 질문이 하나 포함돼 있었다. 아홉 번째 질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님께서는 부산대학교가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 씨에 대하여 입학 취소 예비 행정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응답결과, 전체 응답자 중 '잘한 일이다'는 55.9%, '잘못한 일이다'는 31.5%, '잘 모르겠다'는 12.7%로 나타났다. 조민의 입학 취소는 위조된 서류를 제출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대학 측에서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가 없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잘못한 일이다'라고 대답한 사람이 31.5%에 달하며, 열 명 중 한 명 이상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은 조민의 입학 취소 처분 자체가 맹목적인 정치 갈등의 쟁점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결과표를 좀 더 자세히 읽어보자.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중 조민의 입학 취소 처분에 찬성하는 사람은 21.6%에 지나지 않으며, 60.5%가 반대의 뜻을 표하고 있다. 반면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이들은 87.9%가 조민의 입학 취소 처분에 찬성한다. 심지어 정의당 지지자들 또한 72.5%가 입학 취소 처분에 찬성하며, 반대하는 사람은 14.6%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조민 부산대 의전원 입학취소' 찬반 여부는 민주당(과 열린민주당) 열성 지지층을 가려내는 '후미에(踏み絵)'로 기능할 수 있다. 일본의 에도 막부 시절, 지배층은 기독교 신자들을 가려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나 성모 마리아 등이 새겨진 성화상을 밟고 지나가라고 했다. 그런 절차나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화, 조각 등을 후미에라고 한다. 일본의 기독교 신자들은 후미에를 통과하지 못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처형장에 끌려갔다.

이번 조사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견됐다. 윤석열 지지층 중 조민의 입학 취소에 반대한 사람은 8.8%였다. 국민의힘 지지층의 전반적 성향과 맞아떨어진다. 반면 홍준표를 대선 후보로 지지한다는 사람 중 조민의 입학 취소에 반대하는 이는 59.8%다. 홍준표를 대선후보로 지지하는 사람 중 60%가 '철봉에 매달린 조국 그리스도와 성스러운 가족'을 밟고 지나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신앙이 돼버린 정치가 낳은 웃지 못 할 희극이다.

물론 이 글은 홍준표가 국민의힘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게 아니다. 위에 인용한 조사를 두고 논의를 이어가보자. 국민의힘 지지층 중 12.1%는 조민 입학 취소에 반대하거나 유보적인 입장이다. 또 조민 입학 취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 해서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법도 없다. 가장 첨예한 주제에 대해 본인이 속한 정당과 입장이 다른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면, 즉 '집토끼'가 아니라 '산토끼'를 잘 잡는 후보라면, 그건 장점일 수도 있다.(이하 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등을 참조).

‘받으면 노무현이라고 답하라'

2002년 11월 16일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왼쪽)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서울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후보단일화 방식과 절차에 전격 합의한 뒤 서로 얼싸안고 있다. [동아DB]
여론조사 역선택은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대한민국 같은 정치 과잉 사회에서 정치에 관심이 매우 큰 집단이 여론조사에 '인위적 실수'를 가하는 일은 가능하고 실제 사례도 존재한다.

2002년 11월 24일 자정을 앞둔 늦은 밤. 서울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은 시끌벅적했다. 곧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노무현과 국민통합21 대선후보 정몽준의 단일화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별도의 여론조사기관 두 곳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경쟁할 단일 후보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뒤였다.

‘노풍'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노무현. 2002년 월드컵의 대성공으로 노풍 못잖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정몽준. 새천년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협의회', 일명 '후단협'을 만들어 노무현을 압박했다. 승부사 노무현은 또 한 번 도박을 했다.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 단일화 게임이 시작됐다. 노사모 뿐 아니라 노무현을 지지하는 네티즌들이 모이는 게시판들이 모두 후끈 달아오른 참이었다.

1983년생인 필자는 당시 만 19세여서 대선 투표권이 없었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 '안티조선 우리모두'에 붙어살았기 때문에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집에 걸려올 수 있는 여론조사 전화를 받아야 한다며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자기 집만 챙기는 게 아니라 본인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친인척들에게 '여론조사 전화 꼭 받아라, 받으면 노무현이라고 답하라'며 사실상 선거운동을 했다.

분위기 과열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을까. 이미 그때부터 '여론조사 역선택'을 고려한 문항 설계가 이뤄졌다. 이회창 지지자들의 전략적 역선택을 우려해, 일단 이회창 지지여부를 묻고, 그 다음 이회창과 맞설 단일후보로 누가 더 적합하냐고 질문하는 식의 조사가 진행됐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싸움의 승자는 노무현이었다. 리서치앤리서치가 조사한 여론조사 결과, 단일 후보 선호도에서 노무현 후보 46.8%, 정몽준 후보 42.2%로 노 후보가 4.6% 포인트 차로 이겼다. 문제는 또 다른 여론조사기관 월드리서치의 조사 결과였다. 노무현 후보 38.8%, 정몽준 후보 37.0%. 1.8%포인트 차이로 노무현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 결과는 반영되지 않았다.

왜였을까? 앞서 말한 '역선택 방지 조항'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월드리서치 조사에서 이회창의 지지율은 28.7%에 그쳤다. 이회창이 대선에서 얻은 46.6%라는 득표율을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숫자다. 역선택의 결과였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양측은 이회창의 지지율이 30.4%보다 낮을 경우 여론조사를 무효로 본다는 조건에 합의했고, 이에 월드리서치 조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윤석열의 '지지율만을 위한 지지율 정치'

즉 여론조사에서 역선택은 20년 전에도 실제 벌어졌다. 2002년에도 있었고 유의미했던 역선택 방지 조항을 2021년에 넣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홍준표, 유승민 등 역선택 방지 문항에 반대한 몇몇 국민의힘 대선 주자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낱 여론조사 숫자놀음으로 전락해버린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역사적 맥락에서 반성하자는 게 이 글의 주제다.

사실 2002년 16대 대선 이전에도 여론조사는 중요한 참고 자료로 쓰였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 목적이었다. 풍운아 노무현이 그 흐름을 바꿨다. 그는 이회창과의 가상 대결에서 승산이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결국 노무현은 여론조사를 통해 정몽준을 꺾고 여권 단일 후보가 됐다. 그리고 여론조사대로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한국 정치는 그 어떤 의제나 담론이나 시대정신보다 여론조사를 앞세우는, 아니 차라리 맹신하는, 일종의 숫자놀음이 되고 말았다. 그 흐름은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부터가 그렇다. 그가 야권 유력 대선 후보로 부상한 것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기소하고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도 묵묵하고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런 윤석열을 보며 국민들은 문재인 정권과 함께 무너져버린 상식과 법치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심지어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감옥에 넣었다며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던 열성 야권 지지층마저 윤석열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지금의 윤석열은 어떤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국민의힘에 입당한 후의 행보를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입을 열면 지지율이 떨어진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의 학습효과를 거치더니 지금은 그저 '지지율만을 위한 지지율 정치'를, 즉 묵언수행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지율 유지를 위해 강아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공개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가 9월 5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공정경선 서약식 및 간담회’에서 정홍원 선거관리위원장(오른쪽)에게 인사하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첫 행사로 열린 이날 간담회에는 대선 주자 12명 중 4명이 역선택 방지 조항 도입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불참했다. [뉴스1]

납득하기 어려운 홍준표의 생각

여론조사 역선택은 존재한다. 여론조사를 정치적 의사결정에 반영할 거라면, 유력 후보들은 기꺼이 역선택 방지 문항에 찬성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태도다. 그 점에서 홍준표 등이 보여준 역선택 방지 문항 반대 입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론조사에 나오는 지지율 뒤에 숨어 유의미한 정치 메시지를 내놓지 않는 윤석열의 모습 역시 칭찬할 수 없다. 정치를 시작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정치 신인이 그토록 큰 국민적 기대를 받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행보를 보여줘야 한다.

숫자놀음을 뛰어넘은 정치, 여론조사가 아닌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 정치 의제로 승화시키는 큰 정치, 그런 정치를 보고 싶다.

#역선택 #여론조사 #윤석열 #홍준표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9-10

BTS가 99칸 한옥 지어 산다면...이낙연 후보님 왜 안됩니까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고전을 한 이낙연 전 총리가 지난 15일 "더 큰 가치를 위해서"라며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다. 당내 선두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관련한 '무료 변론 의혹' 등 네거티브 전략도 수정할 의향을 내비쳤다. 이 전 총리의 패배가 진작에 배수진을 치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네거티브 탓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확실히 문제가 있는 공약은 있다. 그중 하나가 부동산 문제다.
지난 7월 6일, 이낙연 전 총리는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택지소유 상한제를 23년 만에 부활시키자는 '토지독점규제 3법'(토지공개념 3법)을 대표 발의한 것이었다. 제시된 법안은 국토계획법상 도시지역 중 택지에 대해 법인의 소유를 막고, 개인의 경우 1인당 최소 1320㎡(약 400평)에서 최대 3000㎡(약 800평)까지만 소유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사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담은 법이 대한민국에는 이미 있었다. '택지소유 상한에 관한 법률'인데, 1989년 위헌 결정으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위헌 결정이 나오게 된 결정적 요인은 면적이 1인당 200평, 즉 660㎡로 너무 좁았던 데다 일률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낙연 후보 측은 새로운 택지소유상한법이 그런 요소를 모두 고려하고 있으므로 괜찮다는 입장이다.

한번 따져보자. 이 후보가 새로 제안한 토지독점규제 3법은 민간 임대업의 규모를 대폭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연인이 소유할 수 있는 택지의 면적에 제한을 두고 법인 역시 택지를 가질 수 없게 한다면 남에게 팔아버리는 것 외에 '합법적'인 선택지는 더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후보 측에서도 그러한 정책 방향을 인정한다. 1인당 택지 소유 면적에 제한을 두면 매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국가는 저렴한 가격에 매수하여 거기에 공공주택을 짓겠다는 큰 그림이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이낙연 전 대표가 지난 7월 6일 국회에서 택지소유상한법과 개발이익환수법, 종합부동산세법 등 소위 토지공개념 3법 대표 발의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이낙연 전 대표가 지난 7월 6일 국회에서 택지소유상한법과 개발이익환수법, 종합부동산세법 등 소위 토지공개념 3법 대표 발의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연 그게 뜻대로 될까? 한국보다 공공임대주택의 비중이 높은 유럽 여러 국가를 보면,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전체 주택 중 19%가 공공임대주택이며 20%의 민간임대주택 역시 임대료 상한제 등 다양한 규제로 묶여 있는 스웨덴의 경우를 살펴보자. 임대업으로 수익을 낼 수 없기에 임대주택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 인구 100만 명의 도시 스톡홀름에서 임대주택에 들어가고 싶다고 신청하고 대기하는 사람만 50만 명이 넘는다. 세입자 보호라는 명목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박탈되고 있는 꼴이다.

여기까지는 부동산을 비롯한 경제 분야의 전문가들이 많이 지적해왔던 부분이다. 나는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새로운 택지소유 상한제는 국민, 특히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의 창의적 도전 욕구를 가로막는다. 이 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꿀 수 있는 꿈의 상한선이 그어지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조앤 롤링의 스코틀랜드 저택.

조앤 롤링의 스코틀랜드 저택.

『해리 포터』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J. K. 롤링. 그는 스코틀랜드에 성(城)을 구입해 살고 있다. 그 면적은 자그마치 65만㎡, 약 20만 평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영국 에든버러에 225만 파운드짜리 저택을 샀다. 두 건물 모두 주거용 건물이니, 의심할 나위 없이 한국에서라면 택지소유상한법을 훌쩍 어기는 셈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은 한때 자신의 저택에 놀이동산을 짓고 동물원을 만들었다. 엘튼 존 역시 영국 우드사이드 등에 큰 저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정원의 마구간을 개조해서 자신만을 위한 녹음실을 차리기도 했다. 최근 이혼당한 빌 게이츠는 시애틀에 욕실만 24개인 저택을 지니고 있는데,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는 그런 취향을 비웃으며 실리콘 밸리의 평범한 주택에 산다. 대신 프라이버시 확보를 위해 이웃집도 몽땅 매입해버렸다.
일부 부자들의 돈 자랑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자. 빌 게이츠가 사는 것 같은 저택을 카카오 창업자 김범수가 갖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요즘 세계 젊은이들에게는 엘튼 존보다 더 유명한 BTS의 리더 RM이 99칸, 아니 199칸 넘는 한옥을 지어서 자기 집을 미술관처럼 꾸미면 안 되는가.
김범수나 RM이 그 정도 성공의 과실은 누릴 자격이 충분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몇몇 분야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주자라면 1인당 800평이 아니라 8000평이 넘는 집도 가질 수 있어야 마땅하다. 이 당연한 상식이 누군가에게는 그리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듯하다. 아무리 큰 재능과 치열한 노력을 통해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다 해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온전히 살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성공하기도 전에 꿀 수 있는 꿈의 크기를 제한해버리는 나라. 대한민국은 그런 의미에서 2021년에도 여전히 집단주의 국가다. 이제는 개인에게 개인의 삶을 허하라.

2021-09-05

탈레반 폭정을 '다문화'라는 자칭 진보들에게

 

[노정태의 뷰파인더㊾] 카불 함락에 대한 철학적 해석

● ‘제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
● 美 민주·공화 공히 아프간 철군 선호
● ‘역사의 종언’ 이후의 정체성 정치
● 탈레반의 ‘문화’도 존중의 대상인가
● ‘다문화’라 쓰고 ‘억압’이라 읽는다!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아프가니스탄 무장단체 탈레반의 지도부들이 8월 15일(현지 시간)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에 모여 있다. [AP 뉴시스]
역사의 종언(The End of the History).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제시한 개념이다.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 국가들의 이탈과 격동이 가시화되던 1989년,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발표한 논문에서 후쿠야마는 야심찬 주장을 내놨다.

역사는 끝났다. 여기서 우리는 후쿠야마가 '역사'라는 단어를 일반적인 뜻으로 쓰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차원의 역사라면 인류가 단번에 멸망하지 않는 다음에야 종언을 고할 수 없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역사'란 거대 담론과 투쟁의 역사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한 권리를 갖고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하면 더 나은 세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유민주주의와,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가 독점 관리할 때 인류가 더 나은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공산주의의 투쟁이, 공산주의의 패배로 마무리됐다는 의미다.

그 결과, 짧게 보면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인 1917년부터 동구권이 해체되기 시작한 1989년까지, 혹은 19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치열하게 이어져온 거대 담론과 투쟁의 시대가 끝났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자본주의 국제 경제 체제의 일부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헌신하던 청년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던 이들은 일순간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으로 인해 니체가 말한 '마지막 인간'만이 남게 될 것이라 보았다. 니체의 '마지막 인간'이란 그 어떤 숭고하고 위대한 업적에도 관심이 없고 그저 말초적인 쾌락과 안전에만 몰두하는 자다. 역사의 위대한 투쟁이 사라졌으므로 위대한 인간도 없다. 역사의 종언, 자본주의의 승리로 인해 온 세상은 자본주의의 단일한 질서 속으로 편입됐다. 모든 인간은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감각적 쾌락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정체성 정치'의 매혹

8월 30일(현지 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의 은행 앞에 현금을 찾으려는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후 현금 인출 수요가 폭증하자 탈레반은 시민들의 인출 금액을 한 주에 200달러로 제한했다. [AP 뉴시스]
이 대범한 주장은 논문의 형태로 발표되었던 1989년부터 큰 충격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91년 소련의 붕괴를 목격한 후 1992년 논문을 확장하여 '역사의 종말'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했을 때, 후쿠야마의 명성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반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났다"는 대전제를 반박할 수는 없었다.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사실이 그러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진보 운동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현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이념 혹은 최소한의 방향이 절실했다. 하지만 냉전은 끝났고 20세기 진보 운동의 가장 큰 밑거름이었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현실에서 파탄을 맞이했다. 대체 무엇으로 그 빈자리를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1990년대부터 문화, 특히 '다문화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은 것은 그래서였다. 자본주의 체제 극복을 위한 대안 논리를 사회주의 이론과 현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대신 문화, 인종, 종교, 젠더 등 다양한 '차이'의 요소를 발견하고 드러내어 논쟁하는 담론이 힘을 얻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나라 미국에서 '역사의 종언'은 곧 미국을 향한 애국심의 종언을 뜻했다. 미국의 엘리트 지식인, 특히 진보 성향이 강한 지식인들은 애국심을 드러내는 것, 혹은 아예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됐다. 대신 그들은 문화의 '차이'를 직시하기 시작했다. 하버드대에서 후쿠야마에게 국제정치학을 가르친 스승인 새뮤얼 헌팅턴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교육받은 미국의 엘리트 계층에서 국가적 정체성은 때로 멀리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세계화, 다문화주의, 범세계주의, 이민, 하부국가주의, 그리고 반국가주의가 미국인들의 의식을 약화시켰다. 대신에 민족적, 인종적, 그리고 성적 정체성이 전면에 부상했다."

이는 '역사의 종언'과 함께 놓고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투쟁이 살아있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미국 지식인에게 국가적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편에 선다는 말과 동일했다. 반대로 국가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공산주의, 혹은 공산주의가 표방하는 국제주의와 이상주의의 편에 선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냉전이 끝나고 거대 서사가 사라졌으므로, 엘리트 지식인들은 국가나 이념이 아닌 다양한 '정체성 정치'에 매혹되고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국의 무덤'

다소 길고 복잡한 설명을 내놓은 이유가 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그에 따른 여파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흔히 아프가니스탄을 '제국의 무덤'이라 부른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속 없는 전쟁을 벌이다 퇴각하고 말았던 그 전철을 미국 또한 밟고 있다. 소련이 치렀던 20세기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의 국력을 약화시켰고 냉전의 종말을 불러온 중요한 기점이 됐다. 그렇다면 미국이 소련과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럽게 상처투성이의 퇴각을 하고 만 것 역시, 거대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프가니스탄 철군은 중동에의 군사적 개입을 줄이고자 하는 미국의 전략적 방향에 따른 행위다. 바이든 대통령이 성급하게 미군을 철수시키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지만, 중동에서 발을 뺀다는 전반적 방향은 민주당과 공화당 가릴 것 없이 미국 정계가 대체로 공유하고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 냉전의 종식과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초강대국 미국의 탄생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거칠게 요약하면 거대 담론을 중심으로 한 진보 운동의 시대가 저물고,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 등을 앞세운 새로운 진보 운동의 시대가 개막했다.

그러한 흐름은 1960년대에 시작돼 199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다. 다시 한 번 헌팅턴의 책을 인용해보자.

"1990년대에 이르러 전문가들은 해체주의자들의 승리를 선언하기 시작했다…그리고 1997년에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학자 네이던 글레이저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우리 모두는 다문화주의자다'."

헌팅턴은 2001년 발생한 9·11 테러와 그 여파는 다문화주의의 승리에 약간의 제동을 걸었지만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불러오지는 못했다고 지적한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는 다문화주의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라! 차이를 존중하라!' 이와 같은 요구를 하는 것만으로 진보적 논의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소총으로 무장한 탈레반 군인들이 8월 28일(현지 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픽업트럭을 타고 시내를 순찰하고 있다. [AP 뉴시스]

그 문화는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

8월 15일 카불 함락은 그런 면에서 국제정치적 사건을 넘어서는 철학적 사건이다. '역사의 종언' 이후의 지성계를 지배해온 다문화주의의 파국을 전 세계인에게 생생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2021년 현재도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다문화주의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많은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테다. 하지만 다문화주의에 기반을 둔 정책은 진지한 도전과 검토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처절한 실패 사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카불 함락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자. 탈레반은 마치 자신들이 달라진 것처럼 홍보했지만, 막상 점령이 시작되고 나니 그들의 행태는 이전과 다를 바 없다. 온 몸을 두르고 눈까지 가려야 하는 억압적인 의상 '부르카'를 마련하지 못한 여성들은 출퇴근도 하지 못한 채 집에 갇혀 있다. 현장을 중계 중이던 CNN의 여성 기자가 탈레반에게 폭행당하는 일도 있었다.

탈레반의 억압이 오직 여성에게만 향하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 엄숙주의와 계율에서 벗어난 그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폭력으로 짓눌러야 할 무언가로 여겨진다. 탈레반을 풍자하던 코미디언, 아프가니스탄 전통 민요를 발굴하고 부르며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던 가수 등도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다.

다문화주의는 모든 문화와 관습에 나름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공적 영역에서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때로는 지나치거나 소모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지만, 특정 국가 안에서 다문화주의 담론과 그에 따른 논쟁은 그간 소외돼 있던 이들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면에서 유익할 때가 많다.

‘다문화주의의 종언'

문제는 다문화주의 관점을 타국의 경우에도, 혹은 타국에 존재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문화'에도 적용할 수 있느냐다. 모든 문화와 관습에 나름의 이유와 존재의 당위가 있다는 주장을, 탈레반의 만행을 지켜보며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문화, 종교, 관습 등을 '다르다'며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탈레반의 극단주의도 하나의 문화라고 한다면, 그 문화는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이다.

물론 미국은 20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점령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평범한 사람들 상당수가 지지하는 문화와 관습을 바꾸는 데에는 실패했다. 실제로 많은 지역에서는 정부군이 아닌 탈레반이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틀린 문화'를 존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카불 함락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이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논의가 주한미군 철수라던가 자유의 소중함 같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주제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역사의 종언'을 넘어 '다문화주의의 종언'을 목격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탈레반 #카불함락 #다문화주의 #부르카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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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4

탈북자는 내치고 아프간 난민은 환대하는 文정권의 이중 잣대

 

[노정태의 시사哲]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의 '무조건적 환대'는 가능할까

1815년 10월, 프랑스. 디뉴 교구 미리엘 주교의 집에 낯선 이가 찾아왔다. 한동안 자르지 않은 더벅머리에 초라한 행색을 한 그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노란색 통행증에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장 발장, 석방된 강제 노역수. 도형장에 십구 년 동안 있었음. 절도 및 가택 침입으로 오 년. 도주 미수 네 번, 십사 년. 이 사람은 매우 위험함.’

미리엘 주교는 그를 쫓아내지 않았다. 장 발장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침대에 새 시트를 깔아주었다. 가정부가 소박한 식기에 음식을 내 오자 손님을 맞이할 때 쓰는 은제 식기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주교는 장 발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곳은 저의 집이기보다 당신 집입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은 당신 것입니다. 당신 이름은 저의 형제라 합니다.”

일러스트=유현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묻지 않고, 그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순수한 박애의 마음으로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미리엘 주교 모습에서 우리는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느낀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철학적 화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환대’(hospitality), 그중에서도 ‘무조건적 환대’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환대를 두 종류로 구분했다. 흔히 생각하는 환대는 ‘조건적 환대’다. 손님이 누구인지, 주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이번에 베푼 환대가 나중에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올지 등의 조건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따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대로 ‘무조건적 환대’란 그러한 계산 없이, 아무 질문도 고민도 없이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환대에 대하여>에서 데리다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편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환대 개념을 파헤쳐 들어간다. 그에 따르면 이방인(xenos)에게는 관용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또한 주인에게는 이방인을 환대할 의무가 있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현대에도 더러 남아 있다. 중동이나 서남아시아 유목민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때까지 대접한다. 알래스카의 이누이트족은 손님이 아내와 동침할 수 있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 기준에서는 터무니없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환대가 법으로 정해져 있거나 어길 수 없는 관습으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낯선 이에 대한 성대한 대접마저도 결국은 조건적 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조건적 환대란 무엇인가? ‘너는 이방인을 환대하라’는 명령과 지시가 없는데도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이다. 법 없는 법이며, 명령하지 않고 요청하는 호소에 가깝다. 따라서 무조건적 환대는 이상적 지향점으로 작동할 뿐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해체(deconstruction)의 철학자인 데리다는 난해한 논의와 현란한 말장난으로 ‘악명’ 높은 사람이다. 철학이란 이름으로 비현실적 요구를 들이밀지 모른다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환대에 대하여>는 ‘환대’에 대한 서구 지성계의 통상적 논의와 결이 다르다. 무조건적 환대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롯과 두 딸 이야기를 인용한다. 소돔에 사는 롯의 집에 두 천사가 사람 모습을 하고 찾아왔다. 롯은 ‘조건적 환대’에 따라 손님을 맞이한다. 그런데 악한들이 찾아와 손님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조건적 환대’를 넘어 ‘무조건적 환대’를 지향하는 롯은 두 딸을 대신 내놓으려 했다. 성경에는 마치 미담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데리다는 물음표를 던진다. 롯의 환대는 “가정의 폭군, 아버지, 남편, 그리고 어른인 집주인”의 독단적 횡포 아닐까? 이방인을 보호하기 위해 딸을 강도에게 바친다면 그러한 환대는 평화인가, 폭력인가?

우리 현실로 돌아와 보자. 아프가니스탄은 대한민국과 지리적으로 동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거리가 멀다. 아프가니스탄의 공식 언어는 파슈토어와 다리어인데, 통역을 구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다. 결정적으로 우리 정신 세계는 불교와 유교, 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영향을 받아 형성된 반면 아프가니스탄 난민은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공통점을 하나 찾다 보면 차이가 열 가지 보일 만큼 서로 다른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이 환대를 필요로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민이라는 주제가 한국 사회에 제시된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실속 있는 논의로 이어진 적은 없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담론을 생산해야 할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진보 진영의 지적 게으름이 눈에 띈다. 마치 연예인이나 저명인사처럼 앞뒤 맥락 없이 무조건적 환대를 외치는 것만으로 그들의 역할을 다한 것인 양 굴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은, 더 다양한 맥락의 난민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문화, 풍습, 종교, 인종, 언어가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꾸준히 논의해야 한다. 북한이란 존재도 잊어서는 안 된다. 탈북자 또한 일종의 난민이라고 볼 때, 우리는 매년 천 명이 넘는 난민을 받고 있다. 그러나 탈북자를 야멸차게 내몰아 국제 인권 단체들의 지탄을 받던 문재인 정권은, 우리 정부에 협력한 아프가니스탄 난민에 ‘특별 기여자’ 자격을 부여해 난민에 대한 사회적 논의마저 원천 봉쇄하고 ‘국뽕’ 소재로 삼았다. 그 홍보용 사진을 찍겠다고 우리 국민인 공무원이 빗속에서 무릎 꿇고 우산을 들게 했다. 이방인을 환대한답시고 같은 국민을 학대하며, 같은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다. 문재인 정권의 환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데리다의 논의로 돌아와 보자. 무조건적 환대는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지향하면서 가능한 것의 영역을 넓혀가기 때문이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은식기를 훔쳤고 발각됐지만 미리엘 주교는 은촛대까지 선물로 주며 장 발장을 감쌌다. 그 환대에 감화된 장 발장은 19년 옥살이에 따른 증오를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우리에게 찾아온 그 모든 이방인에게 우리의 환대가 기적의 씨앗이 되기를 희망한다.

2021-08-29

새벽 4시의 폭주..北 기습남침 뺨치는 巨與 국회농단

 

[노정태의 뷰파인더㊽] '언론재갈법' 강행, 마구잡이 입법독재

● 국민 잠든 새 기습적 단독 처리
● 컵라면 끓이듯 법을 대하는 與
● 87년 체제의 관습 ‘법사위는 野에’
● 법사위 힘 실컷 남용 뒤 권한 축소
●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짬짜미?
● 최후의 방패, 대통령 법률 거부권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8월 25일 오전 3시 54분,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은 국민의힘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처리 직후 여당 의원들은 웃으며 자축했다. 오른쪽부터 민주당 김영배 김용민 김승원 의원. 김남국 의원(왼쪽)은 김영배 의원과 주먹 인사를 나누는 박주민 의원(왼쪽 두 번째)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8월 25일 새벽 4시. 세상이 조용히 잠들어 있을 시각. 국회는 시끌벅적 했다. 법제사법위원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여당 단독으로 통과됐다.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강행처리한 법안은 언론중재법만이 아니었다. 수술실 폐쇄회로(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의료법 개정안, 203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35% 이상으로 하는 탄소중립법 개정안, 사립학교 교사 신규채용 시험을 교육청에 의무적으로 의탁하도록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 등도 일사천리로 본회의에 넘어갔다.

76년 2개월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국군은 그렇게 대대적인 기습이 있으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이내 국군은 낙동강까지 속절없이 패퇴했다. 한국전쟁의 시작이었다.

대단히 과격한 비유를 하는 이유가 있다. 민주당이 저지르고 있는 입법 폭주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전달하기 위해서다. 민주당은 국민이 잠든 사이에 상식 밖의 법 조항을 들이밀고, 문제가 제기되면 즉석에서 떡 주무르듯 늘리고 줄이고 붙이고 잘라내 가는 식으로 대충 만든 법을 당장 통과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것은 국정농단보다 심각한 국회농단이며 입법독재다.

법치주의 파괴라는 害惡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실패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국민은 입을 모아 '부동산 정책'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실패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큰데, 그런 그마저도 지난 5월 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정말 부동산 부분만큼은 정부가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하지만 나는 문재인 정권이 남긴 가장 큰 해악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법치주의 파괴다. 부동산 문제 역시 법치주의 파괴와 무관치 않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니 원천봉쇄한 채 강행처리한 임대차 3법을 떠올려보자.

야당의 반대 논리는 이랬다. 이렇게 무리하게 법을 만들어버리면 전세가가 급등한다. 전세가가 급등하면 집값이 오른다. 집값이 오르면 전세가도 덩달아 오른다. 강남 아파트 가격을 잡겠다고 공급을 늘리는 대신 수요를 찍어 누르기 위한 정책을 만들면 풍선효과로 인해 오히려 전국의 집값이 급격하게 오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 모든 우려는 현실이 됐다. 강행 처리된 임대차 3법이 시행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문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만은 실패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임대차 3법이 집값 상승의 원인이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의 원인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 임대차 3법을 졸속으로 만들고 억지로 통과시킨 과정 전체에 대해 반성을 할리 만무했다.

임대차 3법만이 아니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엉터리로 만들고 힘으로 통과시킨 악법은 즐비하다. 통과를 앞두고 있는 언론중재법, 의료법, 탄소중립법, 사립학교법 뿐만이 아니다. 이미 통과된 공수처법을 비롯해 소위 '검찰개혁'과 관련된 온갖 법 역시 마찬가지다. 그 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기존 법체계와 충돌하지 않는지, 예상되는 부작용과 문제 등은 없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반성 따위는 하지 않았다. 마치 컵라면 끓이듯 뜨거운 물만 붓고 익기도 전에 후루룩 마셔버린 셈이다. 즉, 민주당과 청와대는 애초에 법을 법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韓 민주주의의 린치핀(linchpin)

1987년 민주화 이후 국회 법사위원장은 늘 원내 제2당에게 돌아갔다. 원내 제1당이 국회의장직을 갖고, 제2당이 법사위를 갖는 암묵적 룰이 통용됐다. 때로는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대통령이 속한 여당은 원내 제1당이기도 했다. '법사위는 야당의 것'이라는 암묵적 룰이 17대 국회부터 성립해 20대 국회까지 이어져 왔다. 그렇게 '룰'이 생겼다. 법사위원장은 야당 몫,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국룰'이었다.

법사위의 역할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회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 법을 만들고 예산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정부 각 부처가 제출한 예산안은 그에 해당하는 국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심의를 거친다. 그리고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를 거쳐 본회의에서 의결된다. 예산 문제에 있어서는 각 상임위의 힘이 크고,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막강한 권력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구조다.

반대로 법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법사위 권한이 막중하다. 2021년 8월 25일 이전 기준으로 말해보자면 그렇다. 법사위는 각 상임위에서 제출된 법안을 검토하고 심사하며 심지어 법안의 내용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국회 내의 국회'라는 둥, '상원'이라는 둥, 법사위의 큰 권한에 대한 불만의 여론이 적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 상임위원회가 다른 상임위원회에 비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갖는 구조는 원론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 사회탐구 영역을 풀 수 있을 정도의 지식만 있어도 법사위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법은 모든 국민을 상대로 구속력과 강제력을 지닌다. 아무리 대단한 명분과 좋은 뜻이 있다 한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모든 방면에서 충분한 심사숙고를 거쳐야 한다. 함부로 만든 법은 그 어떤 흉기보다 더 위험하다. 법안을 한 줄 한 줄 꼼꼼히 검토하고 확인하여 본회의로 넘기기 위한 최종 관문으로 법사위가 중요한 이유다.

87년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관습 중 하나가 바로 '법사위는 야당에'였던 것도 그래서였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명시적 권력이 굉장히 큰 나라다. 게다가 정부 산하 조직이 청와대의 눈치를 보며 그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제왕적 대통령제다.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국회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법을 만들고 예산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총괄하는 법사위, 그 중에서도 법사위원장이라는 자리의 무게가 막중할 수밖에 없다. 그 권한이 과도하고 본래의 기능 이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옳건 그르건, 법사위원장이라는 자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바퀴가 빠지지 않게 해주는 린치핀(linchpin)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자체 의석과 자신들에게 동조하는 위성정당을 합해 180석이 넘는 '거여' 체제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모든 상임위와 법사위원장까지 독식해버렸는데, 바로 이 린치핀을 뽑아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87년 체제 출범 이후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전례 없는 길이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민주당은 마치 제대로 길들이지도 못하는 말의 고삐를 잡고 끌려가는 철부지 기수(騎手)처럼, 법사위의 힘을 제대로 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천방지축 날뛰고 말았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운데)가 8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여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을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자칭 '민주 투사'들의 행태

새로 구성된 여야 간 원내지도부의 합의에 따라 21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민의힘이 법사위원장 자리를 가져갈 예정이다. 민주당은 어째서 법사위원장을 순순히 내줬을까? 조건이 있었다. 국회법을 개정해 법사위의 기능을 체계·자구 심사로 한정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래도 법사위는 강력하지만, 이전과 같이 '상원' 노릇은 못 하게 막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들이, 법사위를 넘기기 직전에, 바로 그 법사위가 지닌 막대한 힘을 이용해 온갖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고 대충 땜질해가며 입법 폭주를 감행하고 있다. 8월 25일 법사위가 수정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당초 내용 중 징벌적 손해배상 요건이 되는 '명백한 고의 또는 중과실' 문구에서 '명백한'을 삭제했다. 또 '보복적이거나 반복적인 허위·조작보도로 피해를 가중시키는 경우' 문구에서 '피해를 가중시키는 경우'라는 표현이 빠졌다. '허위·조작보도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은 경우'라는 단서 조항은 아예 없애버렸다.

기술적인 내용은 복잡하지만 결론은 동일하다. 잘못된 보도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입증책임을 언론사에게 쉽게 떠넘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국과 비슷한 규모의 물질적 부를 이루고 있는 그 어떤 국가도 이런 식으로 법을 만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자신들은 실컷 법사위의 권한을 남용하더니, 상대방에게 넘겨주기 직전에 그 권한을 대폭 축소하면서, 여전히 스스로를 민주 투사인 양 행세하는 정치 집단 역시 해외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수의 의석을 앞세운 폭거이며 의회독재다.

이런 광기의 행보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 사실 법사위 말고도 한 장의 카드가 더 있다. 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법률안 거부권이 바로 그것이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을 공표하는 최종 관문으로, 정부에 이송된 법률안에 15일내로 이의를 표명하고 국회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이 직접 법률안의 일부를 수정하거나 폐기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돌려보내진 법안은 과반수가 아닌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어 의결해야 법적 효력을 얻을 수 있다. 입법부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행정부가 갖고 있는 최후의 수단인 셈이다.

8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언론중재법 강행처리 중단 촉구 정의당-언론현업4단체 기자회견에서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뉴스1]

흔들리는 세계사의 기적

통상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바람직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설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민주당이 입법 독재를 하고 있으며 청와대가 그것을 사실상 방조 하고 있다.

8월 17일 문 대통령이 한국기자협회에 공문을 보내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둥"이라고 칭송하더니, 8월 19일에는 청와대 핵심관계자가 서면 브리핑을 통해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입법적 노력도 필요하다"고 밝히는 식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관련해 "청와대는 전혀 관여한 바 없다"는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8월 23일 국회 발언을 믿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동아시아, 아니 세계사의 기적이다. 식민지에서 군사독재를 거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보석과도 같다. 이 찬란한 유산이 민주당과 청와대의 짬짜미 입법 독재로 인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정말 중요하다. 말도 안 되는 법을 만드는 국회를 향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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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