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9

새벽 4시의 폭주..北 기습남침 뺨치는 巨與 국회농단

 

[노정태의 뷰파인더㊽] '언론재갈법' 강행, 마구잡이 입법독재

● 국민 잠든 새 기습적 단독 처리
● 컵라면 끓이듯 법을 대하는 與
● 87년 체제의 관습 ‘법사위는 野에’
● 법사위 힘 실컷 남용 뒤 권한 축소
●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의 짬짜미?
● 최후의 방패, 대통령 법률 거부권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8월 25일 오전 3시 54분,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은 국민의힘이 불참한 가운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처리 직후 여당 의원들은 웃으며 자축했다. 오른쪽부터 민주당 김영배 김용민 김승원 의원. 김남국 의원(왼쪽)은 김영배 의원과 주먹 인사를 나누는 박주민 의원(왼쪽 두 번째)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8월 25일 새벽 4시. 세상이 조용히 잠들어 있을 시각. 국회는 시끌벅적 했다. 법제사법위원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여당 단독으로 통과됐다.

더불어민주당이 단독 강행처리한 법안은 언론중재법만이 아니었다. 수술실 폐쇄회로(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의료법 개정안, 203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35% 이상으로 하는 탄소중립법 개정안, 사립학교 교사 신규채용 시험을 교육청에 의무적으로 의탁하도록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 등도 일사천리로 본회의에 넘어갔다.

76년 2개월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국군은 그렇게 대대적인 기습이 있으리라고 예상치 못했다. 이내 국군은 낙동강까지 속절없이 패퇴했다. 한국전쟁의 시작이었다.

대단히 과격한 비유를 하는 이유가 있다. 민주당이 저지르고 있는 입법 폭주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전달하기 위해서다. 민주당은 국민이 잠든 사이에 상식 밖의 법 조항을 들이밀고, 문제가 제기되면 즉석에서 떡 주무르듯 늘리고 줄이고 붙이고 잘라내 가는 식으로 대충 만든 법을 당장 통과시켜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것은 국정농단보다 심각한 국회농단이며 입법독재다.

법치주의 파괴라는 害惡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실패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국민은 입을 모아 '부동산 정책'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실패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큰데, 그런 그마저도 지난 5월 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정말 부동산 부분만큼은 정부가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하지만 나는 문재인 정권이 남긴 가장 큰 해악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법치주의 파괴다. 부동산 문제 역시 법치주의 파괴와 무관치 않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니 원천봉쇄한 채 강행처리한 임대차 3법을 떠올려보자.

야당의 반대 논리는 이랬다. 이렇게 무리하게 법을 만들어버리면 전세가가 급등한다. 전세가가 급등하면 집값이 오른다. 집값이 오르면 전세가도 덩달아 오른다. 강남 아파트 가격을 잡겠다고 공급을 늘리는 대신 수요를 찍어 누르기 위한 정책을 만들면 풍선효과로 인해 오히려 전국의 집값이 급격하게 오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 모든 우려는 현실이 됐다. 강행 처리된 임대차 3법이 시행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문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만은 실패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임대차 3법이 집값 상승의 원인이라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의 원인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니 임대차 3법을 졸속으로 만들고 억지로 통과시킨 과정 전체에 대해 반성을 할리 만무했다.

임대차 3법만이 아니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엉터리로 만들고 힘으로 통과시킨 악법은 즐비하다. 통과를 앞두고 있는 언론중재법, 의료법, 탄소중립법, 사립학교법 뿐만이 아니다. 이미 통과된 공수처법을 비롯해 소위 '검찰개혁'과 관련된 온갖 법 역시 마찬가지다. 그 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기존 법체계와 충돌하지 않는지, 예상되는 부작용과 문제 등은 없는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반성 따위는 하지 않았다. 마치 컵라면 끓이듯 뜨거운 물만 붓고 익기도 전에 후루룩 마셔버린 셈이다. 즉, 민주당과 청와대는 애초에 법을 법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韓 민주주의의 린치핀(linchpin)

1987년 민주화 이후 국회 법사위원장은 늘 원내 제2당에게 돌아갔다. 원내 제1당이 국회의장직을 갖고, 제2당이 법사위를 갖는 암묵적 룰이 통용됐다. 때로는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대통령이 속한 여당은 원내 제1당이기도 했다. '법사위는 야당의 것'이라는 암묵적 룰이 17대 국회부터 성립해 20대 국회까지 이어져 왔다. 그렇게 '룰'이 생겼다. 법사위원장은 야당 몫,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국룰'이었다.

법사위의 역할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회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 법을 만들고 예산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정부 각 부처가 제출한 예산안은 그에 해당하는 국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심의를 거친다. 그리고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심사를 거쳐 본회의에서 의결된다. 예산 문제에 있어서는 각 상임위의 힘이 크고,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막강한 권력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구조다.

반대로 법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법사위 권한이 막중하다. 2021년 8월 25일 이전 기준으로 말해보자면 그렇다. 법사위는 각 상임위에서 제출된 법안을 검토하고 심사하며 심지어 법안의 내용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국회 내의 국회'라는 둥, '상원'이라는 둥, 법사위의 큰 권한에 대한 불만의 여론이 적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어느 상임위원회가 다른 상임위원회에 비해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갖는 구조는 원론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 사회탐구 영역을 풀 수 있을 정도의 지식만 있어도 법사위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법은 모든 국민을 상대로 구속력과 강제력을 지닌다. 아무리 대단한 명분과 좋은 뜻이 있다 한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모든 방면에서 충분한 심사숙고를 거쳐야 한다. 함부로 만든 법은 그 어떤 흉기보다 더 위험하다. 법안을 한 줄 한 줄 꼼꼼히 검토하고 확인하여 본회의로 넘기기 위한 최종 관문으로 법사위가 중요한 이유다.

87년 체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관습 중 하나가 바로 '법사위는 야당에'였던 것도 그래서였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명시적 권력이 굉장히 큰 나라다. 게다가 정부 산하 조직이 청와대의 눈치를 보며 그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제왕적 대통령제다.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런데 국회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법을 만들고 예산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기능을 총괄하는 법사위, 그 중에서도 법사위원장이라는 자리의 무게가 막중할 수밖에 없다. 그 권한이 과도하고 본래의 기능 이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옳건 그르건, 법사위원장이라는 자리는 한국 민주주의의 바퀴가 빠지지 않게 해주는 린치핀(linchpin)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민주당은 자체 의석과 자신들에게 동조하는 위성정당을 합해 180석이 넘는 '거여' 체제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모든 상임위와 법사위원장까지 독식해버렸는데, 바로 이 린치핀을 뽑아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87년 체제 출범 이후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전례 없는 길이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민주당은 마치 제대로 길들이지도 못하는 말의 고삐를 잡고 끌려가는 철부지 기수(騎手)처럼, 법사위의 힘을 제대로 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천방지축 날뛰고 말았다.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운데)가 8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 앞에서 여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을 규탄하는 손팻말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자칭 '민주 투사'들의 행태

새로 구성된 여야 간 원내지도부의 합의에 따라 21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민의힘이 법사위원장 자리를 가져갈 예정이다. 민주당은 어째서 법사위원장을 순순히 내줬을까? 조건이 있었다. 국회법을 개정해 법사위의 기능을 체계·자구 심사로 한정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래도 법사위는 강력하지만, 이전과 같이 '상원' 노릇은 못 하게 막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들이, 법사위를 넘기기 직전에, 바로 그 법사위가 지닌 막대한 힘을 이용해 온갖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고 대충 땜질해가며 입법 폭주를 감행하고 있다. 8월 25일 법사위가 수정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민주당은 당초 내용 중 징벌적 손해배상 요건이 되는 '명백한 고의 또는 중과실' 문구에서 '명백한'을 삭제했다. 또 '보복적이거나 반복적인 허위·조작보도로 피해를 가중시키는 경우' 문구에서 '피해를 가중시키는 경우'라는 표현이 빠졌다. '허위·조작보도로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은 경우'라는 단서 조항은 아예 없애버렸다.

기술적인 내용은 복잡하지만 결론은 동일하다. 잘못된 보도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한 입증책임을 언론사에게 쉽게 떠넘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국과 비슷한 규모의 물질적 부를 이루고 있는 그 어떤 국가도 이런 식으로 법을 만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자신들은 실컷 법사위의 권한을 남용하더니, 상대방에게 넘겨주기 직전에 그 권한을 대폭 축소하면서, 여전히 스스로를 민주 투사인 양 행세하는 정치 집단 역시 해외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수의 의석을 앞세운 폭거이며 의회독재다.

이런 광기의 행보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 사실 법사위 말고도 한 장의 카드가 더 있다. 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법률안 거부권이 바로 그것이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을 공표하는 최종 관문으로, 정부에 이송된 법률안에 15일내로 이의를 표명하고 국회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이 직접 법률안의 일부를 수정하거나 폐기를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돌려보내진 법안은 과반수가 아닌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어 의결해야 법적 효력을 얻을 수 있다. 입법부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행정부가 갖고 있는 최후의 수단인 셈이다.

8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언론중재법 강행처리 중단 촉구 정의당-언론현업4단체 기자회견에서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뉴스1]

흔들리는 세계사의 기적

통상의 민주주의 관점에서 볼 때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는 바람직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설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민주당이 입법 독재를 하고 있으며 청와대가 그것을 사실상 방조 하고 있다.

8월 17일 문 대통령이 한국기자협회에 공문을 보내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둥"이라고 칭송하더니, 8월 19일에는 청와대 핵심관계자가 서면 브리핑을 통해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입법적 노력도 필요하다"고 밝히는 식이다. 언론중재법 개정안과 관련해 "청와대는 전혀 관여한 바 없다"는 유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8월 23일 국회 발언을 믿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동아시아, 아니 세계사의 기적이다. 식민지에서 군사독재를 거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보석과도 같다. 이 찬란한 유산이 민주당과 청와대의 짬짜미 입법 독재로 인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정말 중요하다. 말도 안 되는 법을 만드는 국회를 향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이 절실하다.

#언론중재법 #입법폭주 #더불어민주당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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