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9

신비주의의 해로움, '무'를 바라보되 '유'에서 살아가기

1. 신비주의의 해로움

조선일보에 실린 최승자 인터뷰(2010)를 읽었다. 

―우리 시대와 사회가 시인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요? 오늘 찾아온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그건 틀린 말입니다. 자기 삶을 사회나 남에게 전가할 수는 없어요. 괜히 '우리 시대가 저 친구를 버려놓은 것이 아닌가' 말하는데, 이는 내가 선택한 삶이었어요. 나 혼자 겉돌았고 그런 공부를 했고 병원에 들어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게나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이,

―가장 궁금한 대목은 시를 쓰던 당신이 폐인(廢人)처럼 됐다는 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언제부터인가 노장(老莊)·명리학·사상의학·점성술 등과 같은 신비주의 공부에 빠졌던 겁니다.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로 좇아갔어요. 답이 있을 듯하면서 손에는 답을 쥐기 어려운 공부였어요. 그 공부에 빠지면서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런 이유로 망가지고 말았던 것이다.

신비주의(로 통칭될 수 있는 것 모두)가 이렇게 해롭다. 적당히 세속적이고 상스러워서 자기 몸에 득 될 만큼만 먹어도 유해한데, 최승자처럼 모 아니면 도, 이런 강단 있는 사람이 탐닉하면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음.

있는 그대로 보이는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너머의 초월을 사유하는 방법. 로마 몰락과 기독교의 홀로서기 당시 교부들이 목숨 걸고 연구한 주제.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철학은 미사여구 음풍농월이 아님. 잘못된 철학은 사람, 사회, 국가, 문명을 망가뜨린다.


2. '무'를 바라보되 '유'에서 살아가기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행한 글이 있다. 제목은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

반야심경_현대어_번역.jpg

반야심경의 내용을 일본 애니메이션의 독백체로 옮긴 것이다. 아마 일본 웹에서 일본어로 작성된 텍스트를 한국어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는 주지하다시피 '무' 혹은 '공'을 직시하는 종교다. 없으면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무에서 유로 왔고, 유에서 무로 돌아간다. 피안과 내세와 안녕을 비는 그 모든 행위는 거짓이다. 우리의 삶과 존재에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

거기서 생각을 멈추면 어떻게 될까? 시인 최승자가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있는 대로 보이는 대로의 세계가 아닌, 현상을 뛰어넘는 세계"를 향한 끝없는 공부에만 빨려든다면?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으로 돌아가보자. 반야심경을 원래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갸웃할만한 대목이 있다. 원문의 내용을 굉장히 길게 풀어서 번역한 나머지, 원문의 어느 대목의 번역인지 짚어내기도 어려운 그런 부분이 있다.

착각은 하지 마. 무정한 사람이 되라는 소리는 아니야. 꿈이나 공상이나 자비심을 잊지 마. 그걸 할 수 있다면 열반은 어디에나 있어. 사는 방법은 어느것 하나 변하지 않아. 단지 받아들이는 방법이 변하는 것 뿐이지.

딱 봐도 불경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혹은, 이런 내용이 정말 이렇게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렇다. 이건 '번역'이 아니라, 주관이 많이 개입한 해석이다. 일종의 재창작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의 번역이니 말이다.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여기에 저 내용이 있다고? 음... 없지 않다. '무고집멸도'. 그것이 저 내용이다. 고집멸도 중 '멸'에 속하는 것에 집착하고 탐닉하면, 수행자는 '무정한 사람'이 되거나, 꿈이나 공상이나 자비심을 잊은 수행 광인이 된다.

그것을 반야심경은 단 5자로 적어놓았고,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은 구구절절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저 내용의 압축을 저렇게 풀어서 전달하는 게 과연 '옳은' 번역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을 오역이라 매도할 수는 없다. 그 '오역'은 어디까지나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아예 필요하지 않다. 우리 가족 돈 잘 벌게 해달라고 교회 가고 절 가고 점집도 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다. 그들에게는 과도한 수행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끔, '무'를 바라보다가 정말 그 '무'에 잡아먹히는 사람들이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심연을 바라보다가 진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반야심경의 원문에는 '무고집멸도 무지'가 적혀 있고,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이라는 걸 쓴 (아마도) 일본인은 그 내용을 참 길고 자세하게도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무'를 굳이 바라보고야 마는 모든 이들의 평온을 빈다.

1960년 12월생 윤석열은 설에 63살? 62살? 61살?

 

1960년 12월생 윤석열은 설에 63살? 62살? 61살?

[노정태의 뷰파인더] 세계 유일 한국식 나이 셈법

● 자궁에서 10개월 보내면 한 살?
● 고대, 중세 중국 전통
● 일본 연호가 기년법
● 행정편의주의 ‘年 나이’


한국인은 매년 새해를 두 번 맞이한다. 양력으로 1월 1일에 한 번, 음력으로 1월 1일에 한 번. 새해 결심을 했다가 못 지켜도 두 번째 기회가 있다며 농담하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인은 매년 나이도 두 번 먹는다. 1월 1일에 한 번, 자신의 생일에 한 번. 태어날 때부터 일괄적으로 부여받은 한 살에 매년 한 살씩 덧붙는 ‘세는 나이’, 그리고 대부분의 공문서에 사용되는 ‘만 나이’가 그것이다.

한국인의 나이 셈법. 이 문제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K-팝과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유행과 더불어 이제는 전 세계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식으로 나이를 세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한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에 속한 중국, 일본, 대만, 베트남에서도 출생 이후의 나이만을 세고 있다.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이 혼란스러워한 사안이다. 그만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9년, 2020년, 2021년, 매해 빠지지 않고 청와대 국민청원에 등장한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올해 1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의제를 던졌다. 이준석 당 대표, 원희룡 선대위 정책본부장은 1월 17일 유튜브에 공개된 ‘59초 쇼츠’ 영상을 통해 서로 몇 살인지 물어보며 오락가락하는 한국의 나이 셈법을 문제 삼았다. 그러고는 윤석열을 향해 바꿔보자고 제안하자 윤석열은 “좋아, 빠르게 가”라고 답하며 영상이 끝난다.

생각해보면 이건 퍽 이상한 상황이다. 드러나는 의견만 놓고 보면 그 누구도 복잡하고 난삽한 한국식 나이 셈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도 대부분의 경우 만 나이를 쓴다. 그런데 왜 우리의 나이 체계는 쉽게 통일되지 않는 걸까?

허세, 주세, 실세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20211112일 서울 광화문 이마빌딩에서 ‘신동아’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일단 가장 흔한 오해부터 바로잡아야 하겠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부여하는 한국식 ‘세는 나이’는 태아가 잉태해 있던 시절을 포함하는 인간적인 나이 셈법이라는 주장 말이다. 그렇지 않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해 출생하기까지 사람은 대체로 자궁에서 10개월을 보낸다. 그보다 일찍 태어나는 경우는 종종 있어도 12개월을 채우는 아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논리에 따라 1월에 잉태해 11월에 태어난 아기의 나이를 한 살이라고 센다면, 10월에 잉태해 이듬해 8월에 태어나는 아기의 나이는 두 살로 세는 것이 합당하다. 이미 자궁에서 보낸 시간에 세는 나이의 기본인 한 살을 또 더해야 할 테니 말이다.

세는 나이에 대한 두 번째 오해가 있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 세는 나이는 ‘우리’ 전통이 아니다. 동아시아권, 특히 중국에서 풍부한 문헌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중국 전통이다. 청나라가 무너진 신해혁명, 그리고 중국 대륙을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차지한 역사적 격변 이전으로 돌아가 보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형태의 나이 세는 방식을 고스란히 접할 수 있다.

이기천 서강대 사학과 강사의 논문 ‘당송대(唐宋代) 묘지(墓誌)의 연구와 생년(生年) 표기: 나이 세는 방식의 혼란과 제안’(중국학보 96권, 2021년 5월)을 펼쳐보자.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사람들이 죽은 이를 매장할 때 묻는 묘지(墓誌)라는 문헌이 있다. 운 좋게 고스란히 발굴되면 상당히 큰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해당 시대의 사람들이 직접 작성하고 매장한 살아있는 텍스트다. 그리하여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묘지를 중요한 사료로 삼는다.

단, 문제가 있다. 당송대 사람들의 나이 세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처럼, 나이를 세는 방법이 세 가지나 있었다. 가장 흔한 것은 허세(虛歲)다. 지금 우리 ‘세는 나이’와 같은 방식이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로 치고, 매년 해가 바뀔 때 한 살을 더한다. 다만 그 시절에는 양력이 아니라 음력을 썼다는 차이가 있다. 둘째로는 주세(周歲)가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사용하는 ‘연 나이’와 같은 개념이다. 태어난 해를 한 살이 아니라 0살로 치고, 매년 정월 초하루에 한 살을 더한다. 마지막은 실세(實歲)다. 태어난 날부터 하루씩 더해 생일에 한 살이 된다. 다음해 생일에는 두 살. 지금 우리가 아는 ‘만 나이’다.

이기천은 당시 문헌을 다방면으로 검토해 당송대 사람들은 대체로 허세에 따라 나이를 따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당연한 나이 셈법’, ‘표준적 나이 셈법’은 주세도 실세도 아닌 허세였다. 그러므로 후대 연구자들은 일단 허세, 즉 세는 나이에 따라 해당 시대 문헌을 읽자고 주장한다. 개별 연구자가 임의로 주세나 실세를 통해 당나라와 송나라 사람의 나이를 세고 논문을 쓰면 혼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독창적이고 고유하고 아름답다고?
그러니 ‘세는 나이’에 대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왜 우리 조상님들은 이런 식으로 나이를 셌을까?’라고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보다는 ‘왜 고대와 중세의 중국인들은 이런 식으로 나이를 셌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 방식은 베트남과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 고루 수출됐지만, 오직 대한민국만이 여전히 이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는 나이’의 수수께끼는 간단하다. 기년법(紀年法)을 개인에게 적용한 것이다. 기년법이란 무엇인가? 왕의 제위 기간에 따라 달력을 구분 짓는 방식이다. 태종 이방원은 서기 140011월에 즉위했다. 그에 따라 1400년은 ‘태종 1년’으로 불린다. 그는 서기 1418년 9월 9일에 왕좌를 세종에게 물려줬다. 따라서 1418년은 태종 18년이자 세종 1년이 된다. 0이라는 개념 없이, 왕에서 왕으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시대의 흐름을 구분 짓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어떤 독자는 이런 식의 나이 세는 방식, 혹은 시대 구분하는 법을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전 세계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동아시아의 전통적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 일본의 연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2019년 5월 1일, 아키히토 텐노가 물러나고 나루히토 텐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스가 요시히데 당시 일본 내각관방장관은 ‘令和’라고 쓰인 붓글씨를 대중에 공개했다. ‘令和’, 일본식으로 ‘레이와’라 읽는 새로운 시대가 개막했음을 알린 것이다. 2019년은 일본인에게 헤이세이 31년이자 레이와 원년, 즉 레이와 1년이 됐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전통에 대해 ‘기원’보다는 ‘사용’, ‘과거’보다는 ‘현재’를 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대찌개가 어엿한 한국의 ‘전통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나는 기꺼이 동의한다. 일본의 ‘노리마키’(海苔巻)와 한국의 ‘김밥’은 모두 적당히 간을 한 밥을 김에 싸서 먹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같고, 엄밀하게 기원을 따지자면 노리마키가 김밥의 원조다. 그러나 노리마키의 ‘전통’을 김밥은 넘어선지 오래다. 우리는 그 속에 치즈를 넣고 참치를 넣고 뒤집어서 싸고 청량고추로 매콤한 맛을 내며 심지어 밥이 아니라 계란지단을 꽉꽉 채워 넣으면서도 ‘김밥’이라고 부른다. 전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그러니 ‘세는 나이’를 ‘우리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덧붙여 우리 문화의 ‘고유한’ 전통이라거나, 오직 우리에게만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하므로 반드시 지켜야 할 미풍양속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는 나이의 기본이 되는 기년법, 그 연장선상에 있는 허세는, 중국에서 만들어져 한반도에 유입됐다. 앞서 언급했듯 전 세계에 기년법을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한국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세습군주제를 유지하는 일본은 온 국민이 우리만큼이나 능숙하게 기년법을 쓴다. 세는 나이를 옹호하고자 우리 문화의 독창성, 고유성, 아름다움을 근거로 들이대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일 수밖에 없다.

71%가 세는 나이 폐지에 찬성
중국과 대만은 세는 나이를 일소한 지 오래다. 일본 역시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기년법이나 그로부터 파생된 나이 세는 법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이렇게 허세, 혹은 세는 나이가 보편적으로 살아남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까.

나 나름대로 열심히 논문과 책 등을 뒤져보았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아주 거친 추론을 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필자는 한국에서 쓰이는 또 다른 나이 셈법인 ‘연 나이’에 주목한다. 연 나이는 문화와 관습이 아니라 법에서 쓰이는 나이 셈법이다. 청소년보호법이나 병역법 등 일부 법률은 연 나이를 사용한다. 이런 법을 개정해 만 나이로 통일하자는 것이 국민의힘 공약이다.

연 나이를 사용하는 저 두 법에 뭔가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젊은이들을 ‘일괄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목적성을 짐작할 수 있다. 만 나이에 따라 청소년보호법을 적용한다고 해보자. 같은 학교와 학급 내에서도 청소년보호법의 대상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나뉠 수 있다. ‘관리’하기 힘들다는 소리다. 병역법의 목적은 더욱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로, 늘 전쟁 위험을 안고 있다. 여차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을 단번에 군사 단위로 편성해야 했다. 병역의무를 부과할 때 만 나이를 기준으로 삼기는 곤란하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연 나이와 세는 나이는 시작점이 0세냐 1세냐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같은 나이 셈법이다. 연 나이는 청소년이냐 성인이냐, 군 입대 대상자냐 아니냐와 같이, 한국인 특히 남자들의 인생에서 큰 분기점을 나누는 방식으로 사용돼 왔다. 그러니 그 자매품이라 할 세는 나이 역시 수십 년간 한국인의 문화에 깊게 자리 잡게 된 것은 아닐까.

이유가 무엇이건, 이제 세는 나이는 사라질 때가 됐다. 1월 5일 한국리서치에서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71%가 세는 나이 폐지에 찬성한다. 청소년 보호와 병역 의무 수행이라는 중요한 과제 역시 행정편의주의가 아닌 당사자의 실제 연령에 맞춰야 마땅하다. 국제적인 표준에 맞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가는 한 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저항적 지식인이 체제에 복무하(게 하)는 방법

옌롄커의 대표작은 '레닌의 키스' 이후 나왔다. 하지만 이 책들은 중국에서 금서가 됐다. 작가 옌롄커는 '가장 문제적 작가'가 됐다. 작가도 움츠러들 수 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자기검열은 한창 강화됐고, 정부에다가는 해외 출판이라고 허락해줘 고맙다고 해야 한다. 나랏돈 받아 글 쓰는 중국작가협회 소속 전업작가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케 한다. (링크)

1) 국가가 월급을 줘서 먹고 살게 해준다.
2) 책을 내는 족족 금서로 만든다.
3) 단, 해외 출판을 허용한다. 해외에서 인터뷰도 하게 해준다.

옌롄커는 책을 쓰고, 내고, 생계를 보장받는다. 중국은 '우리에게도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게 있다'는 알리바이를 얻는다.

나는 그의 입장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온전히 상상하지 못한다. 옌롄커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 충분히 강력한 독재 체제는 '비판적 지식인'마저도 이렇게 써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이건 '대중적 지식인'이건 마찬가지다. 작가 역시 다른 직군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평가받아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옌롄커의 '저항'이 따옴표 치지 않아도 되는 저항이 될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2022-01-22

광주 화정아이파크 참사에서 세월호가 어른거린다

광주 화정아이파크 참사에서 세월호가 어른거린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일벌백계’에서 ‘백벌백계’로

●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교훈
● 찰스 페로의 통찰, ‘정상 사고’
● 분풀이 패러다임은 해결책인가
● 중대재해처벌법 우려하는 이유
● 작업중지권 없는 韓 근로감독관


1월 11일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공사 현장에서 건설 중인 아파트 콘크리트 구조물이 무너져 내렸다. 공사 작업자 중 6명이 실종됐다가 1월 14일 1명이 사망한 상태로 수습됐다. 1월 18일 현재 5명이 실종 상태로 남아 있다. [광주=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대형 참사는 ‘정상적’ 사건이다. 사회학자 찰스 페로에 따르면 그렇다. 그는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소개된 책 ‘Normal Accident’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대형 사고에 대한 이해의 방식을 뒤흔든 바 있다.

대형 건축물, 원자력 발전소, 화학 공장, 비행기, 배 등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가 결합해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떠올려보자. 각각 목적도 제작 방식도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중층적 하위 체계를 결합해 만들어지며, 하위 요소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이다.

적당히 뺐고, 적당히 실었으며, 적당히 묶고
거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은 그 나름의 철저한 관리 감독 체계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부분은 고장이 나거나 오작동할 수 있다. 마치 고도로 복잡한 생명체인 인간이나 동물이 작은 병이나 상처를 입은 채로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큰 차질이 없는 상태. 그런 상태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작은 문제가 여러 개 중첩되면 어떨까. 평소 다한증이 있어 손바닥에 땀이 많이 나는 사람이, 발바닥에 작은 티눈이 생겼고, 오늘따라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충혈 되고 침침한 상태라고 해보자. 떼어놓고 보면 별 문제가 아니다. ‘정상’이다. 다만 발바닥의 티눈 때문에 걸음걸이가 어색해진 상태에서, 눈이 잘 안 보여 균형을 잃었는데, 손바닥에 땀이 나 있어서 계단의 난간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넘어진다면 ‘정상적’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어렵다. 크게 다칠 수 있다.

페로의 주된 목적은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냉각수를 거르는 복수 탈염 장치에 불순물이 섞였고, 터빈의 작동이 멈췄다. 흔히 발생하는 ‘정상적’ 상황이었다. 하필 그 상황에 대비한 비상 급수 펌프가 막혀 있었다. 이틀 전 보수 작업을 했지만 제대로 마무리 지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밸브에 이상이 있을 때 표시하는 램프 위에는, 하필이면 바로 그 때, 서류가 붙어 있었다. 밸브 이상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곧장 대처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노심이 과열됐고 미국에서 가장 큰 원전 사고가 발생했다.

세월호 사고도 마찬가지다. 늘 해왔던 것처럼 짐을 더 싣기 위해 평형수를 적당히 뺐고, 배에 많은 짐을 실었으며, 그 짐을 제대로 묶지 않았다. 하필이면 조류가 거세게 휘몰아치는 수역에서 선박 운항에 서툰 3등 항해사가 키를 잡았고, 짐이 무너지면서 배가 균형을 잃었는데, 하필 그때 배의 조타장치를 움직이는 부품이 관리 소홀로 인해 한쪽으로 쏠린 채 고정되고 말았다. 무게균형이 깨지지 않았다면 적당히 제 자리에서 맴돌았을 세월호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게다가 최고 안전 책임자 선장과 그 아래 고급 선원 다수가 자기만 먼저 살겠다고 도망쳤다. 그 결과 미수습자 5명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벌어졌다.

이렇듯 거대한 공장, 발전소, 건설 현장, 기차나 배, 우주선 같은 대형 시스템에는 ‘정상적’으로 처리되면 큰 탈 없이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문제가 수없이 발생하고 또 해결되지만, 때로는 그런 작은 사고가 겹친다. 그러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엄청난 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 찰스 페로는 그와 같은 현상을 이렇게 정의한다.

“상호작용성 복잡성과 긴밀한 연계성이라는 시스템의 속성에 따라 발생하는 사고를 ‘정상 사고’ 혹은 ‘시스템 사고’라고 한다.”

너무도 친숙한 패턴 반복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이 1월 17일 서울 용산구 HDC현대산업개발 용산사옥 대회의실에서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아파트 사고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이날 정 회장은 사퇴 의사를 밝혔다. [사진공동취재단]
1월 11일, 광주 화정아이파크 공사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건설 중인 아파트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23층부터 38층까지 무너져 내렸다. 공사 작업자 중 6명이 실종됐다가 1월 14일 한 명이 사망한 상태로 수습됐다. 1월 18일 현재 아직 5명이 실종 상태로 남아 있다.

사고 후 전개는 우리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이 사임했다. 경찰은 현대산업개발 공사부장 등 안전관리 책임자와 하도급업체 현장소장 등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입건했다. 감리 3명 역시 관리 감독 소홀 혐의로 입건된 상태다. 문제가 터진 후 ‘책임자’를 찾아서 처벌하라는 목소리를 드높이는, 너무도 친숙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아직 실종자 수습과 원인 분석이 이뤄지는 중이기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고층 아파트 건설 사고 역시 일종의 시스템 사고라는 것이다. 개별적 작업만 놓고 보면 ‘이쯤은 해도 되겠지’ 싶어서 어기는 안전 규칙, 혹은 챙기지 못한 작은 실수와 문제가 중첩돼 거대한 사고로 이어졌으리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정확한 사고 원인을 단 하나로 압축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사고의 진짜 원인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대형 사고에 대해 이전과 같은 방식의 대응만을 반복한다. 책임자 나와라, 누구 잘못이냐, 누구 하나 붙잡아 ‘일벌백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심지어 현장 작업자들이 이른바 조선족이라는 식으로 혐오 발언 성격을 지닌 음모론마저 횡횡한 상태다. 누군가는 잘못을 했을 것이며 다른 사람은 애꿎은 희생자가 됐겠지만 ‘일벌백계’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이 사건을 바라봐선 안 된다.

‘일벌백계’는 기본적으로 백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을 처벌해 본보기로 삼겠다는 발상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99건의 위반 사항을 잡지 않거나 못한다는 소리다. 그런 식으로는 시스템 사고를 예방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 사항을 100% 철저하게 지킨다 해도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실수와 오류가 중첩돼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일벌백계’는 사고의 예방이 아닌 사고 발생 후의 분풀이를 위한 패러다임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는 1월 27일부터 시행될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우려하게 되는 이유기도 하다. 앞으로는 대형 사고가 발생할 경우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하청이나 재하청이 아닌 원청의 대표자나 책임자 등이 형사책임을 지게 된다. ‘일벌백계’의 세계관에 따르면 대단히 정의로운 일이다. 하지만 건설 및 산업 현장의 인센티브 구조는 그대로다. 원청과 하청의 먹이사슬은 똑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앞으로는 사고가 날 경우 대신 감옥에 갈 누군가를 앞세우는 식으로 기업들이 대응하지 않을까. 심지어 ‘일벌백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백벌백계’와 체크리스트
해법은 없을까.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작은’ 사고들이 모여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현상, 그것을 어떻게 가능한 한 원천봉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답을 모두 설명했다. ‘일벌백계’를 버리고 ‘백벌백계’로 나가야 한다. ‘큰’ 사고가 터졌을 때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고 천문학적 손해배상을 때리는 식으로는 ‘작은’ 사고를 막지 못한다. ‘작은’ 사고를 막지 못하면 결국에는 ‘큰’ 사고가 터진다. 그러므로 핵심은 ‘작은’ 사고들을 꾸준히 체크하고 예방하며 곧장 수정하고 확인할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이는 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다. 현직 의사면서 ‘뉴요커’의 필자로도 유명한 아툴 가완디는 ‘체크! 체크리스트’에서 그러한 과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현대 의료계의 근본적인 수수께끼가 있다. 지독하게 아픈 환자가 있다. 그 환자를 살리려면 먼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정확히 알아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에 따른 직무 178가지를 매일 정확하게 처리해야 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니터에서 경보음이 울리고, 바로 옆 침대에 있는 환자의 심장이 멎고, 여성 환자의 가슴 개복을 도와달라고 간호사가 찾아오더라도 일의 종류나 성격에 상관없이 178가지 일을 정확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인 상황이다. 심지어는 아직도 의료계가 충분히 전문화되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툴 가완디의 해법은 단순하지만 확실하다.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하고 확인하며 일하는 것이다.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반드시 확인할 사항을 체크리스트로 만들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일하기에 앞서 서로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며 그 체크리스트를 검토한다. 그 간단한 절차만으로도 업무 현장은 훨씬 민주적인 분위기로 변하고, 서로가 상대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며, 사소한 실수가 거대한 실패를 낳는 일을 막을 수 있다.

단, 중요한 전제가 있다. 체크리스트를 체크하는 사람에게 적당한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수술실에서 가장 직급이 낮은 간호사에게 체크리스트를 맡기면 권위적인 의사나 간호사는 무시하고 ‘대충 빨리 하자’는 식으로 나올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체크리스트는 공염불이 되고 만다. 비행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부기장이 기장에게 체크리스트에 입각해 좋은 조언을 해도 권위적인 기장이 듣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수술실 막내 간호사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산업안전에 대한 우리의 법과 규정은 그리 허술하지 않다. 박찬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의 논문 ‘주요 외국의 하도급 산업안전 체계와 함의’에 따르면 다른 나라에 존재하는 좋은 제도를 많이 수입해 놓은 상태다. 문제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박찬임은 특히 현장에서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을 책임지는 근로감독관에게 주어지는 권한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근로감독관에게 작업중지권이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한국은 작업중지권이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있다. 근로감독관은 다만 관계인에게 질문하고 서류를 요청할 권한을 가질 뿐이다(산업안전보건법 제 155조 1항). 수술실의 막내 간호사가 체크리스트를 쥐고 있는데, 뭔가 잘못되고 있어도 의사를 막을 권리는 없는 셈이다. 물론 근로감독관의 권한을 확충하는 것 말고도 더 좋은 방안이 있을 것이다.

21세기 초유의 아파트 붕괴 사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실종자를 찾는 것만이 아니다. 민주적으로 소통하며 지킬 건 지키는 안전한 산업 현장을 이뤄 나가야 한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해내려고 대충 넘어가는 악습을 도려내지 않는 한, ‘정상 사고’는 언젠가 재발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아무튼, 주말] 코로나 패닉에 던져진 확률 퀴즈… “백신 접종, 살아남는 데 정말 유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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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시사哲]
몬티 홀의 ‘세 개의 문’과
백신 효과의 상관관계

퀴즈. 세 개의 문이 있다. 그중 하나를 열면 최신형 자동차가 있지만, 나머지 두 문 뒤에는 염소가 있다. 3분의 1의 확률로 당첨, 나머지 3분의 2는 꽝인 셈이다. 여러분은 그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러스트=유현호

가상의 수학 문제가 아니다. 1963년부터 40여 년간 방송된 미국의 TV 쇼 ‘거래를 합시다’(Let’s Make A Deal)에서 수없이 반복된 상황이다.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던 몬티 홀은 퀴즈를 맞힌 참가자에게 상품을 뽑으라며 질문을 던졌다. “1번 문을 원하십니까, 2번 문 아니면 3번 문?” 참가자가 문 하나를 고르면 정답을 아는 몬티 홀은 능청스럽게 참가자가 고르지 않은 문을 하나 택해서 보여준다. ‘꽝’이다. 몬티 홀은 다시 묻는다. “지금 선택을 유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바꾸시겠습니까?”

얼핏 생각해보면 굳이 선택을 바꿀 이유가 없는 듯하다. 꽝 하나가 제거되었지만, 아무튼 내가 원래 택한 문은 정답이거나 오답일 것이고, 그 사실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혹시라도 처음 선택을 바꿨다가 꽝을 뽑게 되면 얼마나 후회막심이겠는가. 그래서 수많은 출연자들은 처음 고른 선택지를 바꾸지 않았다.

미국 최고의 IQ 보유자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던 칼럼니스트 메릴린 사반트가 볼 때, 선택지를 바꾸지 않는 사람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었다. 몬티 홀이 세 개의 문 중 하나가 오답이라는 걸 보여줬다면 참가자는 선택을 바꾸는 것이 유리하다. 어째서일까? 몬티 홀의 개입으로 인해 단순한 확률 문제가 조건부 확률(conditional probability) 문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건부 확률은 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전제하에 다른 사건이 일어날 확률을 뜻한다. 몬티 홀은 오답을 하나 제거하면서 참가자에게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준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건은 확률의 조건에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차분하게 따져보자. 참가자가 처음에 오답을 택할 가능성은 3분의 2, 정답을 택할 가능성은 3분의 1이었다. 그런데 몬티 홀이 등장하여 오답을 ‘골라서’ 제거해줬다. 그 말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3분의 1의 오답 가능성을 몬티 홀이 대신 가져가준 것과도 같다. 따라서 참가자가 새로운 선택을 하면 오답을 택할 가능성은 3분의 1이다. 세 개의 문 중에서 하나가 오답이라는 것을 미리 아는 상태에서 나머지 오답을 피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정답을 택할 가능성은 자연스럽게 3분의 2로 늘어난다.

곧장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해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거래를 합시다’ 시청자 중 메릴린 사반트에게 항의 편지를 보낸 사람은 1만 명이 넘었는데, 그중 1000명가량이 수학이나 공학 등을 전공한 ‘이과인’들이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확률, 특히 조건부 확률은 많은 경우 우리의 직관과 상식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몬티 홀 문제는 수학적으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전제 조건이 달라졌다면 확률도 달라진다는 단순명료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백신 맞아도 코로나 걸리잖아, 그럼 대체 백신을 뭐 하러 맞는 거야?” 요즘 많은 곳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물론 완전히 틀리는 말은 아니다. 백신을 맞아도 코로나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위험성은 전혀 달라진다. 편의상 백신을 맞지 않으면 코로나에 걸려 죽을 확률을 50%라고 해보자. 반면 백신을 맞을 경우 10%만이 죽는다. 이 경우, 50명이 백신을 맞았지만 10명은 백신을 맞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 코로나 사망자는 총 10명이 나오는데, 그중 5명은 백신 미접종자, 5명은 백신 접종자가 된다.

그렇다고 백신이 효과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백신 미접종자의 사망률은 여전히 접종자보다 다섯 배나 높으니 말이다. 다만 백신 접종자의 전체 숫자, 즉 모수(母數)가 다섯 배 많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망자 수가 같게 보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백신을 맞아야 한다. 그래야 코로나 사망에 대한 전제 조건이 달라지고, 조건부 확률에 따라 상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 백신은 오답의 가능성을 미리 줄여주는 몬티 홀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백신을 맞는다 해도 운이 나쁘면 돌파 감염되어 ‘꽝’을 뽑을 수 있다. 그러나 확률은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뀐다. 유튜브나 소셜네트워크(SNS)를 통해 돌아다니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가짜 뉴스에 휘둘리는 대신, 종이와 펜을 놓고 찬찬히 숫자를 따져보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는, 수학적이면서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 백신 회의론과 백신 거부 움직임이 퍼져나가고 있다. 코로나도 벌써 2년째에 접어들고 있으니 다들 상당히 지쳤을 법도 하다. 방역패스의 필요성에 원론적으로 동의하더라도 합리적인 기준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자영업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인상 또한 지우기 어렵다. 방역패스에 대한 법원 판결로 인해 혼란은 더욱 가중될 듯하다.

코로나 백신은 급하게 만들어낸 최신작이다. 다른 백신에 비해 불안감이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백신의 효과는 조건부 확률 같은 직관적이지 않은 개념을 통해 바라봐야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국민 정서와 눈높이를 감안한 과학적 설득을 꾸준히 해나가도 부족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문재인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영업자들의 피눈물을 못 본 체하며, 우리나라가 ‘방역 모범국’이라 자화자찬하더니, 해외 순방을 빙자한 외유를 즐기고 있다.

일부 국민들이 정부를 불신하다 못 해 백신을 불신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지난 18일 발표된 조선일보·TV조선 여론조사에서 ‘코로나와 관련한 정부의 방역 관리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조사 대상자 중 절반이 넘는 54.1%가 ‘아니요’라고 대답한 것 또한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3월 9일 수요일, 우리는 새로운 몬티 홀 문제를 풀게 될 예정이다. 선택지를 둘로 줄이면 조건부 확률에 따라 정답을 맞힐 가능성이 높아질까? 몬티 홀 문제처럼 선택지를 바꿔야 하나? 정치는 수학이 아니라 생물이니,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은 금물. 다시 한번 ‘꽝’을 뽑지 않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