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1

'광화문 시대'와 작별을 고하고 싶다

"결국 미 대사관은 이 논란이 본격화되기 전에 마련해 뒸던 정동 옛 경기여고 자리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미국은 90년 을지로에 있던 미 문화원과 1만5117㎡에 이르는 경기여고 땅을 맞바꾸기로 서울시와 합의한 상태였다. 이 부지는 미 대사관저와 바로 맞닿아 있어 대사관과 함께 직원 숙소까지 지을 수 있는 안성맞춤의 땅이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로 유명한 마이클 그레이브스에게 의뢰해 지하 2층, 지상 15층짜리 대사관 설계까지 마친다.

하지만 만사 쉬운 일은 없는 법.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순조로워 보였던 대사관 이전 계획은 돌연 암초를 만났다. 대사관을 지으려던 경기여고 자리가 역사적 유적지로 밝혀진 까닭이다. 조사 결과 문제의 땅에는 1933년까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모셨던 선원전(璿源殿)과 왕과 왕비의 혼백을 모신 흥덕전(興德殿) 등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시민단체들은 “조선시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공간 위에 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미 대사관은 “한국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경기여고 이전 계획을 포기한다”고 2003년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741863

경기여고는 순종이 어명으로 만든 학교임. 조선 왕실에서 '야 너네 이 땅 써라'해서 그 땅 위에 지었음. (사진 속 빨간 동그라미)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경기여고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또 유의미한 '조선시대의 유산'이었는데, 경기여고는 그 땅 버리고 강남으로 훌훌 갔음.

그런데 그 자리에 미국이 대사관 좀 지으려고 하니까 뭔 일이 벌어지냐? 위에 인용된 칼럼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죠.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바 아니었던 유물 나왔다고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남.

결국 미국 대사관은 대사관저와 딱 붙여서 멋들어지게 지어보려던 건물 계획 다 포기하고, 용산 미군기지 옆으로 가려고 했는데, 미군기지 이전에 차질이 생기면서 광화문 한복판에 뒈지게 낡은 건물에서 영원히 살고 있음.

그래서 그 경기여고 땅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그냥 허허벌판임(2030년대까지 '선원전터 복원'을 한다는데 그게 문화재로서 유의미함? 그렇게 믿을 사람은 유홍준 말고 아무도 없음).

이게 뭐야? 뭐하는 짓이야? 아무도 모름. 문화재를 지키자! 하면서 그 땅 기꺼이 쓸 유일한 소비자를 쫓아내놓고, 그냥 비워두고 있음. 이런 비합리적인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 미국이 싫어서. 혹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청와대에서 벗어나 용산으로 간다는 결정의 문화사적 의의를 짚어보기 위함.

대통령이 청와대를 버린다? 이건 청와대만의 문제가 아님. '광화문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미도 됨.

'광화문 시대'란 무엇인가? 김영삼이 중앙청을 박살내면서 시작된 시대. 민족주의적 감성이 모든 합리와 이성과 계획의 상위 개념으로 날뛰고, 그 누구도 그것을 감히 말리지 못했던 시대. 문화재청 같은 일개 '청'이 민족의 제사장 행세를 하며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시대.

일본과 전쟁을 해서 독립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목 하에 역사 왜곡을 하는 게 옳은 일처럼 여겨졌던 시대.

'민족정기'를 세우고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억지 부리고 악다구니 쓰는 게 뭐 좋은 일처럼 여겨졌던 시대.

이제 좀 새로운 세상에 살아보고 싶다는 소리. 그 뭐 광화문의 함성이니 종로의 정취니 피맛골의 그리운 풍경이니, 다 그냥 '즐기는 문화'의 범위로 넘기고, 우리는 갑시다 미래로.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집무실 옮겨야 하는 까닭

● 풍수 언급한 건 승효상·유홍준
YS·DJ·盧도 광화문으로 이전 구상
● ‘시민과의 만남’은 집무실 목적 아냐
● 文은 ‘창성동 청와대’ 속사정 알까


현재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전경.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미신과 풍수에 따라 청와대를 옮기려 한 정권. 어떤 정권이었을까? 문재인 정권이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렇다. 201710월, 건축가 승효상은 청와대 ‘상춘포럼’에서 “청와대 터가 풍수상 문제가 되니 옮겨야 한다”고 했다. 친(親)민주당계 인사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한 뒤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돼 청와대 이전을 논의하다가, 2019년 1월 4일 공약 파기를 발표했다.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퇴임을 앞둔 문재인 정부를 먼저 비판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윤석열 무속 논란’의 백해무익한 면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윤석열 무속 논란’을 진지하게 거론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다. 방귀 뀐 자가 성 낸다는 속담이 떠오를 지경이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하루 이틀 된 논의가 아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는 광화문 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청와대는 여러 건물로 이루어진 시설이다. 1990년 춘추관 및 관저, 1991년 본관이 완공됐다. 그러니까 김영삼은 콘크리트가 속까지 다 굳지도 않았을 시점에 이사를 가네 마네 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선 직후 광화문 청사로 집무실을 옮기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청와대에서 나와 새로운 집무실을 마련하고자 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청와대 용산 이전’이라는 이슈를 ‘윤석열 무속 논란’으로 묻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수많은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사람 만나면서 피해야 하는 대통령의 모순
2019년 1월 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유홍준 당시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유 위원장은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직접적으로 ‘풍수’를 거론했던 문재인 정권을 빼고 나면, 대부분 정권이 탈(脫) 청와대를 외친 이유는 비슷하다. ‘국민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경복궁 뒤편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보니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고 민심의 동향으로부터 어두워져, 결국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런 이유라면 대통령이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에서 노트북 펴놓고 일하는 건 어떨까? 아니면 지하철 노선 세 개가 지나가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물로 청와대를 옮기는 건 어떨까?

말만 들어도 헛웃음이 날 것이다. 그렇다. ‘시민과의 만남’은 대통령 집무 공간의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이유로 대통령 집무 공간을 옮겨서도 안 된다. 완전히 경호를 포기하지 않는 한 대통령이 ‘일반 시민’과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사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중적 접근성은 새로운 대통령 집무 공간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소리다.

괜한 말장난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집무 공간을 옮겨야 한다는 쪽이다. 현재 대안으로 제시된 용산 국방부 안을 지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해볼 필요가 있기에 하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용산 뿐 아니라 어디로 이전해도 부족하고, 또 부적절하다.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 정의상 ‘국민 속’에 있으면 안 된다. 대통령도 불편하고 국민도 불편하다. 그러나 동시에 대통령은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문고리 권력’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 그러니 ‘인의 장막’에도 갇혀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사람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모순이다. 그런데 대부분 선진국은 어렵지 않게,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에 걸쳐 잘 해나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또 반대로, 왜 대한민국 대통령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청와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사실상 두 개
우리는 흔히 ‘청와대’라고 하면 사진에서 본 파란 기와 건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건물은 청와대 본관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청와대 건물은 그것만이 아니다. 청와대에 부속해 있는 건물 중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총 12곳. 그 중에는 ‘위민관’에서 ‘여민관’으로 이름이 바뀐 비서실도 포함돼 있는데, 그 건물만 해도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통령의 집무실은 관저에 마련돼 있다. 반면 대통령의 비서들은 비서실에 있다. 그 거리만 해도 500m인데 보안상의 이유로 중간에 또 한 차례 검문을 받아야 한다. ‘문고리 권력’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구조다. 그런 불편을 해소하고자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초기 여민관 내에 집무실을 마련해 출근하면서 정부종합청사로 집무실을 완전히 옮길 계획이라 밝혔지만 결국에는 청와대에 머물고 말았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청와대의 부속 건물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편번호 03048. 여기까지는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하나 더 있다.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네이버·카카오 지도로 보면 건물 모양만 그려져 있을 뿐 뭐 하는 곳인지 설명조차 나와 있지 않은 곳. 딱히 명칭도 없는 그곳은 흔히 ‘청와대 부속청사’, ‘창성동 별관’ 등으로 통한다. 지난 2018년과 2019년, 사상 초유의 청와대 압수수색을 하네 마네 할 때 뉴스에 등장했던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적어도 두 개 있다. 건물이 아니라 부지를 단위로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리가 아는 청와대.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가끔 뉴스에 나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도 언급하지도 않는 ‘창성동 청와대’.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청와대’와 ‘대통령’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군가 대통령이 되면, 특히 정치권 사람들은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도 않는다. 심지어 ‘BH’라느니 ‘VIP’라느니 하는 식으로 부르는 이상한 관습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본인은 대통령이 아닌데 청와대에 한 다리 걸친 사람들만 신이 난다. 한껏 부풀어 오른 자아를 뽐내며 호가호위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난 정부와 지지난 정부, 아니 1987년 민주화 이후 경험해온 수많은 측근 비리와 판단 착오, 인사 실패 등을 떠올려보자. 모두 같은 패턴이다. ‘청와대’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결정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모른다. 권력의 단맛은 청와대가 누리고, 그 책임은 대통령이 뒤집어쓴다.

청와대의 구조를 가장 악용한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겠지만, 문재인이라고 해서 나을 건 없다. 단적으로 물어보자. 문재인은 과연 ‘창성동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조직 장악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현재 청와대는 하나가 아니다. 건물이 나뉘어 있는 것을 넘어 별도의 부지까지 사용한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득이 될까, 아니면 청와대에서 일하거나 들락거리는 대통령이 아닌 사람들에게 좋을까?

민주국가 행정수반은 ‘오피스’에 있다
현재의 건물 및 인력 배치 구조상,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 ‘청와대’에 잡아먹힌다. 분명 대통령의 부하 직원이라고 돼있는데, 자신의 부하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보기도 어렵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불시에 질문할 수도 없다. 옥상옥 위의 옥상옥으로 이어지는 한없는 계단식 구조 속에 대통령은 마치 구중궁궐의 왕처럼 고립된다.

이 문제는 대통령이 아무리 시내 번화가에서 근무한다 한들 풀리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청와대’와의 접촉면을 늘려 조직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해결된다. 대통령 본인이 모든 직원을 다 파악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의 공간은 비좁아야 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부대껴야 한다. A가 B와 ‘썸’을 타고 있고, C와 D가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으며, E와 F는 공직을 벗어던지고 벤처기업을 차리고 싶어 한다는 등, 온갖 잡다한 대화가 오가는 사무실의 분위기. 그 속에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아니다 싶으면 제3자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의 장막’을 치고 싶어 하는 권력의 불나방들이 권모술수를 부릴 수 없게 된다.

1948년 첫 대통령 선거 이후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은 ‘궁궐’에 있었다. 궁궐이 궁궐인 한 그 궁궐이 어디에 있건 대통령은 성공하기 어렵다. 해법은 대통령 집무실이 궁궐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대통령이 수많은 직원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미국의 백악관처럼, ‘오피스’로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의 일은 다른 모든 지식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결국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미국의 백악관,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 독일의 연방총리관저 ‘분데스칸츨러암트(Bundeskanzleramt)’ 모두 복닥거리는 사무실이다. 민주국가의 행정수반은 그런 곳에서, 마치 국민이 그렇듯,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의 해답은 ‘일하는 대통령’인 것이다.

청와대는 애초에 ‘오피스’로 만들어진 시설이 아니다. 그 설계부터가 궁궐이다. 거대한 부지의 입구에 마치 양반댁 행랑채처럼 비서동을 배치하고, 가장 깊숙한 곳에 사저와 본관을 뒀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이지만 끔찍하리만치 봉건적이다. 분명 민주주의 국가인데 5년마다 한 번씩 선거로 왕을 뽑은 후 새 왕이 뽑히면 지난 왕의 목을 치는 ‘87년 체제’의 비극은 바로 그런 구조적 모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3월 17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인근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국방부 앞 전경.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국방부 신청사로 옮기는 것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신원건 동아일보 기자]
87년 체제’와 ‘궁궐’
청와대를 재활용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세 동으로 이루어진 여민관과 창성동 별관, 그리고 대통령 관저의 업무 공간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단일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과감히 청와대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대통령의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87년 체제’의 모순을 끝내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궁궐’에서 끌어내야 한다. 다행히 용산 국방부 청사에는 헬기 이착륙장, 지하 벙커, 그 외 필요 시설이 이미 갖춰져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오피스’행을 지지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19

‘이대녀’들의 응징투표가 남긴 교훈… “정치는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

‘이대녀’들의 응징투표가 남긴 교훈… “정치는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판타지 로맨스 ‘왓 위민 원트’와
대한민국 남녀갈등 해법은?

멋진 남자, 하지만 나쁜 남자. 잘나가는 광고맨 닉 마셜(멜 깁슨)은 마초에 바람둥이다. 이혼한 전처가 재혼하고, 딸이 아빠를 경멸한다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없던 닉의 인생에 급제동이 걸린다. 닉의 회사가 경쟁사의 달시 맥과이어(헬렌 헌트)를 채용하더니, 닉이 노리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힌 것이다. 술, 담배, 자동차 광고만 신경 쓰면 그만이던 시절은 갔다. 400억달러 규모로 커진 여성 광고 시장을 두고 싸워야 한다. 남성 우월주의자 닉의 인생이 암초에 부딪혔다. ‘여자들이 원하는 것, 그게 대체 뭐지?’

일러스트=유현호

술에 취한 채 매니큐어를 바르고 다리의 털을 뜯어내며 팬티스타킹을 신어보던 닉. 갑자기 집에 찾아온 딸 때문에 당황했다가, 그만 헤어드라이어를 켠 채 욕조에 빠지고 만다. 빠지직!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뭔가 이상하다.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더 끔찍한 건 여자들의 ‘본심’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퍽 다르다는 것이다. 웃는 얼굴로 닉의 야한 농담도 받아주던 가정부는 닉을 경멸하고, 택시를 잡아주던 아파트 수위는 속으로 닉을 성희롱하고 있다.

영화 ‘왓 위민 원트’의 내용이다. 제목에 쓰여 있듯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 주제지만, 좀 더 크게 볼 수도 있다.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철학적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두 개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푸틴의 전쟁으로 인해 EPL팀 첼시의 구단주 아브라모비치는 재산이 동결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푸틴 정권과 함께 호의호식했던 아브라모비치를 비난하는 사람일지라도, 갑자기 재산을 잃게 생긴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연민은 좀 더 직접적이고 감성적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추위에 떠는 길 잃은 개를 볼 때, 전쟁의 포화에 휘말린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소식을 접할 때, 때 이른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에서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때, 우리는 당사자의 감정을 마치 내 것인 양 ‘느낀다’. 공감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육체적이기까지 한 감정의 전염, 그것이 바로 연민인 것이다.

공감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부터 출현한 개념이다. 반면 연민은 18세기 영국에서 철학적으로 주목받았다. 대체 인간은 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흄이 볼 때 우리의 도덕은 한낱 관습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상의 도덕률이 갑자기 잔인하고 포악하게 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아끼고 배려하는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런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국부론>의 핵심 원리다. ‘보이지 않는 손’, 말하자면 이기주의의 법칙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배려한다. <국부론>보다 먼저 펴낸 <도덕감정론>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종종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런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연민은 도덕의 토대가 된다. 서로 공유하는 도덕이 있어야 사회가 성립하고 자본주의 또한 가능해진다.

공감과 연민은 서로 다르고 서로를 보완한다. ‘왓 위민 원트’로 돌아가 보자. 닉에게는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공감 능력이 0에서 100으로 솟구친 셈이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이내 그 잠재력을 깨달았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여자를 쉽게 유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로만 이해하고 접근하는 닉에게 딸은 넌더리를 낸다. 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반응했을 뿐 인간적인 교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감과 연민의 힘을 모두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진정한 공감과 연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지난 대선 과정을 떠올려 보자. 국민의힘은 여론조사에서 큰 폭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박빙이었다. 3월 8일 여성의날을 하루 앞둔 7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단합하는 것 같아도 오프라인 표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도발적 발언을 한 것이 원인 중 하나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20대 여성 표가 일주일 전 여론조사에 비해 약 20%p 뛰어올랐다. 기권하거나 정의당을 찍었을 ‘이대녀’들이 더불어민주당을 찍어서 ‘응징 투표’를 한 것이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특정 유권자 집단을 비하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정동영 전 장관의 ‘노인 투표 발언’, 유시민 전 장관의 ‘나이를 먹으면 뇌가 썩는다’ 발언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박영선 후보가 ‘20대는 역사적 경험치가 낮다’는 발언을 했다가 응징 투표를 당한 것을 보고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 공감도 연민도 없는 발언으로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다. 선거가 휘청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발언자 본인의 정치 인생에도 두고두고 족쇄가 된다.

이번 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년층 내에서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의 역할은 그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 막판에 남녀 갈등에 휘발유를 끼얹는 소리를 해버렸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은 당연한 일. 정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분석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도 알던 사실을 21세기 사람들이 왜 모르는 걸까.

닉은 여자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땅 짚고 헤엄치듯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없다. 닉에게 애정을 느낀 달시의 입장에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어제까지만 해도 솔메이트처럼 내 마음을 짚어내던 이 남자가 오늘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버벅거린다. 두 사람은 차분하게 대화하고, 오해를 풀고, 사과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 ‘왓 위민 원트’는 판타지 로맨스 코미디 영화지만 공감과 연민의 힘은 진짜다. 대한민국의 남녀 갈등 역시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것이다.

2022-03-13

'20대 남자 성비 문제'의 진짜 희생자

2020년 현재 연령별 성비

20대 남자들은 여자보다 1.2배 많고, 그래서 짝을 구하기 어렵고, 일자리도 예전처럼 쉽게 구할 수 없고, 그래서 피해자다.

이런 소리를 이제 남초 커뮤니티가 아니라 나름 양식과 식견이 있는 기성세대 중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다.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옳은 말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성비 박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희생자 집단을 가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여성주의적 맥락에서 낙태권은 곧 여성의 선택권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 낙태에 반대하는 서구 기독교 계열이 스스로를 '프로 라이프'라 할 때, 여성주의는 '프로 초이스'라 하여 여성의 선택권으로서의 낙태권을 옹호하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1세계 문제다. 한국, 인도, 기타등등 남아선호 및 여아살해가 흔한 제3세계에서는 사정이 다르게 전개됐다. '시댁과 사회의 강요로 인한 여아 낙태'를 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낙태시술이 성행한 것이 여성 인권의 억압과 맞닿은 현상이었던 것이다.

<사이언스>의 기자였던 마라 비슨달은 <남성 과잉 사회>에서 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아시아와 서구를 비교해보면 아시아에서의 낙태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와 서유럽에서 낙태 합법화는 보통 낙태 건수의 감소로 이어진다. 이것은 보기만큼 역설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회에서 낙태법을 완화할 때는 피임도 함께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와 아울러 애당초 임신하지 않을 권리가 대두된다. 하지만 가족계획 정책이 여성의 요구에 대한 배려 없이 수립되고 낙태가 피임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속성 인구 조절 방법으로 도입된 아시아와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합법적 낙태는 더 많은 낙태를 의미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연구원 변화순은 "가족계획정책에는 성 인지적 관점(남성과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중심으로 개념과 정책을 검토하는 관점--옮긴이)이 빠져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여성의 몸은 도구죠. 그래서 우리는 약 대신 낙태를 이용합니다"라고 말한다.[208쪽]

마라 비슨달, 박우정 옮김, 『남성 과잉 사회』(서울: 현암사, 2013)

'너무 많이 태어나서 짝 없는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그렇게 남자들을 '과잉생산' 하기까지, 낙태를 강요당했던, 이대남들의 어머니 세대는 안 불쌍한가?

나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 그래서,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택도 없이 이대남에게'만' 감정이입하며 엉엉흑흑 불쌍불쌍 둥기둥기 해주는지 이해를 전혀 못하겠다.

(아니, 실은 잘 알겠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다.)

2022-03-12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尹 시대, 한국정치 개와 늑대의 시간

● 역대급 초박빙 대선의 후폭풍
● 진보성향 유튜버의 송영길 습격
● 일부 친문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 이재명 ‘1600만 표’의 정치적 의미
● 野, ‘굴러온 돌’ 안철수라는 딜레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당선 인사 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3월 9일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3월 10일 새벽 4시가 돼서야 당선자가 확정됐다. 1%p 이내, 고작 247077표 차이로 당락이 갈린 역대급 초박빙 대선이다. 이로 인해 기호 1번과 2번, 그러니까 여당과 야당이 5년 만에 교체됐다.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곳은 청와대만이 아니다. 이제는 ‘과거의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내의 권력 구도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선후보가 2위로 낙선하긴 했지만 무려 16147738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제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당선될 때 얻은 13423800표를 훌쩍 웃돈다. 이재명이 차기 대선에서 재기를 도모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한 대목이다.

반면 원내 제3당 정의당의 현실은 턱없이 초라하다. 2.37%, 803358표. 선거비용 보전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이 완주해 표가 나뉘는 바람에 대선 결과가 달라졌다는 식의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야당이지만 일종의 준 여당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던 정의당과 민주당의 밀월관계는 정권교체와 함께 끝난 셈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건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를 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그를 중심으로 국민의힘이 완전히 개편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24만여 표차의 신승을 거둔 탓에 ‘윤석열발(發) 정계개편 시나리오’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난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윤석열은 압도적 의석의 거대 야당과 맞서면서, 동시에 110석의 여당을 ‘대통령의 정당’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이중 과제에 놓였다.

‘표삿갓’ 테러의 상징효과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프랑스어 표현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 해가 떠오르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뭔가 보이지만 뚜렷하지는 않은 시간을 뜻한다. 저 언덕 너머로 보이는 것이 나를 지켜주는 개인지, 나를 물어뜯으러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대선 이후 한국 정치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접어들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시간. 내게 다가오는 저 사람과 저 지지층이 나의 편인지 적인지, 나의 편인 척 하면서 나를 물어뜯으려 하는 것인지, 나를 공격했던 저들의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인지, 끝없이 고민하며 결국에는 모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점이지대(漸移地帶)로 향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부터 살펴보자. 지난 3월 7일, 서울 신촌에서 거리 유세 중이던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봉변을 당했다. ‘표삿갓’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70대 유튜버가 검은색 비닐로 싼 망치를 이용해 송영길의 머리를 여러 차례 가격했던 것이다. 다행히 송영길의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선거를 치러야 하는 처지의 그는 하루 만에 퇴원해 유세와 연설을 이어나갔다. 송 전 대표의 쾌유를 빈다.

‘표삿갓’은 한미연합훈련을 반대하고 종전 선언을 촉구하는 등의 내용을 유튜브에 올려온 인물이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될 당시에도 “한미 군사훈련을 반대한다”, “청년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가 아닌 진보라는 점, 국민의힘이 아닌 민주당 지지층에 속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일탈적 범죄 행위다. 이와 동시에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극도로 심각해져 있는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삿갓이 내세운 ‘한미연합훈련 반대’, ‘종전선언’ 등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내 추구했던 대북 외교 현안이다. 그를 문재인의 골수 지지자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반면 이재명은 정치 이력을 시작할 때부터 ‘친노’, ‘친문’ 주류와는 거리가 있다. 본인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쳐오자 문재인의 아들인 미디어아티스트 문준용 씨를 거론하는 등, 친문 세력 및 지지자들과 썩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 있는 상태기도 하다. 이재명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송영길이 정치적 테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당내 정치 지형과 무관하다 보기 어렵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민주당의 내분은 이뿐만이 아니다. ‘더레프트’라는 아이디로 잘 알려진 친문 인플루언서를 비롯해, 다수의 친문 지지자들이 이재명을 버리고 윤석열 지지로 ‘갈아타는’ 이변이 벌어졌다. 2018년부터 이재명과 대립해오던 더레프트 및 이른바 ‘극문’ 지지층은 올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윤석열 지지를 표명하고 당선 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에게 ‘여니’, 운석열에게는 ‘여리’라는 별명을 붙이고는,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투항과 전향 사이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오른쪽)가 3월 1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도열한 의원들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에서 이탈한 반(反) 이재명 지지층이 실제로 얼마나 투표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윤석열을 겨냥한 민주당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데에는 분명 일정한 기여를 했다.

윤석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를 향한 인신공격이 쏟아지던 지난 1월 무렵이 그랬다. 더레프트를 비롯해 친문 ‘네임드’ 지지자 중에는 인터넷에 유포되기 적합한 이미지와 문구 등을 잘 만들어내는, 이른바 ‘능력자’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그들은 김건희를 향해 쏟아지는 비방과 흑색선전의 내용을 되받아치거나, 윤석열-김건희 부부를 귀엽게 묘사하는 여러 ‘짤방’을 만들고 유포했다. 온라인 선전전에서 취약했던 국민의힘과 그 지지자들 처지에서 보자면 가히 ‘외계인들이 외계 무기를 들고 와서 도와주는’ 형국이었다.

이낙연계의 유명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윤석열 지지 선언을 한 것은 그런 면에서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민주당 기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변화와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니 말이다. 이낙연의 측근으로 불린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괴물보단 식물 대통령을 택하겠다”는 그의 말에는 뼈가 있고 가시가 세워져 있다.

이렇듯 민주당의 내분은 대선 이후에도 심각한 상태다. 선거 이후 이재명의 지지자 중 일부는 여당 의원들을 향해 문자 폭탄을 보냈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 민주당 의원은 ‘송영길 대표 사퇴는 안 된다’, ‘패배 원인은 무조건 이낙연 전 총리’라는 취지의 문자를 하루에 300여 통 이상 받았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는 점잖은 말로 바뀌어 서술돼 있으나, 실제로는 온갖 욕설과 폭언이 담겨 있으리라 예상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이 50% 이상의 과반 득표를 하고, 이재명은 40% 이하의 득표를 했다면 어땠을까? 대선에 참패한 민주당의 내분은 본격적으로 더 크게 드러났을 것이다. 이낙연의 열혈 지지층은 이재명이 부패하고 부도덕하다고 비난해왔다. 게다가 선거 결과로 무능이 드러나기까지 했다면, 이재명과 이재명계를 쫓아내거나 자신들이 따로 짐을 싸서 나가버리거나, 아무튼 한 집 살림을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에 보다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이재명은 정권교체 여론이 압도적인 가운데에서도 1600만여 표를 얻는 성과를 냈다. 이재명은 대선에서 졌지만 민주당을 움켜쥔 ‘그립’을 놓치지 않고 더 단단히 다져나갈 수 있다. 3월 10일 새벽 4시 KBS의 당선 예측이 나오자마자 후보자 본인이 빠르게 승복 선언을 하고, 같은 날 송영길을 비롯해 당 지도부가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진다며 총사퇴한 것은, 오히려 자신감의 표현에 가깝다. 선거에서 졌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패배를 빨리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 문재인의 임기는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은 이미 야당으로, 윤석열의 인수위로 넘어간 상태다. 현직 대통령과 ‘친노 적통’을 믿고 버텨온 친문 혹은 극문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이재명 쪽에 투항해야 할까? 아니면 이미 한번 지지했으니, 윤석열이 새로운 그림을 그려줄 것이라 믿고, 문재인이 임명한 검찰총장 윤석열의 지지자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할까? 저들은 나의 아군인가? 나는 저들에게 늑대인가, 개인가? 시계(視界) 제로.

이준석을 둘러싼 갈등 지형
대선을 이틀 앞둔 3월 7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경기 화성시 동탄센트럴파크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박수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안개 속처럼 뿌연 상태인 것은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듯 윤석열의 지근거리에는 소위 ‘윤핵관’(윤석열 측 핵심관계자)으로 통칭되는 측근 그룹이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그 점을 연신 지적해왔고, 윤석열이 윤핵관과 거리를 두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하고자 지방으로 떠나는 식의 행보를 보여줬다. ‘윤핵관’과 ‘이핵관’, 그리고 윤석열의 당선에 기여한 다른 세력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은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권교체에 성공했기 ‘ 때문에’ 앞날을 예단하기 어렵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율과 개인의 카리스마로 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과 그에 따른 ‘전리품’은 그대로 있는데, 누가 그것을 차지해야 하는가? 윤석열이 교통정리를 해서 완벽히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초박빙 승부로 결정된 여소야대 정권은 위기에 직면하기 쉬운 구조다. 정치에 입문한지 고작 8개월 만에 대통령이 된 ‘초보 정치인’ 윤석열이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이준석의 영향력은 크게 상처 입은 상태다. 호남에서 30% 이상의 득표를 올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세대포위론’의 힘으로 전체 득표율에서 10% 이상의 격차를 벌려 압승하리라는 호언장담은 무참히 깨졌다. 국민의힘의 호남 진격은 약 15% 정도의 득표율로 귀결됐다. 이는 그간 국민의힘 계열 정당이 얻은 호남 득표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국민의힘이 호남을 끌어안는 전국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이대남’ 구애 전략 혹은 여성주의 고립 전략이다. 이준석과 극적으로 화해한 윤석열이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짧은 메시지를 올려 여론을 반등시킬 때만 해도 이 전략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대성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3월 4일과 5일 사전투표가 시행된 후, 3월 7일 CBS ‘한판승부’에 출연한 이준석이 “여성의 투표 의향이 남성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며 “저는 그런 (여성들의 이재명 민주당 후보 지지 성향 관련)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 온라인에서는 보일 수 있겠으나 실제 투표 성향으로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본다”는 발언을 하면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재명 선대위는 선거운동 막바지에 이르러 여성들이 겪는 디지털성폭력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렇게 민주당은 20대 여성표심을 겨냥했고 서서히 판세가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준석은 젊은 여성들의 표심을 ‘어차피 투표하러 안 나오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일축했다. 역풍을 불러올만한 발언이었다.

여론조사 공표기간 금지 전인 3월 2일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은 20대 여성으로부터 39.1%, 윤석열은 26.7%의 지지를 받았다.(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러나 1주일 후인 대선 당일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을 향한 20대 여성의 지지는 58.0%로 폭증한 반면, 윤석열의 표는 33.8%로 완만하게 늘었다. 안철수와 단일화를 했지만 안철수가 갖고 있던 20대 여성표는 윤석열에게 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준석 심판을 위해 이재명에게 결집하면서 이번 대선을 초박빙 승부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준석이 끌어들인 남녀 갈등은 국민의힘의 ‘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정의당의 고통스러운 홀로서기
‘정치 초보’ 윤석열이 풀어야 할 난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와 합당까지 합의한 안철수를 어떻게 예우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선거가 워낙 박빙으로 끝난 탓에 안철수가 어떤 기여를 했고 어느 정도의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지 이해관계자들 간의 해석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안철수와 ‘굴러온 돌’들은 단일화가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겠지만, 국민의힘의 ‘박힌 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307542표나 쏟아져 나온 무효표를 근거로, 안철수의 기여가 낮으니 많은 지분을 제공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국민의힘 바깥 뿐 아니라 안에서도 적과 동지의 경계선은 흐릿해지면서 많은 이들을 혼란과 번민으로 몰아넣을 전망이다.

정의당은 더욱 험난한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창당된 후 10년간 정의당은 민주당 및 그 지지층과 전략적 우호 관계를 수립하며 동반 성장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는데, 이제는 그 전략이 유효성을 상실했다. 민주당은 야당이 됐고,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에 대선 패배 책임론을 언급하고 있다. 정의당은 이제 고통스러운 홀로서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과연 진보정당으로서 독자 노선을 수립하고 지지층을 다시 쌓아나갈 수 있을까?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해뜰녘과 해질녘, 하루에 두 번 있다. 저 멀리 다가오는 것이 나의 친구인지 적인지 알 수 없으나, 해뜰녘의 불확실성은 조금만 기다리면 확실히 마무리된다. 반면 해질녘의 흐릿한 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오래도록 지속될 짙은 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겪게 될 개와 늑대의 시간이 해질녘의 어둠이 아닌 해뜰녘의 어둠이기를, 곧 해가 뜨고 많은 것이 분명해지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이룰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원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