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녀’들의 응징투표가 남긴 교훈… “정치는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
[노정태의 시사哲]
판타지 로맨스 ‘왓 위민 원트’와
대한민국 남녀갈등 해법은?
멋진 남자, 하지만 나쁜 남자. 잘나가는 광고맨 닉 마셜(멜 깁슨)은 마초에 바람둥이다. 이혼한 전처가 재혼하고, 딸이 아빠를 경멸한다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없던 닉의 인생에 급제동이 걸린다. 닉의 회사가 경쟁사의 달시 맥과이어(헬렌 헌트)를 채용하더니, 닉이 노리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힌 것이다. 술, 담배, 자동차 광고만 신경 쓰면 그만이던 시절은 갔다. 400억달러 규모로 커진 여성 광고 시장을 두고 싸워야 한다. 남성 우월주의자 닉의 인생이 암초에 부딪혔다. ‘여자들이 원하는 것, 그게 대체 뭐지?’
일러스트=유현호
술에 취한 채 매니큐어를 바르고 다리의 털을 뜯어내며 팬티스타킹을 신어보던 닉. 갑자기 집에 찾아온 딸 때문에 당황했다가, 그만 헤어드라이어를 켠 채 욕조에 빠지고 만다. 빠지직!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뭔가 이상하다.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더 끔찍한 건 여자들의 ‘본심’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퍽 다르다는 것이다. 웃는 얼굴로 닉의 야한 농담도 받아주던 가정부는 닉을 경멸하고, 택시를 잡아주던 아파트 수위는 속으로 닉을 성희롱하고 있다.
영화 ‘왓 위민 원트’의 내용이다. 제목에 쓰여 있듯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 주제지만, 좀 더 크게 볼 수도 있다.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철학적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두 개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푸틴의 전쟁으로 인해 EPL팀 첼시의 구단주 아브라모비치는 재산이 동결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푸틴 정권과 함께 호의호식했던 아브라모비치를 비난하는 사람일지라도, 갑자기 재산을 잃게 생긴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연민은 좀 더 직접적이고 감성적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추위에 떠는 길 잃은 개를 볼 때, 전쟁의 포화에 휘말린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소식을 접할 때, 때 이른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에서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때, 우리는 당사자의 감정을 마치 내 것인 양 ‘느낀다’. 공감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육체적이기까지 한 감정의 전염, 그것이 바로 연민인 것이다.
공감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부터 출현한 개념이다. 반면 연민은 18세기 영국에서 철학적으로 주목받았다. 대체 인간은 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흄이 볼 때 우리의 도덕은 한낱 관습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상의 도덕률이 갑자기 잔인하고 포악하게 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아끼고 배려하는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런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국부론>의 핵심 원리다. ‘보이지 않는 손’, 말하자면 이기주의의 법칙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배려한다. <국부론>보다 먼저 펴낸 <도덕감정론>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종종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런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연민은 도덕의 토대가 된다. 서로 공유하는 도덕이 있어야 사회가 성립하고 자본주의 또한 가능해진다.
공감과 연민은 서로 다르고 서로를 보완한다. ‘왓 위민 원트’로 돌아가 보자. 닉에게는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공감 능력이 0에서 100으로 솟구친 셈이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이내 그 잠재력을 깨달았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여자를 쉽게 유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로만 이해하고 접근하는 닉에게 딸은 넌더리를 낸다. 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반응했을 뿐 인간적인 교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감과 연민의 힘을 모두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진정한 공감과 연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지난 대선 과정을 떠올려 보자. 국민의힘은 여론조사에서 큰 폭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박빙이었다. 3월 8일 여성의날을 하루 앞둔 7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단합하는 것 같아도 오프라인 표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도발적 발언을 한 것이 원인 중 하나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20대 여성 표가 일주일 전 여론조사에 비해 약 20%p 뛰어올랐다. 기권하거나 정의당을 찍었을 ‘이대녀’들이 더불어민주당을 찍어서 ‘응징 투표’를 한 것이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특정 유권자 집단을 비하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정동영 전 장관의 ‘노인 투표 발언’, 유시민 전 장관의 ‘나이를 먹으면 뇌가 썩는다’ 발언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박영선 후보가 ‘20대는 역사적 경험치가 낮다’는 발언을 했다가 응징 투표를 당한 것을 보고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 공감도 연민도 없는 발언으로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다. 선거가 휘청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발언자 본인의 정치 인생에도 두고두고 족쇄가 된다.
이번 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년층 내에서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의 역할은 그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 막판에 남녀 갈등에 휘발유를 끼얹는 소리를 해버렸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은 당연한 일. 정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분석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도 알던 사실을 21세기 사람들이 왜 모르는 걸까.
닉은 여자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땅 짚고 헤엄치듯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없다. 닉에게 애정을 느낀 달시의 입장에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어제까지만 해도 솔메이트처럼 내 마음을 짚어내던 이 남자가 오늘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버벅거린다. 두 사람은 차분하게 대화하고, 오해를 풀고, 사과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 ‘왓 위민 원트’는 판타지 로맨스 코미디 영화지만 공감과 연민의 힘은 진짜다. 대한민국의 남녀 갈등 역시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것이다.
판타지 로맨스 ‘왓 위민 원트’와
대한민국 남녀갈등 해법은?
멋진 남자, 하지만 나쁜 남자. 잘나가는 광고맨 닉 마셜(멜 깁슨)은 마초에 바람둥이다. 이혼한 전처가 재혼하고, 딸이 아빠를 경멸한다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없던 닉의 인생에 급제동이 걸린다. 닉의 회사가 경쟁사의 달시 맥과이어(헬렌 헌트)를 채용하더니, 닉이 노리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힌 것이다. 술, 담배, 자동차 광고만 신경 쓰면 그만이던 시절은 갔다. 400억달러 규모로 커진 여성 광고 시장을 두고 싸워야 한다. 남성 우월주의자 닉의 인생이 암초에 부딪혔다. ‘여자들이 원하는 것, 그게 대체 뭐지?’
술에 취한 채 매니큐어를 바르고 다리의 털을 뜯어내며 팬티스타킹을 신어보던 닉. 갑자기 집에 찾아온 딸 때문에 당황했다가, 그만 헤어드라이어를 켠 채 욕조에 빠지고 만다. 빠지직!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뭔가 이상하다.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더 끔찍한 건 여자들의 ‘본심’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퍽 다르다는 것이다. 웃는 얼굴로 닉의 야한 농담도 받아주던 가정부는 닉을 경멸하고, 택시를 잡아주던 아파트 수위는 속으로 닉을 성희롱하고 있다.
영화 ‘왓 위민 원트’의 내용이다. 제목에 쓰여 있듯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 주제지만, 좀 더 크게 볼 수도 있다.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철학적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두 개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푸틴의 전쟁으로 인해 EPL팀 첼시의 구단주 아브라모비치는 재산이 동결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푸틴 정권과 함께 호의호식했던 아브라모비치를 비난하는 사람일지라도, 갑자기 재산을 잃게 생긴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연민은 좀 더 직접적이고 감성적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추위에 떠는 길 잃은 개를 볼 때, 전쟁의 포화에 휘말린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소식을 접할 때, 때 이른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에서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때, 우리는 당사자의 감정을 마치 내 것인 양 ‘느낀다’. 공감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육체적이기까지 한 감정의 전염, 그것이 바로 연민인 것이다.
공감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부터 출현한 개념이다. 반면 연민은 18세기 영국에서 철학적으로 주목받았다. 대체 인간은 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흄이 볼 때 우리의 도덕은 한낱 관습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상의 도덕률이 갑자기 잔인하고 포악하게 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아끼고 배려하는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런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국부론>의 핵심 원리다. ‘보이지 않는 손’, 말하자면 이기주의의 법칙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배려한다. <국부론>보다 먼저 펴낸 <도덕감정론>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종종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런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연민은 도덕의 토대가 된다. 서로 공유하는 도덕이 있어야 사회가 성립하고 자본주의 또한 가능해진다.
공감과 연민은 서로 다르고 서로를 보완한다. ‘왓 위민 원트’로 돌아가 보자. 닉에게는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공감 능력이 0에서 100으로 솟구친 셈이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이내 그 잠재력을 깨달았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여자를 쉽게 유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로만 이해하고 접근하는 닉에게 딸은 넌더리를 낸다. 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반응했을 뿐 인간적인 교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감과 연민의 힘을 모두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진정한 공감과 연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지난 대선 과정을 떠올려 보자. 국민의힘은 여론조사에서 큰 폭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박빙이었다. 3월 8일 여성의날을 하루 앞둔 7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단합하는 것 같아도 오프라인 표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도발적 발언을 한 것이 원인 중 하나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20대 여성 표가 일주일 전 여론조사에 비해 약 20%p 뛰어올랐다. 기권하거나 정의당을 찍었을 ‘이대녀’들이 더불어민주당을 찍어서 ‘응징 투표’를 한 것이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특정 유권자 집단을 비하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정동영 전 장관의 ‘노인 투표 발언’, 유시민 전 장관의 ‘나이를 먹으면 뇌가 썩는다’ 발언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박영선 후보가 ‘20대는 역사적 경험치가 낮다’는 발언을 했다가 응징 투표를 당한 것을 보고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 공감도 연민도 없는 발언으로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다. 선거가 휘청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발언자 본인의 정치 인생에도 두고두고 족쇄가 된다.
이번 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년층 내에서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의 역할은 그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 막판에 남녀 갈등에 휘발유를 끼얹는 소리를 해버렸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은 당연한 일. 정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분석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도 알던 사실을 21세기 사람들이 왜 모르는 걸까.
닉은 여자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땅 짚고 헤엄치듯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없다. 닉에게 애정을 느낀 달시의 입장에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어제까지만 해도 솔메이트처럼 내 마음을 짚어내던 이 남자가 오늘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버벅거린다. 두 사람은 차분하게 대화하고, 오해를 풀고, 사과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 ‘왓 위민 원트’는 판타지 로맨스 코미디 영화지만 공감과 연민의 힘은 진짜다. 대한민국의 남녀 갈등 역시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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