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6

[서평] 로널드 드위킨, <신이 사라진 세상>

신이 없더라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늙은 법철학자의 마지막 질문] 로널드 드워킨의 <신이 사라진 세상>
프레시안Books, 2014년 4월 25일.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6656 

1.

법대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수능 성적 때문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노닥거린 고등학교 내신 성적은 참으로 형편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수능 점수만 놓고 들어갈 수 있는 학교 중 제일 '좋은' 곳에 원서를 냈다.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입수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봤는데, 제목이 기억나는 것은 <무한의 리바이어스> 밖에 없다. 일찌감치 백수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생활을 반복했고,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 공부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민법총칙 교과서에는 스위스가 '瑞西(서서)'로, 오스트리아가 '墺地利(오지리)로 표기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책을 덮어버리고, 당시만 해도 여기저기 퍼져 있던 교내 행사들을 찾아다니며 귀동냥을 하고 술을 마시다가, 그마저도 시들해질 때쯤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그래도 법대에 왔는데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법학에 대한 흥미를 북돋워줄 주변 서적들을 찾아 읽겠다는 발상이 깔려 있었다.

'단지 법학자를 넘어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몇몇 있다. 가령 독일의 형법학자이며 법철학자인 구스타프 라드부르흐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잠언집을 읽어보니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운 문장과 '통찰'이 담긴 에스프리들이 묶여 있었는데 적어도 당시의 내게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일종의 '진입 장벽'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왜냐하면 라드부르흐의 법철학, 특히 "극도로 부정의한 실정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라드부르흐 공식' 등은, 나치 시대에 대한 독일 법학계의 평가와 반성이라는 맥락이 있어야 이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가 '합법적'으로 '불법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따라서 그들이 만든 법이 문제였지 법조계는 비교적 결백하다는 항변이 그 이면에 깔려있기도 하다. 아무튼 당시에는 그의 말과 법철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른 법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법은 그 법이 통용되는 한 사회 내에서는 보편적인 규범력을 지니고, 따라서 그 법을 해설하거나 법에 기반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법학 역시, 대체로 특정 사회의 맥락 속에서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허버트 L. A. 하트의 <법의 개념>(오병선 옮김, 아카넷 펴냄) 같은 책을 읽어서 곧장 이해할 수 있는 한국 법학도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오늘날의 나는 당시의 나를 변호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의 법철학은 영미법 체계를 해석하면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흘러흘러 로널드 드워킨이라는 이름을 만났지만, 역시 학부생이던 그 당시에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유일한 책이었던 <법의 제국>(로널드 드워킨 지음, 장영민 옮김, 아카넷 펴냄)은 그저 두껍고 어려웠을 뿐이다.

2.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하고 전공 대상은 칸트로 선정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다. 책을 그냥 쓱 읽어봤을 때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혹은 이해했다고 착각이라도 할 수 있는) 철학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칸트는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인데, 게다가 여러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드워킨의 마지막 책 <신이 사라진 세상>(김성훈 옮김, 블루엘리펀트 펴냄)도 그렇다. 법학적으로 응용되어 있는 부분을 빼고 나면, 이 책의 논의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백종현 옮김, 아카넷 펴냄), 이른바 '그룬트레궁'의 그것과 거의 똑같다. 칸트의 핵심적 논지들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1) 윤리 법칙은 상대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렇게 파악된 윤리 법칙은 이른바 '정언 명령'으로, 그것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정언 명령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고,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3) 신의 존재는 이러한 윤리형이상학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정언 명령의 최종 담지자로서 신의 존재를 '요청'할 따름이다.

<신의 사라진 세상>의 논리 전개도 이와 유사하다. "종교적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 종교의 과학 영역 그리고 의식을 통한 숭배 의무와 같은 신에 대한 책무를 거부한다"(43쪽)고 할 때, 드워킨은 칸트가 말한 (1)의 논지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어떤 인생을 사는가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해 잘살아야 할, 빼앗을 수 없는 윤리적 책임감을 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같은 곳)는 말은, 칸트가 말한 (2)의 논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종교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워킨의 주장 가운데 '철학적'인 부분은, 사실상 일종의 탄탄대로 위에 놓여있는 셈이다. "우리는 처벌을 내리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판이 필요하다고 가정해왔다. 하지만 오히려 신이 존재해야만 심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183쪽)고 말할 때, 드워킨은 '신의 요청'에 대한 칸트의 주장, 앞서 우리가 정리한 (3)번 논지를 되풀이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직전까지 영미 법철학계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던 그는 굳이 왜 이 책을 썼던 것일까? 칸트가 이야기한 윤리형이상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이른바 '전투적 무신론자'들(및 그들을 따르는 지식인들)과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 대중들 혹은 그러한 성향의 지식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 1차적 목적이다.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가능하다면, 또한 무엇이 윤리적인 삶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때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면,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그렇게까지 전투적이어야 할 필요는 사실 딱히 없다. 반대로, '전투적 무신론자'들 또한 실은 일종의 종교적인 경외감과 진지함으로 삶을 바라보고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면, 유신론자들 역시 그들을 특별히 적개시해야 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드워킨은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이렇다. 그는 철학자이며 동시에 법학자이기 때문에,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신 없는 종교'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현실 속에서 종교가 수행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능을 동일하게 구현한다면, 그 또한 종교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드워킨은 자신이 1992년에 쓴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종교를 정의한다. "종교는 인간 개인의 삶을 초월적인 객관적 가치와 연결함으로써 더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다."(148쪽) 얼핏 듣기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종교를 정의할 경우,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가령 낙태와 같이 기존 종교의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 역시, 일종의 '종교적'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상 보호되는 권리가 과연 무엇을 보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드워킨은 진지한 문제 제기를 하고, 또 답변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신으로부터 파생된 사람들의 윤리적 독립성을 지켜주는 것인지, 드워킨은 묻는다.

가령 내가 우리 집에서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를 (마치 고대 이집트인처럼) 신으로 숭배한다면, 그것은 나의 종교의 자유 중 첫 번째 의미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내가 종교적 환각 상태를 넘나들기 위해 국가에서 금지한 약물을 복용하고자 한다면, 그럴 때 나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위한 종교의 자유가 아닌, 나의 윤리적 독립성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해야만 한다.

첫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는 종교적 광신 등으로 향할 우려가 있다. 또한 국가가 두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를 종교의 자유로 보호한다면, 종종 '자신만의 윤리'를 세워나가며 기존의 법과 질서를 어기는 자들을 법으로 지켜줘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섣불리 해답을 내리는 대신, 드워킨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이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은 모두 좀 더 근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지만, 서로 독립적이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은 깊은 종교적 포부의 영역에서는 유신론자들을 완전한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가 자신들과 똑같은 도덕적,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도저히 메울 수 없을 듯 보이는 간극이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도덕적,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은 과학적 의견의 불일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부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도 너무 큰 욕심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174쪽)

4.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장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낙태와 성에 대한 문제들이 그렇다. 낙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의료 기관은 환자에게 필요한, 환자가 요구하는 의학적 처치를 베풀어야 한다. 그것은 의료 기관의 의무다. 하지만 일부 종교적 성향을 지니는 병원들은 가령 낙태처럼 종교적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시술을 거부하고, 그럴 때 자신들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의 특정 주에서는 종교 단체들이 자신들의 로비력을 발휘해, 동성애 행위(이것은 좀 오래 전 이야기이겠으나), 동성결혼, 조기 낙태 등을 불법화하는 법을 만들려고 시도하거나 종종 성공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연방대법원은 대체로 위헌 판결을 내리는데, "대법원은 그 판결의 근거를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종교의 자유 보장 조항이 아니라 미국 헌법의 평등한 보호와 적법한 절차의 조항에서 찾아냈다."(171쪽)

대법원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신의 의지를 자주 언급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문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에서 자신의 욕구가 종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미국 헌법의 상태와는 별개로,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윤리적 독립성의 일부로 대한다면, 진보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172쪽)

그러니까 한 쪽은 타인의 생명 및 삶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고 침해하는 법안을 만들면서 종교의 자유를 들이밀고, 다른 한 쪽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저 '평등'과 '적법절차'라는, 다소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헌법 원리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종교와, 종교가 담지하는 진지하고 신실한 삶이라는 가치 자체를 장기적으로 훼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로널드 드워킨의 유작이 된 것은, 계산한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아름다운 결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평생토록 진보적(인 입장에 가까운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법학자의 눈으로, 또 철학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왔다. 단지 해석에서 머무는 것뿐만 아니라, 실용학문인 법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답게, 논의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원제 ‘Religion Without God’을 <신이 사라진 세상>으로 옮긴 것은 좋은 판단인 것 같다. 신이 사라진 세상도 아름답고 윤리적일 것이라는 그의 낙관적 믿음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5.

철학을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딴 후 군대에 갔다. 다행히도 카투사가 되었고, 책을 읽을 시간이 있었다. 특히 훈련을 나가면, 나는 통신병이었으므로, 대기 시간이 길었다. 경기도 북부의 어딘가에 있는 탁 트인 벌판에서, 사령부에 인공위성을 통해 인터넷을 연결해놓고, 나는 책을 읽었다. 그 중 하나가 드워킨의 《Life's Dominion》이었는데, 내가 한창 읽어내고 난 후에야 <생명의 지배영역>(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내가 읽었지만, 혹은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대가의 문장과 논증을 접하고 새삼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드워킨은 생의 말년에 접어들어 더욱 치열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오바마의 건강보험 개혁안이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논지가 등장했을 때, 그는 특히 《New York Review of Books》 지면을 통해 치열한 반박에 나섰다. 이른바 '오바마 케어'가 통과되고 작동하기 시작한 것에 그가 얼마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쳤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실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싸우는 지식인의 한 표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킨들에 넣어둔 그의 책을 언제 다 읽나 하고 있을 때쯤, 드워킨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설령 그가 더 오래 살았다 한들 내가 그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문득 아쉬웠고, 어떤 면에서는 슬프기도 했다.

법학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학문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그 근거가 대단히 부실한 학문이기도 하다.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와 권위가, 한국 같은 성문법 국가의 경우 결국은 법조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미법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법은 왜 법인가? 법이 왜 정당한가? 같은 질문에 대해 통상적인 법학의 범위 내에서는 답하기 어렵다. 법의 정당성과 지엄함은 법 바깥의 세계로부터 출발하고 있고, 종종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것을 끝내 모른척하고 오직 실정법에서 출발하는 법학만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실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드워킨 같은 사람의 책을 읽는다. 철학적인 원칙과 논리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법한 논증을 만들고, 그것이 현실의 법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혹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지 유려하게 기술한다.

지적인 기반도 없고, 토대도 약하고, 심지어 판사마저도 걸핏하면 '국민의 법 감정'을 운운하며, 검찰은 국정원과 손을 잡고 무리한 기소를 벌이다가 그들 말에 따르면 '간첩임에 분명한' 유우성 씨를 놓아주는 일이 벌어지는 이 한국의 법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현실과 이상, 시궁창과 별이 빛나는 밤, 그런 차이가 또렷하다.

칸트의 잘 알려진 문구로 이 서평을 끝내도록 하자.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 드워킨과 나와 당신은, 그런 면에서 모두 같은 별과 같은 도덕률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명복과, 우리 모두의 좋은 삶을 빌어본다.

2022-11-27

유전자 조작 아기를 낳는 것을 진보가 옹호할 수 있는가

마이클 샌델이 쓴 <완벽에 대한 반론>을 읽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책. 명확한 지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괜찮은 논증을, 하버마스로부터 빌려와 잘 썼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더 나은 아이를 '선택'해서 출산하는 행위를 미국의 주류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옹호하는데, 그에 대한 반발이다.

같은 주제를 논하면서 하버마스는 '우리가 아는 자유의 개념은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전제되어 있어야만 제대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주 멀리 보면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의 연장이고, 가깝게는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던져짐' 개념을 빌려왔던 것의 연속성 위에 있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진보'라 여겨지는 미국의 고학력 리버럴 계층은, 자신을 닮았는데 여러모로 능력이 탁월한 아이를 통해 존재의 유한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큰 듯 하다. 반면 공동체주의자인 샌델은 '아이는 신이 주신 선물이며 꽝이 나와도 어쩔 수 없다'는 보수적 가치를 옹호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서구 사회를 지배하던 기독교적 가치(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한 죄인이며 죽을 때는 다 똑같다)로부터 벗어난 중국계 이민자에 의해 '글로벌 대리모 서비스 앱'이 출시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쌓아나가야 한다.

다시 샌델의 책으로 돌아와보면 이 아이러니가 더욱 도드라진다. 20세기 자유주의 철학자의 대명사인 하버마스의 입을 빌어, 21세기에 가장 잘 팔리는 공동체주의 철학자가, 21세기 미국의 '리버럴'들을 공격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201n년이니까요!' 같은 말은 정말 아무 쓸모가 없다.

-2019년 5월 5일에 쓴 글

2022-11-09

책 없는 도서관, 도서관 없는 서울

책 없는 도서관, 도서관 없는 서울 - GQ KOREA

2017.02.08

도서관도 없는데 책도 없고 결정적으로 도서관적 경험도 없는 이곳의 도서관에 대하여.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모른다. 서울 외 지역 출신에게 서울은 있어야 할 게 모두 있는 곳이다. 서울의 도서관이라면, 경기도 부천에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책의 바다’여야 한다. 부천의 경인문고에서 책을 뒤지다 좀 부족하다 싶으면 1호선을 타고 종로로 향했으니, 부천과 달리 서울의 도서관은 굉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나름 합리적인 유비 추리의 산물이었다.

서울 사람이 아닌 내게 서울의 도서관은 일단 대학 도서관이었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대출 기록을 긁어보니 총 970권을 빌렸다. 그것들을 전부 읽었다고 장담할 순 없으나, 나는 가급적 빌린 책을 끝까지 읽고 돌려준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부를 졸업한 후 전공을 바꿔 다른 대학교의 대학원에 들어갔다. 도서관에 가보니 학부 시절의 그곳보다 장서량이 부족하다는 게 한눈에 들어왔지만 크게 애석해하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군 복무를 마쳤고 사회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 어떤 대학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서울의 여러 곳으로 주소지를 옮겨 다닌 지 여러 해, 이제야 서울의 도서관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부천에 살던 내가 막연히 동경하던 서울의 도서관은 서울에 없다. 서울에 없다는 것은, 그것이 지역 특산물이 아닌 다음에야,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한국에는,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 이상적인 시스템으로서의 도서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형으로서의 도서관’이 뭘까? <달력과 권력>이라는 생물학자 이정모의 책이 있다. 달력이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그 제정 및 변화 과정이 개별적인 사회 및 세계의 권력 구조와 어떤 연관을 맺는지 추적한 책이다. 박학다식한 과학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물학 전공자가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를 그는 서문을 통해 정직하게 밝히고 있다. 독일의 연방도시 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다.

달력에 관한 책을 한 권 읽고 미진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참고도서를 찾으면 어김없이 도서관에 있었다. 수메르와 로마 달력에 관해 1800년대에 출판된 책이 서체만 현대적으로 바뀌어 재출간된 것을 비롯, 달력에 관한 수십 종의 책이 동네의 조그만 도서관에 갖춰져 있었다. 본에 없는 책은 사서에게 부탁하면 다른 도시에서라도 구해다 주었다. 생태생화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전공과 아무 상관도 없는 달력에 관한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독일의 우수한 도서관 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책이 나오기까지 가장 큰 도움을 준 본의 도서관에 감사의 말을 돌리고 있다.

이정모가 말하는 ‘본의 도서관’은 단일 건물과 제반 시설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에 거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대학 도서관이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립도서관은 도처에 널려 있는데, 일단 도서관에 가면 이용자가 원하는 주제의 책을 찾아주는 사서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없는 책은 다른 도시에서 가져다주는 종합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공부하고, 연구해서, 지적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도서관은 그런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 에도 나와 있다. 에코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평론가들의 은유 개념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하는 한 학생의 사례를 상정한다. 그 학생은 4년간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았고, 현재 직장을 다니고 있으며, 지도교수로부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평론가들의 은유 개념’에 대해 논문을 써 보라는 조언을 받았을 뿐이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시간은 반나절, 그리고 접근 가능한 도서 관은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구 9만의)”의 시립 도서관뿐이다. 에코는 자신이 가진 중세 전문가로서의 이점을 포기하고, 사서에게 물어보는 쉬운 길을 접어둔 채, 우연히 발견한 핵심적인 논문의 참고 문헌 목록을 베끼는 짓을 하지 않 고, 어떻게 인구 9만 명이 사는 도시의 시립도서관에서 어엿한 논문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시연해 보인다. 그리고 밥 아저씨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참 쉽죠?”

어떤 테마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 없이 지방의 도서관에 가서 세 번의 오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충분히 명백하고 완벽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는 지방에 살고 있고, 책들도 없고, 어디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서울의 도서관에서 과연 본의 도서관, 혹은 에코가 말한 인구 9만의 도시 ‘알레산드리아의 도서관’과 같은 수준의 연구를 해나가는 일이 가능할까? 한국의 철새, 19세기 판소리의 채록 과정, 물산장려운동과 담배 수입의 역사 등, 한국적인 뭔가를 주제로 삼는다면 비교적 수월할 것이다. 대학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잘 짜인 상호 대차 서비스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일반인들이 궁금해 하는 지식 및 학술 정보에 대하여, 이용자가 도서관을 방문하지 않고 ‘사서에게 물어보세요’ 홈페이지를 통해 질의 답변을 받는 참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확실한 목표 의식이 있고, 주제가 한국적인 뭔가라면 연구는 가능하다. 문제는 도서관의 또 다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울에서 가장 책이 많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의 경우 책 저장고로서의 기능에 더욱 충실하고자 모든 도서를 ‘폐가식’으로 운영한다. 보고 싶은 책 제목과 청구기호를 적어서 제출한 후 한참 기다리면 도서관 직원이 가져다준다. 열람만 가능하고 관외 대출은 허용되지 않는다. 책을 저장하고 보호하는 데 최적화된 방식이긴 하지만, 책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출구를 찾는, 도서관 고유의 경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서관은 답을 찾는 곳이다. 그러나 도서관의 또 다른 기능은 책 속에서 길을 잃도록 하는 것이다. 스스로 방향을 잡으면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 그런데 대학 도서관이 아닌 한, 서울의 도서관 중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52만여 권을 소장한 정독도서관, 44만여 권을 보유한 남산도서관 정도가 체면을 세운다. 이는 서울대 4백52만 권, 고려대 2백45만 권, 연세대 2백7만 권, 부산대 1백 94만 권, 성균관대 1백82만 권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데, 이 대학 도서관의 장서를 전부 합쳐도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의 장서 수보다 적다. 대한민국에는 도서관이 별로 없다. 그리고 도서관에는 책이 별로 없다.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도서관 정책은 ‘도서관적 경험’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나라에서 아예 법을 만들어 ‘작은 도서관’ 을 육성하고 장려한다. 2012년 2월 17일 제정된 ‘작은도서관 진흥법’에 따르면 작은 도서관이란 “<도서관법> 제2조 제4호가목에 따른 도서관”을 말하는데, 해당 조문을 찾아보면 ”공중의 생활권역에서 지식 정보 및 독서 문화 서비스의 제공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도서관으로서 제5조에 따른 공립 공공도서관의 시설 및 도서관 자료 기준에 미달하는” 곳이라고 한다. 즉, 애초부터 작은 도서관은 자료를 턱없이 부족하게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물론 “국민의 지식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생활 친화적 도서관 문화의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작은 도서관의 기본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생활 친화적 도서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7년 1월 현재 전국에는 6천1백73개의 작은 도서관이 설립되어 있다. 그들 중 상당수가 1천여 권, 혹은 수백 권 단위의 장서를 비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확장된 학급 문고 수준인데 그 앞에 굳이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면서까지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붙여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좀 더 주민 친화적이면서 도서관의 본래 기능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명칭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린이를 위해 작은 도서관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서울의 도서관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더 큰 책의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나는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싶었다. 나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빛나는 지성을 바라보며 눈이 멀고 싶었다. 작은 도서관이 아니라 큰 도서관을 간절히 원했다. 오늘날의 책벌레 어린이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아기자기하고 예쁜 뭔가가 아니다. 성장해가는 자아를 한껏 뻗칠 수 있는 모험의 장이 절실하다. 그러한 곳, 진정한 도서관은, 단지 어린이들뿐 아니라 늘 새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연구하며 표현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학자와 작가와 연구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 서울의 도서관은 세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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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보고 떠올라 백업용으로 올리는 지난 글.

연관된 내용으로, 이 블로그에 있는 다음 글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2022-10-22

보통 남자(homo normale)

 

"보통 남자(homo normale)가 어떤 존재인지 아나?
예쁜 여자의 엉덩이를 보고 힐끔거리는 남자,
본인 같은 남자들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남자,
축구장, 경마장, 성당에 흔한 그런 남자들이지.
자신들과 비슷한 부류를 좋아하고 다르면 싫어해.
그래서 보통 남자들은 진정한 형제고, 시민이며,
진실된 애국자이고, ... 파시스트야."
 
- <순응주의자>(Il Conformista) 중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 1960)

 

어제, 사전정보 없이 봤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다. 3시간의 러닝타임 속에서 약 30분 단위로 이야기가 뚝뚝 끊어짐. 일관되게 전개되는 것은 주인공 마르셀로의 내적, 외적, 타락. 극도로 세련된 영상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피카레스크(picaresque). 임상수가 <돈의 맛>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게 이런 느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