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5-25

질투와 계급의식

'부자들은 착하기까지 하다'는 이야기는 결국 가진 자들이 '우리도 나름의 고충이 있다'고 '진솔한' 말을 털어놓거나, 비교적 가난하게 큰 사람들이 '그게 현실이죠'라고 소소한 술회를 털어놓으며 끝나게 마련이다. 즉, 못 가진 자들의 심리가, 기껏해야 질투심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한국에서 좌파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이 부분을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질투와 계급의식의 차이도, 혹은, 그것들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 그리하여 질투가 계급의식으로 승화되지도 못하고, 계급의식이 질투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솔직하게 드러나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계급의식을 통해 질투심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강인욱은 박예진을 정재민에게 빼앗긴 후 그람시의 옥중수고 따위를 읽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 전에 이미 손을 댔었더라도, 출세하여 자기 손으로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그가 그 내용을 진정으로 흡수했을 리 없다. 하지만 자신의 개인적인 울분을 해결하기 위해, 혹은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아는 좌파 서적을 집어든 순간 그가 계급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 것이기도 하다. 계급의식과 가장 먼 곳에 있는 것이 바로 사회 계층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인욱은 정재민보다 부유해질 수도 없고, 그의 세계를 뛰어넘는 시각을 통해 도래하지 않을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도 없다. 계급의식은 깨달아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제2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러 추구하는 한 쉽사리, 어쩌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질투를 느끼기 시작한 이상, 그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계급 의식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억지로 겨우 가능하기에 어떤 경우에도 미학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좌파들이 우파로서는 어림잡을 수 없는, 특정 계급에게는 해방이고 또 다른 계급에게는 묵시록에 가까울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우파들의 자산으로부터 파생되며 그 소유권을 박탈당했을 때에는 철저하게 파산하여버릴 가치를 배가 고프지만 체면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음식을 힐끔거리듯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온당한 일이 아닐 터이다. 맑스가 확실히 말한 바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이 부르주아의 도덕적 가치관을 모두 폐기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면 그것들이 제1가치로서 남아있을리가 없기에, 결국 부르주아의 도덕적인 혹은 '쿨한' 모습들은 좌파에게는 일종의 사다리로서 받아들여져야 마땅하다. 달리 말하자면, 좌파들은 자본주의적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를 기독교적으로 희구하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질투를 느끼는 순간,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좌파 지망생은, 욕망의 게임에 한 발을 들여놓게 되고 결국 패배하도록 예정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르주아들의 세계를 파괴하면서 노멘클라투라로 다시 태어난다. 보드카 대신 코냑을 마시고 비스킷 위에 케비어를 얹게 되면서 역사는 조악한 형태로 다시 반복되며, 대 부르주아들이 가지고 있던 귀족적인 우아함과 소 부르주아들이 담지하고 있던 지역 공동체와의 밀착은, 대체로 유착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복구될 수 없는 지경까지 파괴된다.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있던 서구 문명이 구 공산권의 그것보다 미적으로 탁월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고목나무처럼 소련이 쓰러지고 중국이 기이하게 변태하면서 두 체제의 대립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완벽하게 해소되어버렸다.

이 과정이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좌파가 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숨쉬고 있는 계급적인 갈등을 해결하려는 청년은 살롱 좌파가 될 수도 없는데, 그것은 이미 '좌파'로서 거듭나버린 그에게 또 하나의 계층적 문제가 있다는 좌절감을 안겨줌으로써 모든 문제를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그러므로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테리 이글턴 같은 좌파가 된다면 부르주아 계급의 지적인 교양이나 우아함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러한 질투심을 이겨내기 위해 테리 이글턴이 되는 것은 가능하지도 온당하지도 않다. 그 순간, 계급의 문제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주변부와 중심부의 갈등이 악몽처럼 덮쳐올 것이며, 그 유령을 이겨내기 위한 엑소시즘을 진행할만한 어떤 신성함이나 초월적인 힘이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결론을 내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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