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결정적 차이 (경향신문, 2009년 4월 14일)
빈의 중앙묘지에 가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묘지가 있다. 젊은 예술가들과 관광객들은 지금도 끝없이 그들의 위대한 음악에 꽃을 바친다. 하지만 베토벤이 영면을 취하고 있는
그의 묘지와 달리, 모차르트의 묘지는 일종의 기념탑에 가까운 것이다. 모차르트가 실제로 매장된 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모든 빈 시민들의 슬픔 속에, 수천 명의 군중의 눈물과 함께 묘역에 들었다. 반면 모차르트는 아내의
냉대와 세상의 멸시 속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고작 15세. 둘 다 천재적인 재능과
초인적인 노력을 겸비한, 전형적인 ‘아웃라이어’이다. 그런데 왜 이리 두 사람의 말년은 확연히 차이가 났던 것일까?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유작 <모차르트-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통해 그 이유에 대해 한 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당시는 귀족과 왕족 등 구 지배세력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동시에 시민계급의 힘이 성장하고 있던 일종의
전환기였다. 만년의 베토벤은 곡을 완성하는 즉시 대기하고 있던 출판업자에게 넘겨 악보를 출판했으며 그것을 통해 수입을 얻고
대중들과 직접 접촉했다. 반면 모차르트는 출판업자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요즘 말로 ‘초대권
손님’이었다. 돈을 지불하는 것은 그 손님들을 초대한 귀족이나 왕족이었다. 그런데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한 이후
귀족과 왕족들은 모차르트를 괘씸하다고 여기기 시작했고 그의 연주회에 발길을 끊었다. 우리가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봐
온 모차르트의 비참한 삶은 바로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높으신 분들’의 눈 밖에 나버렸다는 것, 그리고 시민사회의
후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모차르트가 날개를 꺾인 이유였던 것이다. 예술은 정치적이다. 하지만 예술가가 정치적인
이유로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모차르트가 좀더 오래, 좀더 많은 작품을 써주었더라면 인류의 문화가 얼마나 더
풍성해질 수 있었을까. 그러나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 모차르트와 인류의 문화에 대한 고민은 사치에 불과하다.
3월
31일,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립오페라합창단을 정식으로 해체했다. 이미 몇 차례의 해고가 있었고, 그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렸지만,
대통령이 바뀐 후 새로 취임한 이소영 국립오페라단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그는 “규정에 없는 합창단을 운영할 수
없다”며 해체를 통보했고, 결국 4월은 합창단원들에게 가장 잔인한 달이 되고야 말았다.
국립오페라단은 2002년
합창단을 만들고 단원을 뽑으면서 언제나 ‘상임화’를 약속해왔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적은 없다. 그 희망이 없었더라면, 또한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없었더라면, 한국 최고 수준의 성악가들이 문자 그대로 ‘88만원 세대’로 살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부는 언제나 기대를 배신했고, 이제는 아예 합창단을 없애버렸다. 그 빈자리는 1년 계약직으로 충당하겠다고 한다.
18세기의 빈에서와 마찬가지로, 21세기 서울에서 벌어지는 예술가의 비참함 역시 ‘높으신 분들’의 입김과 무관하지 않다. 정은숙 전
국립오페라합창단 전임 단장은 노무현 정권의 유력 인사였던 문성근의 형수이다. 진작 합창단을 상임화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부는 계속 그들을 비정규직으로 유지했고, 결국 현 정부의 ‘노무현 지우기’와 함께 합창단은 소멸하고 말았다.
우리는 합창단원들에게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공연해달라고 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모차르트의 비참한 삶까지 강요할 수는 없다. 매주
수요일 문화부 앞에서는 시위 겸 콘서트가 벌어진다. 황사 섞인 모래에 성악가들의 성대가 상하고 있다. 이 카나리아들이 피를
토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문화부는 당장 협상에 나서라.
<노정태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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