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30

용산 100일, 그리고 재보선 결과

1.

하루 종일 정신 없이 돌아다녔다. 낮에는 홍대의 한 카페에서 아마미야 카린 씨와 마쓰모토 하지메 씨를 만났다.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아니고, 프레시안에서 나를 포함해 두 명의 20대를 더 붙여서 좌담회를 열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단단했고 어른스러웠다. '활동가'의 모습이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신선했다.

무선 인터넷을 켜고 다시 한 번 확인차 gyuhang.net에 접속했다. 4월 29일은 용산 참사 100일이 되는 날이었고, 나는 김규항 씨의 블로그에서 관련 정보를 봤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4월 29일 시청앞 광장"이라고 써 있었다. 저녁을 잘 얻어먹고, 커피도 잘 얻어마신 다음 길을 나섰다.


2.

시청역에 내려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전경 버스만이 둥근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가, 허탕을 쳤다는 듯 시동을 걸고 있었다. 뭐야 씨발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친구에게 연락해서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을 해달라고 했다. 서울역 광장이었다. 대체 이유가 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낚였고, 괜히 시청 앞에 갔다가 서울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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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불교, 개신교, 원불교, 천주교 등 4대 종교단체에서 번갈아가며 위령제를 치르는 것이 용산 100일 행사의 내용이었다. 나는 원불교의 위령제가 시작되기 전, 영상물이 막 상영되는 찰나에 현장에 도착했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과 땅 사이에 떠돌고 있는 동안, 벌써 100일이 흘렀다. 그들의 육신은 아직도 영안실에 고기처럼 냉동되어 있다.

그런 끔찍한 사실을 아는 것, 굳이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것,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어쩌면 이상한 방식의 자기 학대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침 나는 이런 구절을 읽고 있었다.

상기하기는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며, 그 안에 자체만의 윤리적 가치를 안고 있다.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이다. 따라서 상기하기가 일종의 윤리적 행위라는 믿음은 우리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세상 이치에 따라 우리 눈앞에서 죽은 사람들(조부모, 부모, 선생님, 오랜 친구 등)을 애도하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닌 본성 한가운데에 깊숙이 놓여 있다. 무정함과 망각은 함께 가기 마련인 듯하다. [168p.]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trans. 이재원 (서울: 이후, 2004).


3.

용산 참사 100일이 되는 날 재보선이 있었고, 진보신당은 값진 의석 하나를 얻어냈다. 나 또한 이 승리가 기쁘다. 이 승리를 통해, 진보신당과 그에 기대를 거는 이들은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진실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지지 않았다고 외치기 위해서는 이겨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최대한 버틴 것, 그리고 단일화에 결국 승복한 것은 모두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최소한의 합리적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렇다. 조승수로 단일화할 경우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후보가 버티고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경우, 조승수를 아예 떨어뜨리면 둘 다 소득이 0이니 그것은 선택지에 포함되지 않는다. 반면 너무 일찍 단일화를 해버리면, 어차피 애가 타는 쪽은 진보신당이므로, 원하는 만큼 무언가를 뜯어낼 수 있을 가능성을 포기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상하기 직전', 즉 가장 맛있는 타이밍에 열매를 수확했다고 볼 수 있다(이 표현은 어떤 분의 블로그에 달린 답플에서 줏어왔음을 밝힌다).

문제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이런 생생한 정치공학적 선택이 과연 진보신당의 지지자들에게 어떤 정서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둘째, 이번 단일화를 통해 더욱 거세질 '진보정당 통합', 더 나아가서 '범 개혁세력 통합'의 논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셋째, 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에 제안한 '댓가'가 무엇인지 드러날 경우, 특히 진보신당의 평당원들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진보신당은 값진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독이 든 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내 입장은 분열되어 있다. 한 사람의 평당원으로서, 원칙에 따라 나뉜 정당들 사이의 단일화는 말도 안 된다고 본다. 반면 진보신당을 '응원'하는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겼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고 싶어진다.

민주당과의 단일화건 민주노동당과의 단일화건 정당의 존재 자체가 정치적 의견의 표현이라면,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가 그러하였듯이, 모든 종류의 단일화는 이념정치의 자리를 박탈하고 대신 정치적 잇속 계산을 위한 주판알을 깔아놓게 된다. '상식'과 '희망'을 울부짖으며 시작한 노무현 시대는 숱한 방사능 낙진을 남겨놓았는데, '단일화' 또한 그 시대의 삐뚤어진 유산에 속한다. 정몽준으로 단일화 되었으면 어쩔려고 그랬나? 우리의 승부사 노무현은 그에 대해 말이 없다. 이겼으니까 됐다는 거다.

직업적 정치인들은 어느 정도 승부사 감각을 보여줄 필요가 있고, 가끔 미친 짓도 해야 하며, 술수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노무현 시대 이후 판돈이 너무 커져버렸다는 것이다. '후보 단일화'는, 그것도 이념이 판이하거나 화해하기에는 너무도 서로 주고받은 것이 많은 집단 사이에서의 단일화는, 백 년에 한 번 꺼낼까 말까 하는 그런 카드로 남아있었어야 한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이미 두 번의 단일화 논의를 거쳤고, 한 번은 실패했으며 다른 한 번은 성공했다.

지금 내 머리속에서는 두 개의 '원칙'이 충돌하고 있다. 진짜 '원칙'대로라면 단일화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정치를 고려해서, 정말 불가피할 경우 할 수 있긴 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굳이 말해보자면 이런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또 원칙적으로는 전쟁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진보신당이 두 번째의 원칙에 너무 자주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 이상의 단일화 논의는 없어야 한다.


4.

나 또한 한 사람의 진보신당 지지자이며, 당원이다. 선거 승리는 기쁜 일이다. 이미 한 번 당선되었다가 의석을 박탈당한 조승수가 울산에서 부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큰 경사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조승수가 다시 국회의원 뱃지를 얻어낸 날은, 용산에서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은지 100일이 된 날이기도 하다. 그 5명의 시신은 지금도 땅에 묻히지 못한 채 냉동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단일화라는 도박을 통해 진보신당이, 비록 승리했을지언정,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이 진보신당에 대해 품게될 더 큰 반감 또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게다가 이른바 '범 개혁세력'의 대동단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질 가능성이 있다.

용산을 잊지 않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용산의 죽음은 이른바 '개혁 세력'이 집권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싹이 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어청수는 노무현이 키웠다. 서울 시내 부동산 가격이 들썩거리게 된 것 또한 이미 지난 정권부터 시작된 일이다. 원칙을 어기며 의석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용산의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4월 30일, 오늘로 용산 참사 이후 101일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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