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의 대통령으로서의 단점 중 하나는 본인이 대단한 아이디어 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생각나는대로 저지르고, 아랫사람들 혹은 국민들에게 그 뒷수습을 떠맡긴다. 그런데 이명박이 가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의 장점 중
하나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는 뭐가 됐건 본인이 스스로 의제를 생산한다. 좋게 말하면 의제 선점이고 나쁘게 말하면 말실수인데,
어쨌건 그 결과 국정의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통일세’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개념이 8월 15일 이후 대한민국의 여론을 뒤숭숭하게 하고 있다. 4천만 국민의 소원이
통일이던 시절은 지나간지 오래다. 지금 대부분의 국민들은 통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부담스럽다. 그런데 그 통일 대비를 위해 세금을
내라고?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기존 정부에서 쌓아왔던 대북관계를 모두 망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 이명박이, 그게 할
소리인가? 이른바 ‘진보 개혁 진영’의 반응을 요약하면 대략 이와 같은 형태가 될 듯하다.
그런데 어딘가 맥이 빠져
있다. 미디어오늘의 이정환 기자를 포함해 수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재의 부가가치세 세율이 OECD 평균에 비해
낮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은 역시 OECD 평균과 비교했을 때 전체 세수 중 직접세 비율이 밑에서부터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멕시코와 터키, 한국인들이 평소에는 결코 자존심 때문에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그 나라들 말이다. 그 외의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소득세나 법인세 등을 더 내면 더 냈지 덜 내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보면 대응법은 간단하다.
어차피 통일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 정권의 붕괴, 혹은 그에 준하는 대격변은 대한민국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하며, 그 준비라는 것은 결국 재원을 확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최소한의 현실주의만 가지고 시작하더라도, 결국 통일세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북한의 격변에 대비한 재원 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현실을 어설프게 부인하는 순간 발화자는 책임 있는 정치 세력으로 인식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요점은 그 재원을 간접세로 충당하느냐 직접세로 충당하느냐에 달려 있다. 직접세 비율을 더 끌어올려서 통일에 대비하는 것은
결국 부자들의 돈으로 통일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고, 어차피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경제적 강자들에게 부담시키는 것이므로, 큰
틀에서 볼 때 부의 재분배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간접세로 통일 비용을 댄다면 그것은 밑돌 빼어 윗돌 괴는
형국밖에 되지 않는다. 책임 있는 진보 정치세력을 자청하는 집단이라면 ‘이명박이 하니까 헛소리다, 표리부동하다’는 식의 단편적
비판을 넘어, ‘부자들이 통일 비용을 내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이런 ‘적극적 반MB’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경제 정책의 큰 틀에서는 전반적으로 합의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 합의의 내용 중 하나가 법인세 인하, 소득세 인하이며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종합부동산세법 개정안을 내고
통과시키는 일을 사실상 수수방관했다. 민주당이 직접세 비율을 높이자고 주장하는 것은 김정일이 핵개발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비단 이번 통일세 논란 뿐 아니라 적잖은 사회·경제적 사안에서 민주당의 ‘반MB’가 공허한 수사에 머무는
이유를 깨닫기란 어렵지 않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북한 정권은 언젠가 변할 것이고, 그 변화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에 다가올 것이다. 정부 뿐 아니라 시민사회와 야당 역시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반MB’에 묶여서 적극적인 통일
담론에 끼어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쓰라린 정치적 손실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틀 안에서는 안 된다.
일각에서 종북주의적인 대북관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민주노동당과, 그 민주노동당을 의식하는 가운데 북한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할 뿐인 진보신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민들은 바로 이런 사안에서 책임감 있게, 모두가 져야 할 책임을 공정하게 나누어줄 수
있는 그런 정치 세력을 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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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의 오피니언 사이트 훅(http://hook.hani.co.kr)에 올린 글입니다. 8월 17일에 게재되었으며, 원문은 여기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글루스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논의가 등장하였기에 전문을 게재합니다.
2010-08-19
2010-08-17
2010년 8월 17일
대학원 졸업과 함께, 공식적으로 철학 석사 학위 소지자가 되었다.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출한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 위해
학교에 가야만 했다. 지난주 만나뵌 자리에서 지도교수님이 읽어보라고 권해주신 책은 1970년대에 나온 것으로 아마존에서 구할 수
없었다. 텅 빈 가방에 제본된 책 한 권을 넣고 걸어 내려오면서 인문관 고양이를 만나 쓰다듬어준 후 집으로 돌아왔다.
2010-08-11
진보와 콧대
개인적 편견일 수 있겠지만, 품성 좋은 놈 치고 알맹이가 꽉 찬 놈을 본 적이 없다. 여기서 품성 좋다 함은 오옹 님이 "친서민정당 진보신당이라..."
에서 말한 것과 같은 바로 그런 덕목이다. 괜히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인사 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말 절대 하지 않고,
친목질에 능하고, 뭐 그런 것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뚜렷한 자기 주관이 없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세를
잘 따른다.
알맹이가 꽉 찬 놈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방금 다 말했다. 자기 주관과 신념이 없다는 것이다. 이재오도 김문수도 민중당 할 때에는 콧대 높았다. 그들의 콧대가 낮아진 것은 그들이 한나라당에 투신한 다음부터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접어둔 채, 그저 권력을 얻겠다는 목적 의식이 그들의 삶을 지배할 때, 비로소 그들의 콧대는 낮아졌다.
즉 콧대와 권력 의지는 반비례하는 것이다. 정치집단이 권력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권력욕만 남은 정치집단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진보신당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전자가 문제겠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 전체를 놓고 본다면 후자가 더 문제다. 어떤 구체적인 정책과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대부분의 보수정당들은, 오옹 님 같은 영세상인들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뒷구멍으로는 그들의 생존권을 말려죽이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진보신당이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은 자신들이 일종의 '소비자'라는 의식 하에서 성립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그러한 소비자로서의 요구가 과연 바람직한 결과를 낳고 있느냐이다. 가령 한국 소비자들은 '손님은 왕'이기 때문에 왕처럼 대접받고 싶어한다. 대형 마트에 가보면 그렇다. 1+1 행사가 난무하고, 마트 입구부터 출구까지 굽신거리는 점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저렴하고 안전한, 믿을 수 있는 쇼핑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당신들을 왕처럼 대접하는 그 비용은 결국 당신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이 굽신거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게 앞에서 데모 같은 것은 안 하고, 대신 찾아와서 인사드리고 부주 팍팍 꽂아넣는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나오겠는가? 당신이 낸 세금, 당신이 누려야 할 복지가 정치인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대접' 받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하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어서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따위 대접 받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한 사람들이 '유권자=소비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형 마트가 소비자를 우롱하듯 한국의 정치판은 유권자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신당 자체만 놓고 본다면 좀 더 정치적으로 변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판이 더 '정치적'으로 닳고 닳아야 할 필요는 없다. 즉, 진보신당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방식 역시, 오옹 님이 갈구하는 그런 방향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국민과 정치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정직하게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방향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서로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욕하는, 그런 '친서민'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알맹이가 꽉 찬 놈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방금 다 말했다. 자기 주관과 신념이 없다는 것이다. 이재오도 김문수도 민중당 할 때에는 콧대 높았다. 그들의 콧대가 낮아진 것은 그들이 한나라당에 투신한 다음부터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접어둔 채, 그저 권력을 얻겠다는 목적 의식이 그들의 삶을 지배할 때, 비로소 그들의 콧대는 낮아졌다.
즉 콧대와 권력 의지는 반비례하는 것이다. 정치집단이 권력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권력욕만 남은 정치집단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진보신당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전자가 문제겠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 전체를 놓고 본다면 후자가 더 문제다. 어떤 구체적인 정책과 가치를 지향하지 않는 대부분의 보수정당들은, 오옹 님 같은 영세상인들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는다. 그리고 뒷구멍으로는 그들의 생존권을 말려죽이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진보신당이 더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은 자신들이 일종의 '소비자'라는 의식 하에서 성립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그러한 소비자로서의 요구가 과연 바람직한 결과를 낳고 있느냐이다. 가령 한국 소비자들은 '손님은 왕'이기 때문에 왕처럼 대접받고 싶어한다. 대형 마트에 가보면 그렇다. 1+1 행사가 난무하고, 마트 입구부터 출구까지 굽신거리는 점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저렴하고 안전한, 믿을 수 있는 쇼핑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당신들을 왕처럼 대접하는 그 비용은 결국 당신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이 굽신거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가게 앞에서 데모 같은 것은 안 하고, 대신 찾아와서 인사드리고 부주 팍팍 꽂아넣는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나오겠는가? 당신이 낸 세금, 당신이 누려야 할 복지가 정치인들의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대접' 받는 게 너무 좋고 행복하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어서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따위 대접 받는 것이 너무 좋고 행복한 사람들이 '유권자=소비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대형 마트가 소비자를 우롱하듯 한국의 정치판은 유권자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신당 자체만 놓고 본다면 좀 더 정치적으로 변해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판이 더 '정치적'으로 닳고 닳아야 할 필요는 없다. 즉, 진보신당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방식 역시, 오옹 님이 갈구하는 그런 방향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국민과 정치인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정직하게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그런 방향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서로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욕하는, 그런 '친서민'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2010-08-02
2010 지산 락 페스티벌 회고(1)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서는 '나는 내가 루저라고 생각해'이다. 일종의 '루저-되기'인데,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음악의 생산자 및 수요자가 사전적 의미에서의 루저, 즉 사회적 낙오자는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장기하의 중얼거림과 칭얼거림의 경계는 한없이 좁아진다. 중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락 페스티벌에서 꼭 빠른 템포로만 노래
부르라는 법 있나요 어쩌구 저쩌구 칭얼거리는 멘트를 날리고, 숨이 턱까지 받쳐 헉헉거리며 돌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의 대변인.
하지만 정작 관객들은 '미미 안 나왔어? 미미 안 나와? 그 춤 안 춰?'라고 투덜거리고 있었으며, 그걸 짐작한 장기하도 '스페셜
게스트는 없습니다'라고 못을 박았지. 장기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모니터로 본 동영상 속의 그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것은 밥 딜런이 일렉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왔을 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이런 음악'을 기대하고 온 사람들에게 '저런 음악'을 들려주는 것과 '이런 동영상'을 '직관'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그냥 내 음악입니다'를 들려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일 수밖에 없다. 해상도도 다르고 화질도 다르고 음색도 다른 각자의
스크린을 머리 속에 넣고, 그 원본과 비교하여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공연을 관람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더워 죽을 것
같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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