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정태│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1.12 14:14
"<국제시장>을 보면 아예 대놓고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는 식이거든요. 정말 토가 나온다는 거예요. 정신 승리하는 사회라는 게.”
방송인 허지웅의 말이다. 이것을 TV조선에서 ‘국제시장은 토 나오는 영화’로 축약해 소개한 후 <국제시장>의 정치적 색깔에 대한 논란이 확산됐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던 중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이 영화의 정치색에 대한 논쟁은 점점 첨예해지고 있는 듯하다. 1월6일 윤제균 감독은 JTBC 뉴스룸과 인터뷰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장면에 대해 “시대 상황과 맞물려서 두 사람의 갈등이 너무 무겁지 않게 또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그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서 좀 편안한 마음으로 생각을 했었다”며 “그 장면이 애국심을 강조하는 장면이라고 해도 저는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논란을 피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국제시장>에는 ‘정치’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까지 이어지는 주요 줄거리 속에서 대통령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정전협정을 발표하는 이승만의 목소리만이 흐릿하게 등장할 뿐이다.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주요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줄거리의 출발점이 되는 한국전쟁 역시 ‘흥남 철수’라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압축된다.
영화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보자. 덕수(황정민 역)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라타던 중 등에 업고 있던 동생 막순이를 잃어버린다. ‘아버지’는 “이제부터 네가 가장 노릇을 해야 한다”며 동생과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는 말을 남겨놓고는 그 동생을 찾기 위해 배에서 내려간다.
덕수 본인의 꿈은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선장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생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남동생이 서울대에 합격하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독 파견 광부가 되고 그곳에서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난다. 가게 인수할 돈을 만들기 위해 월남전의 한복판에 파월 기술자가 되어 뛰어든다.
덕수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데는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흥남 철수 과정에서 잃어버린 동생, 그 동생을 찾기 위해 자신의 탈출을 포기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그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1000만 관객 영화’인 봉준호 감독의 <괴물> 역시, 한강에서 불쑥 튀어나온 괴물에게 잡혀간, 가족을 찾기 위한 사투임을 떠올려보자.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것, 혹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켜내는 것은, 아주 강력한 서사적 도구다.
‘가족’이라는 모티브만을 놓고 보자면 <국제시장>은 <괴물>과 같은 얼개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괴물>은 개봉 당시 ‘반미 영화’라는 논란에 휩싸인 반면, <국제시장>은 정치적 복고를 부추긴다는 비난을 듣고 있다. 왜일까. ‘가족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원동력을 제공한 원인이 다르기 때문이다. <괴물>에서 ‘괴물’을 탄생시킨 원인은 미군의 무단 화학폐기물 방류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국제시장>에서 가족들이 생이별을 하게 된 원인은 누가 제공했는가.
영화 속에서 막순이를 덕수로부터 떼어놓는 것은 ‘누군가의 손’이다. 누구의 손인지도 모르고, 왜 하필 막순이를 잡아당겼는지도 모른다. 덕수는 ‘내가 막순이를 잃어버렸다’고 자책할 뿐, ‘누군가 막순이를 끌어당겼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국제시장>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단이 놓여 있다. 이 영화는 ‘부모 세대의 개고생’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그 ‘개고생’을 유발시킨 원인이 무엇인지 탐구하지 않는다. 막순이는 ‘어쩌다가’ 헤어졌고, 서독의 석탄 광산은 ‘어쩌다가’ 폭발했고, 베트콩 역시 전쟁 중 ‘어쩌다가’ 주인공의 다리에 총을 쐈을 뿐이다. 주인공이 고생은 하지만 악역 비슷한 역할은 모두 ‘타자’에 의해 수행된다. 광산에 동료를 구하러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외국인, 선량한 베트남 사람들을 학살하는 베트콩 등.
<국제시장>이 표상하는 ‘부모님의 개고생’에는 ‘가해자’가 없다. 진보 진영에서는 그 자리에 ‘박정희’가, ‘자본’이, 혹은 ‘병영국가 대한민국’이 들어가지 않은 것에 불만을 표시하는 듯하다. 그 비판은 타당하다. 특히 약자에게 폭력적이었던 대한민국 현대사에 면죄부를 부여한 셈이기 때문이다.
‘부모님 개고생’시킨 가해자가 없다
하지만 ‘가해자’의 자리를 공백으로 만들어버린 탓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이 영화를 전유하는 시각 역시 가능해진다. 2007년 한국까르푸-이랜드홈에버 파업을 모티브로 삼은 웹툰 <송곳>의 베스트 댓글 중 하나다.
“(중략) 우리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고 서로 연대하고 부당함에 하나씩 맞서 꾸준히 싸웁시다. 돈의 논리가 강해져가는 이 현실에서 해답은 우리 사람들끼리 힘을 합치는 것뿐입니다. 내게 주어진 부당한 처우부터 고쳐나가고, 주변의 억울한 일들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지겠죠?ㅎㅎ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처럼, 우리 젊은 세대도 훗날 지금의 노력을 더 나은 세상에서 추억하기 위해 열심히 삽시당….”
젊은 세대가 ‘개고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이 고생을 우리 후손이 아니고 우리가 해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중장년층을 떠올린다면, “토가 나온다”는 허지웅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구세대와 맞서려면 결국 청년도 ‘승리하는 정신’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어떤 청년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국제시장>을 보고 와서 ‘힐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제시장>에 대한 비난에 힘을 보태기보다는, 청년들을 위한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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