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14

[별별시선]페미니즘을 위하여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 페미니즘이 주제로 등장하면, ‘진정한 페미니즘은 그런 게 아니지 않나요?’ 하는 사람들 말이다. 경험적으로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그런 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특히 남자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유독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분야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규항의 칼럼 ‘그 페미니즘’을 떠올려보자. 그의 논지는 단순했다. 계급해방보다 여성해방을 앞세우는 ‘그 페미니즘’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최근 트위터에서 터져나온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에 대해 반감을 표하던 고종석도, 말하자면 ‘페미니스트 감별사’ 대열에 동참했다. 졸저 <논객시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각별한, 아니 차라리 애틋한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스탈린’이나 ‘크메르루주’에 빗대는 나의 우상을 보며, 본 필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비감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유명 논객들만이 아니다. 페미니즘이 언급되는 거의 모든 인터넷 게시물에는 ‘제대로 된 페미니즘’ 운운하는 댓글이 달린다.

아마 이 칼럼에도 그런 댓글이 붙을 것이다. ‘저 머나먼 선진국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왜곡되어 있고, 이대 나온 꼴페미들이 여성가족부에서 양성평등이 아닌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한다’는 식의 뻔한 레퍼토리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체 그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가짜 페미니즘’을 질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십중팔구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장학금 타면서 공부해서 좋은 직장 들어갔다는 ‘엄마 친구 아들’과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오직 현실 속의 페미니즘을 ‘가짜’로 몰아가기 위해서만 거론된다.

가령 디씨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메갈리아’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수많은 여성 누리꾼들이 익명으로,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쏟아져 왔던 수많은 여성혐오적 표현들을 그대로 ‘반사’하는 운동이다.

예컨대 ‘김치녀’라는 비하 용어는 ‘김치남’으로, ‘된장남’은 ‘강된장’으로 되돌려준다. 여성을 그저 성기에 빗대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관용구를 ‘보적보’로 줄이는 표현에 대해, ‘메갈리아의 딸’들은 군폭력 문제 등을 거론하며 ‘자적자’라고 받아친다. 그나마 신문 지면에 소개할 수 있는 용어들이 이 수준이다. 그만큼 여성혐오 표현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는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평화와 비폭력을 주장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달리, 폭력을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하는 말콤X는 ‘진정한 흑인운동가’가 아니라고, 어떤 백인이 지껄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남자들이 100만원 벌 때 여자들은 62만원밖에 못 버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국 남자는, 본인이 알건 모르건, 여성 착취의 주체다. 여자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칠, 아니 언급할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페미니즘‘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여성들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그 다양한 의견들의 충돌과 갈등과 화해 속에서 ‘진정한 페미니즘’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리도 안 하고 애를 낳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여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뭔지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은 발에 차이도록 넘쳐난다. 그런 이들이 객석에서 떠들고 있는 한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합창곡은 울려퍼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남자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의 뜻을 표하는 것뿐이다.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묵묵히 연대하자.


입력 : 2015.06.14 20:42:23 수정 : 2015.06.14 20:45: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6142042235


덧붙임1: 내가 이 글을 처음 쓰고 공개했을 때만 해도 '모든 페미니즘이 옳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코멘트를 붙이고 있는 2016년 7월 현재,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라고 주장한 이 글의 관점이 옳았음이 확인된다. 여성혐오주의자들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들먹이며 '메갈'을 타자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반응은 "#내가메갈이다"라고 해쉬태그를 달아, 그러한 인간사냥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덧붙임2: 내가 편집부에 보냈던 원래 제목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하여"였다. (201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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