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알베르 카뮈 지음·김화영 옮김·책세상·1만4000원
설명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책을 다시 꺼내 읽어야만 할 때가 있다. 프랑스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었던 젊은 작가를 일약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지금까지 번역을 제외하고 프랑스어로만 500만부가 팔린 책.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 식상한 세계문학의 고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없이 시의적절한 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쥐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1년째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내를 요양소로 보낸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동시에 늘어나기 시작한 환자들의 예후와 동태를 살핀다. 갑자기 확산되는 전염병을 페스트로 보고 대비해야 하느냐, 그럴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 옳으냐를 놓고 오랑의 의사와 현감 등이 설왕설래하는 사이, 총독부에서 지침이 내려온다. 페스트의 발병을 확인하고 도시를 봉쇄하라고.
“오랑의 시민들은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60쪽) 봉쇄된 도시 속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보행자들의 수는 현저하게 늘었으며, 심지어 대낮의 한산한 시간에도 가게의 휴업이나 몇몇 사무실들의 휴무로 할 일이 없어진 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카페에 득실거리고 있었다.”(115쪽)
일상화된 죽음의 공포. 이미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묘지. 이유 없이 죽어가는 노인과 아이들. 그 속에서도 기계적으로 무색무취하게 돌아가는 도시. 공포와 권태가 한 몸이 되었고, 연락이 끊겨버린 도시 바깥의 친지들에게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마저도 천편일률적인 것이 되어버려 결국 식상해져버리는 그 반복의 공포. 인구 20만의 도시에서 매일 수백명이 죽는 것은 과연 얼마나 ‘큰’ 사건인가? 과연 그것은 지루한 ‘일상’을 대체해버릴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러한 태도 변경 앞에 우리는 윤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
“페스트는 그 병이 유행했던 초기에 의사 리유를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그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 굉장한 이미지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페스트는 용의주도하고 빈틈 없으며 그 기능이 순조로운 하나의 행정사무였다.”(244쪽) 그 페스트에 맞서는 의사 리유 역시 다양한 인물들과 상호 교류하며 실존적인 화두를 던지고 대답을 찾아나서지만, 매일 환자들의 숫자를 세고 통계표를 만든다. 페스트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것과 싸우는 의학 역시 하나의 행정사무인 셈이다.
국가의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해졌고,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워야 할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단 한 사람이 늑장 대책회의를 꾸리는 모습을 보며, 적잖은 시민들은 실존적 문제 이전에 아주 원초적인 생존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고 있다. 인구 5000만명인 나라에, 실은 수십여 명의 확진 환자가 나타났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가가 도저히 해줄 수 없는 일부터 우리가 먼저 해야 한다. 손을 잘 씻고,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에는 손수건이나 휴지, 혹은 팔꿈치나 어깨로 가리고 해야 한다. 본인이 병에 걸린 것 같으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국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양심의 등불을 켜고, 공포와 불안의 봉쇄령이 풀릴 그 날을 함께 기다려보자.
2015.06.16ㅣ주간경향 1130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6081443401&code=116#csidxe60f409375f16b293a255a00aeaba3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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