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봉, 책과함께, 1만4천9백원.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물러난 후라 경성역 창고에는 갈 곳이 없는 화물이 많이 쌓여 있었다. 화물을 정리하는 인부들 사이에서 이를 점검하던 역장은 수취인이 고등법원으로 된 상자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내용물을 살펴본 역장은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이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야.'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서어사전 편찬사업의 결실인 원고지 2만 6천5백여 장 분량의 조선어사전 원고가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 지 3년 만에, 해방 후 사전 원고의 행방을 수소문한 지 20여 일만에 조선어학회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37쪽)
<우리말의 탄생>이라는 제목은 언듯 들으면 형용모순 같다. '우리말'은 따로 '탄생'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말'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책의 부제인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를 보면, 그리고 위에서 인용된 본문의 첫 문단을 읽으면, 우리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은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한국어를 '모국어'로 재정립해나가던 바로 그 과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1894년 조선 정부는 칙령 제1호 공문식에서 한글을 공식 언어로 선포했다. 제14조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되, 한문을 덧붙여 번역하거나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한국어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식 언어가 아니었다. '문자'를 사용하는 식자층은 고전 한문을 표준어로 사용하고 있었고, 사실상 지배 계급 역시 필요에 따라 한글을 이용해 한국어를 소리대로 적고 있긴 했지만 그 언어에 어떤 공식적 지위와 권능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간판을 바꾸고 신장 개업을 하면서,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한국어를 공식어로 선언한 것은 그 중 하나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그때까지 조선의 식자층이 한국어 그 자체를 그다지 진지한 연구와 학습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국문'이 된 입말은 어제까지만 해도 '언문'으로 불리던 백성들의 말이었을 뿐이다.
<우리말의 탄생>은 바로 그 '국문'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던 수많은 학자들과, 그들이 겪었던 내부 갈등 및 외부로부터의 탄압 등을 다각도에서 조망하는 책이다. 우리말에 규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어로 한국어를 설명하는 사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한제국에는 그런 국책 사업을 추진할만한 힘이 없었고,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 지배의 필요성 때문에 한국어 연구를 어느 정도 방관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로는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말 큰 사전>을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의도와 달리, 한국어 혹은 한글에 대한 신화적 열광을 떨쳐내는 데 도움을 준다.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의 발명품을 이용해 어떻게 한국어를 담아내고 또 다듬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와 혼란이 있었다. 한글을 알파벳처럼 풀어서 쓰자는 급진적인 논의가 가능했던, 말하자면 우리말의 가소성이 큰 시점을 다각도에서 조망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말이 지금의 이 모습인 것에는 그 어떤 절대적 필연성도 없다. 다만 수많은 학자와 언어 대중이 고심하고 합심하여 이루어 낸 결과물일 따름이다. 한국어는 근대적 민족국가와 함께 탄생하였고, 지금도 계속 재탄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언어인 것이다.
2015.10.20ㅣ주간경향 114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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