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부르크 강령
프란츠 폰 리스트, 강, 1만5천원
일군의 철학자들이 기존의 것과 전혀 다른 발상을 떠올리고, 세력화하여, 최종적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철학의 개념과 현실의 작동 사이에는 깊고도 넓은 골이 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철학자가 법철학자라면 사정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 법은 세상의 작동 방식을 추상화한 관념 체계이니 말이다.
프란츠 폰 리스트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사촌동생으로, 19세기 독일 형법학의 근본적 방향 전환을 불러온 인물이다. 이른바 형법에서의 '신파'와 '구파'의 대립 중 '신파'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구파'는 죄형법정주의라는 대원칙에 입각하여, 범인의 책임 능력과 행위에 따른 예측 가능한 처벌이 형법과 형사정책의 이상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신파'는 범죄라는 행위는 범죄자라는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므로, 그 양자를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범죄자를 처벌할 때에는 그가 저지른 행위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처벌하는 것인가? 우리의 판단 대상은 행위인가 아니면 행위자인가?"(84쪽, 강조는 원문)
근대 형법의 근본 원칙들을 생각해보자. 형법은 원칙적으로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다. 살인자는 살인을 '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을 뿐, 과거에 살인을 했던 '살인자'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 게 아니다. 또한 그 행위자에게는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인식과 통제력이 있을 때에만 처벌할 수 있다. 정신이상자는 살인을 저질러도 치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오직 행위시에 존재하는 법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간통을 해도 간통죄로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리스트의 생각은 달랐다. 기계적으로 같은 행위에 대해 같은 형량을 부여한다면, 가령 오래도록 괴롭힘을 당하던 부인이 남편을 살해한 경우와, 가정 학대를 일삼던 남편이 끝내 부인을 살해한 경우에 같은 형량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 법 적용은 정의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일단 그는 범죄자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1) 개선이 가능하고 개선을 필요로 하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개선. 2)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하. 3) 개선이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해화."(98쪽) 개선 가능한 부류에 대해 인도적 처분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리스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개선 불가능한 자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사형을 원하지 않고, 범죄자를 귀양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평생 동안(또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감금하는 것뿐이다."(104쪽)
'행위 뿐 아니라 행위자도 바라보는' 형사 체계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악한 상황에 몰린' 이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내민다. 그러나 동시에, 특히 사회 내에 혹형주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때, 리스트의 목적사상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 어떤 수형자들에게 구제 불능의 딱지를 붙인 후 그들을 아예 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나치 독일에서, 그리고 가깝게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절도범이었던 지강현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호관찰제도로 인해 징역 10년에 보호관찰 7년을 추가로 선고받고는, 급기야 탈옥을 감행했던 것이다.
죄가 문제인가, 아니면 사람이 문제인가? 용인 아파트 벽돌 투척 사건의 범인이 만9세의 초등학생임이 밝혀지면서, 우리 사회는 다시 한 번 죄와 벌의 문제를 고민하는 듯하다. 대중적 공분과 열기 속에서 <마르부르크 강령>을 다시 읽어본다. 올바른 형사 체계와 정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서 시작해야 한다.
2015.11.03ㅣ주간경향 114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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