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3

내용적 종북, 형식적 종북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내용적 종북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으되, 형식적 종북은 국정 운영의 기조가 되었다'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패기 넘치게 '박근혜 대통령 떨어뜨리려 나왔다'던 이정희 대표의 통진당은 헌정 사상 최초의 정당해산심판을 통해 공중분해되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기억하기 힘든 '종북 사냥'의 사례가 존재한다. 심지어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이 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칭하기까지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형식적 종북'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정 운영의 많은 부분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주체적인가?

가령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행사를 생각해보자. 블랙 프라이데이는 기본적으로 북미 지역의 백화점이 그간 쌓아두었던 재고를 헐값에 털기 위해 하는 행사다. 처음부터 수많은 물류 비용을 공급자가 떠안고 있으며, 물류 비용이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는 그런 행사가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당에서, 아니 청와대에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유통업체들은 눈물을 머금고 할인 행사를 벌였는데, 최종적으로 그 손실은 공급자가 나눠서 지게 되었다.

이것은 시장 경제가 아니다. 하다못해 북한 장마당에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격 통제를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공산권 국가를 조롱하기 위해서나 등장했던 그런 에피소드가, 2015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이 의사 결정의 방식, 막무가내식 상명하달, 시장 경제와 가격 결정 원리에 대한 철저한 비존중을 놓고 볼 때, 그 행사는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종북 프라이데이, 혹은 블랙 장마당데이 정도로 불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현 정부의 북한 따라잡기는 급기야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교과서화에 이르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국정교과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 중 우리가 '발전 모델'로 삼을만한 나라가 전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중에 북한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어휘라는 이유로 '동무'가 일상 언어에서 완전히 소거되어 버릴 만큼 반공은 우리의 제1국시였다. 북한에서 하는 것은 무조건 정 반대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자신들이 어떠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함에 있어서 북한의 길을 뒤따르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쉽게도 말하지만, 정작 그 통일이 되고 나면 북한의 깊은 산속에 숨어드는 게릴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나는 홀로 고민해보곤 한다. 북한은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오래도록 유지되고 있는 유사 종교적 독재 국가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고, 통일이 되고 난 후에는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 주체주의자들이 가장 큰 안보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 대한민국은 '형식적 종북'에 대해 이토록 관대한 나라가 되었을까. 우리는 북한이 하는 짓을 고스란히 따라해서가 아니라, 북한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정 반대의 방향을 택했기에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설마 아직도 대한민국이 북한과 '경쟁'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시점에서 우리의 핵심 과제는 북한을 이기는 게 아니다. 이미 이겼다. 북한을 흡수하고도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튼튼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박근혜 정권은 정신을 좀 차려야 한다. 통진당이 해산된 이 시점,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 청와대를 능가할만한 조직이 대한민국에 없다. 동시에, 국정교과서 논란을 '역사 왜곡'으로만 몰아가는 야권 역시 역사 인식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국정교과서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그 형식부터가 '쪽팔리는',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말해보자.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측에서는 '내용적 종북'이 들어있기 때문에 여타의 교과서를 없애고 국정교과서로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그것은 친일 독재 세력의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하면,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그 덫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끝나지 않는 논쟁을, 혹시 즐기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피해야 한다.

어떻게? 상대방을 종북주의자로 몰아가면 된다. 위에서 우리가 이야기했다시피 현 정부는 '내용적 종북'과 거리가 멀지언정(정말 그런지도 의문이지만),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공격적인 어법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최근 시사 용어로 '미러링'이라고 한다. 종북 프레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 너희들은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는 것, 다 해봤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지 않나.

이제는 미러링을 해볼 때다. 야권이 종북이라고? 아니다. 북한이나 하는 국정교과서를 기습 추진하는 현 정권이야말로 종북 정권이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보호해야 한다. 청와대에 종북 세력이 숨어들어 있다. 건국 70년, 공산주의와 맞서며 이룩해낸 우리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취를 이렇게 무위로 돌릴 수는 없다. 통진당의 해산 이후, 대한민국에 조직화된 '내용적 종북'은 없다. 이제는 '형식적 종북'의 문제를 고민해볼 때다.

이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다. 피땀흘려 이룬 나라가 하루아침에 후진국 수준으로 주저앉는 꼴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우리의 경제 수준에 걸맞는 정치적 발전을 고대하며, 숨죽여 외쳐본다. 종북세력 물러가라. 자유민주주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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