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에 거주하는 피지배층이 진정 이 땅에서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낀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살아가는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최근 인터넷의 집단지성에 의해 그것은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로 압축되었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에는 영어가 쓰이지 않았으므로, 한양을 향해 질주하는 일본군을 피해 자기 집안 위패를 싸들고 도망가던 선조를 바라보던 조선의 백성들이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취지의 분노와 원망의 언어는 다양한 기록에 남아 있다. 조선의 백성들이 영어를 알았다면 ‘헬조선’을 부르짖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병자호란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외적이 북쪽에서 내려온 탓에 임금에게는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만주로 도망치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남한산성에 틀어박혔다가 항복을 했다.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침략자들에게 집단으로 납치되었다가 그 중 일부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제대로 나라를 지키지도 못했던 남자들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에게 ‘환향녀’라고 손가락질을 시작했다. 역시 용어만 없다 뿐이지 ‘헬조선’이었던 것이다.
‘헬조선’의 역사는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대한민국이 시작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북한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지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요지부동이었다. 실제로 침략이 개시되자 그는 누구보다 민첩하게 도망길에 올랐고, 모두가 다 알고 있다시피 한강 철교를 폭파하며 자신의 도주로를 확보했다. 폭파되는 다리 위에서 목숨을 잃은 800여명의 국민들, 다리를 건너지 못한 채 발이 묶인 수많은 국민들에게 과연 이 나라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었겠는가?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나 일관되게 ‘헬조선’이었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나는 한마디로 단정짓지 못하겠다. 하지만 ‘헬조선’은 그 성격이 매우 뚜렷하다. 의사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의사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 나라, 그것이 바로 ‘헬조선’의 본질이다. ‘윗분’이 되면 아무 판단이나 함부로 내려도 된다. 반면 당신의 신분이 ‘아랫것’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심지어 자신이 내리지도 않은 결정 때문에 덤터기를 쓰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가령 걸그룹 트와이스의 쯔위 사태를 되짚어보자. 애초에 문제의 씨앗을 뿌린 것은 MBC다. 소품으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와서 쯔위의 손에 쥐여주지 않았다면 그런 논란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인터넷 생중계 영상이 나왔고, 그것을 중국의 누리꾼들과 대만 가수 황안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JYP엔터테인먼트에서 소속 가수를 보호해야 할 차례 아닐까 싶었는데, 그들은 초췌한 모습의 쯔위를 앞세운 사죄 동영상을 내보냈다. ‘어떻게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가수에게 저런 짓을 시킬까’ 놀랍지만, 다시 말하건대 ‘헬조선’의 문화적 전통을 염두에 둔다면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재벌 기업들이 앞장서서 벌이고 있는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1000만 서명운동’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팔을 걷어붙이자 총리부터 공직자들이 줄줄이 서명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입법부의 일원인 국회의원들까지 충성 경쟁에 나서는 추세다.
법과 제도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라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헬조선’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이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윗분들’은 이 법이 필요하지만, 그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는 확고한 의사의 표현이다. 만약 이렇게 해서까지 법을 바꿨는데 경제가 안 살아나면 그건 서명운동에 참여한 1000만명의 국민 때문이지, 죽었다 깨어나도 박근혜 탓은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는 권한과 책임이 따로 노는 ‘헬조선’에 대한 거부 선언이기도 하다. 국가, 기업, 기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윗분들’이 책임을 지는 나라, 그런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입력 : 2016.01.24 20:13:11 수정 : 2016.01.24 20:27:3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242013115&code=990100#csidxb078053b773fd869c67a2dbeaf0f6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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