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W. 드레즈너, 어젠다, 1만3천원.
요즘은 유행이 한물 간 듯도 하지만 여전히 좀비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원래 사람이었던, 그저 다른 인간을 물어뜯고 감염시켜 같은 좀비로 만드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그 무리를, 우리의 대중문화는 끝없이 창작하고 변주하며 소비한다.
그런데 좀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중문화계만의 일이 아닌 듯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대니얼 W. 드레즈너에 따르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인육을 먹는, 되살아난 시체가 일으키는 문제에 주목해왔다."(30쪽) 진지하게 좀비 사태를 우려했다는 게 아니라 좀비를 소재로 한 다양한 논문과 학술적 단행본이 출간되어 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계통에 있는 학문 분야가 이룬 성과와 비교해보면 사회학 일반, 구체적으로는 국제관계학은 좀비에 대한 이해 격차에 시달리고 있다."(31쪽) 그리하여 그는 『국제정치 이론과 좀비』라는, 짧고 재미있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수는 없는 독특한 국제정치학 개론서를 써냈던 것이다.
이 책의 기획에는 합당한 논리적 이유가 있다. 해당 대목을 다소 길게 인용해보자. "여러모로 국제관계학은 좀비 폭동 대처법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에서 빠져 있는 연결 고리다. 언데드가 가하는 위협은 좀비가 등장하는 주요 작품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국제정치에 대한 기초 지식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 살아 있는 시체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 분석 단위로 소규모 지역사회나 가족을 이용한다. 한 나라의 중앙정부나 국제관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시체가 '어떤' 식으로든 정책 대응을 야기할 거라는 게 논리적인 판단일 텐데도 말이다."(35쪽)
그렇다. 좀비는 사람을 문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 좀비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좀비 집단은 자멸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점점 늘어가는 거대한 골칫덩이가 되며, 한 국가 내에서 통제할 수 있는 규모를 쉽사리 넘어설 것이고, 곧 국제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좀비를 소재로 기존의 국제정치 이론들을 일별하고 장단점을 따져보는 기획은 가능할 뿐 아니라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국제정치 이론의 갈래 중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대규모 좀비 재앙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이상한 비-생명체의 집단 출현 자체야 신선한 일이겠으나, 본디 국제정치의 세계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잡아먹는 생생한 폭력의 현장이기에, 국제사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힘의 균형을 찾게 된다면 인류의 국제 사회는 좀비들의 집단과 나름 평화로운 공존을 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상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국제 이론의 눈으로 볼 때 좀비 집단과 인류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세계의 평화는 상호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할 때 가능할 것인데, 좀비들끼리 민주주의 국가를 세운다 해도 그 나라의 구성원들과 우리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 공통된 가치관과 이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직접 이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해봐도 좋겠다.
이른바 '에듀테이너'들이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및 북한의 미사일 실험 등 다양한 위험과 변수가 공존하는 요즘이다. 우리는 더 재미있게, 더 진지하게, 한국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