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28

[북리뷰] 재앙을 상상하라, 이론을 공부하라

국제정치 이론과 좀비
대니얼 W. 드레즈너, 어젠다, 1만3천원.

요즘은 유행이 한물 간 듯도 하지만 여전히 좀비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원래 사람이었던, 그저 다른 인간을 물어뜯고 감염시켜 같은 좀비로 만드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그 무리를, 우리의 대중문화는 끝없이 창작하고 변주하며 소비한다.

그런데 좀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중문화계만의 일이 아닌 듯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대니얼 W. 드레즈너에 따르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인육을 먹는, 되살아난 시체가 일으키는 문제에 주목해왔다."(30쪽) 진지하게 좀비 사태를 우려했다는 게 아니라 좀비를 소재로 한 다양한 논문과 학술적 단행본이 출간되어 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계통에 있는 학문 분야가 이룬 성과와 비교해보면 사회학 일반, 구체적으로는 국제관계학은 좀비에 대한 이해 격차에 시달리고 있다."(31쪽) 그리하여 그는 『국제정치 이론과 좀비』라는, 짧고 재미있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수는 없는 독특한 국제정치학 개론서를 써냈던 것이다.

이 책의 기획에는 합당한 논리적 이유가 있다. 해당 대목을 다소 길게 인용해보자. "여러모로 국제관계학은 좀비 폭동 대처법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에서 빠져 있는 연결 고리다. 언데드가 가하는 위협은 좀비가 등장하는 주요 작품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국제정치에 대한 기초 지식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 살아 있는 시체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 분석 단위로 소규모 지역사회나 가족을 이용한다. 한 나라의 중앙정부나 국제관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시체가 '어떤' 식으로든 정책 대응을 야기할 거라는 게 논리적인 판단일 텐데도 말이다."(35쪽)

그렇다. 좀비는 사람을 문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 좀비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좀비 집단은 자멸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점점 늘어가는 거대한 골칫덩이가 되며, 한 국가 내에서 통제할 수 있는 규모를 쉽사리 넘어설 것이고, 곧 국제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좀비를 소재로 기존의 국제정치 이론들을 일별하고 장단점을 따져보는 기획은 가능할 뿐 아니라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국제정치 이론의 갈래 중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대규모 좀비 재앙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이상한 비-생명체의 집단 출현 자체야 신선한 일이겠으나, 본디 국제정치의 세계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잡아먹는 생생한 폭력의 현장이기에, 국제사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힘의 균형을 찾게 된다면 인류의 국제 사회는 좀비들의 집단과 나름 평화로운 공존을 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상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국제 이론의 눈으로 볼 때 좀비 집단과 인류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세계의 평화는 상호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할 때 가능할 것인데, 좀비들끼리 민주주의 국가를 세운다 해도 그 나라의 구성원들과 우리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 공통된 가치관과 이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직접 이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해봐도 좋겠다.

이른바 '에듀테이너'들이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및 북한의 미사일 실험 등 다양한 위험과 변수가 공존하는 요즘이다. 우리는 더 재미있게, 더 진지하게, 한국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2017.02.28ㅣ주간경향 1215호

2017-02-20

20170212-20170218: 마이클 플린 미 국가안보회의 보좌관 사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 김정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

* 현지시간으로 2월 13일, 마이클 플린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사임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트럼프 당선 후 정권 인수 과정에서 오바마 정부는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해킹을 통해 개입한 정황을 확인하고 러시아 외교관들을 추방했다. 그 시점, 트럼프에 의해 발탁되어 백악관 내에서 고위직을 맡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플린은 러시아 대사와 통화를 하며 사태의 변화와 추이에 대해 논의했다. 둘째, 자신이 러시아측과 통화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등 상급자에게 허위로 보고했다. 셋째, 그러한 사유로 인해 정보 당국은 플린이 러시아에게 협박당할 소지가 있으며 정보 유출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플린이 러시아측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정보기관들이 진작부터 몰랐던 것은 아니다. 2015년 9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 한 공화당 인사가 워싱턴에 소재한 Fusion GPS라는 싱크탱크에 거액을 기부하여 트럼프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했다. Fusion GPS는 전직 영국 정보요원 크리스토퍼 스틸(Christopher Steele, 현재 종적을 감춘 상태)을 고용해 트럼프와 러시아의 관계를 추적했다. 스틸은 트럼프와 러시아의 관계에 대한 막대한 양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보고서는 FBI와 <뉴욕타임즈> 등 언론으로 흘러들어갔다. 진작부터 말이 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플린을 도청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에 대한 오바마의 제재가 발표되던 그 시점에 플린이 러시아 대사와 통화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트럼프 측에서는 플린의 해임이 법적 책임과 무관하며 단지 그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트럼프는 76분에 걸친 기자회견(전문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을 열어서 본인을 향한 온갖 질문과 비판에 맞섰다. "(망하고 있는 @nytimes, @CNN, @NBCNews) 같은 가짜 뉴스들은 나의 적이 아니라 미국 인민의 적이다! 역겨움!"이라는 트윗을 올렸던 그는, 그것을 지우더니 "역겨움!"(SICK!)을 빼고 남는 공간에 "@ABC, @CBS"를 추가하는 파워트위터리언적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의 미치광이같은 대응을 조롱하는 것만으로 이 사태를 논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다. 왜냐하면 트럼프 선거본부와 러시아 정보 당국과의 연계 가능성을 알고 있었던 FBI는 그 사실에 대해 선거 기간 중 함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FBI 국장 제임스 코미는 투표를 닷새 앞두고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을 재조사하겠다'고 발표해서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대체 왜 FBI 국장은 이미 의회 청문회까지 마친 민주당 후보의 '이메일 스캔들'을 선거 직전에 들쑤시면서, 공화당 후보 진영에서 러시아 정보기관과 연루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가? 오바마의 임기 8년동안 미국의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가? 트럼프 행정부의 향후 행보나 탄핵 여부 등과 무관하게, 이 또한 별도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 2월 18일 새벽,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이미 한 차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되었던 특검은 절치부심 끝에 재도전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어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부회장에 대해 지난달 1차 구속영장 청구시 적용했던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과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위증) 외에 범죄수익은닉, 재산국외도피를 추가해 총 5가지 혐의를 적용해 지난 14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실질심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점심식사를 거르면서까지 특검과 변호인단 사이에 구속의 적절성과 필요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한정석 서울지방법원 영장전담 판사는 19시간에 걸친 자료 검토 끝에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재용이라는 한 사람이, 아직 유죄 판결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구속수사를 받는다는 것이 왜 그렇게 대단한 뉴스가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뉴스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논점이 얽혀 있다. 첫째, 한국의 재벌 총수, 특히 삼성을 향한 한국 사회의 신화화 경향성. 둘째, 실제로 법원에서 유죄와 무죄가 판결되는 것과 무관하게 '구속되면 유죄고 풀려나면 무죄'라고 여기는 한국 사회의 법 인식. 셋째, 대중들의 무지를 용인하고 부추기는 언론의 문제.

물론 이재용이 구속되었다는 것은, 그가 최순실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이 구속수사의 필요성을 갖는 중대하고 심각한 사안임을 법원이 인식했다는 것으로, 향후 특검 연장에 있어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중대한 사안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위에서 기술한 세 가지 문제점이 고스란히 남아 작동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집행유예가 나올 수 있는 최대한의 형량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제는 그보다 더 크고 확실한 죄목으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할 때다.

* 2월 13일,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됐다. 두 명의 여성에게 습격당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약품을 흡입한 그는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송 도중 사망했다.

국가정보원은 김정남이 피살되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김정남을 제거하는 것은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후로 지속되고 있는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이며, 따라서 북한의 소행'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런데 사흘 전, <주간경향>의 정용인 기자가 "박근혜 유럽코리아재단 대북 비선은 김정남이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단독 보도했던 사실과 맞물려, 박근혜의 대북 접촉 사실을 은폐하려는 국가정보원의 공작이거나 탄핵 국면에서 북풍을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기록해두건대 나 또한 사건 초기에 같은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될수록 이 사건은 북한의 소행임이 명백해지고 있다. 실제로 김정남에게 약품을 뿌린 두 명의 실행자 외에, 그들과 함께 활동한 용의자들 중 적잖은 이들이 북한 여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북한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시신을 인도하는 대신 수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북한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는 중이다. 한편 중국은 사건이 벌어진 주의 마지막 날인 2월 18일, 북한산 석탄의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이 북한의 최대 후견국이며 석탄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북한에게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북한 입장에서 큰 타격일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김정남의 신변을 보호해주던 중국 측의 반발이라고 해석하는 쪽도 있으나 정확한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2017-02-19

[별별시선] 신화는 없었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에 대해 특검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79년만에 처음으로 삼성그룹의 회장이 구속되었다고, '삼성 불구속 신화'가 깨졌다고 거의 모든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물론 합법적으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이미 삼성그룹의 회장은 한 차례 권력에 의해 붙잡힌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바 있다. 1961년 5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지적하고 체포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고 한 박자 늦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갈 줄 알았던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에 몸담았던 손병두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메트로호텔이라는 곳에서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어떤 '신화'가 이어진다. 박정희는 자신이 경제를 잘 모르므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병철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기업인들을 석방해달라고 직언한 후, 일본의 일본경제인연합회(게이단렌)를 모델로 삼아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된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설하였으며 국가중심의 경제개발 전략 수립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박정희 신화, 혹은 한국의 재벌 신화를 윤색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일종의 평화로운 회의, 혹은 '이병철의 돌직구'가 한국 경제 성장의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분수령으로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당시 귀국한 이병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계엄 상황이고, 상대는 바로 그 쿠데타의 주인공이다. 형무소가 아니라 호텔에서 만났다 해도 실질적으로 구금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박정희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박정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만 할 상황이다. 박정희를 오래도록 보좌해온 누군가를 익명으로 인터뷰한 후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병철은 모종의 방법으로 귀국하라는 설득을 받았고, 돌아오자마자 서울 모처에 감금됐다. 그러나 재능 있는 사업가이자 설득력 있는 화술의 소유자였던 이병철은 박정희 장군과의 협상 끝에, 그가 지닌 대부분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기업가들이 박정희가 제시하는 경제개발 전략에 따르도록 설득하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병철은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기업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36쪽)

대한민국의 기업과 정부의 관계란 바로 이렇게 형성되었다. 정권을 손에 쥔 자는 기업의 목에 칼자루를 들이댈 힘을 갖는다. 기업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그 대신 정부의 경제발전계획에 따라 주요 사업에 참여할 권리와 더불어 해당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시중 금리보다 훨씬 저렴하게 대출받을 수 있다. 물론 그 대출받은 돈 중 일부는 다시 정치인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재용 측에서 최순실과 정유라의 말 구입 및 승마 비용을 지불해놓고도 그것이 뇌물로 제공된 것이 아니라 협박을 받아 내놓은 것이라고 항변하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강제로' 돈을 내놓으면 권력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얻어낼 수 있다는 기대 하에 행동했을 따름이다. 1961년 이병철이 불법적으로 '구속'될 때부터 2017년 이재용이 합법적으로 구속될 때까지 이어져온 게임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삼성 불구속 신화'는 없다. 방금 깨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다. 다만 우리에게는 재벌과 정권의 결탁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런 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제는 가짜 신화가 사라진 자리에 공정하고 민주적인 시장경제를 수립할 때다.

입력 : 2017.02.19 20:24:01 수정 : 2017.02.19 20:30:13

2017-02-14

[북리뷰] 우리가 모르고 싶었던 '진짜' 미국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
새뮤얼 헌팅턴, 김영사, 1만9900원.

트럼프의 행정명령, 그 이전에 그의 당선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를 포함해, 그런 이들은 대부분 미국을 '이민자들의 국가'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동시에 미국을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핵심적 가치, 즉 '미국적 신조'(American Creed)에 기반한 이념적 국가로 여긴다. 그러나 새뮤얼 헌팅턴의 생각은 다르다. 2004년작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을 펼쳐보자.

이 책의 원제는 Who Are We?이다. 제목이 곧 내용이다. "미국은 거의 모두가 영국제도에서 건너온 17~18세기의 개척자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59쪽)로, "역사적으로 미국인들은 대체로 이민자들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미국을 "이민자들의 국가"라고 자랑하지도 않았다"(59쪽)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민국가 미국'의 신화는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형성되고 이후 1965년의 이민법 개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그는 주장한다.

실제로 인구 구성을 보더라도 미국은 '이민자들의 국가'가 아니다. '개척자들과 그 후손들의 나라'라고 보는 편이 옳다. "간단하게 말해서, 20세기 말에 미국의 인구는 절반가량이 초기 개척자들과 노예들의 후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개척자들이 만든 사회에 합류한 이민자들의 후손이었다."(67쪽) 전적으로 자신을 이방인, 아웃사이더, 디아스포라라고 여길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미국인으로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는 것은, 영국과 그 외 유럽에서 건너온 신교도 개척자들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관습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승하느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 책은 '개척자'와 그 후손들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미국에 거주하고 경제 활동을 하면서도 미국에 동화되려 하지 않는 이민자들, 특히 멕시코와 근접한 지역에서 스페인어를 쓰고 자기들끼리 별개의 사회를 꾸려가고 있는 히스패닉들에 대한 미국 주류의 불만과 불안이 명료한 학술적 언어로 기술되어 있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뉴멕시코 대학교의 찰스 트루실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예측한다. 즉, 적어도 2080년에는 미국의 남서부 주들과 멕시코의 북부 주들이 한데 합쳐 새로운 나라를 형성할 것이다."(303쪽)

그러한 '바닥 민심'을 철저히 반영한 탓에, 2004년 출간된 이 책에는 트럼프의 당선이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다. 빌 클린턴의 탄핵에 찬성했던 연방의회 하원 의원들은 모두 WASP(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였다. '리버럴' 엘리트에 대한 백인 남성들의 공격은 이미 지난 세기부터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헌팅턴은 "기본적으로 백인 남성이고, 근로계층이고, 중산층인 사람들이 배타주의적인 사회정치적 운동을 전개"(381쪽)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와 같은 운동은 인종적 및 문화적 특성을 가질 수 있고 반反히스패닉, 반흑인, 그리고 반이민일 수 있다."(381쪽) 그는 그러한 움직임에 '백인 현지인주의white nativism'이라는 완곡한 이름을 붙이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이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ism'임을 알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은 진보주의자들이 선호하는 '노동계급의 반란'이 아니다. 백인들의 불만이 한 리얼리티 쇼 스타를 통해 분출되고 있을 뿐이다. 20세기의 이념적 도식으로 미국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이 책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전혀 달갑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2017.02.14ㅣ주간경향 1213호

2017-02-12

20170205 - 20170211: 미일 정상회담, 박근혜 탄핵 심판 변론기일 연장, 일본 법원의 트렌스젠더 불임수술 의무화 위헌소송 기각

* 2월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이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할 것을 강조했다. 일본은 센카쿠열도의 영토 분쟁에서 미국이 일본의 편을 들어줄 것임을 재확인했고, 미국은 TPP에서 탈퇴한 대신 일본과의 양자 무역 협정을 채결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입장을 제시했다.

아베는 정상회담 이전에 '미국에 일자리를 70만개 만들겠다'는 등, 트럼프의 백악관이 제시하는 온갖 종류의 경제적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의향을 강하게 드러내어 왔다. 그렇기에 센카쿠열도 영토 분쟁에서 미일 안보조약 5자가 변함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과연 그렇게 큰 성과인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는 출범부터 지금까지 불안정성 그 자체였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신임 미 대통령으로부터 기존의 원칙을 직접 재확인받았다는 것은 아베의 외교적 성취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정상회담은 내용만큼이나 의전이 중요하다. 의전은 상대방으로부터 어떻게 대접받느냐, 그리고 상대를 어떻게 대접하느냐를 놓고 벌이는 외교전의 최첨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는 아베의 손을 19초 동안이나 붙들고 움켜쥐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곤혹스러움을 안겨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미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탑승하고 플로리다 남부 팜 비치에 위치한 트럼프의 별장에서 이틀 밤을 보내며 함께 골프도 즐겼다. 그 별장 자체가 트럼프의 소유인 탓에, 일본 정부가 숙박료를 지불한다면, 대통령직을 이용해 돈을 번 셈이 된다. 평소에는 신경도 안 쓰던 이해상충을 이유로 들어 트럼프는 아베에게 별장 숙박비까지 '쐈다'. 온갖 립서비스와 굴욕적인 악수 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의전은 이렇게 챙기는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심판에 대한 변론기일이 2월 22일까지 연장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측에서, 이미 한 차례 건강을 이유로 증인신문에 불출석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소환해서 조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주심인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그것을 수락했기 때문이다. 이정미 권한대행은 김기춘을 2월 20일 오후 2시에, 최순실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22일에 소환하여 조사하기로 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의 변론기일은 최소 2월 22일까지 연장되었다.

변론기일의 연장이 중요한 것은 이후 심판 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변론기일이 모두 종료된 후에 결정문을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 작성에는 최소 1주일에서 최대 1달이 넘는 시간이 걸리므로, 2월 22일에 변론이 마무리된다면 아무리 빨라도 3월 초에나 탄핵의 인용이건 기각이건 결정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2월 말 탄핵은 이미 물 건너갔고, 3월 초에 결정이 나는 것이 최선이나, 만약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가 종료되는 3월 15일 이후가 된다면 남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총 7명으로 탄핵이 인용될 가능성이 대폭 줄어든다.

정치권과 법조계 일각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변론기일의 종료를 앞두고 출석 의사를 밝힌 후 그것을 미루는 방식으로 최대한 변론기일을 늦춰서 헌재 재판관을 7명까지 줄인 후,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이 나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소송 전략으로서 어느 정도 말이 되고, 현재 박근혜의 변호인측이 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처럼 보이므로, 아마도 맞을 것이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증인인 박근혜 본인이 출석한다는 핑계로 심판을 지연시킬 때, 그것을 헌재가 어떻게 통제하여 제 시간에 심판을 끝낼 수 있느냐이다. 대단히 중요한 일정이 걸린 사안으로, 지속적인 추적이 필요하다.

* 2월 8일, 일본 오카야마(岡山) 가정법원 즈야마 지원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FTM)의 성별전환인정 요구 소송을 기각했다. 원고인 우스이 다카키토는 호르몬 요법중이지만 난소 적출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일본의 경우, 트랜스젠더가 전환 이후의 성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술을 통해 전환 이전 성별의 성기를 제거해야 한다. 우스이의 경우에는 FTM이므로 난소 등을 적출해야 본인의 새로운 성별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MTF라면 고환과 음경 등을 제거하지 않으면 법적인 여성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언론에서 보도된 바에 따르면 우스이는 호적상 이름도 남성적인 이름으로 바꿨지만 "(성별전환은) 수술 여부가 아니라 개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가 본질"이라는 생각에서 난소적출 등의 수술은 받지 않았다."

일본은 각 지자체 단위로 동성혼을 사실혼으로 인정하는 등, 동북아시아 3국 중 상대적으로 가장 진전된 성소수자 정책을 펴고 있는 나라다. 우스이 또한 "작년 봄부터 파트너인 야마모토 미유키(39), 야마모토의 장남(6)과 셋이서 살고 있"다. 이 판결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퇴행적이지만, 판결이 제기된 맥락을 놓고 볼 때, 일본이 가령 대한민국보다 'Gay Divide'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보다 개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성소수자 정책이 요구된다.

* 일러두기: 2017년 2월 13일 21:30분 수정.

2017-02-06

20170129 - 20170204: 스티브 배넌의 NSC 회의 배석, 매티스 미 국방장관 방한, 백인우월주의자의 캐나다 퀘벡 모스크 테러

* 1월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재편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본인의 선거 과정에서 수석 전략가 역할을 맡았던 스티브 배넌(Steve Bannon)를 NSC에 당연배석하도록 행정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대단히 이례적일 뿐 아니라 상식에 반하는 처사이기도 하다. 첫째, 당연히 NSC에 참석해야 할 국가정보국(DNI) 국장과 합동참모본부장이 배제되었다. 국가의 안보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에 국가정보국 국장과 합동찬모본부장의 참석 권한이 없다. 오직 특정한 이슈가 있을 때에만 참석할 수 있도록 강등되었다. 둘째,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그 어떤 공직 경험도 없고, 다만 트럼프의 선거 운동을 도왔을 뿐인 백인우월주의자다.

현재 미국 "민주당 상·하원은 배넌을 NSC 수석회의의 당연직 위원에서 제외하고 DNI 국장과 합동참모본부장을 복귀시키는 내용의 법안을 각각 제출"한 상태다. 이것은 공화당 내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사안이지만 아직 공화당의 공식적 대응은 관측되고 있지 않다. 대단히 위험할 뿐 아니라 상징적인 사건으로, 전 세계가 마주하고 있는 가장 큰 안보 위협이 백악관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 2월 3일,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이 방한했다. 그는 약 24시간 가량 한국에 채류하며 미국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대북 정책 및 동북아 정책의 방향이 유지될 것임을 확인했다. 그는 한미동맹에 대해 "아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뒷받침하는 핵심 축(linchpin)"이라고 했는데, 조선일보는 이를 두고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 때부터 사용했던 'linchpin'을 되풀이한 것은 한·미 동맹의 큰 틀이 변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했다. 또한 그는 1972년, 1973년, 1974년 세 차례 해병 소대장으로 강릉에 훈련을 왔을 때 자신에게 김치를 가져다 주었던 '정 하사'를 만나고 싶다는 립서비스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 하사'가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은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1970년대 초 미국인이, 한국인이 가져다주는 김치를 먹었다고?).

중요한 것은 이런 '있지도 않은 추억'을 굳이 창작해서 들먹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중국에 대한 견제 태세를 강화하려는 새로운 정부의 방향성 때문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실각해 있고 가장 유력한 야권 대선 주자의 주변에 친중파가 득시글거리는 상황 속에서, 아직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조차 배치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신임 미 국방장관은 한미동맹을 강조하고, 평택 기지를 바라보며 '원더풀'을 연신 내뱉으면서, '정 하사'와의 보도자료용 추억을 회상한다.

이번 동아시아 방문은 일본보다 한국을 먼저 들렀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아베 신조 일본 수상이 트럼프의 취임 이전에 그와 만남을 가졌던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일본은 최선을 다해 미국의 새로운 정권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하다못해 연방법원에 의해 가로막힌 트럼프의 '무슬림 밴' 행정명령에 발맞춰 일본항공(JAL)은 해당 6개국의 승객을 거부하겠다는 발표까지 했다. 그러한 일본의 노력은 전세계적인 비난과 조롱의 대상일 뿐이며 그 효과마저도 의문스러운 반면, 한국의 경우 국내의 싸드 배치 반대 여론이 일종의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다.

* 현지시각으로 1월 30일 오후 7시 50분, 캐나다 퀘백 시에 위치한 이슬람 사원(모스크)에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발생했다. 사망자는 총 6명으로, 고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들이었다. 용의자는 알렉산드레 비소네테(27세, 男, Alexandre Bissonnette). 라발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 반 외국인, 반 페미니즘 등을 소재로 인터넷에서 트롤링(악플을 달며 시비를 거는 행동)을 일삼아왔다.

용의자가 현장에서 체포되고 신원을 확인하던 중이었지만, 폭스 뉴스는 용의자'들'이 '모로코 출신'이라고 트윗을 올렸다(해당 트윗은 현재 지워진 상태지만 캡쳐를 이 트윗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수상실에서는 폭스 뉴스를 향해 해당 트윗이 잘못되었음을 강하게 지적하는 공문을 발송했고, 폭스는 트윗을 삭제했으며, 야당인 보수당은 그러한 수상실의 행보에 대해 비판을 내놓았다. '물론 그 트윗은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었지만 수상은 보다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비판의 내용이었다.

용의자인 알렉산드레 비소네테는 프랑스어 사용자로 미국보다 프랑스의 극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보도되고 있으나, 동시에 트럼프의 당선을 지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 사는 한국계 남성들이 트럼프의 당선을 두고 '노동 계급의 분노'를 운운하는 사이, 그 본질인 백인우월주의 혹은 인종주의가 진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2017-02-03

'백인 현지인주의white nativism'

1993년에 <뉴스위크>에서 데이비드 게이츠는 「무너짐Falling Down」이란 영화를 묘사했다. 이 영화에서 마이클 더글러스가 열연한 백인 전직 군수회사 직원은 자신이 볼 때 다민족, 다인종, 그리고 다문화 사회가 자신에게 가하는 손실, 패배, 분노, 그리고 모욕에 반응한다. 게이츠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와 같은 분노와 모욕은 백인들의 고난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더글러스를--흰 셔츠와 타이, 안경, 그리고 단정한 머리의 구시대 모범생 모습인 그를--다양하고 화려한 L.A. 사람들의 혼합에 대비시킨다. 이것은 다문화적 미국에서 궁지에 몰린 백인 남성의 만화적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은 만화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저명한 사회학자가 7년 후에,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과 관련해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있었던 투표에 대해 한 얘기를 생각해보라.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쪽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WASP(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이었고, 거의 모두가 남부 출신이었고, 한 사람만 빼고 남성이었다.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쪽의 사람들은 천주교도, 유대교도, 흑인, 여성, 게이, 그리고 한명의 남부 WASP 남성이었다. 이와 같은 열정 속에서 남성 WASP들이 미국 사회에서 줄어들고 있는[380쪽] 자신들의 역할에 대항해 일으키는 반란을 보기는 그렇게 어려운가?"

그와 같은 '반란'과 그 이유들을 보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사실,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오한 인구적 변화들이 다양한 형태의 반응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특이하고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중에서 한 가지 가장 있음직한 반응은 기본적으로 백인 남성이고, 근로계층이고, 중산층인 사람들이 배타주의적인 사회정치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일 수 있다. 이들은 그와 같은 운동 속에서 그와 같은 변화들을, 그리고 자신들이 볼 때 점점 더 줄어드는 자신들의 사회적 및 경제적 지위, 이민자들과 외국들에 빼앗기는 일자리,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가 약해지는 것, 그리고 자신들 나라의 역사적 정체성이 침식되거나 사라지는 것을 막거나 되돌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이와 같은 운동은 인종적 및 문화적 특성을 가질 수 있고 반反히스패닉, 반흑인, 그리고 반이민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은 과거에 미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다수의 인종적 배타주의 및 반외국인 운동과 비슷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공유하는 사회적 운동, 정치적 집단, 지적 조류, 그밖의 다양한 저항들은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백인 현지인주의white nativism'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일 수 있다.

새뮤얼 헌팅턴, 형선호 옮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경기도 파주: 김영사, 2004), 380-381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헌팅턴이 말하는 바 '백인 현지인주의'를 오늘날의 우리는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ism'라고, 혹은 더 줄여서 그냥 '인종주의'라고 부른다. 헌팅턴 스스로는 뒤이어지는 서술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백인 현지인주의를 극단주의 과격파 집단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382쪽)고 주장하나, 2017년의 우리는 그런 안일한 소리에 설득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대목은 길게 인용해놓은 후 종종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2004년에 출간된 이 책 Who Are We?가, 헌팅턴의 다른 저작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해당 시점으로부터의 미래 전개를 예측하는데 성공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용된 내용은 트럼프의 당선을 '노동 계급'과 연결짓고 싶어하는 '진보'의 발상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노동을 하는 백인-미국인'일 뿐 진보에서 가정하는 '노동계급'이 아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는 백인 우월주의자 혹은 '백인 현지인주의자'의 그것일 뿐 진보적 의제와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식자층은 트럼프 당선을 어떻게든 '노동'과 연결짓고 싶어하며, 반대로 헌팅턴은 '백인 우월주의'와 '백인 현지인주의'가 다르다고 끝내 우겨댄다.

반면에, 그["이를테면 1990년대에 잠시 미시건과 서부의 몇몇 주들에서 번창했던 민병대 운동이나 오직 반유대인 내지 반흑인 성격만을 띠면서 KKK에서 비롯한 선입견을 반영하는 온갖 종류의 '증오 집단들'"(382쪽)]보다 폭이 넓은 현지인주의 운동은 미국 사회의 새로운 현실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의 지도자들은 과격파 집단의 지도자들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중에서 많은 이들은 캐롤 스웨인이 말한 '새로운 백인 국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이고, 지적이고, 종종 미국의 일부 명문 대학들과 대학교들에서 인상적인 학위를 받은 사람들로서, 이 새로운 종의 백인 인종적 국가주의자들은 대중주의 정치인들이나 '옛날 남부'의 KKK 단원들과 전혀 다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이 아니다. 이들이 믿는 것은 "인종적 자립과 자존이며" 미국이 "빠르게 비백인들의 지배를 받는 국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따르는 전통은 호레이스 캘런, 다문화주의자, 그리고 국가적 정체성의 이분법 개념을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종, 민족성, 그리고 문화를 하나의 꾸러미로 묶으려 한다. 이들에게 인종은 문화의 원천이며, 개인들의 인종성은 고정된 것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이므로, 개인들의 문화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인종적 균형이 변하는 것은 문화적 균형이 변하는 것이며,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백인 문화 대신에 그와 다르고 (그들이 볼 때) 지적 및 도덕적으로 열등한 흑인이나 갈색인 문화가 득세하는 것이다. 인종과 따라서 문화의 이와 같은 섞임은 국가적 타락의 길이라고 그들은 본다. 이들에게 있어서, 미국을 미국으로 보존하려면 미국을 백색white으로 유지해야 한다.(383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우리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말이 결국 '미국을 다시 백인의 나라로 만들자'는 말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트럼프 본인이 진심으로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그의 선거 슬로건이 그에게 표를 던진 이들, 가령 '러스트 벨트의 노동 계급'의 인종주의적 감수성을 직격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헌팅턴의 책에 따르면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백인 현지인주의'의 내용은 무엇인가? 헌팅턴의 주장과 달리 그가 소개하는 내용에 따르면 '백인 현지인주의'는 인종분리정책 등을 추구하거나 그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게다가 차별주의자들이 늘 그렇듯 주장하는 바 그 자체에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문단 안에서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이 아니"라고 전달한 후, '백인 현지인주의'자들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백인 문화 대신에 그와 다르고 (그들이 볼 때) 지적 및 도덕적으로 열등한 흑인이나 갈색인 문화가 득세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라고 서술할 수 있단 말인가? '백인 현지인주의'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는 인종차별주의임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아무튼 미국은 그런 나라가 되었다. 혹은, 그런 나라가 아닌 척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리버럴 엘리트'를 꼬까워하는 '노동 계급'의 이탈로 인해 거대한 퇴행을 감당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새뮤얼 헌팅턴의 이 책은 '백인 현지인주의'에 존재의 당위와 면죄부를 제공해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