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에 <뉴스위크>에서 데이비드 게이츠는 「무너짐Falling Down」이란 영화를 묘사했다. 이 영화에서 마이클 더글러스가 열연한 백인 전직 군수회사 직원은 자신이 볼 때 다민족, 다인종, 그리고 다문화 사회가 자신에게 가하는 손실, 패배, 분노, 그리고 모욕에 반응한다. 게이츠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와 같은 분노와 모욕은 백인들의 고난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더글러스를--흰 셔츠와 타이, 안경, 그리고 단정한 머리의 구시대 모범생 모습인 그를--다양하고 화려한 L.A. 사람들의 혼합에 대비시킨다. 이것은 다문화적 미국에서 궁지에 몰린 백인 남성의 만화적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은 만화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저명한 사회학자가 7년 후에,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과 관련해 하원 법사위원회에서 있었던 투표에 대해 한 얘기를 생각해보라.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쪽의 사람들은 전적으로 WASP(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이었고, 거의 모두가 남부 출신이었고, 한 사람만 빼고 남성이었다.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쪽의 사람들은 천주교도, 유대교도, 흑인, 여성, 게이, 그리고 한명의 남부 WASP 남성이었다. 이와 같은 열정 속에서 남성 WASP들이 미국 사회에서 줄어들고 있는[380쪽] 자신들의 역할에 대항해 일으키는 반란을 보기는 그렇게 어려운가?"
그와 같은 '반란'과 그 이유들을 보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사실,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오한 인구적 변화들이 다양한 형태의 반응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특이하고 인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중에서 한 가지 가장 있음직한 반응은 기본적으로 백인 남성이고, 근로계층이고, 중산층인 사람들이 배타주의적인 사회정치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일 수 있다. 이들은 그와 같은 운동 속에서 그와 같은 변화들을, 그리고 자신들이 볼 때 점점 더 줄어드는 자신들의 사회적 및 경제적 지위, 이민자들과 외국들에 빼앗기는 일자리,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가 약해지는 것, 그리고 자신들 나라의 역사적 정체성이 침식되거나 사라지는 것을 막거나 되돌리기 위해 애쓸 것이다. 이와 같은 운동은 인종적 및 문화적 특성을 가질 수 있고 반反히스패닉, 반흑인, 그리고 반이민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은 과거에 미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다수의 인종적 배타주의 및 반외국인 운동과 비슷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공유하는 사회적 운동, 정치적 집단, 지적 조류, 그밖의 다양한 저항들은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그럼에도 충분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백인 현지인주의white nativism'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일 수 있다.
새뮤얼 헌팅턴, 형선호 옮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경기도 파주: 김영사, 2004), 380-381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헌팅턴이 말하는 바 '백인 현지인주의'를 오늘날의 우리는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ism'라고, 혹은 더 줄여서 그냥 '인종주의'라고 부른다. 헌팅턴 스스로는 뒤이어지는 서술에서 "이와 같은 종류의 백인 현지인주의를 극단주의 과격파 집단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382쪽)고 주장하나, 2017년의 우리는 그런 안일한 소리에 설득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대목은 길게 인용해놓은 후 종종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2004년에 출간된 이 책 Who Are We?가, 헌팅턴의 다른 저작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해당 시점으로부터의 미래 전개를 예측하는데 성공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용된 내용은 트럼프의 당선을 '노동 계급'과 연결짓고 싶어하는 '진보'의 발상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노동을 하는 백인-미국인'일 뿐 진보에서 가정하는 '노동계급'이 아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는 백인 우월주의자 혹은 '백인 현지인주의자'의 그것일 뿐 진보적 의제와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식자층은 트럼프 당선을 어떻게든 '노동'과 연결짓고 싶어하며, 반대로 헌팅턴은 '백인 우월주의'와 '백인 현지인주의'가 다르다고 끝내 우겨댄다.
반면에, 그["이를테면 1990년대에 잠시 미시건과 서부의 몇몇 주들에서 번창했던 민병대 운동이나 오직 반유대인 내지 반흑인 성격만을 띠면서 KKK에서 비롯한 선입견을 반영하는 온갖 종류의 '증오 집단들'"(382쪽)]보다 폭이 넓은 현지인주의 운동은 미국 사회의 새로운 현실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의 지도자들은 과격파 집단의 지도자들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중에서 많은 이들은 캐롤 스웨인이 말한 '새로운 백인 국가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이고, 지적이고, 종종 미국의 일부 명문 대학들과 대학교들에서 인상적인 학위를 받은 사람들로서, 이 새로운 종의 백인 인종적 국가주의자들은 대중주의 정치인들이나 '옛날 남부'의 KKK 단원들과 전혀 다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이 아니다. 이들이 믿는 것은 "인종적 자립과 자존이며" 미국이 "빠르게 비백인들의 지배를 받는 국가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따르는 전통은 호레이스 캘런, 다문화주의자, 그리고 국가적 정체성의 이분법 개념을 고수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종, 민족성, 그리고 문화를 하나의 꾸러미로 묶으려 한다. 이들에게 인종은 문화의 원천이며, 개인들의 인종성은 고정된 것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이므로, 개인들의 문화 역시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인종적 균형이 변하는 것은 문화적 균형이 변하는 것이며,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백인 문화 대신에 그와 다르고 (그들이 볼 때) 지적 및 도덕적으로 열등한 흑인이나 갈색인 문화가 득세하는 것이다. 인종과 따라서 문화의 이와 같은 섞임은 국가적 타락의 길이라고 그들은 본다. 이들에게 있어서, 미국을 미국으로 보존하려면 미국을 백색white으로 유지해야 한다.(383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우리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말이 결국 '미국을 다시 백인의 나라로 만들자'는 말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추론을 해볼 수 있다. 트럼프 본인이 진심으로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그의 선거 슬로건이 그에게 표를 던진 이들, 가령 '러스트 벨트의 노동 계급'의 인종주의적 감수성을 직격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헌팅턴의 책에 따르면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백인 현지인주의'의 내용은 무엇인가? 헌팅턴의 주장과 달리 그가 소개하는 내용에 따르면 '백인 현지인주의'는 인종분리정책 등을 추구하거나 그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게다가 차별주의자들이 늘 그렇듯 주장하는 바 그 자체에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문단 안에서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성이 아니"라고 전달한 후, '백인 현지인주의'자들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백인 문화 대신에 그와 다르고 (그들이 볼 때) 지적 및 도덕적으로 열등한 흑인이나 갈색인 문화가 득세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라고 서술할 수 있단 말인가? '백인 현지인주의'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는 인종차별주의임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아무튼 미국은 그런 나라가 되었다. 혹은, 그런 나라가 아닌 척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리버럴 엘리트'를 꼬까워하는 '노동 계급'의 이탈로 인해 거대한 퇴행을 감당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새뮤얼 헌팅턴의 이 책은 '백인 현지인주의'에 존재의 당위와 면죄부를 제공해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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