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9

독일식 정당명부제에 대하여

'독일식 비례대표제'가 독일에서 잘 돌아가는 이유는 독일이 독일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정치에 뜻을 품은 청소년들이 일찌감치 정당에 가입해, 평당원부터 차근차근 정당인으로서 이력을 쌓아나가고 그 과정에서 능력과 청렴도가 검증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정당명부 비례투표를 해도 되는 것.

반면 한국에서 정치란, 박근혜에게 청년비례 공천받은 이준석 같은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대체로 4-50대 무렵까지 이력을 쌓은 사람들이 인생 이모작을 하러 들어가는 분야다. 중년의 정치 신인들은 지역 연고, 그 순간의 인맥, 기타 이해관계와 당선 가능성을 가늠하여 소속 정당을 택한다.

게다가 한국의 정당들이 독일의 정당처럼 일관된 정책 지향과 이념적 방향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요컨대, 한국의 정당은 자신들이 내놓는 후보의 인적 측면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정책적 측면에 대해서도, 독일에 비해 매우 보증력이 떨어지는 선거 공략용 공대에 가깝다는 말이다.

지역 기반 투표가 국회 의석을 deadlock 시키는 것을 문제라고 본다면 비례대표를 강화하는 것을 해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별적인 후보자에 대한 인적 검증이 소선거구제 시절보다 약화될 수 있음을, 다시 말해 '하자 있는 국회의원'이 더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각오해야 한다.

삼김시대에도 지역구는 나름 필터링을 했다. 보스에게 공천받은 후보가 떨어지면 개망신이니까. 하지만 전국구 의석은 '돈 받고 파는 거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그냥 다들 넘어가주는' 분위기 아니었던가. 비례대표제가 무조건 '민심'을 더 잘 반영한다는 식의 환상을 넘어서서 그 작동 방식을 보자.

지금은 아무리 정치 거물이어도 총선때는 긴장 타야 한다. 여차하면 골로 간다. 하지만, 가령 100% 정당명부비례제라면, 선순위 공천자는 국민이 아무리 싫어해도 당선된다. 비례대표가 늘어날수록 유권자의 '떨어뜨리는 힘'은 줄어든다. 대신 공천권 가진 사람의 '고르는 힘'은 한없이 커진다.

요컨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정당이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구성하고 반영하는 조직으로서 제 기능을 하며, 정당 내부의 정치 행위와 역학 관계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충분히 쌓여 있어야, '민심'을 올바로 반영할 수 있는 선거 제도다. 한국이 그런 나라인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 해볼 일.

하나 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자신들의 의석이 늘어날 거라 믿는 군소정당(정의당, 바른정당 등)들. 그러한 방식의 선거 제도 하에서 대형 정당은 비례 순번의 말석에 군소 정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해당하는 인물을 공천한다.

유권자는 '작은 정당에 속한, 내 지향을 전적으로 반영하는 인물'보다는, '큰 정당에 속한, 내 지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인물'의 당선을 위해 투표할 가능성이 크다. 현행 비례대표제 하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그게 더 큰 규모로 시행될 뿐이다. 한국의 정당은 이념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대 기성 정당이 이념정당의 이념적 지향성을 빼앗아올 수 있는 인물들을 배치하면, 유권자로서는 그 실체와 존속 여부가 불투명한 군소정당을 지지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은 기민당과 사민당이 아니라는 말이다. 뭐, 이미 다들 '합의'를 했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비례대표가 늘어난 후 지금까지 진보정당이 지역구에서 못 본 재미를 비례에서 실컷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유권자에게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잔돈'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애매한 잔돈 그냥 '좋은 일 하겠다는 사람들'한테 주자, 이걸 모아서 의석 만드는 게 진보의 선거 전략이었다.

그런데 그 '잔돈'이 '목돈'이 되면, 유권자들이 예전처럼 진보정당에 옛다 하고 줄까? 그리고 거대 정당들이 이전처럼 순순히 개평 떼어줄까? 안 그럴 것 같은데...

정의당이나 바른미래당 등 군소야당이 진정으로 '정치개혁'을 원했다면, 선거제도 그 자체보다 일단 국회의원 의석을 늘리는 것을 전제로 협상에 임했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200명으로 줄이고 전원 비례대표로 뽑느니, 모든 의석을 지역구로 돌리고 400명을 뽑는 게 훨씬 '대의제'에 부합.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 떠나서 숫자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숫자 뿐 아니라 국회라는 기관 자체가 갖는 권한이 너무 약함. 가령, 감사원을 청와대 직할이 아니라 국회 직할로 옮기면 과연 국정감사가 지금처럼 연례 호통쇼에 머물까?

선거제도개편을 밀어붙이는 측은 국회의 권한을 늘리는 데 관심 없다. 자신들의 의석을 '상대적으로' 더 확보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의석을 300석으로 묶고, 자기들도 남에게 설명 못하는 복잡한 선거제를 도입한다? 이런 정치적 선택을 '개혁'이라 부르는 것은 기만적인 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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