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덕도 신공항이 뉴딜? 케인스가 코웃음 칠 일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9. 10:01●‘정부가 헛돈 쓰면 경제 성장한다’는 사고
●‘일단 이 지역에 돈 쓰겠다’는 건 페론주의
●시장 기능 후퇴, 경쟁 마비, 생산성 추락
●與 선거용 꼼수에 PK 주민들만 속앓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못 하는 거죠."
"그럼 방법이 뭘까요?"
나는 궁금한 마음이 들어 물어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이 돌아왔다.
"지하철 자동개찰기를 없애버리고 옛날처럼 차장이 손으로 개표해주기만 해도 전국에 지하철역마다 일자리가 몇 개가 생기는데요. 그런 식으로 고용을 창출하면 됩니다."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지만 그는 자신이 창출한 가상의 일자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검표용 가위를 들고 차표에 구멍을 뚫는 손놀림을 흉내 내며 입으로 '짤깍 짤깍'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 다시 물었다.
"그건 사실상 일부러 비효율을 증가시키는 것인데요, 그런 식으로 경제의 효율을 일부러 떨어뜨리는 게 어떻게 경제 성장이 될까요?"
"케인스가 말한 게 바로 이런 거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일이라도 시키면서 돈을 주면 그 돈이 사회에 풀리고 돌면서 불황이 해결된다는 말이죠."
돈 파묻고 퍼내는 영국 콧수염 아저씨
나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반문이 돌아왔다. "‘일반이론'에 그렇게 쓰여 있잖아요. 폐광에 돈을 파묻고 사람들이 캐 가게 하면 불황이 해결된다고.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케인스 이론이니까요.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는 거죠."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케인스는 멀쩡히 잘 돌아가는 자동개찰기를 없애고 대신 개찰구마다 직원이 한 사람씩 서서 검표용 가위를 짤깍거리는 것이 불황의 해법이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이렇듯 케인스를,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쓸모없는 일자리, 오히려 사회적 효율을 떨어뜨리는 일자리를 만들면 실업이 사라지고 결국 경제가 좋아진다는 건 케인스의 책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일반이론)'에 등장하는 한 대목을 오독한 결과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식자층 사이에서 케인스란 '돈 파묻고 퍼내는 영국 콧수염 아저씨'다. 좀 길지만 문제의 구절을 읽어보자.
"만약 재무성이 낡은 몇 개의 병에 은행권을 채워서 그것을 폐광된 탄갱의 적당한 깊이에 묻고, 그 다음에 탄갱을 도시의 쓰레기로 지면까지 채워놓고, 허다한 시련을 잘 이겨낸 자유방임(自由放任·laissez faire)의 원리에 입각해, 개인 기업에 그 은행권을 다시 파내게 한다면 (물론, 이것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은행권이 묻혀 있는 지역의 임차에 대한 입찰에 의해 얻어진다) 더 이상 실업이 존재할 필요도 없어지고, 그 반작용의 도움에 의해, 사회의 실질소득이, 또 나아가서는 그 자본적 부 또한, 그것이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될 것이다."(‘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 번역, 비봉출판사, 2007, 152쪽)
이 대목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직접 보았거나 누군가가 언급하는 것을 한 번은 접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사람들에게 그냥 돈을 나눠줄 거라면 허공에 뿌려도 된다. 줄을 세워놓고 나눠주면 질서정연한 현금 살포 정책 역시 가능하다. 왜 하필이면 폐광의 갱도에 돈을 파묻은 후 다시 캐는 헛된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떠올리기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인데, 웃기려고 만든 비유일까.
그렇지 않다. 이유가 있다. 맥락을 알아야 한다. 케인스가 '일반이론'을 펴낸 것은 1936년. 대공황의 한가운데였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금본위제를 유지하던 때다.
풍자를 진지한 조언으로 받아들이다니
케인스가 볼 때 이 공황을 끝내려면 화폐를 더 찍어내야 했다. 그런데 중앙은행들은 금본위제 때문에 돈을 더 찍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금본위제란,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은행에 금괴를 쌓아두고 그것으로 종이에 찍힌 돈의 가치를 보증하는 제도다. 따라서 돈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금을 더 캐야 한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이 금광의 발견과 금괴의 수급에 의해 좌우되는 셈이다.여기까지 설명하고 나면 위 인용문이 이해될 것이다. 금광을 발견하고 금을 캐낼 때까지 화폐 증발을 하지 못해 불황을 겪는 그런 상황은 난센스라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저 유명한 '광산에 묻힌 돈다발'의 비유는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앞서 인용한 문구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이 대목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금광으로 알려져 있는 땅 속에 구멍을 파는 형태는, 그것이 세계의 실질적인 부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직 노동의 비효용만을 가져올 뿐인데도 (경기 회복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해결책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다."
케인스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삽질을 하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한 게 아니다. 금본위제에 묶여 정부 지출로 수요를 진작시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돈을 땅에 묻었다가 다시 캐내라는 기발한 풍자를 했을 뿐이다. 위에 길게 인용한 문단 바로 뒤에서 케인스가 "물론 가옥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것을 건조하는 게 더욱 현명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건 그래서다. 집을 짓고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등 유익한 사업을 벌여라, 그게 안 되면 차라리 광산에 돈을 파묻고 도로 캐내라. 물론 그런 미친 짓거리를 진짜 할 리는 없으니 어서 쓸모 있는 건설 사업을 벌이자, 이런 말이다.
2020년대의 우리는 케인스가 만들어낸 거시경제학적 관점을 전 세계인이 대부분 알고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케인스가 비판한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세상을 지배한 1930년대와 달리, 이제는 경기가 조금만 나빠질 것 같으면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알아서 금리를 내리고 돈을 푼다. 미국은 허공에서 헬기를 타고 돈을 뿌리자는 농담을 즐겨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붙은 벤 버냉키를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 앉히기도 했다. 즉 2020년 현재 전 세계인은 어느 정도까지는 케인스주의자다.
그러니 케인스가 '차라리'라는 단서를 붙여서 제안한 것을 진지한 정책 조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땅에 돈을 파묻은 후 캐내거나 피라미드를 짓는 게 차라리 경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케인스가 말했다는 사실 자체는 옳다. 하지만 그 말을 근거로 케인스의 이름을 외치며 대한민국에 진짜로 피라미드를 짓는 것은 미친 짓이다.
불필요한 공공사업을 벌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기반시설 중복 투자로 인한 예산 낭비를 케인스는 찬성하지 않았다. '일반이론'의 같은 대목에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시피, "두 개의 피라미드, 사자(死者)를 위한 두 개의 미사곡은 하나에 비해 두 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요크까지의 두 개의 철도는 그렇지 않다."
탱자가 된 케인스의 농담
미국의 풍자 유머 사이트 어니언(The Onion)이 2008년 11월 13일 공개한 가상의 TV 토론 영상을 살펴보자. '정부는 거대한 돈 구덩이를 폐쇄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네 명의 패널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원하는 사람은 정부의 구덩이가 아니라 자기 집 뒷마당에 돈을 묻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없애는 방법은 파묻는 게 아니라 태우는 것이다' '종이 파쇄기에 넣고 분쇄해서 말에게 먹이로 줘야 한다' 등 온갖 방법으로 돈을 없앨 궁리를 한다. 마지막 논객이 던지는 멘트는 일품이다. '당신이 미국을 사랑한다면, 미국의 구멍에 돈을 버리세요.'(https://www.youtube.com/watch?v=JnX-D4kkPOQ)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퍽 많은 사람들이 '돈 파묻고 퍼내기'의 비유를 진지한 경제학적 조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언급한 한 교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 체감 상 거의 모든 식자층, 특히 진보 진영의 식자층은 '정부가 헛돈을 쓰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거나, 그런 믿음을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한 상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경제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만약 케인스의 피라미드 농담이 사실이라면, 전국 방방곡곡마다 세워진 수많은 전시성 조형물 덕분에 각 지자체의 경제는 우뚝 일어섰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 차라리 피라미드를 짓자'던 케인스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와서 저 온갖 '랜드 마크'들을 봤다면 박장대소했을 것이다. 물론 찬성하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2020년은 1930년대와 달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를 선택지에 전혀 두지 않는 세상이다. 중앙은행들은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금리를 인하하고 통화량을 늘려 경기 후퇴를 막는다. 따라서 케인스의 농담을 순수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지자체가 증명하고 있다. 피라미드를 짓는다고 해서 되살아날 만큼 21세기의 경제는 만만하지 않다.
공항은 피라미드가 아니다
가덕도 신공항 논란이 다시 불거진 까닭은 문재인 정권의 선거 전략 때문이다.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다. 화두가 떠오르자마자 부산에 지역구를 둔 야당 의원들은 곧장 찬성 의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여당은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애가 타는 당사자는 날로 침체되는 지역 경제로 속을 앓는 부산과 경남 일대 주민들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선거용 꼼수로 인해 온 나라가 '공항장애'에 시달리고 있다.이미 프랑스의 용역회사를 통해 경제성, 확장성, 기타 입지의 적절성에 대해 판단이 끝난 사안이다. 그럼에도 가덕도에 공항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김해공항이 위험하다거나, 가덕도가 실은 더 확장성이 좋다거나, 도심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때문에 시끄럽다거나 등등. 그때와 달리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 지면은 그런 사항을 다루기에 적합한 곳도 아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 상식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공항은 피라미드가 아니다. 앞서 인용한 케인스의 말을 다시 반복하고 싶다. "두 개의 피라미드, 사자(死者)를 위한 두 개의 미사곡은 하나에 비해 두 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요크까지의 두 개의 철도는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상 그 어떤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공항 같은 사회기반시설의 중복 투자와 건설은 비합리적이다. 국가 예산을 투입해 민간 수요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재정승수 효과를 노린다면 차라리 그 효과를 거두는 게 목적이라고 정직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최선의 사업을 찾는 단계부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공항이라는 키워드에 묶여있을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합리적 해법을 찾아야 하겠다.
‘일단 이 지역에 돈을 쓰기 위해 합리성이나 타당성과 무관한 사업을 벌인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케인스주의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에 가깝다. 두 경제 사상은 심지어 케인스주의의 옹호자들 사이에서도 곧잘 혼동되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시장이 제 기능을 되찾게 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 반면 후자는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하게 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가로막으며,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면서, 오직 지지율과 정권 유지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케인스주의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계 경제를 부흥시켰다. 페론주의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던 아르헨티나를 단번에 주저앉히고 말았다.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 온갖 '랜드 마크'들을 보면 웃기다 못해 섬뜩해지는 것은 그래서다. 페론주의가 아닌 케인스주의의 관점에서 대한민국 경제를 고민하는 정치를 원한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