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9

[신동아] 가덕도 신공항이 뉴딜? 케인스가 코웃음 칠 일

 

가덕도 신공항이 뉴딜? 케인스가 코웃음 칠 일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9.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⑪]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오독한 진보

●‘정부가 헛돈 쓰면 경제 성장한다’는 사고
●‘일단 이 지역에 돈 쓰겠다’는 건 페론주의
●시장 기능 후퇴, 경쟁 마비, 생산성 추락
●與 선거용 꼼수에 PK 주민들만 속앓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국무총리실 산하 김해신공항 검증위원회 김수삼 위원장이 11월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김해신공항 추진은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검증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몇 년 전 일이다.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중년 남성 몇 분과 식사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제는 늘 어렵다. 경기를 되살리는 방법으로 화제가 넘어갔다. 그러자 교수 중 한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는 게 아닌가.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못 하는 거죠." 

"그럼 방법이 뭘까요?" 

나는 궁금한 마음이 들어 물어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이 돌아왔다. 

"지하철 자동개찰기를 없애버리고 옛날처럼 차장이 손으로 개표해주기만 해도 전국에 지하철역마다 일자리가 몇 개가 생기는데요. 그런 식으로 고용을 창출하면 됩니다."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었지만 그는 자신이 창출한 가상의 일자리가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검표용 가위를 들고 차표에 구멍을 뚫는 손놀림을 흉내 내며 입으로 '짤깍 짤깍'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내면으로부터 힘을 끌어내 다시 물었다. 

"그건 사실상 일부러 비효율을 증가시키는 것인데요, 그런 식으로 경제의 효율을 일부러 떨어뜨리는 게 어떻게 경제 성장이 될까요?" 

"케인스가 말한 게 바로 이런 거 아닙니까.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일이라도 시키면서 돈을 주면 그 돈이 사회에 풀리고 돌면서 불황이 해결된다는 말이죠."

돈 파묻고 퍼내는 영국 콧수염 아저씨

동남권 신공항 예정지로 거론되는 부산 강서구 가덕도. [부산=뉴시스]
독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하자면 그의 전공은 경제학이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과학과도 무관하다. '조국기 부대'도 '태극기 부대'도 아닌 건전한 상식인이다. 본인의 분야에서 두루 존중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 작업물을 여럿 낸 실력자다. 그런 지성인마저도 케인스의 이름을 외치며 사회의 효율을 떨어뜨리면 경제가 살아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것이다. 

나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반문이 돌아왔다. "‘일반이론'에 그렇게 쓰여 있잖아요. 폐광에 돈을 파묻고 사람들이 캐 가게 하면 불황이 해결된다고.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케인스 이론이니까요.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는 거죠."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케인스는 멀쩡히 잘 돌아가는 자동개찰기를 없애고 대신 개찰구마다 직원이 한 사람씩 서서 검표용 가위를 짤깍거리는 것이 불황의 해법이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이렇듯 케인스를, 더 나아가 현대 자본주의 경제가 돌아가는 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쓸모없는 일자리, 오히려 사회적 효율을 떨어뜨리는 일자리를 만들면 실업이 사라지고 결국 경제가 좋아진다는 건 케인스의 책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일반이론)'에 등장하는 한 대목을 오독한 결과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국의 식자층 사이에서 케인스란 '돈 파묻고 퍼내는 영국 콧수염 아저씨'다. 좀 길지만 문제의 구절을 읽어보자. 

"만약 재무성이 낡은 몇 개의 병에 은행권을 채워서 그것을 폐광된 탄갱의 적당한 깊이에 묻고, 그 다음에 탄갱을 도시의 쓰레기로 지면까지 채워놓고, 허다한 시련을 잘 이겨낸 자유방임(自由放任·laissez faire)의 원리에 입각해, 개인 기업에 그 은행권을 다시 파내게 한다면 (물론, 이것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은행권이 묻혀 있는 지역의 임차에 대한 입찰에 의해 얻어진다) 더 이상 실업이 존재할 필요도 없어지고, 그 반작용의 도움에 의해, 사회의 실질소득이, 또 나아가서는 그 자본적 부 또한, 그것이 현재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될 것이다."(‘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조순 번역, 비봉출판사, 2007, 152쪽) 

이 대목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직접 보았거나 누군가가 언급하는 것을 한 번은 접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는가. 사람들에게 그냥 돈을 나눠줄 거라면 허공에 뿌려도 된다. 줄을 세워놓고 나눠주면 질서정연한 현금 살포 정책 역시 가능하다. 왜 하필이면 폐광의 갱도에 돈을 파묻은 후 다시 캐는 헛된 노력을 기울인단 말인가. 떠올리기만 해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인데, 웃기려고 만든 비유일까. 

그렇지 않다. 이유가 있다. 맥락을 알아야 한다. 케인스가 '일반이론'을 펴낸 것은 1936년. 대공황의 한가운데였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금본위제를 유지하던 때다.

풍자를 진지한 조언으로 받아들이다니

케인스가 볼 때 이 공황을 끝내려면 화폐를 더 찍어내야 했다. 그런데 중앙은행들은 금본위제 때문에 돈을 더 찍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금본위제란,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은행에 금괴를 쌓아두고 그것으로 종이에 찍힌 돈의 가치를 보증하는 제도다. 따라서 돈을 찍어내기 위해서는 금을 더 캐야 한다. 한 나라의 통화정책이 금광의 발견과 금괴의 수급에 의해 좌우되는 셈이다. 

여기까지 설명하고 나면 위 인용문이 이해될 것이다. 금광을 발견하고 금을 캐낼 때까지 화폐 증발을 하지 못해 불황을 겪는 그런 상황은 난센스라고 케인스는 생각했다. 저 유명한 '광산에 묻힌 돈다발'의 비유는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앞서 인용한 문구의 바로 앞에 등장하는 이 대목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금광으로 알려져 있는 땅 속에 구멍을 파는 형태는, 그것이 세계의 실질적인 부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직 노동의 비효용만을 가져올 뿐인데도 (경기 회복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해결책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이다." 

케인스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삽질을 하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한 게 아니다. 금본위제에 묶여 정부 지출로 수요를 진작시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돈을 땅에 묻었다가 다시 캐내라는 기발한 풍자를 했을 뿐이다. 위에 길게 인용한 문단 바로 뒤에서 케인스가 "물론 가옥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것을 건조하는 게 더욱 현명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건 그래서다. 집을 짓고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등 유익한 사업을 벌여라, 그게 안 되면 차라리 광산에 돈을 파묻고 도로 캐내라. 물론 그런 미친 짓거리를 진짜 할 리는 없으니 어서 쓸모 있는 건설 사업을 벌이자, 이런 말이다. 

2020년대의 우리는 케인스가 만들어낸 거시경제학적 관점을 전 세계인이 대부분 알고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케인스가 비판한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세상을 지배한 1930년대와 달리, 이제는 경기가 조금만 나빠질 것 같으면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알아서 금리를 내리고 돈을 푼다. 미국은 허공에서 헬기를 타고 돈을 뿌리자는 농담을 즐겨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이 붙은 벤 버냉키를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 앉히기도 했다. 즉 2020년 현재 전 세계인은 어느 정도까지는 케인스주의자다. 

그러니 케인스가 '차라리'라는 단서를 붙여서 제안한 것을 진지한 정책 조언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땅에 돈을 파묻은 후 캐내거나 피라미드를 짓는 게 차라리 경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케인스가 말했다는 사실 자체는 옳다. 하지만 그 말을 근거로 케인스의 이름을 외치며 대한민국에 진짜로 피라미드를 짓는 것은 미친 짓이다. 

불필요한 공공사업을 벌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기반시설 중복 투자로 인한 예산 낭비를 케인스는 찬성하지 않았다. '일반이론'의 같은 대목에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시피, "두 개의 피라미드, 사자(死者)를 위한 두 개의 미사곡은 하나에 비해 두 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요크까지의 두 개의 철도는 그렇지 않다."

탱자가 된 케인스의 농담

2016년 6월 9일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가덕도 신공항 예정지를 방문해 피켓을 들고 있다. [부산=뉴스1]
문제는 케인스의 저 '돈 파묻고 퍼내기'의 비유가 너무도 강렬하다는 데 있다. 이미지의 힘이 너무 컸다. 마치 기억력 대회에 출전하는 사람들이 괴상하고도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암기해야 할 단편적 정보들을 끼워 맞춰서 기억력을 높이는 것과도 유사하다.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전체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케인스는 돈을 파묻고 퍼내면 경제가 살아난다고 했다'는, 일종의 '경제학적 밈'이 생겨난 셈이다. 

미국의 풍자 유머 사이트 어니언(The Onion)이 2008년 11월 13일 공개한 가상의 TV 토론 영상을 살펴보자. '정부는 거대한 돈 구덩이를 폐쇄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네 명의 패널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원하는 사람은 정부의 구덩이가 아니라 자기 집 뒷마당에 돈을 묻을 수 있어야 한다' '가장 효율적으로 돈을 없애는 방법은 파묻는 게 아니라 태우는 것이다' '종이 파쇄기에 넣고 분쇄해서 말에게 먹이로 줘야 한다' 등 온갖 방법으로 돈을 없앨 궁리를 한다. 마지막 논객이 던지는 멘트는 일품이다. '당신이 미국을 사랑한다면, 미국의 구멍에 돈을 버리세요.'(https://www.youtube.com/watch?v=JnX-D4kkPOQ)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퍽 많은 사람들이 '돈 파묻고 퍼내기'의 비유를 진지한 경제학적 조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언급한 한 교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내 체감 상 거의 모든 식자층, 특히 진보 진영의 식자층은 '정부가 헛돈을 쓰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거나, 그런 믿음을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한 상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경제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만약 케인스의 피라미드 농담이 사실이라면, 전국 방방곡곡마다 세워진 수많은 전시성 조형물 덕분에 각 지자체의 경제는 우뚝 일어섰어야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 차라리 피라미드를 짓자'던 케인스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와서 저 온갖 '랜드 마크'들을 봤다면 박장대소했을 것이다. 물론 찬성하지도 않았을 테고 말이다. 2020년은 1930년대와 달리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를 선택지에 전혀 두지 않는 세상이다. 중앙은행들은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금리를 인하하고 통화량을 늘려 경기 후퇴를 막는다. 따라서 케인스의 농담을 순수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지자체가 증명하고 있다. 피라미드를 짓는다고 해서 되살아날 만큼 21세기의 경제는 만만하지 않다.

공항은 피라미드가 아니다

가덕도 신공항 논란이 다시 불거진 까닭은 문재인 정권의 선거 전략 때문이다.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다. 화두가 떠오르자마자 부산에 지역구를 둔 야당 의원들은 곧장 찬성 의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여당은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애가 타는 당사자는 날로 침체되는 지역 경제로 속을 앓는 부산과 경남 일대 주민들뿐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선거용 꼼수로 인해 온 나라가 '공항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이미 프랑스의 용역회사를 통해 경제성, 확장성, 기타 입지의 적절성에 대해 판단이 끝난 사안이다. 그럼에도 가덕도에 공항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김해공항이 위험하다거나, 가덕도가 실은 더 확장성이 좋다거나, 도심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때문에 시끄럽다거나 등등. 그때와 달리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 지면은 그런 사항을 다루기에 적합한 곳도 아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 상식만을 강조하고자 한다. 공항은 피라미드가 아니다. 앞서 인용한 케인스의 말을 다시 반복하고 싶다. "두 개의 피라미드, 사자(死者)를 위한 두 개의 미사곡은 하나에 비해 두 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런던에서 요크까지의 두 개의 철도는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상 그 어떤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공항 같은 사회기반시설의 중복 투자와 건설은 비합리적이다. 국가 예산을 투입해 민간 수요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재정승수 효과를 노린다면 차라리 그 효과를 거두는 게 목적이라고 정직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최선의 사업을 찾는 단계부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공항이라는 키워드에 묶여있을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합리적 해법을 찾아야 하겠다. 

‘일단 이 지역에 돈을 쓰기 위해 합리성이나 타당성과 무관한 사업을 벌인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케인스주의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에 가깝다. 두 경제 사상은 심지어 케인스주의의 옹호자들 사이에서도 곧잘 혼동되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시장이 제 기능을 되찾게 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 반면 후자는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하게 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가로막으며, 국가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면서, 오직 지지율과 정권 유지만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케인스주의는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계 경제를 부흥시켰다. 페론주의는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던 아르헨티나를 단번에 주저앉히고 말았다.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 온갖 '랜드 마크'들을 보면 웃기다 못해 섬뜩해지는 것은 그래서다. 페론주의가 아닌 케인스주의의 관점에서 대한민국 경제를 고민하는 정치를 원한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11-28

[노정태의 시사哲] 美 엘리트는 '내 탓이오'인데, 韓 586은 왜 '네 탓이오'인가

 

美 엘리트는 '내 탓이오'인데, 韓 586은 왜 '네 탓이오'인가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8. 03:08 수정 2020.11.29. 17:02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윤리철학 최신 담론 '능력주의'
일러스트= 안병현

린 닐텝. 가난하지만 천재적 두뇌를 가진 태국 소녀다. 목표는 해외 유학. 아버지가 그 학비까지 대줄 수는 없지만 상관없다. 장학금을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전학 첫날부터 친해진 단짝 친구에게 호의로 커닝을 시켜줬다가 점점 판이 커졌고, 결국 걸렸다. 가까스로 퇴학은 면했지만 장학금은 받을 수 없다.

내 유학비 내가 벌겠다는 마음으로 린은 커닝 비즈니스를 더 키우기로 한다. 미국 유학을 가고자 하는 금수저 수험생들이 고객이다. 미국 대학 입시에 필요한 STIC라는 시험은 전 세계에서 같은 날 치르는데, 그러니 태국보다 시간이 앞선 호주에 가서 먼저 문제를 풀고 답을 알려주는 계획을 세웠다. 린은 또 다른 천재 소년 뱅크와 함께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2017년 개봉한 태국 영화 ‘배드 지니어스’의 내용이다.

‘배드 지니어스’는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범죄 영화, 즉 ‘케이퍼 무비’에 시험이라는 요소를 절묘하게 섞었기 때문이다. 보석 대신 정답을 훔치는 천재 소녀 린의 활약을 보며, 우리는 문득 능력주의(meritocracy)의 허와 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The Rise of Meritocracy)’라는 소설을 썼다. 어느 날 혁명을 통해 신분이나 재산이 아닌 능력에 의해서만 사람을 평가하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었는데, 결국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어째서 그럴까? 시험을 통한 능력 평가는 안정적으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는 계층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시험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엘리트는 자기들끼리 결혼하여 지능이 높은 아이를 낳아 좋은 여건을 제공한다. 온갖 제도 역시 자녀에게 유리하게 바꾼다. 대학교 학벌 같은 ‘능력 인증’을 받고 나면 다시는 그 밑으로 내려가지 않게 된다. 실제로는 더 나쁜 신분제가 되는 것이다.

‘배드 지니어스’에서 린이 목격하는 부잣집 아이들의 인생을 생각해보자. 머리가 나쁘지만 돈 많은 집 자식들은 기부금을 내고 명문 사립고에 들어간다. 머리 좋은 누군가를 시켜 커닝까지 한다. ‘보스턴에 있는 대학교’ 간판을 따기만 하면 아무도 그들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능력주의 문제는 현실이다.

2017년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인 리처드 리브스가 ’20대 80의 사회'(Dream Hoarders)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후, 미국 지성계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뒤이어 나온 예일대 로스쿨 교수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 하버드 철학과 교수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 정치, 윤리철학의 최신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2016년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이라는 충격으로 인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미국의 리버럴은 상위 1%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게 문제이며, 자신들처럼 능력 있는 중상층 엘리트가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위 20%가 나머지 80%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진짜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능력주의 비판은 미국 지성계의 자기반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능력주의 비판을 수입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퍽 이상하다. 미국에서는 기성 엘리트가 ‘내 탓이오’를 외치고 있는 반면, 한국의 중장년 진보 엘리트는 청년들을 향해 ‘네 탓이오’라며 손가락질하는 분위기랄까. 20대와 30대 사이에서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그 대항마로 능력주의 비판을 끌어들인다. 인천국제공항 사태, 공공의대 논란 등에서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청년들에게 ‘공정충’ 같은 모멸적 딱지를 붙이고는, ‘너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자체가 특권’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식이다.

그런 비판은 학력고사 봐서 대학 간 다음 데모 좀 하더니 정치권의 주류가 된 586 기득권층에 돌아가야 한다. 학력고사나 수학능력시험이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입시 제도에 비해 부모의 정보력, 인맥, 문화적 자산 등의 영향을 덜 받는다. 만약 1980년대의 한국이 2020년대와 같은 방식으로 대학 입시를 치르는 나라였다면 지금 586세대 상당수는 대학 문턱을 밟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은 학벌과 인맥으로 평생을 먹고살면서 그들은 능력주의의 혜택을 철저하게 누린다.

그들이 만들어낸 오늘의 모습은 어떤가. ‘컨설팅’을 받아야 대학 갈 수 있는 나라, 물려받은 재산 없으면 살아 생전 집 한 채 살 수 없는 나라 아닌가.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사회 전체의 꿈을 긁어모아 제 자식에게만 물려주는 탐욕스러운 기득권자들. 수십 번씩 부동산 정책을 내놓아도 집값을 못 잡는 무능력자들. 그들이 무슨 염치로 능력주의 비판을 입에 담는 걸까.

능력 중심 사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류를 봉건적 신분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준 자유주의 혁명의 근간에 개인의 능력에 대한 존중이 깔려 있으니 말이다. 능력 중심 시장주의는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단, 학벌을 능력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며, 진정한 능력을 갖출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해야 한다. 특히 인적 자본 형성기, 즉 유년 시절 가정 환경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리브스는 강조한다.

‘배드 지니어스’는 능력주의의 맹점을 배경으로 한 범죄 스릴러 영화다. 있는 집 자식들은 돈 써서 커닝하고, 없는 집 자식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남 좋은 일 시켜주는 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긴장감 넘치는 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딘가 서글퍼진다. 그래도 시험은 공정한 조건에서 자기 실력으로 경쟁하여 평가받아야 하며, 커닝은 누가 뭐래도 나쁜 짓이다.

12월 3일,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이제는 수능 하나만 잘 봐서는 대학 가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한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그 기간에 집중해서 비대면 학원 수업을 받아 공부를 더 잘하게 되었다는 말도 들려온다. 올겨울은 몸보다 마음이 더 추울 것 같다. 모든 수험생의 건강과 건투를 빈다.

2020-11-27

미친 소와 감기 걸린 닭에 대한 전 지구적 고찰 (GQ 2008/06)

미친 소와 감기 걸린 닭에 대한 전 지구적 고찰 (GQ 2008/06)

 

그것을 인간 광우병이라고 불러도 좋고, 혹은 vCJD라고 해도 상관 없다.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과 인간 광우병이라 불리는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의 정확한 발생 원인 및 감염 경로에 대한 과학적 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확실한 것들을 우선 짚어보자. 첫째, 뇌에 구멍이 송송 뚫려서 사망하는 질병 중 인간이 걸릴 수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이다. CJD, vCJD, 그리고 파푸아섬에서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던 원시인들이 걸리던 '쿠루'라는 풍토병. 둘째, 이 세 가지 질병은 모두 걸리면 수년의 잠복기를 거친 후 100% 사망한다. 셋째, CJD는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하는데, 그 발병 확률은 100만분의 1도 채 안 된다. 넷째, 동물성 사료의 사용을 금지한 이후, 영국에서 CJDvCJD의 발병률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세계에서 인간 광우병이 가장 많이 발병한 나라가 영국임을 감안해볼 때, '통계적'으로 보자면 동물성 사료의 사용 금지 이후 광우병의 위험은 상당히 잘 통제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정부측에서 '끝장 기자회견'과 이후 <MBC 100분 토론>을 통해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산 소고기가 광우병에 노출되어 있다는 주장은 현재로서는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값싸고 질좋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서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어떤 우유 회사가 자기들이 만드는 우유 100만 팩 중 하나에 청산가리를 넣어서 판다고 치자. 그런 경우에도 그것을 먹고 죽을 가능성은 고작 100만 분의 1에 불과하지 않은가? 대체 어째서 우리가 고기 한 점을 먹을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100만분의 1'의 확률이라는 것이, 위에서 말한 CJD의 자연발병률과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가 먹는 한우가 순수하게 풀만 먹고 자란 소가 아니라면, 우리는 vCJD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인은 매일같이 고기국을 먹고, 소 피를 응고시켜서 선지국을 끓여먹으며, 소의 뼈를 고아서 곰탕을 만들어 먹기 때문에 특별히 더욱 위험하다는 주장에 대해, 정부에서는 그런 비위생적인 "Behavior(행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식으로 국민들을 윽박질렀지만, 소의 각종 부산물을 섭취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매우 다양하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갈아서 소고기 패티를 만든 후 그릴에 구워 햄버거 빵 사이에 끼우는 것이다.

, 소의 살코기가 아닌 부산물을 섭취하는 것이 비위생적인 "Behavior(행태)"라는 정부측의 주장은 어떤 면에서는 타당하지만, '미국분'들도 그렇게 드시고 있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전혀 적절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동시에 그 사실은 유독 한국인들이 광우병에 더욱 위험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례가 되기도 한다. 설렁탕 먹는 한국인들이 광우병에 집단감염될 우려가 있다면, 그건 미국인도 마찬가지다. 미국인들이 모두 미국산 쇠고기만 먹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미국인들이 먹는 햄버거에 뉴질랜드산 청정우의 살코기만을 갈아 넣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로 인해 광우병 희생자가 줄을 잇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진작에 미국에서 먼저 발생했어야 한다. 물론 과격한 반대론자들은 '미국 정부가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종류의 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만 있을 뿐이므로 더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자. 하지만 기왕 '정부 탓'을 시작했으니, 여기서는 미국 정부가 아닌 한국 정부 쪽으로 시선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정부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이번 쇠고기 협정이 한미 FTA의 조속한 타결을 위한 '미국 퍼주기'가 아니냐는 지적을 하지만, 정부측에서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기 때문에, 심증을 유지할 수는 있어도 물증을 확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드러난 정황만을 놓고 보더라도 대한민국 정부가 이번 쇠고기 협상의 타결에 있어서 상당히 불성실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듯하다. <<경향신문>>512"사료조치, 에 백지위임 '2의 쇠고기 파동' 조짐"이라는 기사를 1면에 실었다. 광우병 감염우려가 높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선면수입을 허용하면서 강화된 동물성 사료 금지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 없이 미국에 사실상 '백지 위임'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정부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지난달 25일 연방관보를 통해 공포한 강화된 동물성 사료 금지조치 내용과 다른 설명을 해놓고는, 그 사실이 폭로되자 "영문 번역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내놓았다.

이것은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에 감염되었을 확률이 얼마나 높은가와는 전혀 무관한 문제이다. 과학적인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인 문제가 다른 층위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뼛조각' 하나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미국산 쇠고기의 통관을 가로막던 정부가, 지금은 적극적으로 그것을 수입해도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YTN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돌발영상>의 소재가 되는 영광을 굳이 떠안고 싶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쇠고기 수입 협상을 둘러싼 의혹들을 모두 '정치적'인 것으로 몰아붙이고, '미친 소 먹고 죽기 싫다'며 거리로 나선 10대들의 '배후'를 캐겠다고 눈에 쌍심지를 켠 정부의 태도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음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정부의 그러한 대응은 도리어 탈정치적이던 10대들이 정치적으로 결집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삶이 크게 변화할 수밖에 없으며, 때에 따라서는 아주 단순한 반발의 목소리를 내는 것마저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한국의 10대들은 몸으로 배우고 있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책적인 것에 더욱 가까웠는데, '정치적으로 몰아가는 자들이 있다'는 발언으로 인해 더욱 정치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말을 전달하는 농림부 관료들의 화법 또한, 또 다른 차원에서 정치적이며 또한 철학적이기까지 한 논점을 던져준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직접 '확률'의 문제를 들이밀었다.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로또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다는 것이다. 이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대단히 잘못된 이유는 사안의 본질을 전달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로또 1등 당첨의 꿈을 꾸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제대로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서민적인 마스크를 지닌 탤런트 손현주씨가 가문의 영광을 누리며 팔짝팔짝 뛰는 모습에 서민들은 스스로를 오랫동안 대입해왔다. 그런데 그게 바로 광우병 걸릴 확률이라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아닌가. 정부측에서는 '사실'을 전달하는 방법만 알았지 '사태'를 진정시키는 방법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나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절차와 관련된 정치적 논란에서, 정부측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기존의 입장을 뒤엎는 협상을 하면서, 그러한 입장 변화를 국민들에게 전혀 납득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불거진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부적절한 대응만을 보여줬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 10~20년 후 인간 광우병 환자가 속출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식품의 위생 차원을 넘어 식품의 안전까지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과잉해석이다.

 

물론 나는 MBC <PD 수첩>에서 vCJD의 위험성을 경고함으로써 여론을 환기시킨 것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편이다. 적어도 그들은 1년 전 사설에서 광우병의 위험에 대해 근심하다가 오늘에 와서는 '10대들의 정치적 배후'를 묻던 주요 일간지들보다 훨씬 언론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광우병은 국제적으로 볼 때 상당히 잘 통제되고 있으며, 그 전염성은 HIV(에이즈) 등에 비해 매우 낮다. 정작 지금 세계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512일 현재 서울 송파구에까지 상륙한 AI, 즉 조류독감이다.

현재로서는 조류독감이 육류 섭취를 통해 사람에게 감염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사람에게 감염될 수 있는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상존하고 있으며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연구중이다. 만약 그러한 변종이 대기 중에 유포될 경우 한국은 재앙에 가까운 독감 열풍에 휩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광우병 정국'에 심취한 네티즌들은 조류독감이 위험하다는 보도를 소가 닭 보듯 할 뿐이다. 정부에서 '물타기'를 하기 위해 언론에 자료를 뿌리고 있다고 냉소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1918년 전 세계적으로 4000만에서 1억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광우병이 아닌 독감이었음에도, 한국인들은 과학을 불신하고, 언론을 경멸하며,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소의 뇌에 구멍이 뚫리는 것보다 더욱 걱정스러운 일은 객관적인 지식에 대한, 또한 시민들 스스로 구성하는 공공성에 대한 믿음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다. 바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조망해본다면, 질병의 확산과 예방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광우병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조류독감이다. 역시 국제적인 차원에서, 또한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검토해볼 때 지금처럼 미국산 쇠고기에 한국 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는 것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20세기가 IT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BT, 즉 생명공학(Bio Technology)의 시대이다. 핸드폰을 팔아 밀가루를 사오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공업 생산품의 가격은 특히 중국의 발전으로 인해 나날이 떨어지고 있는 반면, 작년 국제 곡물 시장에서 밀의 가격은 자그만치 287퍼센트나 치솟았다. 이렇다보니 세계 각국은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혈안이다. 또한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기업들은 하나같이 농업과 관련된 다국적 기업들이다. 모사익(Mosaic Co.)319퍼센트, 포타쉬(Potash Corp.)140퍼센트, 몬산토(Monsanto Co.)105퍼센트씩 지난해 주가 상승을 기록했다. '첨단 산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농업이 첨단산업이고, 소 키우고 닭 치는 것이 고부가가치 산업인 시대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검역 주권까지 포기하면서 미국산 쇠고기에 한국 축산 시장을 무차별적으로 개방하겠다고 하며,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 또한 우리 아이가 광우병에 걸리게 되지나 않을까 근심할 뿐 근본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한국 축산 농가가 모두 쓰러진다면 경쟁자를 물리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업체들은 '시장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가격을 높일 것이다.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가 졸지에 '비싸고 맛없는 쇠고기'로 돌변하겠지만 그쯤 되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순간에도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국경을 넘어 닭장 속으로 날아들어온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이렇듯 간단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한국이 가운데 놓인 평면 지도가 아닌, 둥그런 지구본 위에 올려놓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 노정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이 원고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는 여기: https://basil83.blogspot.com/2008/05/blog-post_13.html

2020-11-23

코로나와 인종 문제, 혹은 정치적 올바름의 재구성

수많은 확진자가 나오는 가운데 점점 분명해지는 사실. 코로나는 인종별로 영향이 달리 나타납니다. 영국에서 수집된 자료에 따르면, 흑인 남자의 사망률은 백인 남자에 비해 네 배 높음. 흑인이 인종차별 당해서 아니냐? 하겠지만 인도인(대체로 흑인보다 소득 수준이 높음)도 백인 남자에 비하면 코로나로 두 배 많이 죽습니다.

그러니 인종별로 세부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유대인이나 로마니(aka 집시)처럼 인종으로 분류되어 학살당한 경험이 있는 집단들은 더더욱 인종 정보 제공을 원치 않기 때문.

하지만 인종 자료가 필요하고 유의미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코노미스트의 이 기사에서 제시하는 사례. 브라질은 1990년대부터 피부색에 따라 인종을 5개로 분류했더니, 백인과 그 외 인종의 영아사망률 차이가 가시화되었고, 사회적 분노가 집중되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After Brazil started collecting data in the late 1990s by five different skin-colours, the gulf in infant mortality between indigenous and white babies became apparent. Public outrage led to serious efforts to start narrowing the gap. The Brazilian example shows that the data need to be granular. Catch-all terms such as “BAME” (Black, Asian or Minority Ethnic), used in Britain, are unhelpful. “Non-Western migrant” or “foreign born” contain even less information.

그러므로 '흑인과 아시아인과 소수자', '비서구 이민자' 같은 뭉뚱그리는 표현을 이제는 지양해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 코로나로 인해 인종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새로운 방향에서 생각해보게 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신동아] 與부대변인이 진중권을 '예형'에 빗댄 건 협박

 

與부대변인이 진중권을 '예형'에 빗댄 건 협박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3.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⑩] 증오 선동하는 자들이 자유민주주의 등에 칼 꽂아

●새빨간 거짓에 희생당한 프랑스 교사 사뮈엘 파티
●표현의 자유는 원래 ‘불편한’ 것
●탈진실(post-truth) 용어, 사태의 본질 왜곡
●공산주의자가 공유한 나치, 파시스트 선동 화법
●敵 공격 위해 거짓과 폭력 거리낌 없이 동원
●與의원 “X자식들” “X탱이”… 국민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
●文정권의 진실 결여, 검찰총장을 대선후보 만들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연일 정권에 쓴 소리를 하며 사회참여 지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여당의 상근부대변인이 10월 13일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십시오”라고 해 논란을 일으켰다. 예형은 ‘삼국지연의’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처형당한 지식인이다. 사진은 진 전 교수가 10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진행된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의 대담에 참석한 모습. [박해윤 기자]
사뮈엘 파티(Samuel Paty). 목이 잘려 살해당한 프랑스 역사 교사 이름이다. 표현의 자유는 그가 공들여 가르치는 주제였다. 공화국으로서 프랑스가 지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동안 시사 풍자 잡지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의 일러스트를 수업 교재로 택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 언론은 이 사건의 맥락을 온전히 보도하지 않았다. 마치 어떤 '나쁜 백인'이 '선량한 유색인종'을 도발해 벌어진 일처럼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상은 그보다 복잡할 뿐 아니라 암울하다. 이 사건을 '표현의 자유 대 종교 감정' 문제로만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이 자리 잡고 있다.

표현의 자유 기능하려면 불편함 참아야

가장 먼저 지적할 점은 프랑스 정규 교육은 표현의 자유를 교과 과정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파티는 어떤 식으로든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가르쳐야 했다. 표현의 자유를 논하려면 본질적으로 도덕 감정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미국 도색잡지 '허슬러' 발행인이던 래리 플린트의 인생을 떠올려보자. 영화 '래리 플린트'에 잘 묘사돼 있다시피, 그는 성(性)과 쾌락에 엄숙한 혹은 위선적인 미국 기독교인의 종교 감정을 건드렸다. 신앙인의 표를 노리는 보수적 정치인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 래리 플린트마저도 미국 연방대법원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보호해줬다. 

즉 표현의 자유란 본래 '불편한' 것임에도 법과 제도 및 사회적 관용을 통해 보호받아야 한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말을 할 자유가 침해당한다면 함께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명언이 뜻하는 바도 그런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하려면 불편함을 참아야 한다. 내 감정에 거슬리는 내용도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걸 배워야 한다. 그것이 공교육의 역할이다. 

사뮈엘 파티는 학생들에게 "이 수업은 특히 무슬림 학생들에게 불편할 수 있으며, 내가 보여주는 그림을 보고 싶지 않다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도 좋다"고 말한 후 수업을 진행해왔다. 종교적으로 예민한 소재를 다루고 있긴 했지만, 전문적인 자격과 경력을 지닌 교육자가 진행한 정상적인 수업이었다. 파티는 수년 동안 계속 '샤를리 엡도'의 풍자만화를 소재로 수업을 진행해 왔고 별 문제가 없었다. 

2020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페이스북에서 사뮈엘 파티의 수업에 대한 반대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유명한 무슬림 선동가 압델카힘 세프리위(Abdelhakim Sefrioui)가 있었다. 그는 파티의 수업이 "무책임하고 공격적"이라는 취지의 영상을 올렸다. 세프리위에게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의 딸 자이나(Zaina)에 따르면, 파티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무슬림 학생들에게 이 내용이 마음에 안 들면 손을 들어 표시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슬림 학생들은 종교 감정을 모욕당하고 프랑스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한, 즉 인종주의·국수주의 행태의 희생자가 됐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반전이 있다. 자이나는 파티의 수업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한번 쏟아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슬람 혐오자라는 딱지가 붙은 파티는 교장에게 불려갔고 교육청의 감사도 받았다. 교육청은 그의 수업 내용과 방식을 보고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경찰 역시 같은 결정을 내렸다. 파티는 자신을 비방한 압델카힘 세프리위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파티를 향한 무슬림들의 증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이슬람 혐오자라는 온라인 폭로가 거짓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적개심이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자가발전하기 시작한 증오는 점점 더 커지더니 결국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까지 향했다. 압둘라흐 아부예도비치 안조로프(Abdoullakh Abouyedovich Anzorov)라는 18세의 무슬림 난민 소년이 그 증오에 휩쓸렸고, 칼을 빼들었다. 다섯 살 난 아들을 둔 아버지인 사뮈엘 파티는 2020년 10월 16일 목이 잘린 시신으로 발견됐다.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금기

수업 중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보여줬다는 이유로 무슬림 청년에게 테러를 당한 프랑스 역사 교사 사뮈엘 파티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10월 17일(현지시간) 그가 근무하던 파리 북부 콩플랑생토노린의 부아돈 중학교 앞에 꽃을 놓고 촛불을 켰다. [콩플랑생토노린=AP 뉴시스]
프랑스의 공교육이 제공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는 학부모와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학교 측에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언론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며,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항의 시위를 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반론의 형성과 표출은 '샤를리 엡도'의 풍자만화가 그렇듯,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 하에 보호받는다. 

여기서 절대 어기지 말아야 할 금기가 있다.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런 금기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지만, 한번 무너지고 나니 확실히 보이는 선이 있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파티의 수업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그 수업을 실제로 듣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오직 진실에 근거해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압델카힘 세프리위와 자이나는 상식적이고 올바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짓말을 했다. 그 거짓을 기반으로 페이스북에 선동적 영상을 올렸다. 경찰 수사를 통해 사실과 다르다는 게 드러났지만, 자신들이 들쑤셔놓은 사뮈엘 파티를 향한 증오와 분노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들의 증오 선동에 넘어가 범죄를 저지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그러니 이 사건을 두고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대립을 논하는 건 적절치 않다. 그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갈 요소를 빠뜨리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사뮈엘 파티가 이슬람 혐오자이며 교실에서 무슬림 학생들을 모욕하고 쫓아냈다는 말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파티가 진행한 표현의 자유 수업은 프랑스의 정규 교과 과정 중 일부였다. 그는 그것을 교장과 감독관이 볼 때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증오할 거리를 찾고 있던 선동가인 압델카힘 세프라위는 딸의 거짓말을 믿었거나 딸에게 거짓 증언을 시켰다. 거짓을 연료로 타오른 증오의 불길은 사뮈엘 파티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파티를 살해한 18세 소년 압둘라브 안조로프의 인생까지 망가뜨리고 말았다. 

여기서 종교적 감정의 존엄성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에 대한 모욕 아닐까. 세상 그 어떤 종교도 '남에게 거짓말을 하고 네 이웃을 미워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니 말이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특히 거짓으로 남을 고발하고 선동하지 않는 것. 이것은 인간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 규칙이다. 그 어떤 대단한 이유와 핑계를 들이댄다 한들 거짓 선동과 폭언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존속할 수 없다. 사뮈엘 파티 피살 사건의 대립 구도는 표현의 자유 대 종교가 아니다. 진실 대 거짓이다.

레닌, 히틀러, 트럼프

요즘은 '탈진실'(post-truth)이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저런 고상한 표현은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에 탈진실 같은 건 없다. 탈진실이 아니라 거짓말이다. 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 그리고 한국에서도 거짓말로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자들이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근간으로 삼는 자유민주주의의 등에 칼을 꽂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전설적인 서평 전문 기자 미치코 가쿠타니는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에서 거짓을 근간으로 삼는 폭력적 언어의 기원을 추적한다. 이에 따르면 나치와 파시스트의 선동 화법을 공산주의자들도 공유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부터 미국의 좌파 학자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주로 고학력 엘리트를 대상으로 한 대중문화를 거점 삼아 사회 전반에 퍼져나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21세기가 되자 오히려 우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문화주의에 편승해 진실을 부정하고 아무렇게나 내뱉으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탈진실'의 물결에 가담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트럼프 대통령 옹호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논의를 이용해 트럼프의 거짓말을 변명하고 싶어 하고, 우파는 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기후변화의 현실을 부인하거나 대안사실(alternative fact)을 홍보하고 싶어 한다."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우파도 좌파도 아닌 거짓과 폭력의 승리였을 뿐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히틀러뿐 아니라 레닌의 이름까지 등장한다. 다시 가쿠타니의 설명을 들어보자. 

"레닌은 언젠가 자신의 선동적인 언어가 증오와 혐오와 경멸을 불러일으키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어법은 상대 계급을 납득시키는 게 아니라 깨부수려고, 적의 잘못을 바로잡는 게 아니라 적을 파괴하려고, 적의 조직을 지구상에서 전멸시키려고 의도한 것이었다. 이런 어법은 실로 적에 대한 최악의 생각, 최악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성격의 것이다. 이 모두가 트럼프와 지지자들이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동안 힐러리 클린턴을 공격하면서 사용한 언어(‘힐러리 클린턴을 가둬라'), 영국 브렉시트 운동의 과격한 지지자들이 사용한 언어, 대서양 양쪽 해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파 포퓰리즘 운동이 점점 더 많이 사용하는 언어의 원형처럼 들린다." 

즉 선동의 언어는 좌우의 구분을 넘어선다. 서구냐 비(非)서구냐, 근대적 세속국가냐 종교냐 하는 대립과도 무관하다.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적을 공격하기 위해 거짓말과 폭력을 거리낌없이 동원하고자 하는 태도의 문제다. 사뮈엘 파티를 향한 적개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이나가 거짓말을 했고 압델카힘 세프리위가 선동을 했던 것은 그 흐름 위에서 벌어진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종교의 신성함이나 신앙의 자유와는 상관이 없다.

말론 브란도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11월 4일 국회 운영위원회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대통령경호처에 대한 국정감사에 참석했다. 이날 그는 “8·15 광화문 집회 때문에 이것을 클러스터로 해서 발생한 확진자가 600명이 넘는다. 사람까지 7명 이상 죽었다.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다, 살인자. 이 집회 주동자들은!”이라고 말했다.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은 11월 4일 청와대 국정감사에서 "8·15 광화문 집회 때문에 이것을 클러스터로 해서 발생한 확진자가 600명이 넘는다. 사람까지 7명 이상 죽었다.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다, 살인자. 이 집회 주동자들은!"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었을 뿐 아니라 속기록에도 기록돼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논란이 커지자 노 실장은 11월 13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국민에 대해 살인자라고 한 적 없다. 어디서 가짜뉴스가 나오나 했더니, 여기서 나온다. 속기록을 보라"고 했다. 탈진실, 아니 거짓말이다. 정부의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국민을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 들어 가장 우려스러운 현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국민을 상대로 폭력과 증오의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공무원들을 상대로 'X자식들'이라는 폭언을 던지고,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국민에게 'X탱이'라고 문자를 보낸다. 언어 습관이 고상하지 못하다고 말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웃고 넘길 일도 아니다. 그들은 국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여당 상근부대변인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를 상대로 "예형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그리하십시오"라는 말을 한 일도 있다. '삼국지연의'에서 예형은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결국 처형당하고 마는 지식인이다. 집권 여당의 부대변인이 지식인을 향해 예형을 운운하는 건 문자 그대로 협박이다. 영화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이 어떤 점잖은 제안이 아닌 협박인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기억하는 한 민주화 이후 그 어느 정부도 이렇게 대놓고 국민에게 위협을 가한 적은 없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문재인 정권의 이런 행태는 어쩌면 일찌감치 예견됐을지도 모른다. 201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타 후보에게 문자폭탄을 보내고 18원의 후원금을 넣는 등의 방식으로 공격적 행동을 할 때 문재인 당시 후보의 반응을 떠올려보자.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는 친문세력뿐 아니라, 문 대통령 본인이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거짓을 기반으로 한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권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진실의 결여에 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렵기에 '검찰개혁'이라는 양의 머리를 내걸고 증권범죄합동수사단 해체 같은 만행을 저지른 걸까.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은 독일에서는 전례가 없다. 일본에서는 1954년 법무대신이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하던 뇌물 정치인 사건을 불구속 지휘한 사례가 유일하다. 결국 법무대신은 여론의 비난에 사퇴했다. 수사지휘권을 남발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라도 해서 감춰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기가 어렵다. 이 거짓의 정권으로 인해, 민심은 급기야 퇴임하지도 않은 현직 검찰총장을 차기 대선후보로 바라보게 됐다.

설령 진실이 아프더라도

거짓말쟁이를 추궁하면 계속 거짓말을 한다. 그래도 끝까지 물어보면 나중에는 의심당하는 자신이 불쌍하다는 식으로 피해자 행세를 하거나 되레 화를 내는 경우도 있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에서 쏟아지는 '막말'들은 그런 면에서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교양이 부족하고 품위가 없어 생기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폭언과 선동은 거짓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올바른 정치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양한 세력을 규합하고 의제를 파악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대중을 견인하는 등 여러 과정이 필요할 테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진실이다. 설령 그 진실이 아프고, '우리 편'에게 당장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거짓이 아닌 진실을 택해야 한다. 너무 뻔하고 식상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히틀러 최후의 14일>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다운폴>을 보았습니다

<히틀러 최후의 14일>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다운폴>을 보았습니다.

요아힘 페스트는 

  1. 나치가 완전 미친놈들인 건 맞지만 거기에 장단 맞춘 평범한 독일인들도 못지 않았다. 피해자인 척만 하지 마라 좀.
  2. 히틀러를 '인간도 아닌 악마!'로 말하면 1 같은 자기 변명을 되풀이하는 꼴이 된다. 히틀러도 인간이긴 했다. 인간이 그렇게까지 사악해질 수도 있다.
  3. 나치는 애초에 근본 사상이 썩어서 망한 거다. 전쟁하면서 계속 멸망과 죽음을 예찬하는 미친놈들이었다. 일말의 미련을 갖지 마라.

와 같은 입장에서 나치 및 히틀러 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한 독일의 언론인 출신 역사 저술가라고 하겠습니다.

영화는 그 책의 논지를 잘 따라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현'하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애도'가 되어버리는 예술의 내재적 한계 혹은 속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 히틀러'를 배우가 공들여 연기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추모 아니냐, 이런 비판이 가능하고 그런 방향에서 비판도 많이 받은 작품입니다.

아무튼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묵혀두고 있다가 봐서, 가볍게 기록을 남겨봅니다.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고, 회원가입하면 아마도 한달 무료일 겁니다.

다운폴(2004)

구글 블로거 블로그에 랜덤 게시물 위젯 만드는 방법

이 블로그의 오른쪽에 '랜덤 포스트'라는 위젯이 생겼습니다. 말 그대로, 이 블로그에 쌓인 포스트 중 다섯개를 임의로 불러내어 보여주는 위젯입니다.

저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서는 구글 블로거의 자바스크립트 위젯 추가 기능을 이용하여, 아래 내용을 붙여넣어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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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출처: Show Random Posts with Thumbnails in Blogger

 

단, 이 코드를 그대로 붙여넣으면 1) 썸네일 이미지가 강제 표현되고 2) 게시물의 날짜가 연/월/일 이 아닌 일/월/연 순으로 표시됩니다. 그 문제의 해결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document.write('<img alt="'+tow_posttitle+'" src="'+tow_thumb+'"/>'); 삭제.
  2.  tow_postdate.substring(8,10)+'/'+tow_postdate.substring(5,7)+'/'+tow_postdate.substring(0,4) 를 tow_postdate.substring(0,4)+'/'+tow_postdate.substring(5,7)+'/'+tow_postdate.substring(8,10) 으로 변경.

기록 차원에서, 그리고 배운 적 없는 프로그래밍을 아주 조금이나마 해냈다는 뿌듯함을 표출하기 위해, 적어둡니다.

2020-11-20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 일러두기: 이 글은 『무엇이 정의인가?: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마티, 2011)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아직 절판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마이클 샌델의 새 책이 나오는 시점이므로, 블로그에 공개해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외에 박홍규, 장정일, 이권우, 김도균, 이양수, 최원, 박원익, 이택광, 서동진, 이현우 등 훌륭한 필자분들이 참여한 책입니다. 다른 필자들의 논의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1.

학자나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상인들과 부인들이 동석해 있는 사교 모임들에서 대화가 진행되는 모습을 주의해 보면, 거기에는 이야기와 농담뿐만 아니라 또한 환담, 곧 수다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야기는 새로운 내용과 함께 흥미 있게 이끌어가려 하면 이내 소재가 고갈되고, 농담은 쉽게 김이 빠지기 때문이다. 모든 수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의 성격을 결정짓는 이런 저런 행위의 윤리적 가치 에 관한 수다보다도 더 그 밖의 머리 쓰는 일에서는 이내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발하고 모임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없다. —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O273/V153

임마누엘 칸트는 사교계의 총아였다. 그는 키도 작고 얼굴도 과히 잘생긴 편이 아니었지만, 특유의 영민함과 해박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밖으로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런던, 제노바, 베니스 등 세계의 주요 도시에 대한 '구라'를 풀어놓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많은 경우 그의 이야기는 실제로 해외를 다녀온 사람의 것보다 정확하고 세밀했다. 칸트는 당구를 매우 잘 쳤고, 학창시절에는 내기당구를 통해 학비를 벌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쾨니히스부르크 대학교의 교수가 된 이후로 사교계에서 발을 끊고 이른바 '비판철학'의 구상과 완성에 돌입한다. 그 작업을 끝냈을 때, 이전까지 사람들이 알던 사교적이고 유쾌한 칸트 씨는 사라지고, 대신 우리가 아는 철학자 칸트가 탄생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지난 시절을 잊지 않았고, 도덕철학을 다루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위 인용구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윤리적 가치에 대해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한다고. 저 말은 칸트 자신의 사교계 경험에서 우러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좋아한다. 누군가가 진정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를 반드시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만큼은 그 누구라도 즐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것은 근본적인 '인간적 현상'이며,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왜 『정의란 무엇인가』가 40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를 내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하버드 명강의'라는 단어가 수많은 이들을 솔깃하게 했고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이 탁월한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윤리적 딜레마'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섬세한 독해를 할 필요가 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이 보수주의적 입장, 즉 공동체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책의 도입부에서 던져놓는 딜레마 자체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가 책에서 설명하는 공동체주의의 근본적인 한계와 맞닿아있기도 하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설령 그 책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의 도입부에서 제시하는 딜레마가 무엇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열차가 있고, 브레이크는 고장났다. 당신은 그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인데 이 철로를 쭉 달리다보면 공사중인 인부 다섯 명이 치여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편 선로를 바꾼다면 한 사람의 인부만 치여 죽는 것으로 사고를 마무리지을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딜레마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첫 번째와 유사한 듯 하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역시 폭주하는 기관차를 타고 달리고 있고, 다섯 명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런데 철로 위의 어딘가에, 열차를 멈출 수 있을만큼 뚱뚱한 사람을 선로 위로 떨어뜨리면 그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 당신이라면 그 뚱뚱한 사람의 등을 밀어서 그를 철로 위로 떨어뜨릴 것인가?

샌델은 말한다. 공리주의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편을 택한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 사조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 특히 칸트적 자유주의자라면 선로를 바꾸거나 뚱뚱한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오직 목적으로 예우하라'는 정언명법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자는 그와 같은 추상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나'의 삶의 맥락과 공동체의 가치 기준 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샌델은 앞서 제시한 추상적인 비유를 현실 속으로 과감하게 옮겨놓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미군 척후병. 그들은 중간에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을 만났다. 미군들은 이 민간인들이 탈레반 협력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한다. 만약 그들이 협력자라면, 척후병 뿐 아니라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미군들의 위치가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들은 민간인들을 풀어주었고, 몇 시간 후 미군 전체가 탈레반에게 포위되었다. 세 사람의 목숨을 살린 댓가로 총 열아홉명의 미군이 죽어야 했다. 민간인들을 그냥 보내주겠다는 결정을 내린 미군은, 그 역시 전투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자신이 내린 판단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입부를 제시한 후 샌델은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개략적인 해설을 제시한다. 각각 3장씩, 그 내용들이 이 책의 나머지 9장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서평들을 살펴보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 듯 하다. 쉽고 재미있게 정의와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는 평가가 있고,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주의가 결국 보수주의적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나는 두 가지 견해 모두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샌델이 말하는 내용, 공동체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꺼내드는 사례가 이 책을 진정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철로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혹은 폭주하는 열차를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윤리적 토론을 위한 화두로 꺼내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판단이다. 칸트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

2.

사례들이 판단력을 예리하게 해준다는 것은 사례들이 가진 유일하고도 큰 효용이다. 지성의 통찰력의 정확성과 정밀성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사례들은 보통 그런 것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니 말이다. 왜냐하면 사례들이 규칙의 조건들을 (限界의 境遇로서) 충전하게 만족시키는 일은 매우 드물고, 게다가 규칙들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경험의 특수한 상황과는 독립적으로, 충분하게 통찰하려는 지성의 노력을 흔히 약화시키며, 그리하여 종국에는 규칙들을 원칙이라기보다는 공식처럼 사용하는 버릇이 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로서,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판단력 일반에 관하여'에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이며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칸트 자신을 포함하여 위대한 철학자들 역시 까다로운 도덕적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끝없이 가설적 사례를 만들고 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례들은, 칸트의 비판처럼 "규칙의 조건들을 충전하게 만족"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불필요하지만 유의미한 어떤 '맥락'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선 플라톤의 경우를 살펴보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체계적으로 대답을 시도한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위대한 작품은 플라톤의 『국가』일 것이다. 플라톤의 대변자로 등장한 소크라테스는 먼저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따르는 것',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과 같은, 당대에 통용되고 있던 규정들을 하나씩 논파한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찾아내기 위해 개인의 삶이 아닌 공동체의 구성과 그 속에서의 삶으로 논의의 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의 도입부와 그 나머지를 가르는 기준선이다.

바로 그 도입부에서, 등장인물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당대의 통념에 맞서 한 가지 딜레마를 제시한다. 당신에게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성정을 이기지 못해 난폭한 행위를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정신일 때 당신에게 자신의 무기를 맡겨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상태가 안 좋아진 그가 나타나 자신의 무기를 돌려라고 한다. 당신은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순간 그가 그것을 들고 가서 어딘가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올바름이란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개념에 따르자면 당신은 그 무기를 돌려줘야 한다. 무기의 주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 그게 바로 '올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러한 행동이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와 같은 딜레마를 몇 개 더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통념적인 정의관에 도전하고 자신의 새로운 입장을 펼쳐나갈 토대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플라톤이 만들어낸 사례의 맥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시민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민이라는 것은, 전쟁이 나면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들고 폴리스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맡겨놓은 무기'라는 말은 바로 그런 맥락을 전제로 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게는, 우발적인 경우 흉기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은 있을지언정, 본격적인 '무기' 따위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시민들이 곧 군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의 무장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내가 책 한 권을 친구에게 맡기는 것과 완전히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내가 이 도시국가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가 가진 창과 방패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의 무장을 맡아놓고 있다가 돌려주지 않는 행위가 지니는 맥락 역시 결코 간단한 게 아니다. 친구에게 빌린 청바지를 돌려주지 않는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플라톤이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모두가 시민이고 전우이기도 한 고대 그리스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서로가 서로를 시민으로서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혹은 어떤 경우에 우리는 누군가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을 것인가. 명시적으로 서술되고 있지는 않지만, 플라톤이 만들어낸 딜레마는 이와 같은 맥락을 추가적으로 머금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칸트 자신이 '사례'를 통한 접근을 '판단력의 부족을 매꾸기 위한 것'이라고 낮게 평가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상적인 사례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살인자에게 쫓기는 누군가를 집에 숨겨주고 있다. 그런데 그 살인자가 찾아와 당신에게 묻는다. '그 사람이 여기 있는가?' 칸트 자신이 말하는 정언명법에 따르면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므로 '그렇다'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저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딜레마가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맥락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샌델 본인이 곧장 그 예시를 현실 속의 것으로 치환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듯, 칸트가 말하는 저 '살인자'는 사실상 공권력에 해당하는 그 무언가에 가깝다. "우리는 나치 돌격대원에게 안네 프랑크의 가족이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말해줄 도덕적 의무는 분명 없다."(185쪽) 칸트가 말하는 '살인자'는 살인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저지르게 될 한 사람의 개인이라기보다는,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처형'하겠다고 나선 어떤 공권력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적어도 문맥상으로는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사례의 맥락은 독특한 뉘앙스를 지니게 된다. 칸트가 살던 시대에는 국가에 의한 출판물의 검열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유를 논하면서도 계몽군주의 자비와 관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칸트는 동료 지식인들에게 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혹은 네가 사상 검열을 당하고 국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 때, 네가 나를 감싸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일까?

즉 칸트가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국가 권력'을 상대로 하여 '시민'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윤리적일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플라톤의 경우와 달리 칸트는 국가 권력이 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 속에서 윤리적 행위의 문제를 검토하고자 했다. 반면 플라톤은 언제라도 다른 도시국가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분열된 정치 상황을 전제한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고 각자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철학자 모두 어디까지나 '시민'의 눈높이에서 딜레마를 고안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또 창과 방패를 들고 밀집대형을 만들어 적과 싸워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 혹은 왕의 검열을 피해 계몽주의를 설파하고 만들어나가야 할 18세기 프러시아의 시민. 이 딜레마를 만든 사람들과 그것을 듣고 고민한 사람들 모두, 시민의 눈높이에서 윤리를 고민했다.

샌델이 제시한 철도 기관사의 딜레마와 그것의 현실적 적용으로 돌아가보자. 이제 그것이 왜 문제적인지 그 이유가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쏘아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 샌델의 눈높이는 결코 시민들의 그것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군의 시각으로, 자신과 비교했을 때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민간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채 그들을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고민한다.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일지 아닐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3.

공법적 협약하에서의 비밀 조항은 객관적으로는—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는—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즉 비밀 조항을 명령하는 사람들의 인격의 자질에 따라 판단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확실히 비밀은 성립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비밀 조항의 초안자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인격적 존엄성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밀은 성립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조항은 오직 하나뿐이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명제에 포함되어 있다. 공적인 평화의 실현 가능한 조건에 대한 철학자들의 준칙을 전쟁을 위해 무장한 여러 국가들은 충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 임마누엘 칸트, 『영구 평화론』(서울: 서광사, 2008), 개정판, 58쪽.

시민의 딜레마와 점령군의 딜레마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시민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딜레마를 통해 윤리적 문제를 숙고하는 것과, 점령군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딜레마를 검토하는 것 역시 완전히 다른 차원을 형성한다. 전자를 고민할 때 우리는 도덕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동료 시민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진실을 말하는 누군가, 혹은 전쟁에서 동고동락한 전우의 명예를 훼손시키면서까지 그가 벌일 수 있는 위험한 사태를 막아내고자 하는 누군가가 된다. 반면 후자의 상황을 가정하며 토론할 때, 우리는 그저 '이 사람들이 탈레반 협력자일지도 모르니까 죽이자'라는 결론에 도달한 미군이 되어버릴 뿐이다. 전자에는 윤리와 가치가 이미 딜레마 속에 내재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선택이 더 '전략적'으로 타당한가 뿐이다. 윤리적 책임과 도의적 갈등은 그것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판단의 요인으로 전락한다.

샌델이 제시한 딜레마에서 행위의 주체는 곧 '초법적 주권자'이다. 재판 없이, 그 어떤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쥔 채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주체 말이다. 샌델은 독자로 하여금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그저 서류에 사인을 했을 뿐인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이 될 것을 권유한다. 구체적인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목숨을 직접 빼앗는 게 아니라 그냥 '결정'을 내릴 뿐인 상황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구경꾼인 당신은 옆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를 직접 밀지 않고도 철로 아래로 떨어지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맨홀처럼 아래로 통하고, 당신은 핸들을 돌려 뚜껑을 열 수 있다고"(39쪽)까지 상상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기계적인 살인을 상상하는 행위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사고실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순간, 우리는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열차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비곗덩어리'를 죄책감 없이 철로에 처박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 뿐이다.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그것을 어떤 더 큰 뜻, 대의에 따라 행사하는 초월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찾아 헤매이는 미군, 혹은 그 미국의 패권적 지배에 맞선다는 명분 하에 온 몸에 폭탄을 칭칭 감고 뛰어드는 자살 테러범. 양자의 논리는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당신이 이라크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라고 가정해보자. 나 한 사람의 목숨과 더불어 미국인 수십 명을 죽임으로써 '우리 편'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것일까? 샌델이 제시하는 논리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포함하여 몇 사람쯤 희생시키겠다는 자살테러범을 설득할 수가 없다. 미군들이 미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 있듯, 자살테러범은 이슬람 공동체를 위해 미국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살테러범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목숨을 바쳐 미국인들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할 수 없는 것도 물론이다. 하버드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지 토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반대편에서 같은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게 안 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죄책감을 덜어주는 복잡한 장치를 이용해 열차를 막기 위해 뚱뚱한 사람을 철로에 떨어뜨리는 사람과 자살테러범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일 뿐이다. 전자의 경우 무슨 요절복통 기계처럼 생긴 장치 덕분에 살인의 주체가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한다면, 후자는 아예 폭탄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날려버림으로써 도덕적 책임의 소재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각자의 정의(正義)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대체 그들은 어떤 원칙과 논리에 따라 서로를 설득하여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까?

각자의 이익과 도덕과 관습이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영원한 평화를 획득하기 위한 이성적인 방안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썼다. 그리고 그는 본문의 부록에 위 인용구와 같은 단서 조항을 덧붙여 놓았다. 국경과 문화를 넘어서 통용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인 철학자의 말에 정치가들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바로 그렇게, 초월적 관점을 통한 보편성에의 추구가 결여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한 한국인 독자가 대단히 자의적으로 '공정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놓고 보면 상황은 훨씬 비관적인 것 같다.

2020-11-14

[신동아] 느려터진 美대선 개표야말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느려터진 美대선 개표야말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14.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⑨] 실리콘밸리의 나라가 원시적으로 개표하는 까닭

●189년 전 미국 여행한 뒤 토크빌이 남긴 통찰
●‘미국 국민’에 앞서 ‘우리 타운’ 주민
●주 정부·연방 정부가 타운 권력 빌려 쓸 뿐
●인력 ‘갈아 넣어’ 개표하지 않는 이유, 주권자여서!
●며칠 걸리든 세계가 궁금해 하든 말든 신경 안 써
●개표 중 승복 선언해 지지자 달래는 전통, 트럼프가 깨
●신속·정확한 선거 사무, 한국적 능률이자 하향식 민주주의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미국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11월 3일(현지시간) 뉴햄프셔주 북부 딕스빌노치 마을에서 투표를 마친 뒤 개표가 이뤄지고 있다. 뉴햄프셔주 법률에 따라 100명 이하의 마을은 0시에 투표를 시작하고 그 결과를 투표 종료 직후 바로 공개할 수 있다. [딕스빌노치=AP뉴시스]
세상 어디가 안 그렇겠냐만 미국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나라다. 정보통신 기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실리콘밸리가 있는 나라인데, 대통령선거는 아주 원시적이고 답답한 방식으로 치른다. 선거인단과 승자독식제라는 특이한 제도는 그렇다 치자. 여론조사와 출구조사 등이 안 맞는 것도 땅이 넓고 인종 구성 등이 다양하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해보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체 무슨 선거 개표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단 말인가. 미국이 초강대국인 건 알겠는데, 민주주의 선진국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까닭은 민주주의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정치 체제다. 그러나 그 구현 방식은 국가별·지역별·문화별로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미국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흔히 미국을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짧은 역사를 지닌 국가'라고 하지만, 근대 이후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이기도 하니 말이다.

‘타운'에 감명 받은 189년 전의 토크빌

프랑스의 젊은 귀족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1831년 5월 미국 땅을 밟았다. 미국의 감옥 제도를 연구하라는 임무를 받고 프랑스 정부의 후원을 받아 견학 여행을 온 것이다. 9개월간 미국 전역을 두루 훑으며 관찰하고 기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고국에 돌아가 형벌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것도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더 큰 호응을 얻은 저술은 미국의 정치 전반을 고찰한 불후의 명저, '미국의 민주주의'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분명한 주제를 명료한 문체로 다룬 저작이다. 정치학 및 행정학 분야에서 중요한 고전이다. 그 내용을 모두 전할 수는 없고 논의에 필요한 부분만 중점적으로 다뤄보자. 

오늘날 메인,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로 나누어진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토크빌은 특히 큰 감명을 받았다. 연방 정부도 주 정부도 아닌, 그보다 작은 단위인 '타운'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지방자치가 그의 이목을 끌었다. 영어 단어 타운은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토크빌이 보아온 프랑스나 다른 유럽 국가의 마을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뉴잉글랜드의 타운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하는 독립적 정치 단위였다. 

"뉴잉글랜드의 정치생활은 타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타운 하나하나는 본래 독립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뒷날 영국 왕들이 지배권을 주장했을 때도 그들은 국가의 중앙권력을 떠맡는 데 만족했다. 그들은 타운들을 있던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현재 타운들은 뉴잉글랜드주에 종속돼 있으나 처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며 그렇다 해도 약간에 그쳤다. 타운들은 그 권력을 중앙권위(the central authority)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네들의 자주성의 일부를 주에게 양보했다." 

토크빌이 묘사하는 뉴잉글랜드의 타운 중심 정치는 우리가 아는 '지방자치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가나 주 같은 상위 정부에서 주민들에게 '자치'를 '허락'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의 타운들은 수천만 명이 아닌 수천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친하거나 가깝지는 않더라도, 한 두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일 수밖에 없는 규모의 공동체가 정치의 기본 단위로 작동했다. 

주민들은 신대륙으로 건너오면서 신분과 계급 등 구시대적 유산을 버렸다. 모두가 평등한 상태로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다. 생활 곳곳을 지배하는 권리가 스스로의 손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토크빌이 방문했을 당시는 주 정부와 연방 정부가 모두 성립해 있던 19세기 초였다. 하지만 신대륙 아메리카의 주민들은 '미국 국민'이기에 앞서 '우리 타운'의 주민이었다. 

앞서 인용한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음미해보자. 타운의 권력은 중앙의 높은 권위에서 내려온 게 아니다. 주 정부와 연방 정부가 필요에 따라 타운으로부터 잠시 권력을 빌려 쓰는 셈이다. 프랑스의 경우 절대왕정 시기가 대혁명으로 귀결됐으나 나폴레옹이라는 황제가 집권하고 7월 혁명 이후 다시 왕정으로 돌아갔다. 프랑스 출신 토크빌이 보기에 뉴잉글랜드의 타운 중심 민주주의는 이질적 차원을 넘어 외계의 관습처럼 보였을 테다. 토크빌은 거의 감탄하듯이 말한다. 

"프랑스에서는 국가징세관이 지방조세를 거둔다. 아메리카에서는 타운징세관이 주의 세금을 거둔다. 따라서 프랑스 정부는 정부관리들을 지방에 파견하는 것이지만 아메리카에서는 타운이 그 관리들을 정부에 빌려주는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두 나라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정반대의 길로 간 미국과 프랑스

미국 대선이 치러진 11월 3일(현지시간)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한 개표소에서 담당 인력들이 투표함에 담긴 우편투표 용지를 책상 위로 들이붓고 있다. 오리건주는 1998년 11월부터 모든 공직자 선거를 100% 우편투표로만 진행하고 있다. [포틀랜드=AP뉴시스]
미국의 민주주의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민주주의다. 이는 건국 이후 연방을 수립한 시점부터 분명한 사실로 미국 민주주의의 DNA에 새겨져 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권력은 처음부터 국민, 아니 인민에게 있다. 인민의 주권이 모여 타운이 되고 타운에서 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주 단위로 올라가며, 주가 모여 연방 국가를 이룬다. 국민이라는 단위는 그때서야 생긴다.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주를 형성한 후 국가가 만들어지는 세계관이다. 

프랑스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절대왕정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파리에 모인 지식인과 야심가들이 내세운 계몽 프로젝트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내는 하향식 혁명이었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은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선언문을 인쇄해 '계몽되지 않은' 이들에게 가르쳤다. 

민주주의의 두 원형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이 글을 시작할 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보자. 미국 대통령선거 개표는 왜 이런 식일까. 왜 이렇게 답답하고, 느려 터졌을까. 온 미국인, 심지어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데 개표하다 멈추고 다음날 아침 개표를 다시 시작하는 곳도 있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 

이제 독자 여러분도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말이 된다.' 왜냐하면 대선이란 기층 단위, 더 나아가 개인이 갖고 있는 주권을 연방 정부와 대통령에게 '빌려주는' 절차를 규정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마다 우편투표 규정도 다르다. 언제까지 들어온 표를 어떻게 처리할지 각자의 기준이 있다. 가령 이번 대선의 최대 접전지 중 하나였던 펜실베이니아는 대선 당일까지 우편투표를 개봉하지 않는다. 사전투표를 미리 집계해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22개 주는 심지어 선거 당일 소인이 찍힌 우편투표도 유효표로 인정한다. 이번 선거처럼 우편투표가 쏟아진 경우 개표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더 중요한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미국 대선은 한국처럼 인력을 '갈아 넣어서' 개표하지 않는다. 그 지역 사람으로 이루어진 개표원들이야말로 진정한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중요한 공직이긴 하나, 공복(public servant)을 뽑기 위해 주권자가 혹사당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선거란 지역 주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다. 며칠이 걸리든 말든, 보는 사람들이 답답해하든 말든, 미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주권자인 지역 주민들이 그걸 왜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상향식 민주주의'라는 키워드 하나로 이번 대선 개표 지연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일단 우편투표가 너무 많이 쏟아져 들어왔고, 일부 지역에서는 수도관에 물이 새서 개표 작업이 지연되는 등의 악재가 겹쳤다. 하지만 왜 한국처럼 서두르지 않느냐는 '우문'에는, 주민들의 상황, 역량과 자체 규정에 따라 개표를 진행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현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세계에 건네는 피로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월 8일(현지시간) 자신이 소유한 버지니아주 스털링의 ‘트럼프내셔널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긴 후 떠나면서 차량 밖 지지자를 향해 양손 엄지를 치켜들었다. [스털링=AP 뉴시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의 대선 투표 개표 속도가 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면 대체 왜 지난 대선은 결과가 그토록 빨리 나왔나. 소송전으로 이어진 2000년 대선은 논외로 하자. 이번 대선은 무엇이 달랐던 걸까. 

지금까지 미국 대선은 전체 판세가 결정되면 패자가 승자에게 전화를 걸어 패배를 인정하고 향후 국정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중요한 건 그 시점이 언제냐다. 미국의 대선 투표 개표가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는 언제나 며칠이 걸렸다. 2016년에도, 2012년에도,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패배자들은 마지막 한 장까지 세도록 기다리지 않고, 뒤집을 수 없겠다 싶으면 패배를 시인하는 연설을 해 지지자를 달래는 한편 승자에게 격려의 말을 건넸다. 그것이 미국 대통령 선거의 오랜 전통이다. 

2020년 대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도널드 트럼프가 출마했고, 선거에서 졌다는 점이다. 그는 소송전을 불사해가며 버티겠다는 뜻을 밝힌 상태다. 오직 플로리다 주의 개표 결과만으로 전체 대선이 뒤집힐 수 있었던 2000년과 달리, 지금은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트럼프는 그냥 버티고 있다. 관례대로라면 거의 모든 주의 개표 결과가 확인된 지난 주말쯤 했어야 할 낙선 인사를 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미국의 민주주의는 또 한 차례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각 지역 주민의 의사에 따라 상향식으로 운영되는 민주주의 국가다. 한국이나 프랑스처럼 치밀한 계획을 세워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내는 식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가 상대적으로 완벽해 보이지 않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결여를 보충해주는 사회적 신뢰가 있어야 원활하게 작동하는 체제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 재임한 4년의 마지막을 선거 제도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중이다. 미국 대선이 완료되고 정권 인수가 진행되기를 바라는 전 세계인에게 큰 피로감을 안겨주고 있다. 이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하고 상향식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인 스스로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바이든 정권의 첫 번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상향식과는 거리 먼 소용돌이 한국정치

상향식 민주주의가 반드시 선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론장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의 이상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완전하게 실현된 적이 없다.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매끄럽게 국왕의 권력을 줄이고 의회정치로 나아갈 수 있었다. 토크빌이 연거푸 강조하듯 미국은 천혜의 지정학적 조건 덕에 외적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고 특유의 느긋한 지역 공동체 기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두 나라에서조차 상향식 민주주의의 이상은 꾸준히 도전받고 있다. 

오랜 세월 전제군주의 압제에 시달린 프랑스에서는 민주적 이념의 확산이 다소 비민주적 방식, 즉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시대와 군사독재를 겪은 우리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하향식 민주주의의 경우 수많은 이론적 고민과 제도적 모색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빠르고 정확하게 선거 관련 사무를 처리해내는 한국적 능률은 국가 중심 하향식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민주주의라는 정치 형태의 이상은 어디까지나 상향식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자치, 공동체와 함께하는 민주주의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민주주의에 대한 찬사는 상향식 민주주의를 이데아로 삼고 있다. 현실은 상향식 민주주의에 대한 공허한 말잔치만 가득할 뿐, 실제로는 하향식 민주주의가 더욱 강화되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지역 주민들이 타운에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 혹은 서울시처럼 돈과 힘을 가진 큰 지자체가 '마을 만들기' 예산 따위를 책정해 나눠주는 나라다. 각 지역 국회의원과 지자체장은 정부 예산을 끌어다 지역에 얼마나 뿌릴 수 있느냐로 정치적 승부를 겨룬다.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정치담당 자문을 맡았던 그레고리 헨더슨의 말처럼 중앙을 향한 '소용돌이'가 늘 몰아치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미국의 대선 제도를 비난하거나 폄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정치 풍토와 문화 역시 매도하거나 비하할 수는 없다. 중앙을 향한 소용돌이의 열기 덕분에 우리는 군사독재를 이겨냈고 민주화 이후 여러 차례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다만 가끔은 우리의 정치 풍토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고민을 해볼 필요도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건투를 빌며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14. 03:04 수정 2020.11.14. 19:17
[아무튼, 주말] 영화 '그랜 토리노'와 보수주의
일러스트= 안병현

월트 코왈스키는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쇠락한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 디트로이트에 사는 성격 나쁜 독거노인이다. 입만 열면 인종차별적인 말과 함께 침을 뱉어댄다.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었지만 아내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성격은 더욱 삐뚤어졌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죽거나 이사를 갔고, 이제 그의 이웃에는 베트남 근처 어딘가에서 왔다는 몽족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이웃집에는 타오라는 이름의 소년이 살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기 센 누나와 엄마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순한 녀석이다. 문제는 몽족 이민자들이 갱단을 만들어 타오를 끌어들이려 들고 말을 듣지 않자 괴롭힌다는 것이다. 몽족 갱단은 월트가 아끼는 1972년산 명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라고 타오에게 강요하다가 월트에게 걸려 혼쭐이 났다. 타오의 엄마와 누나는 사죄의 뜻으로 타오를 일꾼으로 부려먹어 달라고 부탁한다. 월트는 내키지 않지만 타오에게 일을 가르치면서 남자로서 역할 모델을 제공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배우로서 출연한 마지막 영화 ‘그랜 토리노’의 줄거리이다. 민주당 지지자 일색인 미국 영화계에서 드물게도 공화당 지지자인 그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성찰을 잔잔한 이야기에 담아낸 이 작품을 끝으로 배우 경력을 정리해 나갔다. 10년도 더 된 작품이지만 다시 봐도 진한 감동을 준다. 특히 2020년 대선이 끝난 지금, 대를 이어 전승되는 가치와 보수주의에 대해 곱씹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프랑스 혁명이 갓 벌어지던 무렵,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성의 빛으로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한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차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을 거두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영국 하원 의원 에드먼드 버크였다.

아직 자코뱅 일당이 혁명의 이름으로 피의 숙청극을 벌이기도 전이었지만 그는 프랑스 혁명이 혼돈과 비극으로 빠져들 것임을 단박에 예견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의 내용대로 사태가 흘러가면서 그는 일약 지성계의 스타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보수주의의 비조(鼻祖)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주체들은 오랜 세월을 버텨온 제도와 관습 등을 단번에 갈아엎으려 들었다. 하지만 권력이 있다 해서 추상적 이론만으로 사회를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물려받은 삶의 방식을 신뢰하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삶의 방식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 관습, 도덕, 적절한 물질적 풍요 등이 그런 요소에 해당한다. 홉스, 로크, 루소 같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회계약’은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을 읽어보자.

‘사회는 실로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계약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죽은 자, 그리고 태어날 자와도 맺는 것이다. 국가를 하루아침에 들어엎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세대를 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이 여름날의 하루살이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보수주의의 정수가 바로 여기 담겨 있다. 우리는 과거에서 물려받은 유산 위에 살아가며 그것을 후대에 넘겨줄 의무를 지닌다. 따라서 추상적 이념을 들이밀며 세상을 단번에 통째로 들어엎을 권리가 없다. 지금보다 한 발 나아진 세상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다.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과거를 받아들이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도모하는 것. 고인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보수주의다.

바이든이 이기고 트럼프가 진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트럼프가 보수주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우롱하고 능멸하는 모습에 ‘스윙 스테이트’의 부동층이 등을 돌린 것이다.

미국은 군대가 문민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대신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다. 존 매케인 같은 월남전 참전 용사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파병 군인들을 ‘패배자’ ‘호구’라고 부르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다 목숨을 잃은 자들을 우롱하기까지 했다. 매케인의 선거구인 애리조나주가 ‘레드’에서 ‘블루’로 바뀐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언어, 관습, 도덕 같은 무형의 자산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트럼프는 더더욱 보수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미국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도 트럼프처럼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 이는 없었으니 말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기후변화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각계각층의 요구마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트럼프의 머릿속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었다. 그저 오늘 벌어질 정치 이벤트와 쇼만 가득했다. 한번은 재미로 봐줄 수도 있겠지만 그걸 4년 더 볼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부동층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의 낙선은 진보의 승리라기보다 보수의 패배에 더욱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랜 토리노’로 돌아가보자. 월트는 자신이 낳고 기른 자식이 아닌, 머나먼 이국에서 온 아시아계 이민자 소년에게 부정(父情)을 느낀다. 보수적인 사람으로서 평생 지켜온 남자의 길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이대로 몽족 갱단의 괴롭힘을 당하고 사는 한 이 소년의 앞날은 어둡다. 갱단에 휩쓸리거나 희생당한다면 그가 가르친 올바른 가치는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폐암이 번진 늙은 몸을 이끌고 월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러 간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다. 앞으로도 이민자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미국적 가치를 보수적으로 지키면서 미래를 향해 진보적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그랜 토리노’에 남긴 채 할리우드에서 존경받는 유일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 경력을 마무리지었다. 2009년 초 국내 개봉한 작품이지만 지금도 큰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물려받았는가? 어떤 문화와 관습이 우리를 지탱해주는가?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보수도 성찰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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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습니다] 14일 자 B5면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에서

입력 2020.11.18. 03:04

14일 자 B5면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작 출연 영화를 ‘그랜 토리노’(2008)에서 ‘라스트 미션’(2018)으로 바로잡습니다. 또 같은 기사에서 고(故) 매케인 의원의 선거구를 인디애나주에서 애리조나주로 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