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4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14. 03:04 수정 2020.11.14. 19:17
[아무튼, 주말] 영화 '그랜 토리노'와 보수주의
일러스트= 안병현

월트 코왈스키는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쇠락한 자동차 공업의 중심지 디트로이트에 사는 성격 나쁜 독거노인이다. 입만 열면 인종차별적인 말과 함께 침을 뱉어댄다.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었지만 아내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성격은 더욱 삐뚤어졌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죽거나 이사를 갔고, 이제 그의 이웃에는 베트남 근처 어딘가에서 왔다는 몽족 이민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이웃집에는 타오라는 이름의 소년이 살고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기 센 누나와 엄마에게 찍소리도 못하는 순한 녀석이다. 문제는 몽족 이민자들이 갱단을 만들어 타오를 끌어들이려 들고 말을 듣지 않자 괴롭힌다는 것이다. 몽족 갱단은 월트가 아끼는 1972년산 명차 ‘그랜 토리노’를 훔치라고 타오에게 강요하다가 월트에게 걸려 혼쭐이 났다. 타오의 엄마와 누나는 사죄의 뜻으로 타오를 일꾼으로 부려먹어 달라고 부탁한다. 월트는 내키지 않지만 타오에게 일을 가르치면서 남자로서 역할 모델을 제공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배우로서 출연한 마지막 영화 ‘그랜 토리노’의 줄거리이다. 민주당 지지자 일색인 미국 영화계에서 드물게도 공화당 지지자인 그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성찰을 잔잔한 이야기에 담아낸 이 작품을 끝으로 배우 경력을 정리해 나갔다. 10년도 더 된 작품이지만 다시 봐도 진한 감동을 준다. 특히 2020년 대선이 끝난 지금, 대를 이어 전승되는 가치와 보수주의에 대해 곱씹게 되는 것이다.

역사의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프랑스 혁명이 갓 벌어지던 무렵,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이성의 빛으로 세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한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차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을 거두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영국 하원 의원 에드먼드 버크였다.

아직 자코뱅 일당이 혁명의 이름으로 피의 숙청극을 벌이기도 전이었지만 그는 프랑스 혁명이 혼돈과 비극으로 빠져들 것임을 단박에 예견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의 내용대로 사태가 흘러가면서 그는 일약 지성계의 스타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보수주의의 비조(鼻祖)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 주체들은 오랜 세월을 버텨온 제도와 관습 등을 단번에 갈아엎으려 들었다. 하지만 권력이 있다 해서 추상적 이론만으로 사회를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물려받은 삶의 방식을 신뢰하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삶의 방식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 관습, 도덕, 적절한 물질적 풍요 등이 그런 요소에 해당한다. 홉스, 로크, 루소 같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사회계약’은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을 읽어보자.

‘사회는 실로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 계약은 살아있는 사람뿐 아니라 죽은 자, 그리고 태어날 자와도 맺는 것이다. 국가를 하루아침에 들어엎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세대를 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이 여름날의 하루살이와 다를 게 무엇이겠는가.’

보수주의의 정수가 바로 여기 담겨 있다. 우리는 과거에서 물려받은 유산 위에 살아가며 그것을 후대에 넘겨줄 의무를 지닌다. 따라서 추상적 이념을 들이밀며 세상을 단번에 통째로 들어엎을 권리가 없다. 지금보다 한 발 나아진 세상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렵다.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과거를 받아들이고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도모하는 것. 고인을 존중하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보수주의다.

바이든이 이기고 트럼프가 진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근본에는 트럼프가 보수주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우롱하고 능멸하는 모습에 ‘스윙 스테이트’의 부동층이 등을 돌린 것이다.

미국은 군대가 문민정부의 완전한 통제를 받는 대신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다. 존 매케인 같은 월남전 참전 용사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파병 군인들을 ‘패배자’ ‘호구’라고 부르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다 목숨을 잃은 자들을 우롱하기까지 했다. 매케인의 선거구인 애리조나주가 ‘레드’에서 ‘블루’로 바뀐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언어, 관습, 도덕 같은 무형의 자산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트럼프는 더더욱 보수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미국 역사상 그 어떤 대통령도 트럼프처럼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발언과 행동을 일삼는 이는 없었으니 말이다. 미래 세대를 위해 기후변화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각계각층의 요구마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트럼프의 머릿속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었다. 그저 오늘 벌어질 정치 이벤트와 쇼만 가득했다. 한번은 재미로 봐줄 수도 있겠지만 그걸 4년 더 볼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부동층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의 낙선은 진보의 승리라기보다 보수의 패배에 더욱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랜 토리노’로 돌아가보자. 월트는 자신이 낳고 기른 자식이 아닌, 머나먼 이국에서 온 아시아계 이민자 소년에게 부정(父情)을 느낀다. 보수적인 사람으로서 평생 지켜온 남자의 길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이대로 몽족 갱단의 괴롭힘을 당하고 사는 한 이 소년의 앞날은 어둡다. 갱단에 휩쓸리거나 희생당한다면 그가 가르친 올바른 가치는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폐암이 번진 늙은 몸을 이끌고 월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하러 간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다. 앞으로도 이민자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 미국적 가치를 보수적으로 지키면서 미래를 향해 진보적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그랜 토리노’에 남긴 채 할리우드에서 존경받는 유일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 경력을 마무리지었다. 2009년 초 국내 개봉한 작품이지만 지금도 큰 감동을 안겨준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물려받았는가? 어떤 문화와 관습이 우리를 지탱해주는가?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보수도 성찰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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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습니다] 14일 자 B5면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에서

입력 2020.11.18. 03:04

14일 자 B5면 ‘노정태의 시사哲: 트럼프 낙선을 보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다’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작 출연 영화를 ‘그랜 토리노’(2008)에서 ‘라스트 미션’(2018)으로 바로잡습니다. 또 같은 기사에서 고(故) 매케인 의원의 선거구를 인디애나주에서 애리조나주로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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