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성공하지 못한 라캉 토벌 작전"에 등장하는 한윤형의 주장 중 유난히 도드라지는 부분들만 일단 추려내어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1. 한윤형은 근대 학문의 규칙을 모른다.
"이 경우에도 그의 논변은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실증주의자인 그는 오직 임상효과에 의해서만 이론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심리학에서 듣보잡 취급해서 다루지도 않는 라캉에 대한 임상자료는 ‘제한적’이라는 기타 정신분석학의 임상자료보다도 미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듣보잡이니까 문제가 끝났다고 말한다면 다시 논점은 1로 워프를 하고 그의 대담한 주장은 시궁창에 빠진다. 순수하게 실증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때에 그의 라캉 비판은 제대로 자료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성급한 판단에 불과하다."
-> 저널을 뒤져봐도 라캉의 임상에 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학문의 세계는 자신들의 연구 업적을 철저하게 공개함으로써 성립한다는 점을 한윤형은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임상'에 대한 자료를 철저하게 수집하고 공개해야 할 임무는 실증주의자인 아이추판다님이 아니라 정신분석을 과학이라고, 과학까지는 아니어도 현대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라캉주의자들에게 있다. 하지만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한국에서 라캉주의 정신분석을 개진하는 이들의 저널에는 임상 사례가 딱 하나 올라와 있다. 한윤형의 말대로라면, '실증주의'를 견지하기 위해 아이추판다님이 그 학회에 소속된 분들을 가정방문이라도 해서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임상 자료를 제발 저에게 내어주십시오'라고 굽신굽신 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건 철학과 과학을 논하기 이전에 근대적인 학문 체계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에서 비롯하는 발언일 뿐이다.
"노정태 님이 했던 것처럼 왜 자료를 남기지 않는가, 라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지만, 이 비판은 엄밀히 말하면 실증주의를 넘어서 있다. 실증적 자료를 도출하는 틀 안에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이론적 기준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정태 님의 기준은 스스로 말했다시피 일종의 '태도'의 문제에 기대고 있어서, 과학철학인지 지식인의 윤리의식에 대한 규정인지 분간이 안 간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종교적인 폐쇄성은 그들 수리철학의 철학적 타당성과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 라캉주의자 정신분석자들도 자신들의 저널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으니, '실증주의'에 대한 요구는 과학적인 탐구를 진행하고 있는 그들에게 우선 돌아가야 한다. 내가 말한 라캉주의의 폐쇄성은 실증주의니 뭐니를 논하기 이전 단계에 속하는 일이다. 한편 "실증적 자료를 도출하는 틀 안에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이론적 기준을 세우는 일"이라는 말을 보면, 결국 한윤형이 설명하는 라캉주의 정신분석은 실증적인 자료를 내놓을 수 없는 분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이추판다님에게 '라캉주의 정신분석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당신이 찾아서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 집 장농에 감춰져 있는 금송아지를 내게 보여주되, 우리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소리이다.
게다가 그는 내가 말하는 '태도'의 문제를 대단히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 나는 단지 착하게 연구하자는 뜻에서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쓴 게 아니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검증 가능하도록 연구된 결과들은, 심리학자들의 저널에서 공유되고 또 철저하게 비판받는다. 과학을 과학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검증과 비판의 기제이다. 과학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과 과학적이지 않은 지식을 구분하는 그러한 기능이야말로 과학을 과학으로 성립하게 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다."라는 말이 이미 본문에 있다. 한윤형이 이해하는 나의 과학관은 대체로 리플에 달린 내용을 대단히 단순하게 축약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논지를 이해하고 싶을 때에는 우선 그 상대방이 쓴 본문부터 꼼꼼하게 읽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근대 이후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피타고라스 학파 이야기를 꺼내면서 물타기를 시도한다. 예측 가능한 답변이었다.
"토벌대원들조차도 오직 임상에 의해서만 얘기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웰던지기 님의 글을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할 것이다.)"
-> 임상의 결과가 있다면, 근대적인 학문일 경우 그것은 저널을 통해 공개된다. 그 저널에 나와있는 '임상'에 대해서는 이미 새로운세상님이 정리해서 올려주신 포스트가 있으니 그걸로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아이추판다님도 검색 가능한 모든 저널을 뒤져봤지만 라캉의 임상에 대한 논문은 없다고 한다. 그럼 된 거지 뭘 더 바라나? 이건 약간 개인적인 맥락인데, 한윤형은 평소에 '그것은 지적으로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학계에 의해 검증되었는데, 아직까지 외계에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니까'라는 진보누리 철공사의 말을 대단히 좋아하던 그 자 아닌가? 지금 지구의 학계에서는 라캉이 임상적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다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데, 왜 이해를 못하는지 내가 다 답답하다.
저널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단편적으로 하기에 앞서서, 자신이 말하는 저널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우선 갖도록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 논쟁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한윤형은 근대적인 학문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규칙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다.
자신이 인용을 잘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놀라지 않는 모습도 그렇다. 이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립구도로도 설명되지 않는 일이다. 구술문화의 전통 속에서 남의 말을 엉뚱하게 전달하는 것은 상당히 터부시되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구절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는 되는대로 철학자들의 이름을 주워섬긴 후, 아니다 싶으면 '그가 말하는 심리학은 이게 아니고요'를 반복한다. 이건 그냥 논쟁에 임하는 '불성실한 태도'라고 봐야한다. 근대적인 학문 속에서도 잘못된 인용은 당연히 터부시되는데, 왜냐하면 정확한 인용 규칙이 지켜질 때에만 표절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런 식이어서, '당신들은 실증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론적인 관점은 뭐가 있지?'라는 한윤형의 '논지'는 애초에 존중받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최신 포스트 "성공하지 못한 라캉 토벌 작전"의 3번 부분에 해당하는 논증이 결여되어 있음을 깨닫고 한윤형은 깜짝 놀랐다는데,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윤형을 제외한 그 누구도(아참, 이상한 모자도 껴서) 그게 논점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 '심리학'과의 일전을 벌이고 있다. 지금 다른 이들은 모두 근대적인 학문을 논하고 있는데, 혼자만 중세에서 살고 있나보다. 토미스트에게 철학을 배웠건 말건 우리는 지금 현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건 아나? 지금 우리가 쓰는 인용 규칙 등은 대부분 중세 대학에서 발생했다는 거.
2. 그렇다면 한윤형은 철학을 아는가
내가 진짜 충격을 받고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철학적인 논의에 대해 대충 감은 잡고 있는 것 같은데, 근대 주체철학이 심리학적인 관점에 의해 대거 소거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가 현대 철학의 전개 과정에 완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권위주의를 토대로 그들이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으니 정말로 우스운 일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전통철학을 다 도려내야 하는데?”라고 반응한 것은 정말로 전통철학이 다 잘려 나갈까봐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논변대로 하면 사태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 사태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이걸, 현대철학의 원류 중 한 사람인 후설을 통해 설명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노정태 님은 혼자서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더니 이제는 그 걱정에 대한 정답을 찾았다고 희희낙락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당신은 왜 그렇게 비열하게 최장집을 털었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어디 1950년대에 이승만 노선이 옳았는지 김구 노선이 옳았는지 토론해 봅시다.”라고 반응한 왕년의 이한우를 연상시킨다."
-> 사태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 철학의 미래를 걱정"했고, 칸트와 후설을 다시 읽으며 "그 걱정에 대한 정답을 찾았다고 희희낙락"했는데, "솔직히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야말로 철학 공부를 하는 것이다. 최장집 사건에 대한 비유는 대체 어떤 맥락으로 연결짓고 있는건지 알 길이 없다. 지금 설마 라캉을 '사상 검증' 당하는 최장집에 비유하고 있는 건가? 에이 설마.
"나는 노정태 님이 그 진지한 철학적 열정을 지도교수와의 토론을 통해 해소했으면 한다. 그건 나같은 일개 학부생과 해야할 논쟁도 아니고, 이 논쟁은 철학에 대한 그의 관점과 별 상관도 없다."
-> 물론 그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 논쟁은 철학에 대한 나의 관점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철학을 배웠노라고 말하는 이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데카르트적 성찰'을 새삼 하게 된다.
"느닷없이 철학적 문제를 한정지어보자고 타협안을 제시(?)하신 토벌대장 님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그가 하는 말은 미국 심리철학에서 사용하는 구별법인데, 문제는 그게 대륙철학에 적용할 수 없는 기준이라는 데에 있다. 러프하게 말하면 통약불가능한 것이다. 대륙철학의 이론적 체계 중에서 현대의 심리학 데이터를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이고 데이터와 상관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난해한 철학적 문제일 것 같다. 아마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가 시작된다 해도 철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거기에 동의해야 하는데? 거듭해서 내가 지적하는 것은, 철학자들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는 어려운 문제를 그들이 판정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그 지독한 오만이다."
-> 그 자체로 난해한 철학적 문제에 대한 토론에서, 적어도 고전적인 대가 중 누군가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논쟁이 가능하지 않나? "내가 왜 동의해야 하는데?"라면서 뻣대고 있는 것은 철학과 과학의 싸움 이전에 그냥 학생의 자세도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과학은 철학자들이 잘 모르는 문제를 판정해주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에 대한 좀 더 정돈된 연구 결과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대륙철학의 이론적 체계 중에서 현대의 심리학 데이터를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이고 데이터와 상관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대강은 파악하고 있어야 논의가 가능하지 않나? 모르면 알아보려고 시도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한윤형은 철학도 맞나?
"위에서 점검한 바와 같이, 끊임없이 과학이라는 주문을 되뇌이는 토벌대의 논증 방식은 과학이고 나발이고 간에 일단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들의 논변 수준을 고려해 보건대 설령 쓸만한 데이터를 손에 쥐고 있다 한들 그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
-> 아니, 논리적이다. 한윤형이 그 논리의 대전제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 지금의 문제일 뿐이다. 까먹었을까봐 다시 이야기해주는데, 라캉을 연구하는 학회가 공개하는 저널에 임상에 대한 연구 결과를 요만큼, 그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만 싣고 있다면, 실증주의고 뭐고 논할 것도 없이 그 학문의 '과학'으로서의 위상도 딱 거기까지다. 뭐, 저널을 통한 학문의 연구 방식 자체가 '남성주의적'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리가레이의 입장을 수용할 거면 그러던지.
3. 설마 그래도 수사학은 알겠지?
"지금도 GT 님의 발언을 털어버리는 걸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벌쳐로 프루브 잡는 컨트롤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셈인데, 그러다가 본진에 캐리어 한 부대 뜨면 어쩌시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머리는 지었나? 골리앗 사업은 했나? 근데 내가 왜 이런 걸 걱정해 줘야 하는 거지? 아, 클로킹 레이스가 준비되어 있다고? 라캉 이론에 대한 과학적 반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그의 서술을 기대한다. 적어도 그쯤은 되어야 3의 관점에서 그들 토벌대의 입장을 정리하는 일이 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 한마디로, 빈곤한 비유. "뭐?" 시리즈에서 봤던 그것을 연상시킨다.
4. 결론: 자신을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 가정하지 말라
한 번 배우니까 계속 써먹게 되는데, '안다고 가정된 주체'는 라캉 정신분석이론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정신분석가는 환자를 대함에 있어서 상대방이 자신을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 대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논쟁에 임하는 한윤형의 자세가 바로 이런 식이다. 정작 '과학주의자'들은 과학과 철학의 세부적인 내용들을 뒤적이고 있는데, 오직 한윤형만 배를 긁으면서 '내게 정돈된 지식을 제시하라, 그러면 답변하리라'고 버티고 있다. 이건 소통을 위한 자세가 아니다. 기본적인 개념에서 합의된 의사소통의 전제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공부하지는 않을 망정, '나를 설득시켜봐'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마치 김대중더러 '나를 설득해봐, 그럼 국민이 다 설득되는 거야'라고 뺀들거리던 한국논단의 그 어떤 분을 연상시킨다.
아무도 한윤형에게 분석가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스스로를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 여기는 한윤형의 상징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논쟁을 할 거면 최소한의 규칙과 통일된 용어 사용 등을 갖춰야 한다. 내가 요구하는 건 딱 그만큼의 상식과 성실함이다.
2008-03-25
시험용 각성제
베커-포스너 블로그의 게시물을 보다가 발견한 내용이다. 게리 베커는 정부가 학생들이 지적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것을 금지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포스너 판사는 일단 그 논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을 요약하면서, 이것이 미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약물 파동에 대한 코멘트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적시한다. '순수한 인간 승리'를 맛보고 싶어하는 스포츠 팬들은 주최측에 약물 검사를 요구하게 마련이며, 그것을 적발하고 말고는 주최측의 결정에 달린 문제이지만, 굳이 법적으로 처벌하게 되면 걸린 사람만 큰 손해를 볼 뿐 그에 합당한 공익이 달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약물 복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약에 취한 사람이 주변에 끼칠 해악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그는 결국 '학생이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는 약을 먹는 것을 국가가 금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경쟁이 과열로 치달을 경우, 결국 모든 학생들이 약을 먹고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인데, 베커와 포스너는 둘 다 그런 종류의 외부효과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를 하고 있지 않다. "South Korea and other countries have tried to use laws to cut down on private tutoring and other investments that increase the likelihood that a student may succeed in gaining entrance to top universities, where the number of acceptances remains constant. Presumably, these countries would want to ban students from taking various stimulants that improve their performance, perhaps at a risk to their health, but such bans are difficult to enforce."라고 하는 걸로 봐서 베커 또한 한국의 입시 경쟁에 대해 어느정도 들은 바는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낳는 극단적인 외부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짐작을 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학생들이 각성제 대신 한약을 먹으며 공부하는 것은,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약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어쩌면 강남에서는 벌써부터 이 두 편의 글에서 언급되는 약물을 학생들에게 공급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인할 길이 없으니 논외로 하자). 하지만 이와 관련된 사회적 현상들을 통해, 또한 이론적 개념화를 통헤 베커의 경제학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논증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 정도만을 기록해두는 선에서 일단 이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해야겠다.
"All in all, even aside from enforcement issues, I see little reason for governments to ban the use of Provigil and other stimulants that improve cognitive performance. There are some situations where this improvement mainly benefits users at the expense of harm imposed on their competitors. For the most part, however, potential users are the best judge of whether they should use stimulants since they bear the lion's share of the costs as well as receive the benefits."Becker, Gerry "Comment on Intelligence Doping-Becker", The Becker-Posner Blog, 2008년 3월 23일.
한편 포스너 판사는 일단 그 논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을 요약하면서, 이것이 미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약물 파동에 대한 코멘트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적시한다. '순수한 인간 승리'를 맛보고 싶어하는 스포츠 팬들은 주최측에 약물 검사를 요구하게 마련이며, 그것을 적발하고 말고는 주최측의 결정에 달린 문제이지만, 굳이 법적으로 처벌하게 되면 걸린 사람만 큰 손해를 볼 뿐 그에 합당한 공익이 달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약물 복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약에 취한 사람이 주변에 끼칠 해악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그는 결국 '학생이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는 약을 먹는 것을 국가가 금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What is a possible source of concern is that because there is competition based on intelligence, for example to get into good schools or win academic prizes or achieve success in commercial fields such as finance that place a premium on intellectual acuity, the availability of intelligence-enhancing drugs places pressure on persons who would prefer not to use them because of concerns over their possible negative health consequences to use them anyway. There is also a danger that such drugs produce only very short-term effects, for example on exam performance, that may exaggerate a person’s long-term ability. (This is one of the reasons for objecting to exam coaching.) But against this is the fact that it is even more difficult than in the case of sports doping to draw a line between permitted and forbidden uses of cognition-enhancing drugs. It is hard to define "normal" cognitive functioning in a meaningful sense. Should people with an IQ above 100, which is the average IQ, be forbidden to use such drugs, but people below that level permitted to use them until it brings them up to 100? That would be absurd. The person with an IQ of 120 would argue compellingly that he should be allowed to take intelligence-enhancing drugs in order to be able to compete for good school placements and jobs with people having an IQ of 130. And so on up.Posner, Richard "Intelligence Doping--Posner", The Becker-Posner Blog, 2008년 3월 23일
Of course the naturally gifted will object to any "artificial" enhancements that enable others to compete with them. But it is not obvious why their objections should be given weight from a public policy standpoint."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경쟁이 과열로 치달을 경우, 결국 모든 학생들이 약을 먹고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인데, 베커와 포스너는 둘 다 그런 종류의 외부효과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를 하고 있지 않다. "South Korea and other countries have tried to use laws to cut down on private tutoring and other investments that increase the likelihood that a student may succeed in gaining entrance to top universities, where the number of acceptances remains constant. Presumably, these countries would want to ban students from taking various stimulants that improve their performance, perhaps at a risk to their health, but such bans are difficult to enforce."라고 하는 걸로 봐서 베커 또한 한국의 입시 경쟁에 대해 어느정도 들은 바는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낳는 극단적인 외부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짐작을 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학생들이 각성제 대신 한약을 먹으며 공부하는 것은,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약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어쩌면 강남에서는 벌써부터 이 두 편의 글에서 언급되는 약물을 학생들에게 공급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인할 길이 없으니 논외로 하자). 하지만 이와 관련된 사회적 현상들을 통해, 또한 이론적 개념화를 통헤 베커의 경제학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논증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 정도만을 기록해두는 선에서 일단 이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해야겠다.
3월 24일 KBS 여론조사
서울 노원병
진보신당 노회찬 32.6%
한나라당 홍정욱 25.6%
통합민주당 김성환 12.7%
서울 은평을
창조한국당 문국현 48.5%
한나라당 이재오 28.6%
서울 은평을에는 '전략적으로' 후보를 내지 않아 문국현에게 표를 몰아주면서, 노원병에는 기어이 후보를 내고야 마는 통합민주당의 행태가 우선 눈에 띄지만, 공교롭게도 김성환이 홍정욱의 표를 갉아먹는 현상이 발생함으로써 노회찬의 독주에 도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종필을 떨어뜨리면서 '3김 시대'(나는 이 어휘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의 종지부를 찍었던 노회찬이, 이번에는 홍정욱 대신 지역구 의원이 되면서 '귀족정치'의 싹을 뽑을 수 있을지 심히 귀추가 주목된다. 좌파 정당의 행보는 일단 방해하고 보는 '개혁 진영'의 선택과 그로 인한 오비이락이야말로 진정한 관전 포인트.
진보신당 노회찬 32.6%
한나라당 홍정욱 25.6%
통합민주당 김성환 12.7%
서울 은평을
창조한국당 문국현 48.5%
한나라당 이재오 28.6%
서울 은평을에는 '전략적으로' 후보를 내지 않아 문국현에게 표를 몰아주면서, 노원병에는 기어이 후보를 내고야 마는 통합민주당의 행태가 우선 눈에 띄지만, 공교롭게도 김성환이 홍정욱의 표를 갉아먹는 현상이 발생함으로써 노회찬의 독주에 도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종필을 떨어뜨리면서 '3김 시대'(나는 이 어휘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의 종지부를 찍었던 노회찬이, 이번에는 홍정욱 대신 지역구 의원이 되면서 '귀족정치'의 싹을 뽑을 수 있을지 심히 귀추가 주목된다. 좌파 정당의 행보는 일단 방해하고 보는 '개혁 진영'의 선택과 그로 인한 오비이락이야말로 진정한 관전 포인트.
2008-03-23
아리스토텔레스와 귀머거리 곤충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서는 플라톤 다음으로 거론되지만, 생물학으로 넘어오면 그 학문의 비조가 되는 사람이다. 그는 최초로 생물들을 분류하였고, 지금은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중세 이후까지 통용되던 분류표를 만들었다. 그가 주장한 생기론은 19세기까지 거의 수정 없이 받아들여졌다. 물론 지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을 곧이곧대로 믿는 생물학자가 존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학문을 최초로 개시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반면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관찰을 직접 하지 않았다. 흔히 드는 일화가 있다. 누군가 '말의 이빨이 몇 개냐'고 물으면 눈 앞에 있는 말의 이빨을 세는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뒤져서 정답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놓은 자연에 대한 관찰 결과를 가톨릭 신학의 내용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은 것 등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근대 철학의 고전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는 대신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던 관찰과 실험을 자기도 직접 해보겠노라고 나선 이들이 만든 것들이다. 새로운 오르가논을 주창한 프랜시스 베이컨을 가장 앞에 놓아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 아닌 새로운 운동 법칙을 만들어내기 위해 데카르트는 뭔가 이상한 도식을 개발해내는데, 그 내용은 데카르트 생전에 논박당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뉴턴이 빛을 통한 인간의 시각적 인지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바늘로 자기 눈의 수정체를 찔러서 조작하다가 실명할 뻔 했다는 에피소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인지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하고 있기도 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돌아가보자. 그는 오감 중 기억을 생성하는 역할을 하는 감관은 청각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과 동물들을 쭉 관찰해본 결과, 우선 사람은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기억하고, 개처럼 지능이 있는 동물들도 익숙한 소리를 들으면 반응을 한다. 이들에게는 외부의 지각 대상을 기억하여 자기 속에 갈무리했다가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반면 벌은 옆에서 징을 때려도 놀라서 도망가지 않는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곤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집을 짓고 군집생활을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본성적으로 타고난 어떤 지식이 있기 때문이며, 그 지식은 '벌들의 영혼'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벌은 죽어서도 벌로 태어나지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할 수 없다. 막판으로 가면 결론이 이상하게 빠지는데 거기에는 일단 신경 쓰지 말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과 동물과 곤충을 모두 관찰하고, 당시에 가능하던 방법을 동원하여 실험도 해 본 다음 자신의 철학적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근대 철학의 초기, 즉 우리가 아는 고전들이 생성되던 당시만 해도, 철학자들이 직접 실험을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과학적인 발전의 내용들을 실시간으로 습득하는 모습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칸트는 모르는 게 없었다. 스피노자가 안경알을 깎았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요즘 안경점에 앉아있는 직원을 연상하는데, 당시는 광학이 막 발전하던 시대였고 렌즈를 가공하는 것은 그런 첨단 과학의 소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으로 치면 대형 실험실의 실험 보조 내지는 기자재 납품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과학이 지금처럼 고도로 발전하지 않았으니 그쯤 되면 대충 과학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수학자였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고, 그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철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의 습득을 포기한 사건이 언제부터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자체가 철학사적 연구 과제일 것인데, 관련 도서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시간' 개념을 들고 아인슈타인에게 논쟁을 걸었다가 참혹하게 무시당한 이후, 철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을 올바르게 습득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분석철학자들은 19세기 말부터 폭발적으로 발전한 수학, 논리학의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로 공격한 대상은 이른바 '일반 형이상학'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연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의 4권 1장에서 말한 바로 그런 형이상학 말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이 문법적 착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거의 모든 논의를 무화시켰고,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던 하이데거를 안주거리 삼아 대륙철학과의 거리를 한없이 벌려놓는다.
하지만 '특수 형이상학', 가령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등은 애초에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한 대상이 아니며 그렇기에 언제나 철학자들에 의해 연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근대철학이, 니체가 선언하기 이전부터 신과는 결별해버린 상태로 근 200년을 지속해왔다는 것이며, 덕분에 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적 문제는 오직 신 스콜라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로 인해 고전적인 인식론이 특히 공격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신 스콜라 철학은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안전한 성채를 끝내 지키고 있다. 그 외의 근대 철학의 사조들은 과학의 발전 앞에서 큰 변화를 겪어야만 할 운명이다.
심리학적 발견이 철학의 인식론의 내용을 반박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면, 우리는 우리가 고전으로 대접하는 텍스트들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치열한 현재성마저도 부정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들은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이 더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까지 탐구를 펼친 선구자들이다. '그 결론에 따르면 대륙철학의 많은 부분을 도려내야 하므로 심리학적인 발견을 직접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한윤형의 주장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대륙철학의 전통을 불구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근대철학의 인식론 중 적지 않은 부분은 '말의 이빨을 잘못 센' 기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다시 한 번 반복하게 될 뿐이다.
과학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성과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과학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철학도'들의 모습이 이번 논쟁을 통해 숱하게 발견된 것 같아서 매우 착잡한 기분이 든다. 그들은 심지어는 아직까지는 과학을 통해 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에서 철학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한다. 대륙철학의 텍스트를 보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현대 과학으로 밝혀진 지식을 직접적으로 대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지적인 토론도 아니고 그냥 자해공갈일 뿐이다. 철학사를 전체적으로 공부하면서 철학의 문제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확인하고, 한 철학자의 텍스트를 심도 깊게 독해하면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력을 기르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지식을 흡수하는 과정이 병행되어야 한다. 텍스트를 부여잡고 놓치지 않기 위해 현실 세계에 대한 연구 결과로부터 눈을 돌리는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귀머거리 곤충일 뿐이다.
반면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관찰을 직접 하지 않았다. 흔히 드는 일화가 있다. 누군가 '말의 이빨이 몇 개냐'고 물으면 눈 앞에 있는 말의 이빨을 세는 대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뒤져서 정답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놓은 자연에 대한 관찰 결과를 가톨릭 신학의 내용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갈릴레이가 재판을 받은 것 등에 대해서는 굳이 내가 부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근대 철학의 고전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는 대신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던 관찰과 실험을 자기도 직접 해보겠노라고 나선 이들이 만든 것들이다. 새로운 오르가논을 주창한 프랜시스 베이컨을 가장 앞에 놓아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 아닌 새로운 운동 법칙을 만들어내기 위해 데카르트는 뭔가 이상한 도식을 개발해내는데, 그 내용은 데카르트 생전에 논박당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뉴턴이 빛을 통한 인간의 시각적 인지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바늘로 자기 눈의 수정체를 찔러서 조작하다가 실명할 뻔 했다는 에피소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인지에 대한 철학적 연구를 하고 있기도 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돌아가보자. 그는 오감 중 기억을 생성하는 역할을 하는 감관은 청각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과 동물들을 쭉 관찰해본 결과, 우선 사람은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기억하고, 개처럼 지능이 있는 동물들도 익숙한 소리를 들으면 반응을 한다. 이들에게는 외부의 지각 대상을 기억하여 자기 속에 갈무리했다가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반면 벌은 옆에서 징을 때려도 놀라서 도망가지 않는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곤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집을 짓고 군집생활을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본성적으로 타고난 어떤 지식이 있기 때문이며, 그 지식은 '벌들의 영혼'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벌은 죽어서도 벌로 태어나지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할 수 없다. 막판으로 가면 결론이 이상하게 빠지는데 거기에는 일단 신경 쓰지 말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과 동물과 곤충을 모두 관찰하고, 당시에 가능하던 방법을 동원하여 실험도 해 본 다음 자신의 철학적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근대 철학의 초기, 즉 우리가 아는 고전들이 생성되던 당시만 해도, 철학자들이 직접 실험을 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과학적인 발전의 내용들을 실시간으로 습득하는 모습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칸트는 모르는 게 없었다. 스피노자가 안경알을 깎았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체로 요즘 안경점에 앉아있는 직원을 연상하는데, 당시는 광학이 막 발전하던 시대였고 렌즈를 가공하는 것은 그런 첨단 과학의 소재를 제공하는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으로 치면 대형 실험실의 실험 보조 내지는 기자재 납품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과학이 지금처럼 고도로 발전하지 않았으니 그쯤 되면 대충 과학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수학자였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일이고, 그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다.
철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의 습득을 포기한 사건이 언제부터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자체가 철학사적 연구 과제일 것인데, 관련 도서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시간' 개념을 들고 아인슈타인에게 논쟁을 걸었다가 참혹하게 무시당한 이후, 철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을 올바르게 습득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분석철학자들은 19세기 말부터 폭발적으로 발전한 수학, 논리학의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로 공격한 대상은 이른바 '일반 형이상학'이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연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의 4권 1장에서 말한 바로 그런 형이상학 말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이 문법적 착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거의 모든 논의를 무화시켰고,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던 하이데거를 안주거리 삼아 대륙철학과의 거리를 한없이 벌려놓는다.
하지만 '특수 형이상학', 가령 신의 존재에 대한 탐구 등은 애초에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한 대상이 아니며 그렇기에 언제나 철학자들에 의해 연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근대철학이, 니체가 선언하기 이전부터 신과는 결별해버린 상태로 근 200년을 지속해왔다는 것이며, 덕분에 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적 문제는 오직 신 스콜라 철학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로 인해 고전적인 인식론이 특히 공격받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신 스콜라 철학은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안전한 성채를 끝내 지키고 있다. 그 외의 근대 철학의 사조들은 과학의 발전 앞에서 큰 변화를 겪어야만 할 운명이다.
심리학적 발견이 철학의 인식론의 내용을 반박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면, 우리는 우리가 고전으로 대접하는 텍스트들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치열한 현재성마저도 부정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들은 당대의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이 더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까지 탐구를 펼친 선구자들이다. '그 결론에 따르면 대륙철학의 많은 부분을 도려내야 하므로 심리학적인 발견을 직접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한윤형의 주장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대륙철학의 전통을 불구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근대철학의 인식론 중 적지 않은 부분은 '말의 이빨을 잘못 센' 기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다시 한 번 반복하게 될 뿐이다.
과학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성과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과학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철학도'들의 모습이 이번 논쟁을 통해 숱하게 발견된 것 같아서 매우 착잡한 기분이 든다. 그들은 심지어는 아직까지는 과학을 통해 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에서 철학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한다. 대륙철학의 텍스트를 보전할 수가 없기 때문에 현대 과학으로 밝혀진 지식을 직접적으로 대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지적인 토론도 아니고 그냥 자해공갈일 뿐이다. 철학사를 전체적으로 공부하면서 철학의 문제 의식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확인하고, 한 철학자의 텍스트를 심도 깊게 독해하면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력을 기르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지식을 흡수하는 과정이 병행되어야 한다. 텍스트를 부여잡고 놓치지 않기 위해 현실 세계에 대한 연구 결과로부터 눈을 돌리는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귀머거리 곤충일 뿐이다.
2008-03-21
Breifly, what banks do
To grasp the problem, you need to understand what banks do.Paul Krugman, "Partying Like It's 1929", The New York Times, 2008년 3월 21일.
Banks exist because they help reconcile the conflicting desires of savers and borrowers. Savers want freedom — access to their money on short notice. Borrowers want commitment: they don’t want to risk facing sudden demands for repayment.
Normally, banks satisfy both desires: depositors have access to their funds whenever they want, yet most of the money placed in a bank’s care is used to make long-term loans. The reason this works is that withdrawals are usually more or less matched by new deposits, so that a bank only needs a modest cash reserve to make good on its promises.
But sometimes — often based on nothing more than a rumor — banks face runs, in which many people try to withdraw their money at the same time. And a bank that faces a run by depositors, lacking the cash to meet their demands, may go bust even if the rumor was false.
Worse yet, bank runs can be contagious. If depositors at one bank lose their money, depositors at other banks are likely to get nervous, too, setting off a chain reaction. And there can be wider economic effects: as the surviving banks try to raise cash by calling in loans, there can be a vicious circle in which bank runs cause a credit crunch, which leads to more business failures, which leads to more financial troubles at banks, and so on.
That, in brief, is what happened in 1930-1931, making the Great Depression the disaster it was. So Congress tried to make sure it would never happen again by creating a system of regulations and guarantees that provided a safety net for the financial system.
And we all lived happily for a while — but not for ever after.
He's extremely brilli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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