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을 추종하는 사람도, 그 추종하는 이들을 논박하는 사람도, 그들과는 거리를 두고 '포스트모던'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도, 그 누구도 지젝이 정말 하고 있는 그 무언가를 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지젝은 영화를 비평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현란하게 풀어내지만, 그 모든 지적 활동에 앞서서 순수하게 영화를 즐길 줄 아는 영화광이다. 영화
《300》에 대한 지젝의 평을 우선 읽어보도록 하자. 지젝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 혹은 그에게 반박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뒷부분의 이론적인 해설에 관심을 갖겠지만,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낄낄낄'로 일관되어 있는 두 번째 문단이다. 일반적인 비평가들과는 달리 그는 페르시아에서 미 제국의 모습을 발견하고, 스파르타의 결사대를 탈레반으로 간주한다. CG의 발전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현실의 배경 속에 가상의 인물이나 캐릭터를 삽입하는 대신, 실제의 인물을 찍어 가상의 배경 속에 배치하는 기법을 보여주었다며, 그것을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지젝의 '통찰'이 아니라 '안목'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오랜 세월동안 즐기며 영화를 봐 온 사람만이 발견해낼 수 있는 요소들이 이 짧은 글의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론적인 논의에 동의하고 말고는 그 다음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젝의 이론들이 '옳은 이야기를 괜히 빙빙 돌려서 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그의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하다는 말에 반만 동의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지젝에 반대하는 '좌파'들은 대부분 완전히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과 대립하는 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것 만큼이나 간단하다). 하지만 《300》에 대한 그의 지적은 흥미롭다. 그것이 어떤 인식론적인 통찰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적으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영화광이 내놓을 수 있는 신선한 시각을 한껏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내용은 그 다음이다.
또한 지젝은 소설광이기도 하다. '하다'라는 표현은 너무도 단정적일 수 있겠다. 내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고 한다.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대한 그의 논의에는 무언가 매우 탁월한 지점이 있다고도 한다. 자꾸 소문의 벽 너머로 후퇴하게 되는 것 같으니, 다소 비슷한 뉘앙스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읽어본 에코를 예로 들어보자. 에코는 자타가 공인하는 문학 노년이다. 본인이 소설을 쓰기 전부터 그랬다. 수 개 국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그는 자신이 할 줄 아는 언어로 소설을 읽는 즐거움에 대해 잘난 척을 하기도 했다. 루카치 같은 철학자는 애초에 문학평론가니까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미국의 법경제학자 리차드 포스너도, 출판사의 청탁을 받고 어떤 소설의 발문을 써주기 위해 그 작품을 읽다가 필을 받고
《성과 이성》이라는 두텁고 무게감 있는 이론서를 써냈다. 이런 사례들을 아무리 들어봐야 '지젝은 소설광이다'라는 명제를 입증할 수 없다는 거 잘 아는데, 아무튼 지젝은 소설광이다.
지젝이 영화와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설명하면서 보여주는 빛나는 성취의 많은 부분은, 이렇듯 그가 실제로 그것들을 즐기며 살아가는 데 기인하고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나는 이걸로 논문을 써야지'라고 작심하고 붙잡고 본 영화에 대해 그토록 발랄한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그는 도착증 환자일 것이다. 지젝은 문화연구가이기에 앞서 대중문화를 즐기는 한 사람이고, 바로 그 점이 지젝의 대중적 인기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서도 머리 좋은 놈이 열심히 하는 놈 못 이기고, 열심히 하는 놈이 즐기는 놈 못 이긴다고 하였듯이, 대중들은 즐기면서 글을 쓰는 지젝의 진가를 본능적으로 간파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어 화자인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게 된다. 지젝을 섬기는 사람도 많고, 그러한 '지젝빠'들을 까는 사람도 적잖게 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인문돌이'들이 차려놓은 블로그나, 혹은 그들이 흔적을 남기는 게시판 등을 들여다보면, 과연 지젝만큼 자연스럽게 대중문화의 맥락을 향유하고 있는 이가 존재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나는 소설 따위 읽지 않습니다'라고 써붙여 놓고 자랑스레 떠벌이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영화 볼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이라고 완장을 차고 좋아라 하는 이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특히나 '소설 볼 시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기도 차지 않는다. 적어도 지젝에게는 인터넷 할 시간이 없으면 없지 소설 볼 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가 있다면 시사회에 참석하거나 개봉관을 서둘러 찾는 일도 잊지 않을 것이다. 문화비평을 하기에 앞서서, 우리에게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화 향유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문화 컨텐츠를 논하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너무도 손쉽게 자신이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그것'에 대한 평가를 마무리짓고, '대중'이나 '광기', '문화적 흐름'이나 '도치', '향락', '재발견'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지젝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글에서 다루는 부분은 전체 분량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다루는 작품의 핵심을 짚어내어 결정적인 한 지점을 콕 하고 찔러내고 있다. 그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통찰이 아니라 안목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이며, 그렇기에 그의 이론만큼이나 성취하기 어려운 문화적 소양의 축적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 워》를,
《칼의 노래》를, 혹은 2002 월드컵을 논할 때 과연 우리는 그 대상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었을까.
이러한 문화적 소양의 결여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였는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혹자의 말처럼 사람들이 매일 야근을 하는 통에 '즐길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인구가 1억 명이 되지 못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소설책 한 권을 사서 볼 돈도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종합되어 있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문학을 한다고 하는, 혹은 비평의 언어를 생산한다고 하는 이들 사이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일종의 엄숙주의가 퍼져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이, 혹은 한 번 읽고 더 안 볼 책 사보기는 아깝다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즐기는' 것이 '금지된 쾌락'에 속하는 것일까? 흠, 이런 가설은 한 번쯤 세워봄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의 9페이지에 실린 한 어구의 내용을 적절하게 차용해보는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자.
한국에서 지적 엔터테인먼트는 오랫동안 금지된 쾌락에 속했다. 한국인에게 이 금지된 쾌락은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대상으로 현신한다. 불가능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열망은 쾌락은 쾌락이되 고통스러운 향락을 반복하게 만든다. 이 대상이 채우고 있는 빈자리, 그 결여의 지점에 완전무결한 지젝은 숭고 대상으로 존재한다.
말을 하고 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다. 지젝을 즐기기 위해 지젝이 즐기는 것들을 즐기는 것은 지젝의 광신도들에게, 심지어는 그들을 논박하는 이들에게도 '금지된 쾌락'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젝이 봤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씨네마테크를 향하거나 DVD를 구입하거나,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장바구니에 담는 대신, 지젝이라는 숭고한 대상의 진실을 놓고 하염 없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오, 그들은 지젝이 하는 일을 정녕 알지 못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