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28

'영구분단론'은 답이 아니다

내가 아는 '진보진영'의 인사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지만원의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론(이하 '영구분단론')의 지지자라는 것은 사실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자신들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받는다는 것을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 자들이 민주노동당을 점거해버린 상황이다. 게다가 진보진영의 특성상 북한을 떠안겠다는 발언과 내치겠다는 발언은 모두 만만치 않은 부담감을 안겨준다. 등장한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구분단론'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아, 몰라 씨바, 그냥 지들끼리 알아서 하게 냅둬!'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적인 변화가 이른바 'NL'진영에게 반드시 타격으로 돌아가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만약 지금 당장 영구 분단 체제가 정착된 후, 2년 후 북한의 통치 체계가 무너졌다고 가정해보자. 가까운 시일 내에 남한이 북한에 중국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북한이 망하면 그 영토와 인구의 거의 대부분은 중국에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런데 우리가 베이징 올림픽의 전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티벳의 항쟁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배는 그리 인도적이지 않다.

물론 흔히 말하는 '주사파'의 궁극적인 존립 근거는 북한에 자신들을 받아줄 정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만이 '민족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김정일 정권이 몰락함으로써 주사파의 존재 근거가 희박해진다고 해도 민족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국경 너머에서 고통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고려해야 한다는 요청이, 극우파와 '민족주의자'들에게서 공히 울려퍼지는 상황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가정해볼 수 있다. 혹은 그 반대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이들이 북한에서 발생하는 현실을 외면하려 들고, 그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는 경우도 상상해볼 수 있다. 탈북자들을 일차적으로 받아주는 완충제 역할을 현재는 중국이 하고 있었으나, 중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북한에서 탈출하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 외에도 가능한 문제의 조합은 끝이 없다.

'영구분단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일종의 이론적 도피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은 그 누구라도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그가 한반도의 이남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하필이면 좌파 정당의 지지자일 경우, 자신들이 진보적이라고 착각하는 모종의 종교 집단의 구성원과 맞닥뜨리거나, 그들이 벌이는 해악을 목도하거나, 그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데, 물론 넌더리가 난다. 하지만 남북문제는 오직 남한과 북한과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 자체가 한국이 처해있는 국제 정세 중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구분단론' 처럼 대책 없는 대외정책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나는 지금 당장 중국이 북한을 넘어 남한까지 통합하려 들 것이라거나, 그럴 수 있다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북한이 망하면서 중국에 편입된다면 지금처럼 속 편하게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던 시점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이 선거를 앞두고 무력시위를 펼친 지금, 진보신당의 논평이 어떻게 나올지 나름대로 귀추가 주목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진보진영에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이러한 사태에 대처할 수 있을만한 이론적인 기반이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다. 북한의 무력 시위는 한반도 평화에 위협이 된다. 그것은 정권을 유지하고픈 북한의 통치자들과 한국의 극우파 등에게만 이득이 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나열하고 원론적인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 이상의 정당 논평은 사실상 무의미하고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러한 논평의 이론적 근거가 '영구분단론'이어서는 곤란하다. 지금은 90년대가 아니다. 2008년에도 '영구분단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은, 지적인 나태와 정서적인 미성숙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2008-03-27

대륙철학의 존재 근거와 '라캉 논쟁'의 후반전

이 논쟁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진다. '라캉의 정신분석을 현재 통용되는 과학이라 보기 어렵다'라는 결론에 참여자들 전원이 동의한 전반부, 그리고 '심리학은...' 으로 시작하여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논쟁이 되어버린 후반부. 전반부에 대해서는 논쟁 참여자인 한윤형의 승복이 있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고, 이제 우리는 후반부에 대해서만 결론을 내리면 될 것이다.

"메타 이론, 과학, 물리주의"(한윤형의 블로그, 2008년 3월 17일)를 다시 펼쳐보자. 앞서 내가 인용했던 바와 같이 한윤형은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했다.

"a) 분과학문인 심리학의 메타화로 나오지 않는 철학 이론들, 특히 인간의 의식이나 심리에 대한 철학 이론들은 모두 말이 안 된다. 특히 주체 철학 혹은 의식 철학이라 부르는 분류에 들어가는 학자들, 데카르트, 칸트, 독일 관념론, 헤겔, 훗설은 철학이라 볼 수 없다.

b) 우리는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여기서 그 누구도 a)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의식이나 심리에 대한 철학 이론들"을 "모두 말이 안 된다"고 몰아붙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철학과에 드디어 다니고 있으니 논외로 치고, 그 외의 '과학주의자'들은 '그래도 철학에는 나름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 주장 또한 상식적이다. 대륙철학자들이라고 해서 심리학의 발전을 모르는 바가 아닐테니, 그들 또한 나름의 대비책을 세워서 철학의 입지를 지키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과학주의자'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으므로, 그냥 '아, 그렇군' 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윤형은 다음 문단부터 허수아비 논증을 시작한다.

"a)의 결론은 논리필연적이다. 다음과 같은 예상반론이 가능하다. “데카르트나 훗설의 시대엔 심리학이 지금과 같은 데이터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이론은 성립이 가능했다. 그러나 라캉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답변. “지금도 데카르트주의자가 있고 현상학자들이 있다.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 빙빙 돌리지 말고 어서 한번 그렇게 주장해 보시지.”"

이건 과학 논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소양의 문제에 더 가깝다. 철학의 허벅지 칸트로 돌아가보자. 칸트는 신, 영혼, 자유의 개념은 경험세계의 논리를 통해 논박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존재증명 논쟁은 무의미하지만, 신의 존재는 우리의 윤리적 삶을 위해 요청된다는 것이 그의 논법이다. 나머지 두 가지도 그렇다. 여기서 문제는, 적어도 후설이 말하는 '심리학'은 데카르트적 자아, 즉 영혼에 대한 학문에 매우 가까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성찰해야 할 물음은 이제 다음과 같은 것으로 향한다. 즉 어떠한 그리고 어떻게 영혼들-특히 인간의 영혼들-이 세계 속에 즉 생활세계 속에 존재하는가, 따라서 어떻게 영혼들이 물리적 신체에 영혼을 불어넣는가, 어떻게 영혼들이 시간공간성 속에 자리잡게 되는가, 어떻게 각자가 그가 살고 있고 살고 있음을 의식하는 세계에 관한 의식을 가지면서 영혼적으로 살아가는가에 향한다. . .(생략). . .
영혼은 물론 세계 속에 존재한다."(346, 에드문트 후설, 이종훈 옮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7))


하지만 후설은 여기서 자신이 영혼을 연구하는 방식이 자연과학의 그것과 평행을 이루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수학적 자연과학과] 평행하는 학문이라는 과제에 의해, 그리고 심리학의 주제인 영혼이 자연과학의 주제인 물리적 자연과 동일한 의미의 실재적인 것이라는 파악에 의해 미리 멍에가 지어졌다. 여러 세기에 걸친 이러한 편견이 그 모순을 통해 밝혀지지 않는 한, 참으로 영혼에 관한 학문 즉 생활세계-모든 객관적 학문과 유사하게 심리학은 이 생활세계에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로부터 근원적 의미를 갖는 것에 관한 학문인 심리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347, 같은 책)


후설으로부터 시작한 현상학은 하이데거로 이어진다. 그런데 "요즘 회자되고 있는 해체주의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철학적 흐름도 그 뿌리를 하이데거의 이와같은 「현상학적 해체」에 두고 있다"(이기상, 옮긴이의 말,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서울: 문예출판사 1994))고 하니, 라캉주의를 제외한 현대 대륙철학의 상당수는 과학적인 검증의 대상이 아니거나 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물론 이것은 '관념론'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얘기가 일관성을 갖추려면 심리학의 발전이 데카르트에서 훗설까지의 철학자들의 논법을 격파했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화자가 대륙철학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나뉘어진다. 만약 한윤형이 대륙철학의 자기 방어 기제에 대해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런 소리를 했다면, 그는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놓고 그냥 선을 찍찍 그어버린 다음 '전선'을 확보하려고 든 것이다. 반대로 알면서도 저런 소리를 했다면, 그는 내가 지난번에 비판한 바와 같이 '논증이 아닌 자해공갈'을 하려 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논쟁 상대방을 '대륙철학의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는 과학도'로 몰아가고자 하는 정치적 기동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입장은 모두 옳지 않다.

하지만 한윤형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b) 우리는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를 이렇게 단순하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 후, 심리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지는 않고, 도리어 심리학이 과학인지 덜 과학인지 더 과학인지 등과 같은, 자신이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대해 김재권, 콰인, 쿤 등의 역시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썰'을 풀기 시작한다. 나머지는 우리가 이미 보고 겪어서 알고 있는 진흙탕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논지'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 논지의 전제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라캉 논쟁'의 후반전은 사실상 벌어질 필요가 없었다. 혹은, 이상한 모자가 내 글 "완전한 몰이해"에서 리플을 통해 말한 바와 같이, 라캉의 이론에 대해 라캉 자신의 텍스트를 통해 공부한 누군가가 그를 방어하면서 촉발되었어야 겨우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어이 논쟁에서 이겨보겠다는 심사의 발로로 인하여 그다지 의미 없는 논쟁은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 후설과 칸트와 하이데거를 다시 들춰보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소득이 없다고 말할 것까진 없을 것 같다. 아이추판다님이 올리겠다고 약속한 새로운 글을 기다리며, '라캉 논쟁'의 후반부를 나는 여기서 마무리짓고자 한다.

2008-03-26

완전한 몰이해

이 글은 "성공하지 못한 라캉 토벌 작전"에 등장하는 한윤형의 주장 중 유난히 도드라지는 부분들만 일단 추려내어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1. 한윤형은 근대 학문의 규칙을 모른다.


"이 경우에도 그의 논변은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실증주의자인 그는 오직 임상효과에 의해서만 이론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심리학에서 듣보잡 취급해서 다루지도 않는 라캉에 대한 임상자료는 ‘제한적’이라는 기타 정신분석학의 임상자료보다도 미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듣보잡이니까 문제가 끝났다고 말한다면 다시 논점은 1로 워프를 하고 그의 대담한 주장은 시궁창에 빠진다. 순수하게 실증주의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때에 그의 라캉 비판은 제대로 자료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성급한 판단에 불과하다."

-> 저널을 뒤져봐도 라캉의 임상에 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학문의 세계는 자신들의 연구 업적을 철저하게 공개함으로써 성립한다는 점을 한윤형은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임상'에 대한 자료를 철저하게 수집하고 공개해야 할 임무는 실증주의자인 아이추판다님이 아니라 정신분석을 과학이라고, 과학까지는 아니어도 현대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라캉주의자들에게 있다. 하지만 이미 지적된 바와 같이 한국에서 라캉주의 정신분석을 개진하는 이들의 저널에는 임상 사례가 딱 하나 올라와 있다. 한윤형의 말대로라면, '실증주의'를 견지하기 위해 아이추판다님이 그 학회에 소속된 분들을 가정방문이라도 해서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임상 자료를 제발 저에게 내어주십시오'라고 굽신굽신 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건 철학과 과학을 논하기 이전에 근대적인 학문 체계에 대한 완전한 몰이해에서 비롯하는 발언일 뿐이다.



"노정태 님이 했던 것처럼 왜 자료를 남기지 않는가, 라고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지만, 이 비판은 엄밀히 말하면 실증주의를 넘어서 있다. 실증적 자료를 도출하는 틀 안에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이론적 기준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정태 님의 기준은 스스로 말했다시피 일종의 '태도'의 문제에 기대고 있어서, 과학철학인지 지식인의 윤리의식에 대한 규정인지 분간이 안 간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종교적인 폐쇄성은 그들 수리철학의 철학적 타당성과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 라캉주의자 정신분석자들도 자신들의 저널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으니, '실증주의'에 대한 요구는 과학적인 탐구를 진행하고 있는 그들에게 우선 돌아가야 한다. 내가 말한 라캉주의의 폐쇄성은 실증주의니 뭐니를 논하기 이전 단계에 속하는 일이다. 한편 "실증적 자료를 도출하는 틀 안에 들어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이론적 기준을 세우는 일"이라는 말을 보면, 결국 한윤형이 설명하는 라캉주의 정신분석은 실증적인 자료를 내놓을 수 없는 분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이추판다님에게 '라캉주의 정신분석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당신이 찾아서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우리 집 장농에 감춰져 있는 금송아지를 내게 보여주되, 우리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소리이다.

게다가 그는 내가 말하는 '태도'의 문제를 대단히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 나는 단지 착하게 연구하자는 뜻에서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쓴 게 아니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검증 가능하도록 연구된 결과들은, 심리학자들의 저널에서 공유되고 또 철저하게 비판받는다. 과학을 과학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검증과 비판의 기제이다. 과학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것들은, 바로 이러한 검증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학적인 지식과 과학적이지 않은 지식을 구분하는 그러한 기능이야말로 과학을 과학으로 성립하게 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이다."라는 말이 이미 본문에 있다. 한윤형이 이해하는 나의 과학관은 대체로 리플에 달린 내용을 대단히 단순하게 축약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논지를 이해하고 싶을 때에는 우선 그 상대방이 쓴 본문부터 꼼꼼하게 읽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근대 이후의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피타고라스 학파 이야기를 꺼내면서 물타기를 시도한다. 예측 가능한 답변이었다.


"토벌대원들조차도 오직 임상에 의해서만 얘기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은 웰던지기 님의 글을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할 것이다.)"

-> 임상의 결과가 있다면, 근대적인 학문일 경우 그것은 저널을 통해 공개된다. 그 저널에 나와있는 '임상'에 대해서는 이미 새로운세상님이 정리해서 올려주신 포스트가 있으니 그걸로 이야기하면 될 것이다. 아이추판다님도 검색 가능한 모든 저널을 뒤져봤지만 라캉의 임상에 대한 논문은 없다고 한다. 그럼 된 거지 뭘 더 바라나? 이건 약간 개인적인 맥락인데, 한윤형은 평소에 '그것은 지적으로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학계에 의해 검증되었는데, 아직까지 외계에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니까'라는 진보누리 철공사의 말을 대단히 좋아하던 그 자 아닌가? 지금 지구의 학계에서는 라캉이 임상적으로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다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데, 왜 이해를 못하는지 내가 다 답답하다.

저널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단편적으로 하기에 앞서서, 자신이 말하는 저널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우선 갖도록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 논쟁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한윤형은 근대적인 학문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규칙에 대해 너무도 무지하다.

자신이 인용을 잘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놀라지 않는 모습도 그렇다. 이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의 대립구도로도 설명되지 않는 일이다. 구술문화의 전통 속에서 남의 말을 엉뚱하게 전달하는 것은 상당히 터부시되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구절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는 되는대로 철학자들의 이름을 주워섬긴 후, 아니다 싶으면 '그가 말하는 심리학은 이게 아니고요'를 반복한다. 이건 그냥 논쟁에 임하는 '불성실한 태도'라고 봐야한다. 근대적인 학문 속에서도 잘못된 인용은 당연히 터부시되는데, 왜냐하면 정확한 인용 규칙이 지켜질 때에만 표절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런 식이어서, '당신들은 실증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론적인 관점은 뭐가 있지?'라는 한윤형의 '논지'는 애초에 존중받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최신 포스트 "성공하지 못한 라캉 토벌 작전"의 3번 부분에 해당하는 논증이 결여되어 있음을 깨닫고 한윤형은 깜짝 놀랐다는데,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윤형을 제외한 그 누구도(아참, 이상한 모자도 껴서) 그게 논점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깨비 '심리학'과의 일전을 벌이고 있다. 지금 다른 이들은 모두 근대적인 학문을 논하고 있는데, 혼자만 중세에서 살고 있나보다. 토미스트에게 철학을 배웠건 말건 우리는 지금 현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건 아나? 지금 우리가 쓰는 인용 규칙 등은 대부분 중세 대학에서 발생했다는 거.




2. 그렇다면 한윤형은 철학을 아는가


내가 진짜 충격을 받고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철학적인 논의에 대해 대충 감은 잡고 있는 것 같은데, 근대 주체철학이 심리학적인 관점에 의해 대거 소거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가 현대 철학의 전개 과정에 완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 권위주의를 토대로 그들이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으니 정말로 우스운 일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전통철학을 다 도려내야 하는데?”라고 반응한 것은 정말로 전통철학이 다 잘려 나갈까봐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논변대로 하면 사태가 그렇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 사태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이걸, 현대철학의 원류 중 한 사람인 후설을 통해 설명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노정태 님은 혼자서 철학의 미래를 걱정하더니 이제는 그 걱정에 대한 정답을 찾았다고 희희낙락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당신은 왜 그렇게 비열하게 최장집을 털었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어디 1950년대에 이승만 노선이 옳았는지 김구 노선이 옳았는지 토론해 봅시다.”라고 반응한 왕년의 이한우를 연상시킨다."

-> 사태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 철학의 미래를 걱정"했고, 칸트와 후설을 다시 읽으며 "그 걱정에 대한 정답을 찾았다고 희희낙락"했는데, "솔직히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야말로 철학 공부를 하는 것이다. 최장집 사건에 대한 비유는 대체 어떤 맥락으로 연결짓고 있는건지 알 길이 없다. 지금 설마 라캉을 '사상 검증' 당하는 최장집에 비유하고 있는 건가? 에이 설마.


"나는 노정태 님이 그 진지한 철학적 열정을 지도교수와의 토론을 통해 해소했으면 한다. 그건 나같은 일개 학부생과 해야할 논쟁도 아니고, 이 논쟁은 철학에 대한 그의 관점과 별 상관도 없다."

-> 물론 그러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 논쟁은 철학에 대한 나의 관점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철학을 배웠노라고 말하는 이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데카르트적 성찰'을 새삼 하게 된다.


"느닷없이 철학적 문제를 한정지어보자고 타협안을 제시(?)하신 토벌대장 님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그가 하는 말은 미국 심리철학에서 사용하는 구별법인데, 문제는 그게 대륙철학에 적용할 수 없는 기준이라는 데에 있다. 러프하게 말하면 통약불가능한 것이다. 대륙철학의 이론적 체계 중에서 현대의 심리학 데이터를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이고 데이터와 상관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난해한 철학적 문제일 것 같다. 아마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가 시작된다 해도 철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왜 거기에 동의해야 하는데? 거듭해서 내가 지적하는 것은, 철학자들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는 어려운 문제를 그들이 판정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그 지독한 오만이다."

-> 그 자체로 난해한 철학적 문제에 대한 토론에서, 적어도 고전적인 대가 중 누군가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논쟁이 가능하지 않나? "내가 왜 동의해야 하는데?"라면서 뻣대고 있는 것은 철학과 과학의 싸움 이전에 그냥 학생의 자세도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과학은 철학자들이 잘 모르는 문제를 판정해주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에 대한 좀 더 정돈된 연구 결과를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대륙철학의 이론적 체계 중에서 현대의 심리학 데이터를 반영해야 하는 부분이 어디이고 데이터와 상관없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대강은 파악하고 있어야 논의가 가능하지 않나? 모르면 알아보려고 시도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한윤형은 철학도 맞나?


"위에서 점검한 바와 같이, 끊임없이 과학이라는 주문을 되뇌이는 토벌대의 논증 방식은 과학이고 나발이고 간에 일단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들의 논변 수준을 고려해 보건대 설령 쓸만한 데이터를 손에 쥐고 있다 한들 그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

-> 아니, 논리적이다. 한윤형이 그 논리의 대전제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 지금의 문제일 뿐이다. 까먹었을까봐 다시 이야기해주는데, 라캉을 연구하는 학회가 공개하는 저널에 임상에 대한 연구 결과를 요만큼, 그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만 싣고 있다면, 실증주의고 뭐고 논할 것도 없이 그 학문의 '과학'으로서의 위상도 딱 거기까지다. 뭐, 저널을 통한 학문의 연구 방식 자체가 '남성주의적'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리가레이의 입장을 수용할 거면 그러던지.




3. 설마 그래도 수사학은 알겠지?


"지금도 GT 님의 발언을 털어버리는 걸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벌쳐로 프루브 잡는 컨트롤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셈인데, 그러다가 본진에 캐리어 한 부대 뜨면 어쩌시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머리는 지었나? 골리앗 사업은 했나? 근데 내가 왜 이런 걸 걱정해 줘야 하는 거지? 아, 클로킹 레이스가 준비되어 있다고? 라캉 이론에 대한 과학적 반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그의 서술을 기대한다. 적어도 그쯤은 되어야 3의 관점에서 그들 토벌대의 입장을 정리하는 일이 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 한마디로, 빈곤한 비유. "뭐?" 시리즈에서 봤던 그것을 연상시킨다.




4. 결론: 자신을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 가정하지 말라

한 번 배우니까 계속 써먹게 되는데, '안다고 가정된 주체'는 라캉 정신분석이론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정신분석가는 환자를 대함에 있어서 상대방이 자신을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 대하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논쟁에 임하는 한윤형의 자세가 바로 이런 식이다. 정작 '과학주의자'들은 과학과 철학의 세부적인 내용들을 뒤적이고 있는데, 오직 한윤형만 배를 긁으면서 '내게 정돈된 지식을 제시하라, 그러면 답변하리라'고 버티고 있다. 이건 소통을 위한 자세가 아니다. 기본적인 개념에서 합의된 의사소통의 전제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공부하지는 않을 망정, '나를 설득시켜봐'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마치 김대중더러 '나를 설득해봐, 그럼 국민이 다 설득되는 거야'라고 뺀들거리던 한국논단의 그 어떤 분을 연상시킨다.

아무도 한윤형에게 분석가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스스로를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로 여기는 한윤형의 상징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논쟁을 할 거면 최소한의 규칙과 통일된 용어 사용 등을 갖춰야 한다. 내가 요구하는 건 딱 그만큼의 상식과 성실함이다.

2008-03-25

시험용 각성제

베커-포스너 블로그의 게시물을 보다가 발견한 내용이다. 게리 베커는 정부가 학생들이 지적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것을 금지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All in all, even aside from enforcement issues, I see little reason for governments to ban the use of Provigil and other stimulants that improve cognitive performance. There are some situations where this improvement mainly benefits users at the expense of harm imposed on their competitors. For the most part, however, potential users are the best judge of whether they should use stimulants since they bear the lion's share of the costs as well as receive the benefits."
Becker, Gerry "Comment on Intelligence Doping-Becker", The Becker-Posner Blog, 2008년 3월 23일.

한편 포스너 판사는 일단 그 논의를 둘러싼 주변 상황을 요약하면서, 이것이 미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약물 파동에 대한 코멘트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적시한다. '순수한 인간 승리'를 맛보고 싶어하는 스포츠 팬들은 주최측에 약물 검사를 요구하게 마련이며, 그것을 적발하고 말고는 주최측의 결정에 달린 문제이지만, 굳이 법적으로 처벌하게 되면 걸린 사람만 큰 손해를 볼 뿐 그에 합당한 공익이 달성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약물 복용을 금지하는 이유는 약에 취한 사람이 주변에 끼칠 해악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그는 결국 '학생이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는 약을 먹는 것을 국가가 금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What is a possible source of concern is that because there is competition based on intelligence, for example to get into good schools or win academic prizes or achieve success in commercial fields such as finance that place a premium on intellectual acuity, the availability of intelligence-enhancing drugs places pressure on persons who would prefer not to use them because of concerns over their possible negative health consequences to use them anyway. There is also a danger that such drugs produce only very short-term effects, for example on exam performance, that may exaggerate a person’s long-term ability. (This is one of the reasons for objecting to exam coaching.) But against this is the fact that it is even more difficult than in the case of sports doping to draw a line between permitted and forbidden uses of cognition-enhancing drugs. It is hard to define "normal" cognitive functioning in a meaningful sense. Should people with an IQ above 100, which is the average IQ, be forbidden to use such drugs, but people below that level permitted to use them until it brings them up to 100? That would be absurd. The person with an IQ of 120 would argue compellingly that he should be allowed to take intelligence-enhancing drugs in order to be able to compete for good school placements and jobs with people having an IQ of 130. And so on up.

Of course the naturally gifted will object to any "artificial" enhancements that enable others to compete with them. But it is not obvious why their objections should be given weight from a public policy standpoint."
Posner, Richard "Intelligence Doping--Posner", The Becker-Posner Blog, 2008년 3월 23일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경쟁이 과열로 치달을 경우, 결국 모든 학생들이 약을 먹고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인데, 베커와 포스너는 둘 다 그런 종류의 외부효과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를 하고 있지 않다. "South Korea and other countries have tried to use laws to cut down on private tutoring and other investments that increase the likelihood that a student may succeed in gaining entrance to top universities, where the number of acceptances remains constant. Presumably, these countries would want to ban students from taking various stimulants that improve their performance, perhaps at a risk to their health, but such bans are difficult to enforce."라고 하는 걸로 봐서 베커 또한 한국의 입시 경쟁에 대해 어느정도 들은 바는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낳는 극단적인 외부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짐작을 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학생들이 각성제 대신 한약을 먹으며 공부하는 것은,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약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어쩌면 강남에서는 벌써부터 이 두 편의 글에서 언급되는 약물을 학생들에게 공급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확인할 길이 없으니 논외로 하자). 하지만 이와 관련된 사회적 현상들을 통해, 또한 이론적 개념화를 통헤 베커의 경제학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논증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 정도만을 기록해두는 선에서 일단 이 글을 마무리 짓도록 해야겠다.

3월 24일 KBS 여론조사

서울 노원병

진보신당 노회찬 32.6%

한나라당 홍정욱 25.6%

통합민주당 김성환 12.7%


서울 은평을

창조한국당 문국현 48.5%

한나라당 이재오 28.6%


서울 은평을에는 '전략적으로' 후보를 내지 않아 문국현에게 표를 몰아주면서, 노원병에는 기어이 후보를 내고야 마는 통합민주당의 행태가 우선 눈에 띄지만, 공교롭게도 김성환이 홍정욱의 표를 갉아먹는 현상이 발생함으로써 노회찬의 독주에 도움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종필을 떨어뜨리면서 '3김 시대'(나는 이 어휘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의 종지부를 찍었던 노회찬이, 이번에는 홍정욱 대신 지역구 의원이 되면서 '귀족정치'의 싹을 뽑을 수 있을지 심히 귀추가 주목된다. 좌파 정당의 행보는 일단 방해하고 보는 '개혁 진영'의 선택과 그로 인한 오비이락이야말로 진정한 관전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