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23

중산층은 생각하지 마

이런 노래를 들었다.



Hey girl what's wrong with your principles?
When you say that you're a vegetarian
Well, I've seen you eat meat a couple of times but
I swear I won’t tell anyone.

And how about the affection for me after I've been
Walking through hell for you?
What the hell did you expect me to do?

I still think that you're a bitch, talking Motherfucker
You’re the worst cock sucker
Swore that you were true to me
Yeah - in my dreams, in my dreams

Ah - I just won't rub it in...

Hey girl what's wrong with your principles?
When you say that you're a vegetarian
Well, I've seen you eat meat a couple of times but
I swear I won’t tell anyone.

And how about the affection for me after I've been
Walking through hell for you?
What the hell did you expect me to do?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다니엘 시레라(Daniel Cirera)의 노래라고 하고, 제목은 Motherfucker fake vegeterian ex-girlfriend라고 한다. 이택광 선배의 블로그에서 잘 들었는데, 위아래로 달린 노래에 대한 코멘트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예전에 가투 몇 번 나갔던 경력을 자랑 삼아, 술자리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걱정하고, 집에 돌아오면 과감하게 교육과 부동산을 위해 보수주의자로 변신하는 한국의 신흥 중간계급들에게 한번쯤 들려줘야할 노래"라는 것이 이택광의 언급이고, 그 밑에서는 젱가님이 "들으면 들을수록 한국 중간계급 또는 지난 10년 개혁세력의 행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고 응수한다. 나는 이런 시선이 너무도 불편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연애 이야기 아닌가. 중산층, 혹은 상류층 젊은 여성의 허위 의식과 마찰하는 노동 계급 출신 남성이 부르는, 제 아무리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고 해도 결국은 찌질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 노래를 들으면서, 한국 중산층과 '개혁정권 10년' 등을 떠올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약이다. 바로 그런 이데올로기적 선입견이야말로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노동계급적인 삶의 본질이 존재로서 드러나고자 하는 것을 은폐한다는 인상마저 든다(하이데거를 방금 읽은 티가 난다).

노동계급의 남성이 중산층 여성과 이성으로 만나면서 겪게 되는, 그 부대끼는 느낌을 이렇게 간단하게 '한국 중산층에게 들려주면 좋겠다'로 치환하는 과정을 되짚어보면, 결국 그 과정에서 이 노래의 진정한 주인공이어야 할 누군가가 또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찌질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틈을 주지도 않고, 비평가는 '중산층'을 위한 노래로 이 곡을 해석하면서 결국 그들에게 이 좋은 노래를 헌정해버린다. 곡이 지니고 있던 최초의 에너지는 온데간데 없고, 결국 남는 것은 그 흔하고 상투적인 '중산층의 허위의식 비판' 뿐이다.

그들에게 소비자로서의 능력과 의사가 있기 때문에, 중산층을 소재로 삼는 작품들은 넘쳐난다. 다만 그중에서도 중산층을 바라보는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온전히 내는 무언가는 제법 드물게 나오는 편이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그 드문 사례 중 하나이다. 그럼 대체 왜 여기서, 이렇게도 간단하게 '한국 중산층'에 대한 비아냥이 마치 노래 전체의 주제인양 등장해야만 할까? 전 여자친구를 저렇게 욕하는 바로 저 화자의 심정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을까? 너무도 뻔한 귀결이지만, 갑자기 펄프를 듣고 싶어졌다. 커먼 피플의 주제 의식도 이 노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산층의 허위의식'은 90년대에도 있었고 80년대에도 있었고 2010년대에도 계속 있을 것이다. 그것에 진저리를 내는 사람의 노래를 들으면서까지 중산층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비평적 상상력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She came from Greece, she had a thirst for knowledge
She studied sculpture at Saint Martin's College
That's where I caught her eye
She told me that her Dad was loaded
I said "In that case I'll have rum and coca-cola
She said "fine"
And then in 30 seconds time she said
"I want to live like common people
I want to do whatever common people do
I want to sleep with common people
I want to sleep with common people like you"
Well what else could I do?
I said "I'll see what I can do"
I took her to a supermarket
I don't know why
but I had to start it somewhere
so it started there
I said "pretend you've got no money"
but she just laughed
and said "oh you're so funny"
I said "Yeah
Well I can't see anyone else smiling in here
Are you sure
you want to live like common people
you want to see whatever common people see
you want to sleep with common people
you want to sleep with common people like me?"
But she didn't understand
she just smiled and held my hand
Rent a flat above a shop
Cut your hair and get a job
Smoke some fags and play some pool
Pretend you never went to school
But still you'll never get it right
'cos when you're laid in bed at night
watching roaches climb the wall
if you called your dad he could stop it all
yeah
You'll never live like common people
You'll never do whatever common people do
You'll never fail like common people
You'll never watch your life slide out of view
and then dance and drink and screw
because there's nothing else to do
Sing along with the common people
Sing along and it might just get you through
Laugh along with the common people
Laugh along although they're laughing at you
and the stupid things that you do
because you think that poor is cool
Like a dog lying in a corner
they will bite you and never warn you
Look out
they'll tear your insides out
'cos everybody hates a tourist
especially one who thinks
it's all such a laugh
yeah and the chip stain's grease
will come out in the bath
You will never understand
how it feels to live your life
with no meaning or control
and with nowhere left to go
You are amazed that they exist
and they burn so bright
whilst you can only wonder why
Rent a flat above a shop
Cut your hair and get a job
Smoke some fags and play some pool
Pretend you never went to school
But still you'll never get it right
'cause when you're laid in bed at night
watching roaches climb the wall
if you called your dad he could stop it all
yeah
You'll never live like common people
You'll never do whatever common people do
You'll never fail like common people
You'll never watch your life slide out of view
and then dance and drink and screw
'because there's nothing else to do
I want to live with common people like you.....

뮤직비디오 버전에서는 이탤릭 표시한 부분이 빠져있다. 대단히 직설적으로, 이 노래는 중산층에 대한 것이 아니라 중산층 여자를 바라보며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는 노동계급 남자의 것임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 부분. 마침 그게 온전하게 다 들어있는 버전을 발견하여 보너스로 덧붙여 놓는다. 코난 오브라이언의 토크쇼에 출연한 윌리엄 샤트너가 부르는 커먼 피플. 데니 크레인 같지가 않다.

2008-04-15

정치적 반목, 정책적 연대

"[여야 전수조사]한나라-대운하, 親李도 39명만 찬성"(경향신문, 2008년 4월 15일)

"[여야 전수조사]민주-한·미FTA, 8명 빼곤 결국 ‘찬성’"(경향신문, 2008년 4월 15일)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된 한반도 대운하는 박근혜의 화려한 승리와 함께 좌초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정책적 쟁점으로 전락한 한·미FTA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통과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 총선은 그 과정도 최악이었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도 최악으로 기록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내놓은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왜 한나라당이 찬성합니까?"라고 강기갑이 질문하던 그 순간, 이미 한국 사회는 돌아오기 힘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시 지역 출신으로는 천정배 당선자가 사실상 유일하게 반대했다. 결국 18대 국회의 민주당 당선자들 중에서 이념적·가치적으로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셈이 가능하다"니, 정말이지 말 다했다.

타인의 글을 읽는 자세

"사실 노정태의 반론에 대해서, 약간 우려되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이 모든 건 다 유시민 때문이다."로 요약될 수 있다. 그 견해에 동의하는 면이 없는 바는 아닌데, 결국에 노정태의 글은 이 투표율 하락의 책임도 유시민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단호한 글쓰기'로 진실을 호도하기", How may cuts should I repeat?, 2008년 4월 15일)

내 글에서 과연 저런 내용이 나왔던가? 유시민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최장집은 탄핵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는 선관위와 헌법재판소를 비판하였지만, 사태가 수습되고 유시민이 민주당을 파국으로 몰아가던 시점부터는 꾸준히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유지해왔다."

"아이추판다님은 "뭘 말아먹었는지 얼마나 말아먹었는지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집권여당이 정권말기에 당 간판을 내렸다면 하여간 무엇이든 심각하게 말아먹었다는 건 분명해보인다"라고 하지만, 구 열린우리당이 당 간판을 내리고 아작이 나게 된 것은 노무현 유시민을 비롯한 일부 정치적 급진주의자들이 지역감정의 해소라는 이념적 당위를 위해 정당의 존립 근거를 전부 뒤흔들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그 자체가 노무현 정권이 행정부 차원에서 벌인 실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시민과 이해찬 등 이른바 '친노' 계열과 정동영을 선두로 하는 신규 당권파들이 기존의 민주당 세력과 분당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의석을 갖게 된 '탄돌이'만으로 구성된 정당이 바로 열린우리당이었다. 망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최장집과 총선에 대한 의견들", 노정태의 블로그, 2008년 4월 14일)

'읽힐 수 있다'는 말에 방점을 찍어봐야 소용 없다. 한윤형은 내가 술자리에서 떠든 내용과, 그것을 정련하여 만든 글의 내용이 같으리라는 짐작 하에 제대로 된 독해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구 열린우리당이 간판을 바꿔 달고 통합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후 선거에서 참패하였고, 그 과정에서 투표율이 바닥을 친 것이 전부 유시민 탓이라고 나는 주장한 바 없다. 다만 열린우리당은 망할 만한 집단이었고, 더욱이 그들은 한나라당과의 정책적 차이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고, 그래서 '대안'을 찾지 못한 국민들이 투표장으로 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이 글에서 전제하고 있는 18대 총선에 대한 분석이다. 나는 한윤형이 나의 취지를 함부로 축소하고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열린우리당이나 통합민주당이 자신들의 계급적 지향성을 가감없이 드러내게 된 것, 그것도 유시민 때문이라고 내가 말하고 있는가? 노회찬 심상정이 지역구에서 낙선한 것도 유시민 때문이라고 내가 말하고 있는가? 총선 득표율이 50%도 안 되는 것이 유시민 탓이라고 주장하려면, 혹은 그런 주장을 암암리에 전제하려면 적어도 내가 기존에 쓴 글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글은 "이 모든 건 다 유시민 때문이다."로 요약될 수 있다"고 내 글을 넘겨짚는 모습을 보고, 다소 어이가 없어서 그의 글에 트랙백을 보내기 위해 이 포스트를 작성하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나는 술자리에서 필 받은 김에 하는 소리를 그대로 블로그에서 '의견'으로 제시할만큼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나는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후 "유시민 이 개새끼, 나라 꼴이 이게 뭐야?"라고 소리를 지르긴 했다. 하지만 그걸 '정치적 분석'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정치적인 분석을 담은 글에 고스란히 그 취지를 담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면 매우 곤란하다. 아, 곤란하다.

한국 민주주의의 현황과 '속류 최장집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혹은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 한 두 마디로 잘라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러셀이 이미 50여년 전부터 단언한 바와 같이, 행정부가 입법부를 이끌면 독재의 경향이 크고, 입법부가 행정부를 적절하게 견제하면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통찰에 대해서는 부가 연구가 존재한다.

최근 발표된 연구에서 피쉬와 크뢰닉은 각국 전문가 700여 명이 참여한 조사 분석을 통해, 세계 158개 나라 입법부의 권한을 비교하고 순위를 매겼다. 의회의 권한은 다음 네 가지 범주의 변수들을 사용해 측정했다. 행정부에 대한 영향력(국가 원수 탄핵권 등), 자율성(국가 원수의 의회 해산권 등), 고유 권리(전쟁 선포권 등),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능력(의회 직원을 고용할 예산 등)이 그것이다.
분석 결과, 강력한 입법부를 가진 나라일수록 훨씬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음이 밝혀졌다. 입법부가 취약하면 행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며, 특히 독재자가 권좌에 올랐을 때는 속수무책이 된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교수인 피쉬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만일 어떤 나라의 입법부가 대통령에 대항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12, "국회가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In Box〉,《Foreign Policy》한국어판, 2008년 3/4월호)

한편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제왕적 대통령제'라 불리는 중앙집권적인 정부 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령 Bertelsmann Transformation Index에 따르면 한국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South Korea, however, has not evolved into a liberal democracy. The country’s political system is characterized by a concentration of power in the presidential office, especially when the party of the president holds a majority in the parliament.(Bertelsmann Stiftung, BTI 2008 — South Korea Country Report. Gütersloh: Bertelsmann Stiftung, 2007.)

집권여당이 그냥 그 이름을 달고 있는 국회의원만을 과반수 이상, 또한 그 당에서 나온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확보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되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최장집 학파의 견해 중 '제도적 민주주의'가 이미 달성되었다는 부분에서 '제도적'에 괄호를 치고 나면, 남는 것은 아이추판다님과 같은 '민주주의 발전도상론'이나 홍준표식의 '민주주의 완성론'밖에 없다. 그 양자는 모두 최장집이 진행하고 있는 민주주의 담론을 속류화한 견해인데, 둘 다 정치적으로 그리 긍정적인 효과를 낳지 못한다. 최장집의 민주화 담론에 대해 섬세한 독해가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2008-04-14

최장집과 총선에 대한 의견들

최장집은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인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바라던대로 총선에서 심상정과 노회찬이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인 한국 사회가 바로 눈앞에 존재하고, 그의 말을 들어주는 지식인 집단과 대중을 확실히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낙후되고 또한 소외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과 비교해볼 때, 최장집이 누리고 있는 '지적 탐구의 직접성'은 부러움을 살만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그는 노무현 정권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것'을 진작부터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최장집은 탄핵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는 선관위와 헌법재판소를 비판하였지만, 사태가 수습되고 유시민이 민주당을 파국으로 몰아가던 시점부터는 꾸준히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유지해왔다. 그 중 많은 이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정권이 한나라당으로 바뀌어도 상관 없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민주적이다'라던 그의 대선 관전평이다. 수많은 '노빠'들이 그 시점에 최장집을 헐뜯기 위해 안달이었지만, 한국에서 가장 행복한 지식인이며 동시에 가장 존중받는 학자 중 한 사람인 그에게는 이빨조차 먹히지 않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이 피상적인 차원에서 소화될 경우 낳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선거 결과"(Null Model, 2008년 4월 10일)라는, 아이추판다님이 쓴 글을 읽어보자.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보더라도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다"라고 자신있게 선언하며 글을 시작한다. 그 내용은 앞서 말한 최장집의 사고방식을 이번 총선에까지 확대 적용한 것이다. 그 논지는 "통합민주당은 확실히 말아먹었고 아직까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이렇다할만큼 말아먹은 일도 없다면(말아먹을 시간도 없었지만) 권력이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넘어가지 않는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딘가 고장나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라는 문장에 잘 요약되어 있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이 대선 역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과 함께 이명박을 당선시켰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최장집이 비춘 진실의 햇살은 마치 장농 밑의 바퀴벌레들에게 사정없이 내리쬐는 형광등 불빛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 그 단순한 공식을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아이추판다님은 "뭘 말아먹었는지 얼마나 말아먹었는지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집권여당이 정권말기에 당 간판을 내렸다면 하여간 무엇이든 심각하게 말아먹었다는 건 분명해보인다"라고 하지만, 구 열린우리당이 당 간판을 내리고 아작이 나게 된 것은 노무현 유시민을 비롯한 일부 정치적 급진주의자들이 지역감정의 해소라는 이념적 당위를 위해 정당의 존립 근거를 전부 뒤흔들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그 자체가 노무현 정권이 행정부 차원에서 벌인 실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시민과 이해찬 등 이른바 '친노' 계열과 정동영을 선두로 하는 신규 당권파들이 기존의 민주당 세력과 분당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의석을 갖게 된 '탄돌이'만으로 구성된 정당이 바로 열린우리당이었다. 망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앞서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최장집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지식인이며, 동시에 식자층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아이추판다님이 보여주고 있는 사고의 궤적 또한, 일종의 '속류 최장집주의'라고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의 정교한 논변은 그 자체로서 섬세한 맥락 하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듯 단순하게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례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이 부분은 책이 없어서 정확한 인용이 불가능한데, 최장집은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당정치의 활성화,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당 구조 개편 등을 제시한 바 있다. 그렇다면 구 열린우리당 계열의 통합민주당 의원들이, 단지 자신들이 당권을 점하기 위해 벌인 정치적 투쟁과 그것이 불러온 지지층의 이탈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차원의 해석이 필요하다. 현재 벌어져버린 한나라당의 과반수 의석 점유를 단지 '지난 정권의 실정' 탓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노무현 정권 계속 심판론'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급감한 투표율이 말하는 바와 같이,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지도 않고 그냥 정치적 의사 표현을 포기해버렸다.

투표율의 하락에 대해서도 아이추판다님과 같이, 그것을 모두 '건강한 민주주의'의 발로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번 총선의 가장 큰 특이점 중 하나는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내놓는 공약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정동영과 정몽준이 맞붙은 동작을의 경우, 두 후보 모두 동작 지역에 뉴타운을 건설하겠다며 목청을 높였다. 다른 곳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당 후보와 여당 후보가 모두 뉴타운을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울 때, 여당 후보가 이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국민들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건 괜찮을 것이다'라고 민주주의적인 낙관을 품고 있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나라가 망하건 말건 우리 집값부터 올리고 보자'는 근시안적인 개발 환상에 젖어있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더욱 정확하다. 이번 총선이 얼마나 '뉴타운 선거'였는지를 알고 싶다면 KBS 스페셜 "노회찬과 상계동 사람들"의 시청을 권한다. 후마니타스 박상훈 주간의 말마따나 이번 선거는 민주화 이후 최악의 선거였다.

여기서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현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진지하게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sonnet님은 "총선 단상"(a quarantine station, 2008년 4월 10일)에서 "지금 반 한나라당 성향의 사람들은 어짜피 친박세력이나 선진당은 다 그나물의 그밥이라고 평면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친박세력의 한나라당 복당을 허용하면 (지금도 헐거운) 히데요시의 당 장악력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주장을 편다. 그 밑에 달린 리플들을 보더라도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사태를 지나치게 입체적으로 보고자 함으로써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및 범 보수 진영을 관통하는 계급적 이익을 전혀 바라보지 못한다. 나름대로 개혁적이라고 표방하고 있던 열린우리당? 아, 열린우리당(당명을 하도 자주 바꿔서 혼동이 있었다)이 겉으로는 그렇게 싸우다가도, 비정규직법 개악에 있어서만큼은 일치단결하여 일사천리로 국회 통과시키던 광경을 기억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물론 박근혜와 이명박이 박터지게 싸워서 이명박 맘대로 운하를 못 팔 수도 있다. 하지만 한미 FTA는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고 노동법은 이번 국회 내에 한층 더 개악될 것이며, 현재의 파견근로법 따위가 나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이상의 최악으로 나아갈 것임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범 한나라당 계열에서 벌이게 될 이러한 대대적인 악법의 연속에 맞설 수 있는 방안은, 현재로서 전혀 없다.

다시 최장집으로 돌아가보자. 그가 노원과 덕양을 오가며 심상정과 노회찬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번 선거에서 두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한국의 민주주의 그 자체에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노회찬과 심상정은 삼성의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고 공인된, 매우 드문 정치인이다. 그들이 국회의원으로서 보여준 실력과, 특히 노회찬이 가지고 있었던 전국적인 단위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가 한국 정치의 드문 희망이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지막지한 '시장주의'의 질주를 막기 위해서는, 그와 반대되는 방향의 사회적 합의가 구성되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정치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나는 지난 글을 통해 노회찬이 지역구 차원에서 또한 공약 차원에서 실패하였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그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정치적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색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노회찬과 심상정은 그러한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재였다. 그런 그들이, 비록 선전하였지만 국회에 입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행보에 대단히 짙은 암운을 드리우는 사건이다. 한국의 현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하는 최장집이, 과연 언제까지 '행복한 지식인'으로만 살 수 있을지, 이제 의문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