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27

고립과 연대

1.

6월 25일, 경복궁역 1번 출구 패밀리마트 앞. 애초에 경복궁역에 모이는 것부터가 잘못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경복궁역을 가로지르는 차도가 시위대를 양쪽으로 분산시켰다. 오후 8시경 도착한 나는, 패밀리마트가 있는 1번 출구에서 친구와 만났고 상황을 주시했다. 정말 좋지 않았다. 전경들은 인도까지 올라와있었다. '불법집회를 당장 해산하라'고 말은 하는데, 해산한 다음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청와대 방면에서 전경 중대 하나가 내려왔다. 스크럼 짤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쪽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버텼다. 50여분 정도 그럭저럭 잘 해나간 것 같은데, 뒤쪽에서도 진압이 들어왔다.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사기가 떨어졌고 체력도 많이 소진되었다. 내 왼쪽에서 스크럼이 깨졌고, 전경들이 밀고 들어와 바로 내 옆에 있던 사람까지 연행해갔다. 손을 잡았지만 미끄러졌고, 나는 지하철역으로 돌아와 친구를 다시 만난 후 숨을 골랐다. 광화문으로 옮겨간 후 그날 3시까지 집회에 참여했다.

내가 대책회의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자기들이 '집행부' 노릇하고 싶어서 방송 틀고 노래에 춤에 덩실덩실 노는 것도 다 좋다. 하지만 앞장서서 나서고 있는 사람들이 고립되도록 방치하는 것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고립으로 인한 공포심이야말로 시위대를 해산하고자 하는 경찰이 노리는 바로 그것이다.

경복궁에 고립된 사람들을 구하러 가자는 목소리를, 교묘한 방식으로 묵살했다는 제보가 한 둘이 아니다. 현장에서 그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칼라TV 중계를 통해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그 광경을 지켜봤다. 게다가 새벽 무렵, 서대문에서 전경들이 밀려들어오던 순간에도 그렇다. 투썸플레이스 방향으로 차를 몰고 왔으면 계속 거기서 버티거나, 방송을 끄고 조용히 광화문으로 도망갈 것이지, 계속 방송을 하면서 차를 빼니 시위대가 그것을 따라가게 되는 것 아닌가.

분통이 터져서 항의를 하러 동행인이 달려갔다. 그러자 방송차량 주변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던 '일반 시민'들이, 누구에게도 답변을 할 수 없도록 돌려가면서 한 마디씩 툭툭 던지더라. 하나같이 말로는 '나는 대책위는 아니지만' 이라고 단서를 붙이는데, 대책위의 입장을 너무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방송차량에 고압전류가 흐르고 있어서 살수에 맞으면 안 된다나? 누가 당신들더러 앞장서서 방송 해달랬나? 후퇴를 하더라도 시끄럽게 하지 말라 이거다. 꺼질거면 닥치고 꺼지라고. '님을 위한 행진곡' 틀면서 도망가면 후퇴가 전진으로 바뀌더냐?


2.

현재 가장 두려운 것은,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고립되고 있다는 불안감에 잠식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일을 수도 없이 겪게 된다. 안전한 곳에 앉아서,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노래 틀면서 지휘부 행세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대책위로부터도, 고립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에 빠져들면 진다. 비단 이 시위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국민들이 무기력에 빠져들어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있으면, 선거에서 거의 다 이기고도 정권 탈환을 못 하는 수도 있다. 짐바브웨가 바로 지금 그렇다.

짐바브웨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뉴스위크 인터넷판이 24일 대선 결선투표를 앞두고 야당 후보가 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등 혼란을 겪고 있는 짐바브웨의 현지 르포를 실었다. 뉴스위크 기자의 눈에 비친 모습은 기이한 ‘평온함’이었다.

로드 노드랜드 기자가 지하 조직을 통해 어렵사리 잠입한 곳은 짐바브웨 제2의 도시 블라와요. 실업률이 85%에 이른다는데 거리에는 굶주린 사람이나 거지가 없었다. 교통체증도 없고 거리도 깨끗했다.
"짐바브웨, 빵 한덩어리 사는데 3시간 ‘줄서기’"(경향신문, 2008년 6월 24일)


1차 투표에서 현직 대통령인 무가베를 앞섰지만 50%를 넘기지 못해 결선투표로 가게 된 짐바브웨에서, 무가베는 무자비하게 야당 지지자 및 지도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금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야당 후보가 네덜란드 대사관을 통해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국민들은 의외로 대단히 평온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노드랜드가 본 짐바브웨 사람들의 주된 활동은 ‘줄서기’였다. 시내 빵집마다 빵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쥐새끼를 때려잡자'는 사람들이, 아파트 값이 올라가는 것을 기대하며 주택청약 줄서기를 하고 있는 한국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여기나 거기나 본질적으로는 같다. 자기 손으로 벌어서 삶을 꾸리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오직 '줄서기'에 매달려있는 동안 정부는 제멋대로 정책을 펼쳐나간다. 그래놓고서는 다들 '나는 찍지 않았읍니다'라고 항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줄서기'를 그만 둬야 한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들 스스로가 한 사람의 노동자라는 것을 절실하게 자각하는 의식적 전환이 필요하다.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역설적 기반이 되고 있는 셈이다. 노드랜드 기자는 “무가베 정권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보도가 6년째 이어지고 있지만 무가베는 ‘짐바브웨는 붕괴되지 않는다’고 교만하게 말하고 있다”며 “지금까지는 무가베 말이 옳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이 5년째 10% 이하"라는 보도가 5년째 이어졌지만, 아무튼 대운하 공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싶지 않다면, 아프리카 플레이어를 끄고 아고라 띄워놓은 웹브라우저 창을 닫자. 광화문의 시민들은 현재, '일반 시민'들 속에 고립되어 있다.


3.

오늘은 경찰이 매우 이른 시각부터 진압에 나섰다고 한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지키기 위한 방편일 가능성이 크다. 숫자가 적지 않아서 당장 집단 연행을 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시위가 어떤 방향으로 튈지에 대해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결국 우리는 다시 '연대'라는 해묵은 가치를 꺼내들 수밖에 없다. 금토일 사흘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더 강하게 연대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모두 거리에서 만납시다.

2008-06-24

크루그먼 칼럼 번역, 그 외 여러 가지

Bad Cow Disease


"메리는 작은 양을 길렀고/ 그 양이 아프다는 것을 봤을 때/ 그것을 패킹타운(Packingtown)으로 보냈고/ 그 위에는 닭고기 라벨이 붙었답니다."

이 짧은 동요는 업튼 싱클래어(Upton Sinclair)가 1906년 미국의 육류 포장업계의 실상을 폭로한 "정글(The Jungle)"의 내용을 탁월하게 요약하고 있다. 싱클래어의 고발은 테오도어 루즈벨트가 청정 음식 및 약물법(Pure Food and Drug Act)과 고기 검사법(Meat Inspection Act)을 통과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그리하여 다음 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미국인들은 그들의 식품의 안전을 검사하는 정부를 믿었다.

최근, 그러나, 언제나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식품 안전 문제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상한 시금치, 독성을 띈 땅콩 버터, 그리고, 근래에는 살인 토마토의 공격까지 있었다. 미국 식품 규제의 신뢰도 감소는 심지어 대외 정책의 위기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친 미국적인 수상(NYT의 실수. 6월 20일 내용을 수정하였음)이 2003년 광우병이 발견된 이후 금지했던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하겠다고 결정하자 그에 대한 대규모의 반발이 일어났다.

대체 어떻게 해서 미국은 "정글"로 돌아가게 되었을까?

그 문제는 이념에서 출발하고 있다. 미국의 하드 코어 보수주의자들은 미국 도금시대(Gilded Age)를 오래도록 이상화하면서, 동시에 그 뒤를 이은 모든 시대를, 뉴딜 뿐 아니라 진보시대(Progress Era-대공황 극복기)마저도 진정한 자본주의의 길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여, 세금 반대론자인 그로버 노퀴스트(Grover Norquist)에게 그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미국이 "테디 루즈벨트, 그 사회주의자가 가져온 소득세, 사망세, 규제, 그 모든 것들"로부터 미국을 되돌려놓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고 밀턴 프리드먼(Milton Freidman)은 식품의약청을 없애자는 요청에 동의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불필요하다. 사기업들은 그들의 명성을 위협하는 공공 안전의 위험 유발을 회피할 것이며, 치명적인 집단 소송을 회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다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프리드먼은 변호사를 자유 시장 경제의 수호자로 보았다.)

이러한 하드 코어 규제 반대론자들은 정치적 극단주의자들 중 일부일 뿐이었지만, 보수주의의 현대적 부흥 운동과 함께 그들은 권력의 통로로 들어왔다. 그들이 FDA를 없애거나 육류 검사 제도를 제거하는데 충분한 표를 얻은 적은 없지만, 그들은 식품 안전 보장을 무력하게 만드는 로비 집단을 만들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그 로비 단체에는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을만한 자원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 그 작업 중 일부분이었다. 예컨대 과학의 발전과 세계화로 인해 FDA의 업무는 그 전에 비해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1994년에 비한다면, 그 로비 집단은 실질적으로 적은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고 있는 구조일 것이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견되었던 2003년, 농림부 장관은 앤 M. 비네만(Ann M. Veneman)이었는데, 그는 전직 식품 산업 로비스트였다. 그리고 위협을 체계적으로 축소하고 추가적인 검사 요청을 거부한 농림부의 대응은, 축산업계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2004년 놀라운 결정이 나왔다. 켄사스의 한 축산업자가 자신이 기르는 소를 검사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일본으로의 수출을 재개할 수 있도록 말이다. 부시 정권이 이러한 자율 규제 사례를 쌍수 들어 환영했으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허가는 나지 않았다. 같은 요구를 소비자들이 하게 된다면 그 규제를 따라야 할 다른 육류 생산자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압력이 높아지던 그 때, 패거리 자본주의 놀음은 자유 시장에 대한 신앙 고백의 가르침을 훈계하듯 설파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과적으로, 농림부는 검사를 확장했고, 그 시점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금지했던 나라들은 다시 시장을 개방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쇠고기 문제가 덜떨어진 외교관에 의해 상처받은 한국인들의 국가적 자존심과도 연결되어버린 만큼, 그 불신 중 일부는 비이성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을 비난하기란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축산업계에 대한 농림부의 엄호사격은 아군을 쏘는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 잠재적인 외국 구매자들이 우리의 안전 기준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쇠고기 생산자들은 가장 중요한 대외 시장에 수 년간 접근하지 못한 것이다.

부시 정부가 효율적인 규제를 위해 벌인 다른 행동들에 대해서도 같은 관점에서 비판이 가능하다. 가장 도드라지는 것이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에 대한 일체의 규제를 제거해버린 정책이다. 이것은 과잉 대출보다 더 큰 부담을 금융업계에 전가시킴으로써 서브프라임 위기의 토대를 마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렇다. 효율적인 규제에 실패하는 것은 소비자뿐 아니라 기업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이다.

식품의 사례로 돌아와보면, 우리의 건강과 우리의 해외 시장을 위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테디 루즈벨트, 그 사회주의자 이후에 우리가 걸었던 길을 회복하는 것이다. 미국의 식품이 안전하다는 보증을 업계에 돌려줘야 할 때이다.
(폴 크루그먼, "Bad Cow Disease", The New York Times, 2008년 6월 13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에 갔다가 돌아온 지금, 우리가 6월 13일에 올라온 이 칼럼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자율규제'는 이미 한 번 실패한 바 있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켄사스의 한 축산업자가 자신이 기르는 소를 검사할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일본으로의 수출을 재개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허가는 나지 않았다. 같은 요구를 소비자들이 하게 된다면 그 규제를 따라야 할 다른 육류 생산자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한국의 경우에 적용해보자. 한국에 수출되는 쇠고기를 위한 QSM은 모든 축산업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그 도장을 찍어주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아무튼 저런 짓을 하면 분명히 추가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 특히 현대 산업 사회에서는 음식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미비하므로, 소비자들은 가급적이면 자신이 먹는 식품이 안전하다고 보증되어 있기를 원하지, 그 반대를 바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QSM같은 새로운 '자율 규제'가 도입되면, 한국에 곱창을 수출하고자하는 축산업자들은 그러한 자율 규제를 따르고자 하겠지만, 위 경우처럼 다른 업자들의 반대와 맞닥뜨릴 공산이 크다. 정부의 추가협상안은 결국, 이미 한 번 실패한 사례를 반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이다.

문제는 이 칼럼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 부분을 인용하여 정부의 추가협상안을 비판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수많은 한국인들의 관심은 오직 "한국인들을 비난하기는 어렵다"라는 한 구절에만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영어로 된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을 거면 대체 뭐하러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난리를 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나는 이러한 '한 줄 인용'이 대단히 불편하다.

크루그먼의 이 칼럼은 기본적으로 '미국은 시장 내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한국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크루그먼, "한국인들 비난하기 어려워""라고 기사 제목을 따는 식의 저널리즘을 대체 언제까지 보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미국 쇠고기 그 자체의 안전성이 아니라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의 '신뢰도'가 문제라는 논점을 제대로 잡아, 이쪽에서 먼저 의견을 펼쳐나갈 수 있는 그런 저널리즘은 눈 씻고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경향신문과 프레시안 정도가 쇠고기 문제에 대해 심층적인 보도를 펼치고 있지만, '모든 규제는 악이다'라는 주문에 휩싸여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것이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크루그먼과 같은 논지는 진작에 이쪽에서 먼저 나왔어야 한다.

미국 내에서 과도하게 규제를 풀어버림으로써 도리어 수출이 막히고 있는 것은 비단 한국 시장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특히 EU에 수출하고자 하는 미국 업자들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 마이에미 대학교의 경제학과 조교수인 Bill C의 설명이다. "The EU Is Watching Out for You"(Twenty-Cent Paradigms, 2008년 6월 14일)라는 포스트를 통해 그는 규제와 수출의 미묘한 상관관계를 설명한다. "정부의 효율적인 간섭이 없다면, 소비자들은 잠재적인 위험 수준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구매하는 물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완전하게 알고 있다면 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데 EU의 소비자들이 뭐가 들어있는지 알 턱이 없는 미국 물건, 특히 화학 생산물을 구입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그 시장을 노리기 위해 미국인들은 '자율적으로' 품질 보증 등의 제도를 택할 수 있겠는데, 문제는 '규모의 경제'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할 경우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규제에 맞추기 위해 온 산업이 안전 기준을 맞출 때보다 개별 생산자가 감당해야 하는 생산비가 높아진다는 데 있다. 즉, 품질은 똑같고 가격은 더 비싼 물건을 미국은 EU에 수출하게 되는 것이다. 팔릴 턱이 없다.

물론 한국의 쇠고기 가격은, 미국 내에서 생산비가 다소 높아진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하지만 '자율 규제'로 인한 비용은 결국 한국 소비자들에게 전가된다.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는 그로 인해 '값은 어중간하게 비싸지만 질이 좋은지는 딱히 알 수 없는' 이상한 물건이 되고 만다. 그럼 대체 왜, 한국의 영세 축산농가를 괴멸로 몰아가는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신이 없어서 번역은 엉망이고 글도 횡설수설인데, 그래도 내용을 정리해보자. 첫째, 크루그먼 교수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이미 자율 규제를 시험해봤지만, 시장 논리에 의해 실패했다. 둘째, 이런 중요한 정보를 한국 언론들은 거의 다루지도 않고 있다. 그저 "한국인들은 나쁘지 않아요"라는 말에만 주목하고 있을 따름이다. 셋째, 과도한 규제 완화로 인하여 발생하는 경제적 문제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문제이며 미국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다. 대체 왜 한국 정부가 나서서 미국의 짐을 대신 떠맡아주는 것일까? '이면합의가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이쯤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하다.

이 문제는 단지 광우병과 식품 안전만에 대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부시 행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다이 하드 규제 완화가 논점이 되듯, 한국인들은 여기서 고기 타령 외의 논점을 더 끌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수준 문제가 일단 걸린다. 미국 내에서 이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전혀 추적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하나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자율 규제'의 실패 사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해법이라고 들고 온 협상단에도 문제가 있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찾고, 미국산 쇠고기에서 출발한 이 문제의 끈을 다방면으로 이어갔으면 한다.

2008-06-23

7/30, The Desperate People's Vote

이명박이 '실용주의자'이긴 한가보다. 촛불시위가 50일이 넘어가도 묵묵부답이다. 지지율이 바닥을 뚫고 유전을 파도 반응이 없긴 마찬가지이다. 그런 이명박이라 하더라도 재보선 결과에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명박은 우리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실용주의자'인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실질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닌 한,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그의 '실용주의'는 자본주의의 법칙과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그것도 실용주의이긴 실용주의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대규모 파업이 뛰따라야 한다고 줄곧 말해왔다. 기업들에게 타격이 가지 않는 한 이명박은 절대 국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광고 압박 운동이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지점도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대중운동화된 안티조선'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뿐이지만, 국민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절망적인 현 상황에서 그것은 나름대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현 사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영어 단어를 차용해야 한다. 'desperate'가 바로 그것이다. 'desperate'가 가지는 첫번째 뜻은 '절망적'이다. 전경들과 수십일 넘도록 대립하고 있는 것이, 극도로 제한된 효과밖에 가져올 수 없음을 우리는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토요일 밤, 시민들은 모래주머니를 쌓고 전경 버스 위에 올라가 깃발을 흔들어 보았다. 밧줄 걸린 닭장차가 쑥 하고 딸려나올 때에는, 말 그대로 앓던 이가 빠지는 듯 속이 후련했다. 일요일 밤에는 진보신당측의 변호사 한 명이 전경들의 체포가 불법임을 밝혀내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에게는 씨도 안 먹힌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명박은 뒤틀린 실용주의자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실질적인 타격을 입히지 않는 한 촛불시위를 통해 표출되는 국민들의 열망이 정치적으로 소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노동조합에 속해있지 않은 노동자들, 혹은 스스로에게 '일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7월 총파업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말이 영 마땅찮게 느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표로 심판하고 싶지만, 선거가 너무 멀다.' 하지만 서울시민들을 위한, 아주 중요한 선거가 눈 앞에 있다. 7월 30일은 사상 최초로 서울시교육감 직선투표가 열리는 날이다.

서울시교육감은 서울시의 모든 초등, 중등교육을 책임지는 직책이다. '교육 대통령'이라고 보면 된다. 서울시교육감이 집행하는 예산만 해도 총 6조원에 달하는데, 이것은 부산시 전체의 예산에 육박한다. 5만 5천여명의 교직원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정독도서관, 남산도서관 등 서울 시내 17개 시립도서관까지도 직속기관으로 두고 있다. 또한 교육감은 외국어 고등학교를 추가 설치할지 여부를 실질적으로 결정한다.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교육감에게 0교시 수업을 철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실질적인 권한은 개별적인 학교장들이 가지고 있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육감은 학교장 인사권을 지니고 있다. 일부 소신있는 학교장이라면 교육감이 뭐라고 하건 신경 쓰지 않고 0교시 수업을 밀어붙일 수 있겠지만, 공직사회의 특성을 염두에 둘 때 교육감이 바뀌면 적어도 서울시에서는 0교시 수업이 사라진다고 보면 된다. 청소년들에게 아침잠을 돌려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이 모든 교육감의 법률적 권한은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제20조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20조 (관장사무) 교육감은 교육·학예에 관한 다음 각 호의 사항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1. 조례안의 작성 및 제출에 관한 사항
2. 예산안의 편성 및 제출에 관한 사항
3. 결산서의 작성 및 제출에 관한 사항
4. 교육규칙의 제정에 관한 사항
5. 학교, 그 밖의 교육기관의 설치·이전 및 폐지에 관한 사항
6. 교육과정의 운영에 관한 사항
7. 과학·기술교육의 진흥에 관한 사항
8. 평생교육, 그 밖의 교육·학예진흥에 관한 사항
9. 학교체육·보건 및 학교환경정화에 관한 사항
10. 학생통학구역에 관한 사항
11. 교육·학예의 시설·설비 및 교구(敎具)에 관한 사항
12. 재산의 취득·처분에 관한 사항
13. 특별부과금·사용료·수수료·분담금 및 가입금에 관한 사항
14. 기채(起債)·차입금 또는 예산 외의 의무부담에 관한 사항
15. 기금의 설치·운용에 관한 사항
16. 소속 국가공무원 및 지방공무원의 인사관리에 관한 사항
17. 그 밖에 당해 시·도의 교육·학예에 관한 사항과 위임된 사항


이 역사적인 선거가 벌어지는 날이 바로 7월 30일이다. 수요일이고, 임시공휴일이 아니며, 따라서 투표율이 낮을 수밖에 없다. 10%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2월 부산시교육청 교육감 선거 투표율은 15.3%에 불과했다고 한다. 즉 한나라당에서 밀어주는 후보의 조직표가 활약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교육감은 행정직이기 때문에 정당의 추천을 받거나 해서 나오는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는 명백하다.

공정택 현 교육감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촛불 집회의 배후는 전교조"라는 발언을 한 바로 그 사람이다. 서울시의 교육 정책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던 것은 오직 이명박 때문만이 아닌 것이다. 그런 공정택 현 교육감은 이미 3월부터 "서울지역 전체 초·중·고교 학부모에게 ‘교육감 서한문’을 발송"하는 등, 사전선거운동으로 의심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공정택이 아닌, 진보진영의 유일후보인 주경복 건국대학교 교수를 서울시교육감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실 나는 주경복 교수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믿음직한 사람들이 그를 최초의 민선 서울시교육감으로 만들기 위해 발벗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촛불의 방향에 대한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하기도 했지만 사전선거운동의 험의를 뒤집어쓸 수 있기 때문에 발언을 자제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도 주경복 교수이다. 물론 전교조도 함께하고 있다(참고기사). 나는 그를 지지한다.

7월 30일 투표가 불가능한 사람들은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부재자투표 등록을 한 후, 24일에서 25일까지 이틀간 부재자투표를 할 수 있다고 한다(교육감 선거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여기). 부재자투표는 군인 뿐 아니라, 선거일에 투표를 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이니만큼, 출근하였다가 잠시 투표하러 집에 다녀올 수 없는 직장인들에게 특히 요긴한 제도가 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미친 행보를 실질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7월 30일에 투표를 하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부재자투표라도 하도록 하자.

'desperate'의 첫번째 뜻은 '절망적'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필사적'이라는 의미도 숨어있다. 한국어로 1:1 번역이 되지 않는 이 단어는, 이명박 정부와 맞서고 있는 시민들의 현 국면을 너무도 잘 드러내준다. 우리는 절망적인만큼 필사적이다. 전경버스로 막히면 돌아갔고, 명박산성으로 막히면 그 위에 올라갔으며, 물대포에 맞아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신문지를 모아 불을 붙였다.

또한 이 시위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는 청소년들을 보라. '아이들이 무슨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짜증나는 구호에, 그들은 '어른들이 무슨죄냐 청소년이 지켜주자'고 맞받아친다. 그들이 꾸준히 출석하며 촛불시위의 동력이 되고 있다. 만 19세 넘은 성인들은 모두 그 청소년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바로 7월 30일 서울시교육감 선거이다. 그것은 동시에 이명박의 미친 교육정책에 결정적인 태클을 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절망적이지만, 동시에 필사적이다. 7월 30일에 이기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절망적인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고, 그 위에 필사적인 노력을 덧붙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희망을 쟁취해낼 수 있다.

2008-06-21

이것 저것

1. 대책회의의 행동 중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긴 하다. 하지만 '48시간 국민행동'을 제안해놓고는, 10시 30분에 시청 광장에서 "우리 내일 만나요"라며 해산해버리는 건 대체 무슨 발상인지 지금까지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아주머니가 커다란 쇼핑백에 싸들고 온 은박 돗자리가 민망해보일 지경이었다.

2. 최장집 교수의 고별강의에 다녀왔다. 한국의 현실정치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인식적 탁월함과, 그것을 담론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실천적 한계가 동시에 잘 드러난 강연이었다고 생각한다. 필기한 내용을 정리해야겠다.

3. 이문열이 내놓는 정치적 발언들은 결국 책 팔아먹으려고 벌이는 노이즈 마케팅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택광 선배의 지적은 상당히 적절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문열을 비판하는 것은 그리 효용 있는 일이 되지 못한다. 2008년의 촛불 혁명이 어디로 향할지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나는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새물결, 2006)를 읽었다. 이것만으로도 내가 어떤 서평을 쓸지, 그것을 통해 이문열을 어떻게 비판할지에 대해 상당히 큰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현재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헌 논의가 매우 위험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기사를 레디앙에서 발견하였다. "개헌? 초가삼간 태운다!"(윤현식, 레디앙, 2008년 6월 20일)의 논의 중 특히 중후반부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어떻게 소화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문제의식 또한 나는 필자와 공유하고 있다.

5. 잠시 광고 말씀. 7월호 GQ가 나왔다. 최근 나온 GQ중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오래된 아파트에 대한 특집은 정말이지 눈이 번쩍 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자료 삼아 한 권 사야 한다. 박상륭 인터뷰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나이 많은 문학인을 이토록 멋지게 다루어준 사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GQ 7월호에 실린 박상륭은 흡사 변희봉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사진과 인터뷰가 실려있다. 자세한 내용은 서점에서.

2008-06-16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며 시위대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노래하고 있던, 문제의 5월 31일 밤. 그런 시위가 있건 말건,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은 제18대 국회의 첫 번째 법안을 발의했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1가구 1주택 보유자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면제였다. 시가가 1억이건 100억이건, 1가구 1주택이면 종합부동산세를 내지 않도록 하는 법안이, 우리가 광화문 사거리를 뚫고 안국동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 상정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노래하며 광장에서 빈둥거리는 6월 2일 이후의 '촛불시위'와, 그러한 종류의 '참여'에 과다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부 네티즌들에게 내가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들이 거리에서 자신들의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6월 10일 100만 명이 모인 이후 한국의 쇠고기 문제가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미국도 비로소 눈치챘고, 그에 따라 폴 크루그먼을 비롯한 다양한 논자들이 여러 의견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위의 목적이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탈당파들의 복당을 일부 수용하면서 한나라당은 명실공히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당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가 당권을 잡고, 현재로서는 분위기가 많이 죽었지만, 총리까지 된다면 그 결과는 실로 파멸적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지난 포스트에서 "죽 쒀서 개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굳이 더러운 비유를 써서 말하자면,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여 죽는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다. 촛불시위가 불타오르고 있거나 말거나 한나라당은 종합부동산세의 적용 대상을 축소하려 들 것이고, 사학법을 더욱 나쁜 방향으로 개정할 것이며, 기득권층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은 헌법 제119조 2항을 슬그머니 빼는 쪽으로 개헌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추상적인 구호만이 가득한 촛불시위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헌법 제1조 1항이 상징하고 있는 바는 매우 크다. 하지만 구체적인 차원으로 내려와보면, 대한민국의 경제 정의를 지켜온 것은 사회적 시장경제질서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119조 2항이다. 자유 시장경제질서 원칙을 정하고 있는 동조 1항과 함께, 119조 전체를 우선 살펴보자.

제119조

1.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2.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이 당연한 말이 헌법에 써있느냐 마느냐가 낳는 차이는 매우 크다. 이번 촛불집회와 가장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주제를 통해 그 영향의 일부를 살펴보자. 흔히 '신문고시'라 불리는 '신문업에있어서의불공정거래행위및시장지배적지위 남용행위의유형및기준'에 대한 헌법소원에서, 재판부는 바로 저 119조 2항을 근거로 신문고시와 그에 따른 무가지 경품 배포가 합법임을 확인하였다(2002. 7. 18. 2001헌마605 전원재판부).

신문고시에 따르면 신문판매업자는 신문구독자가 내는 1년 구독료의 20%를 상회하는 무가지 혹은 경품을 제공할 수 없다. 신문고시는 그러한 행위를 불공정 거래로 규정하고 있다. 규정에도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신문업에있어서의불공정거래행위및시장지배적지위남용행위의유형및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 제2001-7호) 제3조(무가지 및 경품류 제공의 제한) ①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행위는 법 제23조(불공정거래행위의 금지) 제1항 제3호 전단에 규정하는 “부당하게 경쟁자의 고객을 자기와 거래하도록 유인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1. 신문발행업자가 신문판매업자에게 1개월 동안 제공하는 무가지와 경품류를 합한 가액이 같은 기간에 당해 신문판매업자로부터 받는 유료신문대금의 20%를 초과하는 경우

2. 신문판매업자가 독자에게 1년 동안 제공하는 무가지와 경품류를 합한 가액이 같은 기간에 당해 독자로부터 받는 유료신문대금의 20%를 초과하는 경우. 이 경우는 구독기간이 1년 미만인 때에도 같다.

3. 신문발행업자가 직접 독자에게 1년 동안 제공하는 무가지와 경품류를 합한 가액이 같은 기간에 당해 독자로부터 받는 유료신문대금의 20%를 초과하는 경우


이것은 우리가 흔히 '조중동 찌라시'들이 벌이는 패악 중 하나로 지목하는 바로 그 행위를 막는 것으로, 언론 정의를 실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이에 신문 독자인 청구인 1과 신문 배급소를 운영하는 청구인 2가 공동으로 신문고시의 위헌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재판소의 판결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우선 신문 독자는 신문고시로 인해 기본권이 침해되었다고 볼 이유가 없다. 반면 신분 배급자의 경우, 지금 내가 이 글에서 인용하지 않은 다른 청구이유에 대해서는 관련이 없으므로 청구가 각하되었지만, 신문고시 3조 1항에 대해서는 심리에 들어갔다. 길고 긴 판결문의 끝에서 최종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결국 헌법 제119조 2항의 사회적 자유경제국가 규정이다.

이 사건 조항은 신문판매업자가 거래상대방에게 제공할 수 있는 무가지와 경품의 범위를 유료신문대금의 20% 이하로 제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신문판매업자의 사업활동의 자유와 재산권 행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나, 앞서 본 바와 같이 신문판매업자에 대한 이러한 행위제한은 무가지와 경품등의 과다한 살포를 통하여 경쟁상대 신문의 구독자들을 탈취하고자 하는 신문업계의 과당경쟁상황을 완화시키고 신문판매ㆍ구독시장의 경쟁질서를 정상화하여 민주사회에서 신속ㆍ정확한 정보제공과 올바른 여론형성을 주도하여야 하는 신문의 공적 기능을 유지하고자 하는데 주 목적이 있다고 할 것이며, 나아가 무가지 살포와 경품 제공은 결국 신문의 구독강요에 흐를 위험이 큰 점을 고려할 때 일반 국민인 신문구독자가 내용상 자신이 선호하는 신문을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를 침해당하는 것을 억지하고자 하는 목적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므로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면 이 사건 고시 내용에 의한 신문판매업자에 대한 규제는 신문업에 있어서의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경제적 규제로서 헌법 제119조 제2항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정도의 것이며, 따라서 결국 이는 헌법 제119조 제1항을 포함한 우리 헌법의 경제질서조항에 위반되지 아니한다고 할 것이다.
(강조는 인용자)


이런 '독소 조항'이 헌법의 한켠에 버젓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987년 6월 시민항쟁 이후 7, 8, 9월에 걸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흔히 '789 노동자 대투쟁'이라 부르는 이 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개헌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질서를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큰 힘이 실릴 수 있었고, 그 결과 우리는 민주공화국이며, 동시에 사회적 자유경제질서하에 움직이는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헌법의 규정이 그 자체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없으면 노동자와 시민들의 경제적 권리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수호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무너진다. 이것은 심지어 홍준표마저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홍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정회의에서 "헌법 119조 2항은 사회적 시장경제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 시장을 전부 일대일의 대결구조로 만들어 버리면 대기업만 살아남는 시장구조가 된다"며 이 같이 말했다.

그는 또 "중소기업도 살고 근로자 살고, 힘없는 사람도 사는 구조를 만들려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헌법상 원칙이 있다"며 "그 원칙이 이번 화물연대 파업사태에도 적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정부는 헌법 원칙에 의거해서 개입할 것은 개입해야 한다"며 "이번 기회에 화물연대가 불법파업에 나서게 된 절박한 배경을 정부가 헤아려서 헌법원칙에 맞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요즘 철근 값이 인상되면서 건설업계, 중소기업이 굉장히 어려워지고 있다"며 "그 문제도 결국 헌법 119조 2항에 따라 정부가 앞으로 약자들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인지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준표 "헌법, '사회적 시장경제' 천명 적극 개입해야"(뉴시스, 2008년 6월 15일)


'일반 시민'들의 촛불시위만으로는 한나라당의 연이은 악법 제정을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개헌을 통해 헌법 제119조 2항을 제거하는 일에도 속수무책이다. 구체적인 개정안에 대한 직접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단지 개인들이 모여있을 뿐인 그런 '대중'이 아닌, 자신들의 경제적 요구 사항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집단'들의 연합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일반 시민'들의 촛불시위가 무의미하다거나 도움이 안 된다는 등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사회적 기득권층에게 줄 수 있는 위협의 정도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조중동의 광고를 며칠간 끊어놓을 수 있지만, 한나라당이 신문고시를 폐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파업중인 노동조합이라고 해서 그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파업을 하는 것은, 현재 완전히 마비되어버린 부산항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이명박 정권이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는 자본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위의 공격적인 파급력에 있어서 파업과 촛불시위는 작동하는 방식도 다르고 그 영향력도 다르다. 이것은 하나의 수직선 위에 올려놓고 직선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파업이 자본가들의 목줄을 졸라 이명박 정권의 궁극적인 지지기반을 흔들리게 한다면, 촛불시위는 시민들이 정치적인 관심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양자가 서로 보완해나갈 때 우리는 이번 시위의 승리 가능성을 비로소 엿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파업하는 노동조합은 마린이고, 촛불시위하는 시민들은 메딕이다. 6월 10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은, 이명박이 쌓아놓은 컨테이너 박스 너머에 메딕만 다섯 부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유를 노동조합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물병을 던져야 한다는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폭력시위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파업을 옹호하고 있다. 파업 또한 평화적인 시위의 일부분이다. 나 또한 파이어벳이 나오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굳이 한 번 더 강조한다.

제발 현실을 직시하자. 국회를 한나라당이 가져갔다. 동시에 대한민국은, 어찌되었건 법치국가이다. 18대 국회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정말이지 마음 내키는대로 사회를 뜯어고칠 수 있다. 현재 야당들의 꼬락서니를 볼 때, 그러한 발걸음을 원내정치를 통해 제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러므로 나는 2008년에, 1987년의 6월 항쟁만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789 노동자 대투쟁까지도 함께 부활하기를 희망한다. 촛불과 깃발이 함께 서야 거대여당과 재벌의 횡포로부터 중산층과 저소득층, 그리고 중소기업의 권리를 간신히 지켜낼 수 있다.

현재 정부는 화물연대에게 업무개시 명령을 내릴지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업무개시 명령이 떨어진 후에는 강제진압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촛불들에게 묻고 싶다. 5월 31일 밤, 안국동 골목에서 물대포에 맞서 싸우던 깃발 중 금속노조의 것을 기억하냐고. 보건의료노조 사람들과 함께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말리던 그때를 잊지 않았느냐고. 현재 촛불정국의 2라운드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제는 아가씨들이 아저씨들을 지켜줘야 할 때인 것이다. 헌법 제119조 2항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촛불은 더욱 굵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