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13

우석훈 필화사건에 대하여

오늘자 경향신문에 관련 기사가 나왔다. 전문을 인용해보자.

우석훈씨 “靑서 비판글 쓰지말라 경고” (경향신문, 2009년 2월 13일)

ㆍ‘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씨 주장 파문 ㆍ“필화 사건… 굴복안해 충돌 불가피 할듯”

<88>의 저자 우석훈 박사(41·연세대 문화인류학 강사·사진)가 정부 고위 관계자로부터 ‘정부 비판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12일 밝혔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구속에 이어 정부가 본격적인 ‘비판 언로(言路) 차단’에 나선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 박사는 1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10일 정부 고위 인사로부터 정부 비판 글을 자제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며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경고를 받기는 했지만 정부 관계자가 직접 전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인사는 ‘청와대 홍보실에서 글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고도 했다”면서 “사실상 청와대가 원 소스이고 이를 전달하기 위해 나를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때도 몇 번 경고를 들었지만 ‘오해가 있으니 풀자’는 수준이었다면,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쓰면 곤란하다’는 식으로 경고 수위가 높았다”며 “글 쓰는 것에 대해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덧붙였다.

우 박사는 지난 5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칼럼이 직접적으로 문제가 된 것 같다면서 정부측 인사가 “이런 식으로 쓰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우 박사는 ‘녹색성장이라는 사기극’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녹색 본래의 의미는 ‘반핵’인데 이명박 정부는 철저하게 원자력 위에 서 있기로 선택한 것이라서 ‘녹색’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반녹색”이라며 “기괴한 토건자본의 ‘그린 워시’, 즉 녹색 이미지를 뒤집어쓰는 녹색 마케팅이 바로 녹색성장”이라고 비판했다.

우 박사는 “(경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지인들의 피해가 걱정돼 말하기 곤란하다”면서 “내가 글 쓰는 기조가 있고 글은 계속 쓸 것이므로 어찌됐든 앞으로도 충돌은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그는 11일 오전 1시33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필화 사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지난 정권에서도 나는 청와대에 눈엣가시였는데, 본의 아니게 주변 지인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 필화 사건에 대한 거의 마지막 경고를 오늘 받은 듯싶다. 모르겠다…. 감옥 보내려면 보내라…”고 적었다.

우 박사는 2006년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2007년 <88> 등을 출간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20대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왔다. 현 정부 들어서는 <촌놈들의 제국주의> <괴물의 탄생> <직선들의 대한민국> 등의 저작과 기고문을 통해 경제정책을 비판해왔다.

이에 대해 송경재 경희대 교수는 “모니터링이 여론수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감시와 통제의 수단으로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글 쓰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도록 하고 언로를 막는 흐름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정인·조미덥기자 jeongin@kyunghyang.com>


이럴 때에는 다들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당사자 운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고, 그 '당사자 운동'의 좌파 버전과 우파 버전이 또 나누어질 수 있으며 변듣보가 잘해보면 좋겠다고 말한 우석훈의 실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계급론에 세대론이라는 당의(糖衣)를 입혔다는 공저자의 설명은 참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386과 유신세대는 착취를 멈추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쨌건 이런 일이 터졌는데 우석훈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을 혼자 아는 것과, 글로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가령 나 같은 경우에도 작년 12월 25일에 관련 내용으로 칼럼을 하나 썼지만 청와대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건을 저지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어쨌건 글쟁이는 다른 사람의 주목을 끌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보낸 원고에서 문장 하나가 잘렸는데,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것을 복원시켜보자.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를 잠재우고, 적극적으로 친환경 대체에너지 개발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진정 정부가 주도해야 할 '녹색성장'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적으로 건설하고 수출하는 그 '녹색'은, 푸르른 잎사귀의 싱그러운 녹색이 아니다. 방사능 폐기물이 뿜어내는, 돌연변이 괴물의 징그러운 녹색이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진보신당의 녹색특위는 당원들의 유가환급금을 모아 태양열 발전소를 건설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초능력도 없으면서, 둘리처럼 '호이, 호이!'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핵폭탄과 구공탄들" (경향신문, 2008년 12월 25일)


핵발전소 추가 건설이 친환경정책이 아니라는 것은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들 알 법한 내용이다. 고작 그런 내용을 칼럼에 썼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외압이 들어오는 것은 명백한 언론탄압이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다. 나는 우석훈에 대한 정부의 외압에 반대한다.

2009-02-12

용역과 용병

그런데 군주가 자신의 국가를 방어하는 데에 사용하는 무력은 그 자신의 군대이거나, 아니면 용병(mercenario, mercenary)이거나 외국의 원군, 또는 이 세 가지가 혼합된 혼성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병과 원군은 무익하고 위험합니다. 자신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서 용병에 의존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영토를 결코 안정되고 안전하게 통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병이란 분열되어 있고, 야심만만하며, 기강이 문란하고, 신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동료들과 있을 때는 용감하게 보이지만, 강력한 적과 부딪치게 되면 약해지고 비겁해집니다. 그들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한 약속도 잘 지키지 않습니다. 당신의 파멸은 적의 공격이 지연되고 있는 만큼 지연되고 있는 데 불과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평화시에는 그들에게, 전시에는 당신의 적에게 시달릴 것입니다. 모든 이유는 그들이 당신에게 아무런 애착도 느끼지 않으며, 너무나 하찮은 보수 이외에는 당신을 위해서 전쟁에 나가 생명을 걸고 싸울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전쟁을 하지 않는 한, 그들은 기꺼이 당신에게 봉사하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도망가거나 탈영합니다. 기실 이탈리아가 최근에 겪은 시련은 다른 어던 이유보다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용병에 의존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물론 이 용병들의 일부는 무기력하지 않았으며 다른 용병들과 싸울 때 용맹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군의 침입이 시작되었을 때, 일거에 그들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샤를 왕은 이탈리아를 백묵 하나로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 이러한 사태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진리를 말한 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믿은 죄악이 아니라 제가 적시한 죄악입니다. 그리고 이는 군주들의 죄악이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자신의 죄악으로 인하여 처벌을 받았습니다. [84-85쪽] (강조는 인용자)

Niccolo Machiavelli. 『군주론』. 강정인, 김경희 옮김. 제3판 개역본. (서울: 까치글방, 2008).

용역들이 'Policia' 방패를 들고 날뛴 사건이 경찰들에게도 큰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경찰 방패는 '싸제'도 있다던데? 허허, 싸제가 더 좋지 않나?' 이런 소리를 하니까 전경들 몇몇의 눈이 번뜩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경찰들은 극심한 스트레스 하에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문제는 과연 그들이 '용역'이라는 사병의 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반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레디앙은 용역의 배후에 삼성물산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물론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공권력이 사적 폭력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 사적 폭력은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라는 거다.

법대에서 숨을 쉬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을 안다. '법은 불법에 조응하지 않는다.' 법은 절대 정의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얻어진 증거를 법정에서 채택하지 않는다. 법은 절대 정의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에, 불법적인 단체와 연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이 남긴 교훈도 그것이다. 아무리 그 녹음에서 명백한 선거법 위반 사실이 나왔다고 해도, 불법도청을 통해 얻어낸 증거인 이상 법정은 그것을 받아줘서는 안 된다. 그래서 결국 '주거침입죄'로 관련자들을 처벌해버린 엽기적인 판례가 나왔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법은 불법에 조응해서는 안 된다. 정의는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경찰은 조폭과 연합해서는 안 된다.

한편 불법도청을 통해 얻어낸 증거를 통해 재판이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명백히 면책특권을 지니고 있는 국회의원이 그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명박 시대에 들어와서 세상이 딱히 더 나빠진 게 어디 있냐는 사람(가령 '미스터 불온')은 세상 물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다. 권력조직은 다들 '알아서 기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지금 고삐 풀린 규제가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만이라도 돌아가는 세상과 그마저도 안 되는 세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17-18세기에 부르주아들이 혁명을 한 이유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폭력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시민사회가 정치적 과정을 통해 통제할 수 있도록 폭력이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용역의 폭력, 용병의 폭력은 그렇게 통제될 수가 없다. 이것은 《Foreign Policy》2009년 1, 2월호에 실린 한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군대가 좀 더 약한 화력으로 작전을 수행한다면, 전투 지역에 있는 다른 부문들도 여기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다. 특히 사설 경비업체들이 그렇다. 필자 중 한 사람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설 경비업체의 호위를 받는 무장 수송대 차량을 타고 잘랄라바드 부근의 어두운 고속도로를 지나다 끔찍한 경험을 했다. 경찰이 설치한 검문소들을 무시하며 질주하던 수송대는, 승객이 가득 찬 채 길가에 정차해 있던 미니 버스를 뒤에서 들이받았다. 중무장을 한 SUV에 받힌 버스는 그 충격으로 길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그러나 경비업체 요원들은 차를 세우고 부상자를 구호하라는 우리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적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프간 시민은 이처럼 위압적인 물리력을 쓰는 게 군대인지 사설 용역업체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미국에 대한 반감이 곧 현실적 위협으로 나타나는 지금과 같은 전쟁판에서, 그 결과는 오로지 우리가 덮어쓰게 된다.

30-31쪽. 너새니얼 C. 픽, 존 A. 네이글, "미 육군 해병대 - 반전 대응용 야전 교범 아프가니스탄 특별판" (Foreign Policy 한국어판, 2009년 1/2월호)


"그들은 동료들과 있을 때는 용감하게 보이지만, 강력한 적과 부딪치게 되면 약해지고 비겁해집니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문제는 용산에서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던 용역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데 있다. 무전기 통신의 내용을 통해 추측해보자면, 만약 용역이 호스를 잡고 있었다면, 경찰측에서 '신나는 물로 못 끈다, 물 그만 뿌리고 소방차 불러라'라고 할 때 용역은 어떤 식으로 대응했겠는가? 지금 내가 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가정'이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당신의 파멸은 적의 공격이 지연되고 있는 만큼 지연되고 있는 데 불과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평화시에는 그들에게, 전시에는 당신의 적에게 시달릴 것입니다. 모든 이유는 그들이 당신에게 아무런 애착도 느끼지 않으며, 너무나 하찮은 보수 이외에는 당신을 위해서 전쟁에 나가 생명을 걸고 싸울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명박이 유지광과 이정재를 다시 불러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2009-02-10

[인터뷰] 무신경함때문에 시민들은 화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친구들에게 궁금한 게 있다면?

“저는 진짜 쇼프로가 재미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20대들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방식이 쇼프로를 모방하고 있어요. 대여섯 명이 모이면 누구 하나가 큰 목소리로 사회자가 돼요. 그리고 막 역할을 부여해요. 얘는 찌질하고 쟤는 소심하고 너는 엉큼하고… 이런 식으로 좁은 틀로 몰아넣어요.

제가 무슨 얘기를 하면, 열혈정태라고 붙여버리고 역시 열혈정태야, 열혈정태, 오늘도 분노? 무슨 쇼프로 자막 붙이듯이 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정말 재미없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이것은 20대뿐아니라 30~40대도 마찬가지죠. 대중문화에 쇼프로를 빼면 다른 오락이 없기에 TV에만 의존하게 되는 거고 그러다보면 세상 보는 게 좁아지는 거죠. 문제는 재미로 보고 있다는 건데, 그게 정말 재미있냐는 거죠.

사람들이 쇼프로를 모방하면서 사람관계를 맺고 있어요. 자기가 알고 있는 맥락에서 벗어나는 걸 용납하지 않고요. 요즘 유행하는 오락프로그램들이 사람들이 노는 형식을 본 따서 극화시킨 거잖아요. '패밀리가 떴다'에 대본이 있다 없다를 놓고 난리가 났었는데, 그게 TV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놀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픽션이라고 드러나니까 그걸 못 참는 거잖아요. 픽션이나 논픽션이냐를 떠나서 자기들도 그런 역할놀이를 하는 걸 알지 못해요.

"무신경함때문에 시민들은 화난다"(꺄르르, 노정태 인터뷰. 2009년 2월 10일 게시)


오마이뉴스 블로거기자 꺄르르님과의 인터뷰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인터뷰는 지난주 수요일(2월 4일) 오후 2시 상수역 인근 비하인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장황한 이야기를 매끄럽게 정리해준 인터뷰어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2009-02-06

시대착오에 대하여

잘못된 시대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올해로 한국 나이 스물 일곱이 된 나는, 정말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것 같다.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세계들이 내게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것들이 멀어지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향해 다가가고 있지 않아서도 아니고, 또 그것들이 나로부터 부러 멀어지고 있어서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어떤 세계, 단정한 문장 속에 뜨거운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시대가 점점 흐릿하게만 보이는 것은, 그것이 통째로 부서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황혼을, 청춘의 한복판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저널리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시에 지식인의 위기 또한,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2000년대부터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저널리스트와 지식인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전자가 사실을 직접 발굴하여 의견을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 속에서 다시 언어를 발굴해내고 다듬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지식인일 수 있고, 지식인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어쨌건 둘 다 언어를 일구어내는 사람들인 것이다.

미국인의 시민사회가 국부로 섬기는 사람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죽을 때 자신의 묘비명을 A Printer라고 새겨달라고 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익혔고, 신문 기사를 쓰며 자신의 관점을 남에게 전달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저널리즘과 지식인의 성장이 서로 얽혀있는 것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를 편집했다. 당시의 편집자들은, 지금도 종종 그렇지만, 펑크난 기사를 자기 손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노가다꾼 역할까지 해야 했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 함께 《상황》을 창간한다. 한편 네오콘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기 위해 《위클리 스텐다드》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아주 넓게 보자면, 특정 분야의 학문 연구자들 또한 대단히 제한된 의미의 저널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들 또한 어떤 '저널'에 글을 쓰기 위해 그 모든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Kant Studien》은 칸트에 대한 독일어권의 연구를 다룬다. 한편 《Nature》는 포괄적인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에 대한 최신 소식을 담아내는 저널이다. 그 '잡지'에서 다 다룰 수 없는 내용들은 개별적인 저널들에 실린다. 어느 저널에 어떤 논문을 실었는가, 그것을 읽은 이들이 다른 저널에 또 기사를 쓸 때 자신의 글을 어느 정도 참조하는가에 따라 학자의 인생이 갈린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저널리스트'들이 대중을 상대로 '저널'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학자들은 해당 저널에서 다루는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동료 학자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저널'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뒤흔들어놓는데에는 한 권의 책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을 꾸준히 모아내고, 다듬고,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기간행물이 필요하다. 《뉴욕 타임즈》를 읽지 않는 뉴요커 지식인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Medline이 저널 이름인지 DB이름인지도 모르는 심리학도를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저널을 읽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그 저널에 글을 쓰는 것은 그 사람이 여느 '독자'는 아님을, 하나의 완결된 순환 체계를 갖춘 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저널리즘에는 황혼이 드리워지고 있다. 저널리즘의 왕국이라 할만한 미국에서도 이미 여러 개의 적신호가 켜진 상태다. 《Time》지의 편집장인 월터 아이작슨은 "How to Save Your Newspaper" (2009년 2월 5일)에서, 이미 미국에서조차 신문을 돈 주고 사서 보는 사람보다 온라인에서 공짜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심지어 자신마저도 뉴욕타임즈의 정기구독을 해지했다고, 가판 판매와 정기구독, 광고 수입의 세 다리로 버티고 있던 앉은뱅이 의자가 쓰러질 상황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문 기사를 많이 읽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돈을 내고 읽지는 않는다. 신문 기사를 공짜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바그다드에 특파원을 보내거나 르완다에 프리랜서 리포터를 보내는 일이 공짜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뉴욕타임즈 또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데이빗 스웬슨과 마이클 슈미트는 "News You Can Endow"라는 기고 칼럼을 통해, 차라리 이 수익성 없는 사업을 공공 기금이 운영하는 공적 사업으로 전환해버리자는 획기적인 주장을 펼쳤다. 물론 공공 기금이 신문을 운영하게 된다면, 지금처럼 '정치적 의견'을 담은 칼럼을 실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블로그와 인터넷 공간에 그런 '의견'은 넘쳐나는데 뭐가 문제인가? 그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저널리즘의 핵심은 사실을 추적하여 그것을 보도하는 데 있다. 그 기능만큼은 온전히 살려 놓아야 시민사회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 마련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통적인 저널리즘이 죽어가고 있고, 그마나도 인터넷 광고주에게 목을 매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공익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도발적인 주장에 대해 수많은 독자 편지가 답래했고, 그것은 "Imagining Newspapers of the Future"라는 제목의 독자 편지란으로 집결되었다. 다양한 해법을 독자들이 제시하였고, 그 중에는 '아하' 하며 무릎을 치게 하는 것도 종종 있지만, 저널리즘을 뒤덮고 있는 우울한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널리즘은 죽어가고 있다. 동시에 지식인이라는 존재 또한 시장 논리에 의해,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시장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상황으로 인해,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사르트르 가 말한 것처럼, 지식인이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탄생하는 사회적 존재다. 문제는 과연 그 '전문가'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목소리를 낼 때, 어떻게 그가 '상식적'인 선을 지키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상식을 바꾸어낼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저널리즘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좋은 저널리즘이 튼튼하게 버티고 있지 않다면, 전문가는 자기 영역 밖의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낼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지식이 과연 확실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마이크 데이비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는 방금 책꽂이에서 그의 칼럼 모음집 In Praise of Babarians(HaymarketBooks, 2007)를 꺼냈다. 그리고 가장 뒷 페이지를 펼쳐 참고문헌 목록을 들여다보았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인용 매체는 다름 아닌 《The New Yorker》다. 두 칸 내려가면 WSJ가 나오고, 8번 각주는 LA Times가 차지하고 있다. 나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스칼라십을 문제 삼고 있지 않으며, 동시에 국내 저자들 또한(특히 강준만의 경우) 국내 매체를 적극적으로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쳐낸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굳이 지적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거리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는 최초로 정부 발행물을 학술적 저작물에 인용하기 시작한 학자였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른바 '주류 언론'의 기사를 인용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흔히 말하는 '중심부 국가'의 전문적인 학자들이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데에는, 이렇듯 신뢰할 수 있는 저널리즘이 그 뒤를 받쳐주고 있다는 것 또한 이유로 지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과 의견은 명료하게 분리되어 있고, 그래서 그 매체의 논조를 탐탁찮게 여긴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사실만을 추려내어 자신의 입장을 구성할 수 있다. 공연히 '진실 게임' 따위에 말려들 필요 없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상식'은 그야말로 '상식'으로서 단단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그와 정 반대이다. 언론은 사실과 의견을 전혀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신문을 읽고 세상에 대해 논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참여'가 아니라, 복덕방 노친네의 '꼰대질'로 전락하기 일쑤다. 심지어 신문 기자들마저도 서로의 신문에서, 혹은 자신이 속한 회사에서 만들어낸 신문의 내용이 사실을 충실하게 담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사실은 왜곡되어 있고, 그 왜곡은 모두 정치적이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고 그래서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고급 정보'를 손에 넣고자 다들 방방 뛴다.

미네르바를 둘러싼 헛소동을 돌이켜보자. 그 사건은 그 미네르바가 가지고 있던 '정보'가 고작 인터넷 서핑질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는 '진실'이 폭로되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언론들은 그것을 통해 그가 '대한민국 1%'가 아니라고, 진짜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깎아내렸다. 물론 그의 경제학적 지식의 기본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타당하고 옳다. 하지만 정보의 출처가 고작 '인터넷 뉴스'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WSJ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방 언론이 무료로 컨텐츠를 공개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첩보원'들이 하는 일도 결국 그것과 유사하다. 상대방 국가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모든 일간지와 정기간행물 및 서적을 훑어보며 그것을 재가공해서 '정보'로 만드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탐닉하는 '고급 정보'는 물론 어떤 국면에서 중요하지만, 오픈되어 있는 정보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문제는 과연 그 열린 정보가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느냐이다. 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와 그럴 수 없는 사회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갈라진다.

저널리즘의 몰락은 세계적인 추세로 전개되고 있다. 학자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결국 한 사람의 학자가 되고자 하는 나로서는, 그 몰락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다. 한국어로 만들어지는 저널리즘은 그 수준에 도달해보지도 못한 상태로 허물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으면서 한나라당과 싸우고 싶지, 조선일보가 '진실 게임'으로 용산 참사의 프레임을 몰고 가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싶지 않다. 논조야 어찌 되었건 담백한 정보가 우선 전달되는 저널리즘이,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에서는 성립한 적도 없었고, 수익 모델이 박살나고 있는 현 상황을 놓고 볼 때 앞으로도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NYT와 Times는 저널리즘의 위기에 대해 '공영화', 'iTunes식의 클릭뷰' 같은 해법을 내놓는다. 반면 한국의 신문사들은 방송법을 뜯어고쳐서 방송사를 집어삼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미국에서 재채기를 하면 한국 증시는 감기에 걸린다. 미국 저널리즘이 다리를 절면 한국의 신문사들은 개처럼 기어다니며 풀을 뜯기 시작한다. 저널리즘에 대한 불신과 그 산업의 붕괴가 한국만의 일이라면 훌쩍 털고 도망가겠다는 꿈이라도 꿀 수 있겠지만, 이것은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아도르노에 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에세이는 그런 우울에 빠져드는 내게 잠깐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사이드에 따르면,

아도르노는 일차적으로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란 그에 따르면 "대상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것에 관심을 두는" 형식이며, "내밀한 형식적 법칙은 이단이다." 아도르노의 의미로 볼 때 에세이스트라는 존재는 당대에 유행하는 모든 것에 영원히 맞서 싸우고 화해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보통 "에세이가 당대에 갖는 의미는 시대착오에 있다"고 말한다. (강조는 인용자) 
140-141p. 에드워드 사이드, 장호연 옮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서울: 마티, 2008)

즉 에세이를 쓰고자 한다면 언제나 시대착오적이어야 한다. 이 말은 잠깐의 위로가 된다.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그러므로 '에세이를 써야 한다'는 해법을 내가 나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름다운 문장과 차분한 해설력을 갖춘 지식인 비르투오조답게,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작가와 알지도 못하는 곡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독자를 유혹하고, 설득하고, 주먹을 꼭 쥔 채 책을 덮게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시대착오적인 에세이는, 같은 의미에서 배은망덕한 것이기도 하다. 귀를 기울이는 독자들에게 불협화음을 들려주고, 눈을 떼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러 추한 것과 끔찍한 것을 현시한다. 당혹스러워하는 독자를 향해 지식인은 피식 비웃는다. '아무튼 너는 내 글이 실린 잡지를 산 거야. 독자님, 감사합니다.' 지식인의 삶의 양태를 지탱해주는 물질적 토대가, 원고지 한 장에 얼마씩이라도 온전히 주어지던 시대에는, 그런 배덕자들 또한 얄팍한 지갑의 틈바구니에 숨어 시민권을 보존하고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나약한 20대라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하게, 느끼는 그대로 말해보도록 하자. 공짜가 아니면 읽지 않고, 공짜가 아니면 보지 않는 이 세상은, 바로 그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나는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것 같다.




언급된 기사와 책들


Isaacson, Walter. “How to Save Your Newspaper.” Time, February 5, 2009. http://www.time.com/time/business/article/0,8599,1877191-4,00.html.

Swensen, David, and Michael Schmidt. “News You Can Endow.” The New York Times, January 28, 2009, sec. Opinion. http://www.nytimes.com/2009/01/28/opinion/28swensen.html.

“Imagining Newspapers of the Future.” The New York Times, January 31, 2009, sec. Opinion. http://www.nytimes.com/2009/01/31/opinion/l31endow.html.

Davis, Mike. In Praise of Barbarians: Essays against Empire. Haymarket Books, 2007.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 10점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마티

2009-01-30

간단한 설문 조사

"구경꾼의 구성"에서 몇 분의 방문자들이 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리플을 달고 있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이미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적극적 참여자인 A와, '민주 시민'으로서 경찰의 공권력 남용 문제에 관심이 많은 C가 주를 이루는 구경꾼 집단은, '오지라퍼'인 B보다 훨씬 철거민 문제에 적극적이며 또한 피해자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이 내 주장이다.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해보자. 메모장같은 간단한 프로그램을 띄우거나, 메모를 할 수 있는 종이를 준비하면 좋다. 어제 그린 표를 다시 인용한다.


 
경찰의 공권력 남용, 공공의 선
 
관심 있음
관심 없음
갈등의 축
사적 이익 배분 및 조정 문제
관심 있음
A: 적극 참여자
B: 오지라퍼
‘진실 게임’
관심 없음
C: ‘민주 시민’
D: 방관자
‘꼭 투표하세요’
 
갈등의 축
진짜 진보 논쟁
그 글쎄...
 


이 표를 1분간 잘 살펴본 후, 자신이 어느 사분면에 속하는지 적어두자. 나 같은 경우, 말하는 건 C에 가깝지만 실상은 A에 속한다. 철거민들이 받았던 보상금이 턱없이 부족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물론 난 이 블로그에서 그것을 '입증'할 생각도 없고, '반증'하겠다는 사람에게 대응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아래 계좌 번호를 그 메모장에 적는다.

농협 067-02-302163 예금주 이종회

용산 철거민 문제 대책위원회의 후원계좌 주소가 바로 이거다. 다 적었으면, 이 계좌에 후원금을 입금한다. 적어도 1만원은 되어야 하겠다. 대개의 경우 결혼식이나 장례식의 축의금/부의금처럼, 3만원에서 5만원 정도가 적정선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입금을 해보자.

그리고 자신이 입금한 시간을 (액수는 사생활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굳이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까 그 메모장에 적는다. 그러면 이런 정보가 나올 것이다.

이름 | 구경꾼 유형 | 후원금 입금 일시

가령 나 같은 경우, 이름은 노정태고, 구경꾼 유형은 A이며, 후원금은 2009년 1월 28일에 입금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후원금을 이미 입금하였거나 앞으로 그럴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A나 C에 속할 것이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는 철거민들이 받는 보상금이 너무 적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을 후원한다"고 말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내 가설에 대해 살아있는 반례를 제공하기 위해 후원금을 보낼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사분면 B에 속하는 구경꾼보다는 C에 속하는 사람들이 더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거지에게 동전을 던져주네 마네 하는 폭력적이고 몰상식한 언술을 보며 나는 정말 화가 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연대이지, 값싼 동정과 적선이 아니다.


* 이미 입금하신 분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입금하신 분들, 모두 리플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