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13

[시론] 신장 유혈 사태, 타인의 비극과 우리의 미래 사이

7월 8일 우름치에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면서 신장 지구의 유혈 사태는 제압되었다. 중국 공안은 금요일에 메카에 모여 집회를 하는 이슬람교도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종교 행사가 폭력 시위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접한 어떤 국가의 경찰을 연상시키는 대목인데) 모스크를 한시적으로 폐쇄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장 지구 유혈 사태는 진정되어가고 있다.

‘해외’라는 단어를 들으면 ‘시장’ 내지는 ‘자원’을 떠올리는 국내 언론의 속성상, 신장 지구 유혈 사태의 보도 방향도 대부분 그쪽으로 편향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신장 지구에서 개발된 유전이 있고, 그 유전의 개발권을 한족이 독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위구르인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있다가 한 장난감 공장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신장 지구 유혈 사태를 이렇게만 묘사할 경우, 위구르인들의 폭력 행사 이후 역으로 한족들이 위구르인들에 대해 자행한 무차별적인 폭력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국내 언론의 통상적인 설명은 신장 지구의 민족 갈등을 ‘자원 수탈자’와 ‘선량한 토착인’으로 치환시켜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 7월 7일자 3면.  
 
물론 한족들이 세운 거대한 에너지 기업이 자원 개발에서 나오는 이익을 독식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일부 기업만이 진출해 있고 그 기업들만이 문제였다면, 위구르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후 극소수의 부유한 한족들이 쫓겨나거나 대피하는 쪽으로 사태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실제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800만의 위구르인들은 해당 지역 인구의 40%를 점하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 60%는 중국 각지에서 건너온 한족들이며, 그들 중 대다수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해온 하층민이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 중앙정부는 동부로 밀려드는 미숙련 노동자들을 처리하고 동부와 서부의 불균형한 발전을 해소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이주 정책을 추진했다. 서부를 개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4대강 유역을 개발한다는 말이 한국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솔깃하게 들릴 수밖에 없듯이, 서부 지역을 개발한다는 말은 중국의 저소득층에게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약속으로 들렸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뉴욕타임즈》의 에드워드 왕(Edward Wong)은 위구르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한 중국인 이민자 가족의 사례를 통해 그들의 열악한 생활 수준을 보도했다. 매일 아침 8시에 리어카를 끌고 행상을 나가 한밤중에 집에 들어온다. 벌이가 쏠쏠하다 해도 미화 300불 수준에 머물고, 그러면 가까스로 생활비를 맞출 수 있다. 서부 개발의 노다지를 노리고 들어온 한족 이민자들에게도 막연한 불만은 팽배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서로 막연히 품고 있는 삶에 대한 불만이 특정한 계기로 터져나올 경우, 그것은 눈 앞에 보이는 다른 민족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치환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앞서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폭력 사태의 계기가 된 장난감 공장 살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저소득층 위구르인과 한족들은 그럭저럭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씨가 튀자 그들은 서로 갈라져 몽둥이를 들고 폭력을 휘두르며 서로의 변변찮은 재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폭동을 벌인 위구르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다민족 ‘포용’ 정책이 실상은 해당 문화의 압살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구르인들은 이민자의 증가로 인해 다수에서 소수로 변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문화와의 연결고리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위구르인은 하루 다섯 번의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이것은 이슬람인들의 취업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족 사장들은 메카 순례를 위해 긴 휴가를 쓰고 싶어하는 위구르인, 라마단을 지키고 낮 동안은 금식하고자 하는 이슬람 신자들의 사정을 신경쓰지 않는다.

종교 뿐 아니라 언어에 대해서도 제도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우름치에 위치한 신장대학교에서는 오직 위구르 시(詩)에 대한 강의만이 위구르어로 이루어진다. 1990년대부터 대학 교육에서 위구르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신장 지구 내 한족의 불만이 경제적인 문제에서 출발한다면, 위구르족의 불만은 경제적인 문제와 문화적인 차원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중앙 공산당 정부는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댓가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 G8 행사에 참여하고 있던 후진타오 주석이 급히 귀국한 것은 그러한 의지를 특히 대내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위구르의 유혈 사태가 더 악화되어 국제 사회가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확산된다면, 인접한 티벳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도미노 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중앙정부가 강력한 제압 의지를 보인 것은 그러나, 적어도 현지인들의 생존권 측면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 이 폭력 사태는 ‘돈 많은 한족’과 ‘가난한 위구르인’의 대결이 아니다. 위구르인들은 (국내 언론에서 너무도 자주 언급되는) 석유 회사가 아니라, 자기 주변의 한족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족들의 대항 시위도 마찬가지이다. 중앙정부의 이주 정책에 대한 불만을 그 정부를 향해 풀어내지 못하고, 대신 이웃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혈 사태가 지속되는 것은 그 어떤 문제의 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종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곳을 ‘개발’하는 것으로 국내의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려 하는 중앙정부가 있다면, 당연히 저소득층은 생활을 위해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위구르의 관계를 식민지와 제국의 그것으로 당장 치환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마치 영국이 식민지배를 시작한 이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제국』에 따르면, 영국이 제국으로 성립해있을 당시 영국의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보다 영국에서 식민지로 넘어간 이민자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일거양득이다. 식민지를 개발하면서 국내의 불만 세력이 될 수 있는 저소득층을 먼 곳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신장과 티벳에서 바로 그러하듯이, 원주민보다 이민자의 수가 많거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가면 문화적, 인종적 단일성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분리 독립운동의 추진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는 신장 지구를 포기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동에서 서로 건너간 이민자들이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신장 위구르 유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서 ‘거지떼’가 내려와 우리 모두 거지가 될 것이라고. 어쩌면 맞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북한의 체제가 얼마나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남한과 하나의 정치 단위를 구성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지금처럼 어느 정도의 국가 형태가 존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고위층과 남한의 자본이 결탁하여 이북 지역에 대한 대규모 ‘개발’이 시행된다면, 마치 중국 동부와 서부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대규모 이주의 물결은 북에서 남이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향하게 될 수도 있다. 위구르에 사람이 없어서 한족들이 건너간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한의 양극화가 심해져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일용직 노동자층이 크게 늘어나고, 북한에 이른바 ‘개발 특수’가 시작된다면, 남한의 저소득층은 당연히 북한으로 이주할 것이다.

비록 혈통상으로는 같은 민족이지만 이미 남과 북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다른 형태의 집단이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북이 서로의 이민자를 포용해야 하는 문제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결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북한이 망하고 남쪽으로 ‘거지떼’가 몰려올 상황에 대해서만 걱정하지 말고, 북한이 개방되고 남쪽에서 ‘노가다’들이 몰려가 에스닉 그룹을 형성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리 걱정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신장 지구 폭력 사태라는 ‘타인의 비극’을 바라보며 우리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 비윤리적인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이 조만간 우리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중국이 대한민국을 삼켜버릴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인구와 경제력을 놓고 볼 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다. 우리는 그보다는 북한 사람들을 중국이 위구르족 대하듯이 취급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피해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덩치가 커져버렸지만, 아직 자신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국인들이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될 때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노정태/Foreign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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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6

'20대 개새끼론'에 한 마디 덧붙임

판] 20대, 보이지 않아도 있는 거에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였던 시절의 일이다. ‘한국논단’의 이도형 발행인은 김 전 대통령에게 ‘당신이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게 납득시켜 봐라. 내가 납득하면 온 대한민국이 다 납득한다’고 말했다. 대단히 고약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주장을 입증할 책임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명제를 입증해야 할 책임이 이도형에게 있다면, ‘20대는 멍청하다’는 명제를 입증해야 할 책임은 아마도 김용민 교수에게 있을 것이다. 얼마 전 그는 충남대학교 신문에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면서 ‘솔까말(솔직히 까놓고 말해), 나는 너희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5월30일 서울광장이 무기력하게 ‘털렸다’는 사실을 통탄하며 “2009년에도 선발됐고, 재학 중이고, 취업 될 때까지 졸업하려고 버티는 선배까지 합치면 학생들이 제법 있을 텐데, 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 말을 하려거든 ‘20대는 촛불시위의 현장에 없다’는 것을 김용민 교수 본인이 입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게 사실일까?

6월 10일에도 서울광장은 ‘털렸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국회의원과 당직자들이 밤샘 시위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서울광장에서 6·10 추모 행사를 하게 되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권해효씨가 사회를 보면서 “저 솔직히 여러분 하나도 반갑지 않습니다”라고 할 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극도의 착잡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실은 반갑고 좋았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밤 11시가 갓 넘었을 무렵 갑자기 밀어닥친 전경들 때문에 대열이 깨지고 우왕좌왕하고, 그 와중에 나는 운동화 한 짝을 잃어버렸는데, 그것도 한 달쯤 지나고 보니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뭐,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울광장이 또 ‘털릴’ 때, 20대가 그 현장에서 보이지도 않았다는 그런 식의 말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까지도 해결되고 있지 않은 한예종 사태, 학생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거리에 섰다. 아무래도 실기를 이론과 함께 배워서 그런 것 같다. 깃발과 피켓 및 유인물 등의 디자인과 품질이 기존의 그것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Art is our Power’, 예술은 우리의 힘. 그 학생들은 20대가 아닌가?

20대의 목소리와 활동은 촛불시위 현장 밖에서도 발견된다. 두 달쯤 전부터 서강대학교에는 쇼핑몰에서 쓰는 카트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축 건물에 홈플러스가 입점하는 문제를 놓고 학생회와 재단의 입장이 대립한 가운데, 전체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등장한 이색 홍보 수단이었다. 반대 서명을 받는 학생들은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마치 영수증처럼 생긴 전단을 나눠주며 즐겁고 발랄하게 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20대가 아닌가?

‘한국논단’의 이도형에게는 김대중이 빨갱이로만 보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굳건하게 다져놓지 못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후퇴로 인한 패배감이 밀려올 때, 그것을 20대라는 희생양을 붙잡고 해소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20대는 당연히 바보 멍청이 천치들로 보일 수밖에 없다. 혹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일부 똑똑한 애들도 있겠지.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도 안 보인다니까?’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현장’에 오기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성실하게 찾아보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의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셈 치다니. 내 또래, 나 자신의 단점으로부터 눈을 돌릴 생각은 없지만, 그런 식의 비판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선배님’들 덕분에 황폐해진 정신을 달래기 위해 종종 가네코 미스즈의 시집을 펼친다. 나는 특히 ‘별과 민들레’라는 시를 좋아한다. 후반부만 인용해보자. “지느라 시든 민들레는/ 기왓장 틈에서 말이 없어도,/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강한 저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아도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도 있는 거예요.”

<노정태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경향신문, 2009년 7월 6일.

떡밥도 복수처럼 식었을 때 가장 맛있는 음식... 이기 때문은 아니다. 현재 민주주의에 위기가 닥쳐온 것은 이른바 '민주화 세력'들이 민주주의를 대충 만들어놓기만 하고 사후 관리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20대를 탓하고 87년 헌법을 탓하고 하는 식의 '남탓'으로 점철된 수사가 횡횡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큰 경향성이라고 보이며, 어찌 되었건 옳지 않다.

내가 만나본 바, 또 나 스스로 느끼는 바에 따르면, 지금의 20대는 민주화가 이미 실현된 대한민국 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386과는 달리 이미 존재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과 그 속에서의 삶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있다. 가령 서울시청 구 청사를 때려부순다거나, 청계천 양쪽의 낡은 상가가 허물어진다거나 하는 일들에 대해, 예전에 386이라고 불렸던 현재의 4~50대는 그리 큰 정서적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세상은 언제라도 허물고 다시 만들 수 있는 가건물과도 같은 것이다.

반면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만나본 몇몇의) 20대들에게는 1950-70년대 사이의 것들이 '낡아빠진 것들'이 아니라 '빈티지'로 보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큰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미 산업화가 완성된 세상에서 태어난 세대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얼마나 빈약한 문화적 지반 위에 서 있는지를 (어학연수, 해외여행 등을 통해 특히) 각별하게 느끼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앞선 세대들의 눈에는 왜 이 젊은이들이 세상을 통째로 뒤집어엎자고 날뛰지 않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을 것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서적인 차원만을 언급해보자. 지금의 20대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대한민국은 무슨 컴퓨터 하드 포멧하듯이 밀어버릴 수 있는 그런 알량한 가건물이 아니다. 초라하긴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태어났고 이 문화 속에서 자랐다는 말이다.

386세대, 혹은 자신이 386세대라고 착각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이 당선된 것도 20대 탓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이명박을 당선시킨 것은 서울을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로 도배해서 집값을 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부응한 4~50대 남성들이었다. 언제나 '새로운 대한민국',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그들 말이다. 그들이 20대를 실패작으로 여기는 것, 그래서 ('이끼'의 대사처럼) '시마이 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렇게 볼 때, 구역질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9-07-02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이명박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난다면 - 온두라스 쿠데타를 보며

이런 상상을 해보자.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상상’임을 확실히 못박아두는 바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제로는 그럴 만한 정치력이 없지만) 한나라당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어, 자신이 연임할 수 있게끔 헌법을 개정하고자 시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이미 겪어서 아는 바와 같이, 거리에서의 항의 시위나 시민단체 및 야당의 반발 따위로는 그의 의지를 가로막을 수 없다. 급기야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완성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 바로 ‘그 일’이 터져버리는 것이다.

온두라스의 상황이 바로 이렇다. 지난 토요일, 호세 마누엘 셀라야(Hose Manuel Zelaya) 온두라스 대통령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관저의 침실에 들어갔다. 비록 대법원은 대통령이 위법 행위를 했다고 두 차례에 걸쳐 선고한 바 있고, 육군과 해군에서도 직접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셀라야 대통령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복면을 쓴 군인들이 그를 깨우기 전까지 그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가 추진하던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예정된 날의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 체포되어 파자마 차림으로 코스타리카로 이송된 그는, 쿠데타에 굴하지 않고 세계 각국에 자신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셀라야 대통령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반미주의의 기수라 할 수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셀라야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유엔에서도 쿠데타를, 당연한 일이지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분위기이다. 온두라스 의회는 재빠르게 셀라야 대통령을 ‘전 대통령’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온두라스 국내의 정확한 반응을 알 수는 없지만, 쿠데타 세력이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 헤럴드경제 6월 29일자 14면.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적법’한 선거에 대한 의혹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이란 사태를 살펴보았다. 그 사건을 두고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를 운운하는 것은 상스러운 행동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국민투표를 한다면 개헌에 성공할 수 있고, 헌법을 바꾼다면 대통령직을 연장할 수 있는 ‘적법’한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나라의 실제 정치 상황만 놓고 보자면 쿠데타를 저지른 군부와 법원에게 어쩌면 더 정당성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일제히 셀라야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번에도 문제의 핵심은 ‘민주주의’에 달려있는 것이다.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 자본주의/민주주의는 ‘외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는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의 북쪽에 위치한 세습왕정국가도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칭하는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나라의 모든 정치가 다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 아닌 나라가 없다. 정치적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민주주의냐 민주주의가 아니냐’라는 질문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해졌다. 지금 온두라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바로 그렇다.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쿠데타는 반민주주의이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행정부 수반 대통령의 통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헌법기관에서 반대하는 개헌을 강행하는 대통령의 통치도 과연 민주적인 것인가? 그따위 국민투표가 벌어지는 일이 과연 민주주의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민주주의의 ‘외부’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 민주적인 절차 혹은 투표를 통해 헌법을 바꾸고 통치하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민주주의의 보증수표가 된다면, 우리는 나치의 독일 지배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2009-06-1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이란 대선 시위, 남의 일이 아니다 - 절차적 민주주의는 절대적인가

6월 13일 선거 결과가 발표된 후, 이란은 폭풍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그 시위를 보고 있노라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현 정부의 임기가 3년 반 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선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이번 대선은 분명히 ‘합법적’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보통, 비밀,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유세 과정에서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밝은 녹색을 상징으로 삼아 축제처럼 선거운동을 진행해 나갔다. 테헤란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지지 집회는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를 붙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아랍권을 순방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은밀한 지원 사격도 눈에 띄었다. 바야흐로 이란에도 변화의 물결이 당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 경향신문 6월 15일자 8면.  
막상 투표함을 열고 보니 결과는 기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현임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에자드가 62.6%의 득표율을 올리며 상대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둔 것이다. 이란의 대선은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있기에, 한 후보자가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하면 결선투표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이 압도적인 수치에 무사비를 지지하던 이란 국민들이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사비에 대한 지지 열풍은 분명히 뜨거웠다. 그런데 이렇게 완패했다니? 선거 조작을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미국의 인권단체 Avaaz에 따르면, 대선 과정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증거가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개별적인 증거들은 아직 공식적인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없다. 만약 확실한 증거가 나온다면, 이란의 최고 결정기관인 혁명수호위원회는 무사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디에자드의 지도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7일 오후 7시 현재까지 시위 도중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총 12명. 이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나는 몇 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우선 테헤란을 뒤덮었던 밝은 녹색의 물결을 짚어보자. 무사비의 지지자들은 주로 여성, 도시에 거주하는 전문직 종사자, 고학력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선거 운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와도 같았다. 문제는 그러한 ‘축제와도 같은 선거’가 반드시 민주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논자들은 여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선거운동이 도리어 이슬람 원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고착되어 있는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논리 자체는 부당한 피해자 탓하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내느냐이다. 요즘 한국인들은 ‘축제’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선거도 축제처럼 하고, 홍보도 유세도 축제처럼 하고, 심지어는 시위도 축제처럼 하고, 등등. 특히 촛불시위에 본격적인 사회 이슈를 접목시키려 들 때마다, ‘촛불시위의 자발성이 훼손된다’거나 ‘축제의 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의 반발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사태를 놓고 보면 그 축제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축제처럼 선거운동하다가 결국 목숨 걸고 데모하게 된 이란 국민들을 보면 분명히 그렇다. 무언가를 ‘축제처럼’ 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그 자체가 정치적 성격과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과 이란의 경우를 1대1로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질적으로 이란을 지배하는 집단은 혁명수호위원회이며,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입김에 의해 이번 정국의 방향이 좌우될 것이다. 말하자면 (어쨌건 절차적으로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시위로 인해 물러난다 해도, 이란이라는 나라의 안정성은 그리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반면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권력의 대부분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 대통령 위의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3년 반 뒤에 한국에서 지금 이란과 같은 시위가 벌어질 경우, 그것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가져올 충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란의 시위를 보며 한국의 3년 반 뒤를 걱정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란이 처한 국제적 고립과 사회적 불평등 등을 놓고 볼 때, 현 국면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은 비교적 덜 심각한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해 국민들의 반발을 힘으로 억누른다면 그것은 큰 비극이 될 터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도 그러한가? 우리가 가진 것은 87년 체제의 허약한 정통성 뿐이다. 다음 대선이 치러진 후 이란의 경우와 같은 시위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과연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당한 시위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혹여 그러한 행동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염치불구하고 독자 여러분께 이 질문을 남겨둔 채 이번 칼럼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2009-06-10

‘개혁’과 ‘진보’에게

[판]‘개혁’과 ‘진보’에게 부탁드린다

어느 쪽으로 머리를 두고도 숨을 쉴 수가 없다. 온 대기 중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그리고 중간 반환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2009년, 턱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가 흘렀다. 서울시 용산구에서 장사를 하던 세입자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의 목숨이 화마에 휩싸였다. 건당 수임료 30원을 올려달라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대한통운 사측은 철저히 무시했다. 해고를 통지하는 똑같은 문자 메시지 78통이 전송되었을 때, 휴대폰에서는 서로 다른 통곡처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 도착 알람이 울려퍼졌을 것이다. 박종태씨의 생명이 스러졌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엉이바위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노무현 정권 5년을 지나면서, 이른바 ‘개혁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갈등과 반목은 깊어만 갔다. 개혁은 진보를 일컬어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들일 뿐이라고 칭했다. 진보는 개혁을 두고 그런 식이면 영원히 보수 정치의 맥락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고 다그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빛바랜 개혁에 실망하고 진보로 발길을 돌렸지만, 진보진영에서는 그들을 온전히 품어낼 수 없었다.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그래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가 행정부의 수반일 때 해악을 품고 사는 사람들을 묶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직 대통령에 대한 강렬한 반감뿐이었으리라.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예상대로 이미 부관참시가 벌어지고 있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사장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언론이 ‘서거’가 아닌 ‘자살’로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일 00시 현재, 한나라당 홈페이지 게시물에는 한 가족이 웃고 있는 해맑은 화면을 배경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덕수궁 앞에서 시민들이 차린 분향소는 경찰에 의해 수 차례 철거·압수되고 말았다. 마치 용산에서도 그러했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듯이, 화물연대 박종태 지부장의 자살 또한 사회적 타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경찰은, 용산 참사 철거민들의 사체를 유족의 동의도 없이 부검하고, 분향소를 엎으며 영정을 짓밟은 바로 그 경찰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능멸하는 현 정부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야만의 왕국,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삶과 동등하게 존엄하다. 그래야만 한다. 그 지엄한 균형이 허물어질 때 나의 마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고 김선일씨 사건 이후로 노무현 정부를 버렸다. 나는 진실로, ‘사람 하나 죽으면 파병 안 하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인간의 삶이, 생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평등하게 존중받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개혁’과 ‘진보’ 모두에 너무도 가혹하다. 우리에게는 심지어 애도할 수 있는 권리조차 없단 말인가?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만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가? 시위로 변질될까 우려되는 추모 행사는 아예 하지도 말아야 한단 말인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냉동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언어폭력에 시달린다. 외람된 말이지만 ‘개혁’과 ‘진보’ 모두에 간곡히 부탁드린다. 이 모든 죽음을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애도할 수는 없을까. 브레히트의 시구를 보자. “아 우리는/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후손들에게’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그런 세상을 맞거든/관용하는 마음으로/우리를 생각해 다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노정태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6월 8일 경향신문 칼럼입니다. 원래 5월 25일에에 실렸어야 했는데 워낙 기사가 넘쳐서 아예 두 주 뒤로 밀려났네요. 그때 발표되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뭐 별 수 없죠.

시청 앞 광장에서 많은 분들을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