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1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독일 관념론은 프랑스 혁명의 이론이라 불리어 왔다."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 『이성과 혁명』의 서론에서 서슴없이 단언한다. 선진국 프랑스의 발전된 정치경제적 상황을 동경하던 독일의 지식인들이 그 혁명을 정신 속에서 구현해낸 것이 바로 독일 관념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은 칸트의 1784년 텍스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이미 하나의 싹으로 심어져 있다.

칸트는 자신과 독자들이 "계몽된 시대"(aufgeklärten Zeitalter)에 살고 있지 않지만, "계몽의 시대"(Zeitalter der Aufklärung)에 살고 있다고 선언한다. "일반적 계몽을, 다시 말해 마땅히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할 미성년에서의 탈출을 방해하는 장애가 차츰 감소해가는 명백한 징후"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견은 사실의 보고라기보다는 희망사항의 표현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칸트가 "이 시대는 바로 계몽의 시대이며, 환언하면 프리드리히 왕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명확해진다.

이 짧은 텍스트 안에서 칸트는 끝없이 외줄타기를 벌인다. 그는 결코 프리드리히 왕, 계몽군주의 통치가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삭제가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고, 칸트 본인도 결국 그 칼날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는 프리드리히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당시의 낙관주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양자가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이룬다.

칸트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왕은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스로 계몽된 군주"이며, 동시에 "공공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잘 훈련된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군주"이다. 이러한 칭송은 두 세기 전의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친 찬사를 보는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의 힘을 칭송한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나마 말해줄 것을 칸트가 희망한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이른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이성의 사적 사용'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 부권적 명령을 전제로 해야 이해 가능하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는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왕이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을 가로막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무엇인가? 왕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뿐이다. 왕은 검열하고, 삭제하고, 저자를 고문하고 심판할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이 '허용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전적으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사람의 학자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여기서 칸트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도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아메리카의 용맹한 시민들보다 한참 소심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결의했고, 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 반면 칸트는 어떠한 세금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 '학자로서 비판'하는 것은 괜찮지만, "시민은 그에게 부과된 조세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성의 사적 사용의 제한] 때문에 계몽의 진행이 특별히 방해받지는 않기 때문"이라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설명일 뿐 적극적인 설명이 되지 못한다. 시민적인 차원에서, 시민의 목소리로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꼭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때, 칸트의 귓가에는 여전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복종하라!"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이라는 구분을, 어떤 적극적인 재해석을 가하지 않는 한, 사실상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에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을 비판할 자유, 정부의 시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아직 학자와 시민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헌법상의 권리들은 실질적으로 안전하게 보장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칸트처럼 비굴한 강화 협상을 계몽군주에게 제안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칸트는 그가 누리고 싶은 정치적 자유를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우리는 표현되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수많은 자유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던 '계몽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계몽의 시대'는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룬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칸트는 대중들이 계몽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계몽되지 않는 대중들에 대한 절망은 20세기의 현상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민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일"이며, "이런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에 대한 자유를, 그 반쪽짜리 원웨이 티켓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유를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자가 자유롭게 비판하고 독자들이 그것을 읽는다면, 언젠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칸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함성 앞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보장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앞서 말했듯 매우 적극적이고 치열한 재해석을 가하여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다. 칸트적 의미에서 '학자'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자신의 책을 검열당하지 않고 써서 시장에 출판한 다음이라면, 대중들이 스스로의 이성을 감히 사용하여 자신을 계몽할 것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칸트에 대한 온갖 재해석이 담론계에 떠돌고 있지만 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칸트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믿음은, 마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삶과 학문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내가 읽은 칸트의 저작 중 가장 극심한 정신적 굴곡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나누고 분석하는 그의 해박한 지성은, 권력 앞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주저하는 일개 대학 교수의 그것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는 『정신현상학』보다 앞서서 독일 지식인들의 내면을 그려내어 보여준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저작 중 드물게 '뜨거운' 글이다. 그 열기는 분출될 수 없는 억압된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다음과 같다. 칸트의 시대부터 이미 독일 관념론의 그것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난삽하고 어지러운 문장을 읽다 지친 검열관의 시선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마지막 문단의 중간 부분부터 칸트의 어조는 급변한다. "이렇게 하여 여기서 이상하고 예기치 않았던 일이 진행된다." ... "이러한 일의 진행 속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역설적이다." 이하 진행되는 내용은, 앞서 말했듯 너무도 '뜨겁기' 때문에, 나의 요약을 통해 접하는 것보다는 직접 길게 인용하여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크게 하는 것은 국민의 정신의 자유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신의 자유에 넘을 수 없는 한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적게 하는 것은 국민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때 이런 딱딱한 껍질 밑으로부터 자연이 가장 조심스럽게 보호하는 싹을, 곧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을 계발하게 되면, 이것은 점차 국민의 성격에 반작용하게 되고(이에 의해 국민은 점점 행동의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 마침내는 이 반작용이 통치의 원리에까지 미치게 되어 정부는 이제야 기계 이상인 인간을 그의 품위에 어울리게 대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시민적 자유의 제약이 정신적 자유의 확장을 가져오고, 확장된 정신적 자유가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으로 이어지며, 결국 행동의 자유를 거쳐 통치의 원리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는 것, 그러한 강렬한 역사적 발전에의 소망이 조심스럽게 쇳물을 부어 거푸집에 담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대미에 이르러 칸트의 이 텍스트는 한없이 '인간'의 텍스트에 가까워진다. 매우 용감하게, 과감하게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이미 헤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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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언급된 글 중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은 중원문화사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 편역, 서광사)을 참조하였습니다.

*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외의 다른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에, 이 생각이 (혹시라도) 독창적인 것인지, 아니면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텍스트를 곡해하고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 확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2009-10-09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조두순, 장자연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 엄격한 잣대가 과연 평등했는가?

‘대체 왜 지금에서야 폴란스키를 체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피아노>, <차이나 타운>등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13세 소녀에게 약물과 술을 먹인 후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항문성교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77년의 일이다. 46일간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은 끝에 ‘사회에 무해하다’는 판정을 받고 잠시 가석방된 틈을 타, 그를 다시 구치소에 구금한 후 재판을 진행하려 했던 판사의 결정에 불복하고 미국에서 빠져나간 것은 1978년 2월 1일. 아직 미국으로 송환되지는 않았지만, 31년만에 미 사법 당국은 폴란스키를 다시 붙잡았다.

   
  ▲ 로만 폴란스키 감독  
 
적지 않은 수의 헐리우드 영화 감독과 스타들, 프랑스 대통령 샤르코지와 대중적 철학 저술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구명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예술가, 철학자 등에게 관대한 프랑스의 문화적 전통도 그렇거니와, 싸움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언론의 경향성이 맞물려 폴란스키의 체포는 일종의 ‘문화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마저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국내의 언론 및 예술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무관심이 다행스러운 이유는 안그래도 ‘공인’들에게 관대하지 않은 국내의 여론이, 폴란스키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예술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메다꽂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 무관심은 불행한 일이다. 아동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는 논쟁의 씨앗을 머금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법 현실과 성범죄

연예인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마이스페이스, 기타 등등 사적인 공간을 뒤져 몇 장의 사진이나 ‘발언’을 얻어낸 후 ‘어떻게 공인으로서 이럴 수 있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인터넷의 여론과 달리, 한국의 사법 현실은 (폴란스키의 체포 및 압류를 끝까지 요구하는) 미국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에 더 가깝다. 몇몇 유명한 뺑소니 사건이나 도박 사건 등을 놓고 일반적인 경우와 형량을 비교해본다면 분명 그렇다. 그 대상이 연예인이 아닌 정치인, 혹은 기업가라면 솜방망이 처벌의 사례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쉽고, 통상적인 형량이 선고되거나 집행된 경우를 찾는 게 어려워질 지경이다.

반대로 인터넷의 열화와 같은 분노가 곧장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50대 남성이 안산에서 9세 여아를 성폭행하고 평생 회복될 수 없는 상해를 입힌 사건, 이른바 ‘조두순 사건’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그렇다. 경애하는 지도자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천인공노할 사건에 크게 진노하시어 ‘그가 받은 형기를 모두 살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 성범죄에 대한 공포에 떠는 민중들의 마음을 크게 헤아리신 것이다. 그 뜻을 이어받아 법무부와 정치권은 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이고 공소시효를 연장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법 시스템은 대중들의 분노가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으면 즉각 반응하지만, ‘사회적 강자’를 향하고 있으면 귀를 막는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다섯 글자를 타자로 치는 것이 참으로 메스꺼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변변한 소득도 직업도 없었고, 성범죄를 포함한 온갖 범죄를 저질러 전과 10범이 넘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사회 시스템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가 오직 ‘조두순’이라는 한 개인에게로, 혹은 언제 다가와서 내 아이에게 혹은 나에게 성폭행을 가할지 모르는 ‘잠재적 범죄자’들에게만 향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지금 조두순을 동정하는 게 아니다. 조두순이 아닌 사람들, 안정된 지위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성범죄에 대해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을 따름이다.

과연 한국 사회가 성범죄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를 요구할 수 있을만큼 성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지니고 있는가? ‘설령 상대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해서는 안 된다’, ‘설령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가해자가 누가 되었건 성범죄만큼은 확실히 처벌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서울신문 10월5일자 1면  
 

‘성범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이런 논의를 할 때 가장 곤란한 것 중 하나는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체 ‘성범죄’가 무엇일까? ‘조두순 사건’에 대해 핏대를 올리는 수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성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미 성범죄의 가해자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국 남성들 중 상당수는 성매매를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성매매는 성범죄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두순이 저지른 범죄에 진노하신 그 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못생긴 마사지걸 발언’이 터졌을 때 이명박 대통령은 스포츠 마사지에 대한 것이라고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공식석상에서조차 성매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발언이 등장했으나 그것이 이미 ‘성범죄’임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남자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돈이 있는 남자가 성을 제공할 수 있는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섹스 서비스를 받는 성매매가 대체 왜 성폭력이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리 베커와 리처드 포스너를 필두로 한 법경제학자들이라면 ‘성이라는 재화를 자유롭게 매매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매매는 엄연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성폭력이다.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은 성매매를 강요한 자, 성매매를 한 자 모두 처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포주도 나쁘지만 그 포주에게 돈을 주고 성을 구매하는 ‘평범한 남자’도 그 범죄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만 강압에 의해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당한 사람은 ‘성매매피해자’로 규정하여 처벌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미 이 지점에서부터 뭔가 크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성매매는 누구나 다 하는 거고, 그냥 쉬쉬하고 넘어갈 일이지 그것을 괜히 단속하겠다고 하면 ‘풍선효과’가 발생해서 성매매가 음성화되고, 그래서 차라리 공창제를 시행하는 게 나을 것이고, 등등 운운하는 이들을 상대로 성범죄에 대한 전반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에서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작 ‘남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드높이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이 한국에서 발생했다면

‘조두순 사건’에 대한 여론과 함께 폴란스키의 체포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두순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곱씹으며 ‘미국처럼 200년, 300년씩 콩밥 먹여야 한다’고 이를 갈았다. 그렇게 외치는 남성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성매매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며, 설령 그것이 범죄로 규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성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미국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프랑스 대통령이 헛기침을 해도 사법 당국은 꿈쩍하지 않는다. 성범죄는 성범죄일 뿐이며, 누가 저질렀더라도 처벌을 받아야 하고, 아무리 오래 된 것일지라도 법의 심판대에 서야만 하는 것이다. 독일의 『슈피겔』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LA 주 검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 다루는 사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 신부가 20년전 어떤 소년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건이다. 왜 이런 경우는 박수갈채를 받아야 하고, 폴란스키를 체포한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폴란스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절대적인 원칙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혹자는 폴란스키를 고발한 소녀가 그를 유혹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조사 결과 피해자는 폴란스키와 단 둘이 남아있을 때 성관계를 거절했다. ‘무섭다, 집에 가겠다’는 의사를 수 차례에 걸쳐 분명히 표현했다. 이미 가해자가 먹인 술과 약물로 인해 행동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다.

피해자는 두려웠기 때문에 적극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면 ‘적극적인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빌미삼아 ‘화간’이라고 몰아붙이는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고, 가해자는 어렵잖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거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은 후 집행유예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 장자연씨 사건’을 떠올려보면 된다. 성접대를 받은 사람들이 과연 법에 규정된 처벌을 받았던가?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기나 했던가? 한국 검찰은 미국 검찰이 그러하듯이 성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는 한 것인가?

‘그 XX를 죽여라’, ‘거세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미국의 제도와 형량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그런 엄격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범죄 자체에 대한 단호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을 보라.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연예계에는 감독과 배우들간의 은밀한 성적 거래가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폴란스키 감독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사건 발생 이전에 부인이 연쇄살인범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는 충격을 겪었다.

그러나 미국의 법 체계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가 13세 소녀에게 약을 먹이고 술을 먹인 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힘과 협박으로 제압하고 피해자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하여 수 개월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혔다는 것만이 관건일 뿐이다. 성폭력은 성폭력일 뿐이다. 다른 변명은 필요 없다. 사건이 벌어진지 31년이 지났지만 검찰은 끝까지 처벌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것은 바로 이럴 때에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미국식으로 하자고? 그 엄격한 잣대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면, 나는 찬성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 사회는 고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그런 사회이다. 형량을 높이고 전자발찌를 평생 채우자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법무부 관계자들 중, ‘미국식 윤리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적어도 ‘각하’께서는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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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5

'흑싸리 총리' 정운찬

[판] '흑싸리 총리' 정운찬

한국을 대표하는 케인시언 경제학자 정운찬 교수. 총리가 되기 위해 청문회장에 앉았다. “감세의 70%가 서민의 혜택으로 돌아간다는 정부의 주장에 동의하느냐”는 이정희 의원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그 경제학자는, 여론의 반발과 야당 의원들의 투표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3분의 2를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을 등에 업고 ‘무사히’ 총리가 되었다. 이른바 ‘식물 총리’가 될 것임이 자명한 상황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식물이 되었을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그가 현 정부 내에서 해충을 잡아먹는 식충식물 역할이라도 해주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현실은 훨씬 절망적이다.

[온 가족이 모여앉아 차례를 지내고 서로 안부를 묻고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치는] 추석을 맞이하여 용산참사 유가족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정운찬 총리는 흑싸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흑싸리껍다구’라는 관용어구 그대로, 마땅히 내놓을 패가 없을 때 버리는 그런 패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정부 당국자 중 최초로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방문한 정운찬 총리는 미리 준비해 온 원고를 읽은 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그 어떤 확답도 내놓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고, 수사자료 공개 문제는 검찰 소관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중앙 정부에서 오긴 왔습니다’라며 얼굴도장만 찍고 돌아갔다. 원론적으로 중앙정부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말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한 채 총총히 떠나간 것이다.

재개발 정책은 서울시 소관이지만, 서울시에서 무리하게 뉴타운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전체적인 주택 정책 자체가 신규 주택 건설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사자료 공개는 검찰 소관이지만 예로부터 검찰은 법무부장관의 지시를 받아왔고, 법무부장관은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각료회의의 일원이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은 어설픈 변명에 불과하다.

용산참사 재판은 정부에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4일 증인석에 선 경찰특공대 제1대대 대장은 “망루 내부를 파악하고 작전에 진입한 것은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경찰특공대는 당시 망루 안에 사람이 몇 명 있는지, 시너가 몇 통 있는지 등의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망루가 건설되기도 전에 진압작전을 시작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리한 진압이 참사를 불렀다”는 유족 측의 주장이 점점 신빙성을 얻고 있다. 명절을 전후하여 정부 측에서도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운찬 총리가 나왔다.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먹을 게 없는’ 상황이다. 용산참사는 서민경제를 표방하며 서민들의 주거지를 초고층 주상복합으로 재개발하는 정책에 대해 커다란 물음표를 던진다.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법원의 명령마저 무시하는 안하무인 검찰에 대한 비판도 당연히 제기될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모르쇠 할 수가 없다. 차례가 돌아왔으니 뭐라도 내긴 내야 한다. 그러니까 에라, 흑싸리껍다구나 하나 버리지 뭐.

흑싸리라는 이름의 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흑싸리라고 부르는 것은 본디 등나무인데, 화투에 그려진 모양이 비슷하여 싸리와 혼동하게 된 것이다. 등나무는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장미목 콩과의 낙엽 덩굴식물로,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심는 경우가 많으며 학명은 Wisteria floribunda이다. 정운찬 총리가 흑싸리가 아닌 등나무가 되어 지친 서민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게임의 세계는 냉정한 법.

정부는 그를 흑싸리껍다구로 내놓았고, 낙장은 불입이다. 정 총리의 관운을 빈다.

경향신문, 2009년 10월 5일


편집 과정에서 빠진 문구를 첨가하여 올립니다. 하긴 신문 지면에 대놓고 '고스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게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이나 불만을 리플로 달아주세요.

2009-09-23

기후 변화와 과학적 태도, 확실성의 문제

17세기 철학자들의 주된 과제 중 하나는 '지식의 토대'를 찾는 것이었다. 과학을 철학이 '정당화'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와서 과학은 철학자들의 이런 저런 정당화 따위가 그다지 쓸모도 없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지금은 과학적 지식이 왜 참인가,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 결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확실성'을 갖고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온난화 회의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대부분의 기상학자들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기후 변화가 촉진되고 있으며, 그 방향은 평균 기온 상승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문제는 '그게 정말 참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지?'같은 수준 낮은 질문에 대답하기가, 적어도 그 분야의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특히 엄청나게 많은 양의 복잡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현대 과학의 연구 성과는 비전문가가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것일 뿐더러, 훈련된 전문가라 해도 잘못된 해석의 함정에 빠지기 일쑤다. 아이추판다님의 블로그에 올라왔던 연어 영혼 발견 사건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내가 해봐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두 개 이상의 독립된 자료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아내는 일은 '이게 있고 저게 있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은 관련되어 있다'는 수준의 판단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고 한다).

같은 교훈이 기후 온난화와 관련해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이 기상 정보를 정밀하게 수집하기 시작한 역사 자체가 매우 짧거니와, 지금도 새로운 방법론이 속속 개발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기존의 데이터에 대한 재해석이 끝없이 가해진다. 따라서 그 분야의 정보를 꾸준히 다뤄봤거나 다른 분야의 연구를 손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감식안을 갖추지 않은 다음에야, 대체로 '학계 주류'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내가 지난 포스트에서 실피드님의 리플에 대해 답변으로 인용한 기상학 블로그 RealClimate의 한 구절 또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Scientifically, this argument holds no water: it is simply not possible to draw conclusions about the causes of climate variations by just looking at one time series. Only considering the time series of Arctic temperature, it is impossible to tell what the cause of the 1930s warming was, what the cause of the recent warming is, and whether both have the same cause or not. Milloy’s specious argument is a characteristic example for a method frequently employed by “climate skeptics”: from a host of scientific data, they cherry-pick one result out of context and present unwarranted conclusions, knowing that a lay audience will not easily recognise their fallacy.
(강조는 모두 인용자)

http://www.realclimate.org/index.php/archives/2004/12/the-arctic-climate-impact-assessment/


가령 많은 온난화 회의론자들이 '자연스러운 기후 변화의 주기'의 사례로 인용하는 태양 흑점 변화의 경우, 그것이 '이유'가 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라는 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태양 흑점의 변화 주기 그래프 등을 제시한 후, 그 밑에 평균 기온 그래프를 가져다 놓고, '자 어때요, 놀랍죠? 온난화는 자연의 섭리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인 반론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정보가 옳다고 믿어야 하는 것일까? 실피드님과의 대화에서 나는 '나 스스로 자료를 해석하려 들지 않고, 다수의 견해라고 인정되는 것을 따른다'고 나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반면 실피드님은 스스로 논문을 검색하고 자료를 찾은 후 기후 변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세우는 편이다. 각자의 방식에 장단점이 있겠지만 나는 내 방식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영역의 자료를 해석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렇다.

실피드님은 "북극의 얼음 면적 변화 추세" 라는 글에서 본인이 확보한 2002년부터 2009년까지의 북극 위성 사진 및 분석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난 10년 간의 [면적] 자료는 추이라고 할만한 일관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후, 지난 40년간 측정한 얼음의 두께에 대해 언급하고, "내 생각에도 북극의 얼음은 백 년 이상이 걸려 제법 많이 녹아 없어지거나, 유럽까지 덮을 정도로 커지거나 하는 것 같긴 하다. 요점은, 이 마저도 고기후에 비추어 보았을 때 '주기적'일 거라는 생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실피드님은 인공위성 자료에 대한 크나큰 신뢰를 가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이전의 북극 현황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거나 찾더라도 신뢰할만하지 않으므로 장기적인 추세를 계산할만한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적어도 링크된 포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그러하다.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 시리즈로 내고 있는 문고본 입문서 A Very Short Introduction중 하나인 Global Warming의 저자 Mark Maslin에 따르면, 그러나, 인공위성 자료가 지금까지 확보된 것들보다 정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그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4. Satelite data casts doubt on the models.

Again, before the satellite data was clearly understood it did suggest that [65p] over the last 20 years there had been a slight cooling. The interative process of science, i.e. the re-examination of data and the assumption concerning the data, clearly showed that there were some major inconsistencies within the satellite data; first, as a result of trying to compare the data from different instruments on different satellites and, second, because of the need to adjust the altitude of the satellite as its orbit shrinks as a result of friction with the atmosphere. The final problem withe the satellite data is that 20 years is just too short a time period to find a temperature trend with any confidence. This is because climatic circles or events will have a major influence on the record and will not be averaged out; for example, the sunspot cycle is 11 years, El Niño-Southern Oscillation is 3-7 years, and the North Atlantic Oscillation is ten years. So which of these cycles is picked up by the 20-year satellite data will strongly influence the direction of the temperature trend. [65-66p.] (강조는 인용자)


아무튼 위성을 통해 우리는 지난 20여년간 얻을 수 없었던 값진 데이터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 자료들을 통해 기후 변화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몫이다. 그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태양 흑점으로 인해 기온이 내려가는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관측을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자연적인 요소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요소를 종합하면, 지난 130여년간 평균 기온은 지속적으로 상승해왔으며 그것은 모델을 통해 예측한 결과와 일치한다.

3. Solar output and sunspot activity control the past temperatures.

This is something both the sceptics and non-sceptics agree on. Of course sunspots and also volcanic activity influence past temperatures. For example, the cooling of the 1960s and 1970s is clearly linked to changes in the sunspot cycle.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camps is that the sceptics put more weight on the importance of these natural variations. Though great care has been taken to understand how the minor variations in solar output affect global climate, this is still one of the areas which contain many unknowns and uncertainties. However, climate models combining our current state-of-the-art knowledge concerning all radiative forcing, including grennhouse gases (see Table 1 on pages 16, and 17) and sounspots, are able to simulate the global temperature curve for the last 130 years. Figure 19 shows the separate natural and anthropogenic forcing on global climate for the last 130 years and the combiantion of the two. This provides confidence in both models and also an understanding of the relative influence of natural versus anthropogenic forcing. [62p.] (강조는 인용자)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에서 언급한 도표를 첨부한다. 이것을 보면 자연적 요소와 인위적 요소를 결합하여 만든 모델이 지난 130여년간의 평균 기온 변화를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과, 현재의 평균 기온이 지난 130년 중 그 어느때보다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련 분야에 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진 '평범한 입문서'의 도입부에서부터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 . . Global warming is caused by the massive increase of greenhouse gases, such as carbon dioxide, in the atmosphere, resulting from the burning of fossil fuels and deforestation. There is clear evidence that we have already elevated concentrations of atmospheric carbon dioxide to their highest level for the last half million years and maybe even longer. Sceintiests believe that this is causing the Earth to warm faster than any other times during, at the very least, the past one thousand years. [1p.]


여기서 다시 지식의 확실성 문제로 돌아가보자. 만약 누군가가 '저 과학자들 다 돈 타먹으려고 그러는 거다. IPCC는 악의 소굴이다. 넌 왜 직접 자료를 찾아볼 생각도 않고 넙죽넙죽 믿기만 하냐'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그가 바라는 수준의 '확실성'을 제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지식, 혹은 지식 일반에 대한 토대론이 무너진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의 지적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자승자박에 빠지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대중적 차원에서 접할 수 있는 온난화 회의주의에 대한 책 중에는, 내가 인용한 것과 같은 '포괄적인 개론서'가 없다. 다만 특정한 자료의 해석을 놓고 기존의 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주안점이 맞춰져 있을 따름이다. 이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온난화 회의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그들은 학계의 소수자 혹은 이단아일 뿐 주류적인 견해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나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온난화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시간적 단위는 150년이다. 2009년은 인류가 땅에서 석유를 채굴하여 쓰기 시작한지 딱 150년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석유가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면서부터, (이것은 『인간 없는 세상』의 엘런 와이즈먼이 쓴 표현인데) 지구는 쉴 새 없이 화산이 폭발하고 있는 행성이 되어버렸다.

내가 인용한 책에서 130년간의 데이터를 논한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현재의 인공위성 데이터처럼 심층적이거나 정밀하지는 않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그런 경우에도 모델을 만들어서 현실을 예측하고 자료를 해석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지난 130년간 가장 뜨거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대체로) 통합된 견해를 신뢰하는 편이, 나 스스로 자료를 찾고 결론을 내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북극 빙하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실피드님의 리플에 내가 달아놓은 반박에 이미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1900년과 비교했을 때 현재 남아 있는 [북극해] 빙하의 양은 예전의 77퍼센트이다. 데이터 분석을 통해 지난 30년간 여름에 팽창했던 빙하의 부피가 무려 20퍼센트 감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78년부터 2005년까지 측정한 인공위성 기록을 살펴보면 2005년 9월 북극의 빙하 부피는 최저치(550만 제곱미터)를 가리켰다. 이 데이터는 현재 진행되는 빙하의 감소가 20세기에 와서 발생한 유일한 현상임을 조언하고 있다.(110쪽, 강조는 인용자)

『기후 변화를 이해하는 짧지만 충분한 보고서』, 슈테판 람슈토르프, 한스 요하임 셸른후버 지음. 오재호 옮김, 도솔.


그러나 실피드님은 2002년부터 2009년까지의 위성 사진 자료(지난 '10년간'의 위성 사진 자료)를 찾아낸 후, 그것으로부터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지 못하고(자료가 부족하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그 결과 '북극해의 변화에 대해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그의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의 한 표를 훈련된 다수의 연구자들의 일관된 견해에 던질 수밖에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 또한 전혀 기후 변화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나는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내가 제시한 '사실'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해도 내게서 답변을 듣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저 또 다른 전문가들의 '보편적' 견해를 들이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보자면 나는 결코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 채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 수준의 확실성을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지는 이제 철학의 문제가 되어버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이다.

2009-09-18

김어준 총수, 파티는 끝났다

딴지일보에 기사로 실을 수 있는지 여부를 타진해 보았다가 거절당한 글입니다.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 짧은 호흡으로 거칠게 썼는데, 거절당해서 안타깝군요. 이런 글도 올라갈 수 있어야 딴지일보가 새로운 활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급적이면 링크된 김어준 총수의 글을 먼저 읽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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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사건에 대한 길고 긴 변명일 뿐인 삶은 얼마나 초라한가. 김어준 총수가 최근 한겨레 ESC에 쓴 "박재범은, 돌아온다" 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그의 말대로 박재범은 돌아올 수도 있다. 비록 그가 가지고 있던 '짐승돌'로서의 상품성은 이미 반토막이 난 다음이지만,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오묘한 속성이 그의 귀환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총수는, 못 돌아올 것 같다.

문제는 2002년 월드컵이었다. 당시 그가 쓴 기사들을 살펴보면, 애국심이 발현되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총수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나보다. 여기서 관건은 애국심 자체에 대한 칭찬과 비난이 아니다. 애국심, 혹은 국가주의적 열기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느냐이다.

비유를 들어보자. 남자라면 누구나 발기한다. 따라서 발기하는 것, 성욕을 느끼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짓이 못 된다. 하지만 아무데서나 발기하고, 자기가 흥분했다는 이유로 아무나 붙잡고 성폭행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자를 처벌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성추행범들이 자연스러운 욕구가 어쩌고 저쩌고 운운한다. 모든 남자들이 그 '자연스러운'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강간범이 되는 것은 아니고, 그 누구에게도 그런 행위가 허용될 수는 없다.

국가주의도 그렇다. 축구는 일종의 형식화된 전쟁과도 같다. 축구 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특히 축구는 국가주의적인 열기와 쉽사리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월드컵이라면, 축구장에서 국기를 흔들면서 응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의된 섹스와도 같다. 혹은 엄격한 규칙을 세워놓고 벌이는 정교한 SM플레이와도 같은 것이다. 오직 '그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국가주의적 열기. 문제는 김어준 총수가 이 열기에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발기했다고 그걸 꺼내들고 만지작거려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적 자존심' 따위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걸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이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당연한 것 아닌가? '애국 완장질', 아무렇게나 막 해도 되는 건가? 총수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두 번째[박재범에게 '암컷'들을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하던 한국의 '수컷'들]가 세 번째['순수하게' 국가적인 관점에서 박재범을 비판한 사람들]의 언어를 구사하며 첫 번째처럼 행동하면서다. 나를 주눅 들게 만들던 알파 수컷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애국의 완장까지 채워진다. 이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자 그 완장을 애국주의의 집단발호로 해석하고 만 먹물들의 관습적 훈시가 등장한다. 그것은 파시즘이다! 이에 첫 번째['우리 동네에서 장사하면서 우리 동네 욕한다'고 반발한 '소비자'들]가 먼저 반발한다. 아니 소비자로서 내가 내 맘대로 섭섭해하지도 못한다는 건가. 어디서 훈장질이야. 이 반발은 대체로 합당하다. 첫 번째는 그런 구호를 외친 적 없었으므로. 두 번째는 실제 애국엔 관심이 없었으므로. 하여 그 질타는 세 번째에게나 적합한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세 번째는 워낙 소수라 그 판에 거의 참여도 않았으므로.

"박재범은, 돌아온다"(김어준, 『한겨레』, 「매거진 esc」, 2009년 9월 17일)


이 시점에서 예의 '먹물' 비난이 등장한다. 먹물들은 그냥 완장만 차고 있는 애들한테도 '국가주의자'라고 비난하니까 잘못되었다는 거다. 이건 아무리 봐도 웃기는 소리다. 나치 완장을 차고 나치 뺏지를 달고 다니면서 유대인을 구타하면 그게 나치인 거지, 가슴 속 깊은 속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아리안 민족에 대한 사랑과 총통에 대한 충성이 있어야만 나치인 건가?

이런 논리대로라면 '생계형 친일파'들은 친일파도 아니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 입사시험 볼려고 창씨개명하고 동양척식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서류 정리 좀 했을 뿐인데. 천황에 대한 가슴 속 깊은 충성심 따위 전혀 없었는데. 안 그래?

더군다나 '우리 나라에서 돈 벌어먹으면서 우리 나라 욕한다'고 불쾌해하는 게 국가주의가 아니라는 말도 납득하기 어렵다. 한국의 지역주의는 거의 박살이 난 상태다. 호남과 영남으로 나누어진 그 지역주의 말고, 자기가 사는 동네를 가꾸고 지켜나가고, 자신이 '한국인'이기 이전에 '이 동네 사람'이라고 느끼며 자부심을 갖는 그런 지역주의 말이다.

이탈리아인들에게 물어보라. '너 이탈리아 사람이야?'라고 물어보면 '아니, 난 나폴리'라고 대답한다. 이런 지역주의가 과연 한국에 존재하는가? 설령 영남 호남 싸움에 목숨을 거는 누군가라 할지라도, '당신은 한국인입니까, 아니면 경상도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한국인이라고 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그 질문에서 자기 고향을 먼저 대는 이들은 극히 일부의 부산 출신들 뿐이었다. 그마저도 외국의 진짜 지역주의, 나라고 뭐고 다 필요없고 내가 사는 이 동네가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그런 지역주의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김어준이 전제하고 있는 그런 민족주의는, 한국에 없다.

김어준은 앙증맞게도 한국에 있지도 않은 '지역주의'가 바로 '소비자'들의 사고방식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지역'이라는 게 바로 '대한민국'이고, 그래서 그 지역주의는 국가주의와 다를 바 없다. 단지 적극적인 공격심을 드러내는 대신 그냥 흥핏쳇 하면서 툴툴거리는 수준에 머물렀다 뿐이지, 그것도 국가주의라는 말이다. 왜냐,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주는 공동의 정체성이 바로 '대한민국'이니까.

다양한 회피 기동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놓고 보건 국가주의라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국가주의를 국가주의라고 비판하면, 예의 "먹물들의 관습적 훈시"같은 비난이 돌아온다. 마치 제 다리를 잘라먹는 문어처럼, 어차피 같은 먹물을 뿜고 사는 주제에 누구는 관습적 훈시를 내뱉는 먹물이고 누구는 아니라는 이 발상, 이게 진짜 문제다.

앞서 말했지만 어떤 형식을 띄고 있건, '너네 나라로 꺼져'라는 함성은 결국 국가주의에 속한다. 그리고 그것이 '건강'하게 소비될 수 있는 지점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아직도 김어준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2002년 월드컵 같은 특정한 때와 장소가 그 예에 속한다. 일상의 영역, 혹은 음악 듣고 아이돌 팬질하면서 꺅꺅거리는 그 순간은 국가주의와 무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대체 4년 전에 마이스페이스에 투덜거린 게 뭐가 대수인데?

스포츠의 현장이 아니면 국가주의적 함성이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진정한 국가주의자'가 아닌 자들, 그저 박재범을 씹기 위해 대한민국을 거들먹거리는 자들이야말로 자신들의 행동을 일종의 '게임'으로 만들어버린다. 국가주의적 함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일종의 스포츠로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악플을 달고, '그 새끼가 우리 나라 욕한 증거'를 퍼다 나르고, 오역이네 아니네 운운하면서 흥분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놀이'이다. 인간 사냥도 놀이에 속할 테니 말이다.

인류는 원시시대부터 수렵을 했다. 무언가를 추적하고, 몰아붙이고, 숨통을 끊어놓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짜릿한 쾌감을 안겨준다. 그런데 그 대상이 '사람'이 되는 게 정당한가? 우리는 네티즌들의 인간 사냥을 비판하지도 말아야 하는가?

'먹물'을 비난하기에 바쁜 총수에게 묻고 싶다. 이 상황에서 그럼, 당신은 이 인간 사냥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그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며 홍위병처럼 자아비판을 시켜야 속이 시원하겠노라고 외치는 저 행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완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너희들이 대한민국 어쩌고 운운하는데, 대한민국 어쩌고 하면서 어린 가수의 사소한 잘못을 놓고 쫓아내는 것이야말로 수치스러운 행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국가주의'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체 왜 대중들이 '먹물'을 싫어할까? '국가주의'같은, '파시즘' 같은 단어들을 계속 사용해서? 그런 "지적 태만"에 분노해서? 본질은 그보다 훨씬 간단하고 유치하다.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행동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거다. 국가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아무리 떠들어도, 비판만 하지 않는다면 무사통과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해도 흥분한 대중들의 흐름을 거스르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이건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사람들에게 스스로 생각해야만 할 숙제를 안겨주느냐, 아니면 '너희들은 머리 쓰지 마, 내가 한큐에 정리해주마'라고 나서서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우겨넣은 다음 대중들의 호응을 얻을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박재범에게 소비자로서 배신감을 느낀다, 그런데 국가주의라고 비난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먹물이 개새끼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똥꼬 깊숙히' 똥침을 찌르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똥구멍을 핥아주는 것밖에 안 된다. 지금은 질문을 해야 할 때이다.

'대체 왜 당신은 배신감을 느끼는가? 그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감정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총수는 그저 속편하게 예의 '암컷'과 '수컷'의 문제로 도피한다. 그런데 그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박재범에 대한 인터넷의 대중적 분노는 오히려 '미국인'에 대한 열폭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국인에게 열폭하는 데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 총수는 '건강보험료 한 달치 내고 비싼 치료 받는 재미교포들의 염치 없음'을 비난하는 여성 네티즌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나보다. 수컷으로서의 불안감?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핀트가 안 맞는단 말이다.

총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지금은 2009년이다. 월드컵 끝난지 7년 됐다. 파아티는 끝났다.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대~ 한민국~' 외치고 다녀도 되는 시기는 이제 끝났단 말이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간판 아래에서 벌어지는 비극들을 직시해야 하고, 완장을 차고 돌아다니는 얼간이들이 더 큰 해악을 벌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국가주의' 비판이 단지 "강박적인 호들갑"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김어준 총수 본인의 "지적 태만"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달력부터 보자는 말이다. 파티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