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04

단순하고 점잖은 혐오의 표현이 낳는 결과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면,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집단이 탄생하게 된다. 2007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수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값을 올려줄 정치세력'을 국민들이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혐오 감정이 단지 dislike에만 머물 뿐 심각하게 범죄적인 hate까지는 도달하지 않으므로 괜찮다는 식의 표현을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정 반대의 진실이다.

나치가 세력을 확장하던 당시, 사민당은 급격히 우경화하고 있었고 당내 소수파들을 '급진주의자'들로 몰아붙이며 급격한 중도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많은 경우 대중의 정서를 거스르지 않기를 원했고,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집권을 한 다음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식의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지적 및 정확한 기술을 환영합니다). 나치 뿐 아니라 사민당도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대중 일반의 편견을 방조하거나 심지어 그에 동참하는 일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독일인 다수가 인정한 대표적인 나치 테러가 동성애자라는 소수에 대한 테러였다. 나치 지도부 몇 명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두고, [339쪽] 동성애에 대한 나치의 원칙적인 적대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돌격대 대장 에른스트 룀이 동성애자라며 치욕적인 공격을 가한 것은 하필 사민당 신문이었다. 그때 사민당은 선거를 위해 "인민의 건강한 정서"에 호소한답시고 독일 사회주의의 자유주의적인 전통을 더럽힌 것이었는데, 1934년 소위 룀 쿠데타 이후 나치는 그 문제를 재론하면서 그때의 학살을 정당화했다.(338-339쪽)


이런 식으로 테러는 정치의 "일탈"적 수단이 되어갔다. 나치는 특유의 선동으로 '일반 대중'들이 '싫어하는' 자들을 하나씩 공격해 들어갔다. 가령 동성애자를 싫어하지만 그들에게 직접 돌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던 일반 대중들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나는 동성애가 싫다, 하지만 그들이 저렇게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라는 식의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치가 직접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하자 대중들은 스스로의 입장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나치의 테러에 동조하거나, 그들의 테러에 공포를 느끼며 입을 다물거나.

나치는 '일반 시민'들이 고깝게 여기는 자들을 순차적으로 대상으로 삼았다. 테러의 화살이 돌고 돌아 사회주의자들에게까지 돌아왔을 때, 나치의 테러를 우려하는 이들은 적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직접적·조직적으로 항거하지는 못했다. 왜일까? 데틀레프 포이게르트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놀라운 것은, 적어도 1933년에는 신문들이 공산주의자, 사민당원, 노조 조합원에 대한 억압 조치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에는 나치의 정치적 테러에 대한 의사 표명이 드물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좌파에 대한 테러에 침묵한 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과거에 중도 정당이나 우파 정당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나치가 "빨갱이"를 해치운 것을 환영했고, 따라서 테러로의 "일탈"을 기꺼이 감수했다. 둘째, 좌파 정당에 대한 테러에 대해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은 그 자체의 정치성으로 인해 생필품 공급의 부족에 대해 불평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행위였다. 따라서 좌파에 대한 테러에 동의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은 박해가 두려워 침묵했다. (79쪽)


'나는 공산주의자를 싫어한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나치의 폭력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이용하려 하거나, 그 폭력의 화살이 자신들에게 돌아올까봐 두려워서 반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국내의 불만 세력, 특히 조직적으로 산업에 타격을 입힐 수 있고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분쇄해버린 히틀러는 급격하게 군국주의로 향하는 가속 패달을 밟는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동성애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회라면, 누군가가 동성애자들에게 테러를 가할 때, 어떤 이들은 후련해하고 어떤 이들은 그 폭력에 내가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움추려든다. 결국 남는 것은 피묻은 몽둥이를 든 깡패 집단이다. 당신들의 고상한 혐오가 반드시 고상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사민당 신문은 에른스트 룀을 아웃팅하면서 히틀러에게 그들을 학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죽어갔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동성애에 대한 대중적 혐오를 부추긴 자들이, 바로 그 혐오를 타고 폭력을 휘두르며 정권을 잡은 집단에 의해 숙청당하게 된 것이다. 그 노란 카나리아를 죽인 것은 결국 '선량한 시민들'의 '평범한 혐오감'이었다. 그 모든 폭력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말 그대로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참고문헌

나치 시대의 일상사 - 10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개마고원

2009-12-31

2009년 독서 목록

  1. 20090105 - 움베르토 에코, 김운찬 옮김,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01)
  2. 20090110 - 강영안,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서울: 소나무, 2000)
  3. 20090114 - 앙드레 고르, 임희근, 정혜용 옮김, 『에콜로지카』(서울: 생각의나무, 2008)
  4. 20090114 - 장 폴 사르트르, 조영훈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서울: 한마당, 1999)
  5. 20090120 - 존 에이거, 이정 옮김, 『수학 천재 튜링과 컴퓨터 혁명』(서울: 몸과마음, 2003)
  6. 20090122 - 게르트 기거랜처, 안의정 옮김, 『생각이 직관에 묻다』(서울: 추수밭, 2008)
  7. 20090127 - 페터 제발트, 이희숙 옮김, 최현식 감수, 『가톨릭에 관한 상식사전』(서울: 보누스, 2008)
  8. 20090203 - 한국18세기학회, 『위대한 백년 18세기 - 동서 문화 비교 살롱토크』(서울: 태학사, 2007)
  9. 20090204 - 요하임 슐테, 김현정 옮김, 『비트겐슈타인』(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10. 20090205 - 에드워드 사이드, 장호연 옮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서울: 마티, 2008)
  11. 20090207 - 에드워드 사이드, 김정하 옮김, 『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서울: 마티, 2008)
  12. 20090326 -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윤미경 옮김, 『혁명을 팝니다』(서울: 마티, 2006)
  13. 20090327 - 데를레프 포이케르트, 김학이 옮김, 『나치 시대의 일상사』(서울: 개마고원, 2003)
  14. 20090328 - 리처드 예이츠, 유정화 옮김, 『레볼루셔너리 로드』(서울: 노블마인, 2009)
  15. 20090329 - 오트프리트 회페, 박종대 옮김, 『정의-인류의 가장 소중한 유산』(서울: 이제이북스, 2004)
  16. 20090330 - 이영록, 『우리 헌법의 역사』(서울: 서해문집, 2006)
  17. 20090330 - 장 폴 사르트르, 정명환 옮김, 『문학이란 무엇인가』(서울: 민음사, 1998)
  18. 20090402 - 테오도르 아도르노, 김유동 옮김, 『미니마 모랄리아 - 상처받은 삶에서 얻은 성찰』(경기도 파주: 길, 2005)
  19. 20090403 - 강영안,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서울: 소나무, 2002)
  20. 20090407 - 박해천, 『인터페이스 연대기』(서울: 디자인플럭스, 2009)
  21. 20090411 - 노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옮김, 『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1999)
  22. 20090416 - 얀 크노프, 이원양 옮김, 『베르톨트 브레히트』(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23. 20090416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1』(서울: 아카넷, 2006)
  24. 20090418 - 고종석, 『경계긋기의 어려움』(서울: 개마고원, 2009)
  25. 20090421 - 고바야시 다키지, 양희진 옮김, 『게공선』(서울: 문파랑, 2008)
  26. 20090421 - 베르톨트 브레히트, 임한순 옮김, 『브레히트 희곡선집 1 - 서푼짜리 오페라 외』(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27. 20090424 - 토르스타인 베블런, 김성균 옮김, 『유한계급론』(서울: 우물이 있는 집, 2005)
  28. 20090428 - 아마미야 카린, 송태욱 옮김, 『성난 서울』(서울: 꾸리에, 2009)
  29. 20090428 - 마스모토 하지메, 김경원 옮김, 『가난뱅이의 역습』(서울: 이루, 2009)
  30. 20090503 - 게리 윌스, 권혁 옮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6)
  31. 20090505 - 게리 윌스, 김창락 옮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32. 20090509 - 마루야마 마사오 외, 고재석 옮김, 『사상사의 방법과 대상』(서울: 소화, 1997)
  33. 20090510 - 이매뉴얼 더만, 권루시안 옮김, 『퀀트, 물리와 금융에 관한 회고』(서울: 승산, 2007)
  34. 20090517 - 도글라스 호프스태터, 데니얼 데닛, 김동광 옮김, 『이런 이게 바로 나야 (1)』(서울: 사이언스북스, 2001)
  35. 20090521 - 게리 윌스, 안인희 옮김, 『성 아우구스티누스』(서울: 푸른숲, 2005)
  36. 20090524 - 김욱, 『법을 보는 법 - 법치주의의 겉과 속』(서울: 개마고원, 2009)
  37. 20090525 - 플라톤, 강철중, 김우일, 이정호 옮김, 『편지들』(서울: 이제이북스, 2009)
  38. 20090605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2』(서울: 아카넷, 2006)
  39. 20090612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윤리형이상학 정초』(서울: 아카넷, 2005)
  40. 20090615 - 조지프 히스, 노시내 옮김,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제학』(서울: 마티, 2009)
  41. 20090620 - 강준만, 『대한민국 소통법』(서울: 개마고원, 2009)
  42. 20090717 -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경기도 파주: 창비, 2009)
  43. 20090721 - 데이비드 퍼피뉴, 신상규 옮김, 『의식』(서울: 김영사, 2007)
  44. 20090721 - 리누스 토발즈, 팀 오라일리 외, 이만용 외 옮김, 『오픈 소스』(서울: 한빛미디어, 2000)
  45. 20090721 - 죠지 레이코프, 로크리지연구소, 나익주 옮김, 『프레임 전쟁 -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경기도 파주: 창비, 2007)
  46. 20090806 - 나오미 울프, 김민웅 옮김, 『미국의 종말』(서울: 프레시안북, 2008)
  47. 20090806 - 김국현, 『웹 이후의 세계』(서울: 성안당, 2009)
  48. 20090812 - 딜런 에번스, 이충호 옮김, 『진화심리학』(서울: 김영사, 2001)
  49. 20090828 - 앨런 와이즈먼, 이한증 옮김, 『인간 없는 세상』(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50. 20090831 - 슈테판 람슈토르프, 한스 요하임 셸른후버, 한윤진 옮김, 오재호 감수, 『미친 기후를 이해하는 짧지만 충분한 보고서』(서울: 도솔, 2007)
  51. 20090901 - 제임스 듀이 왓슨, 김명남 옮김,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서울: 이레, 2009)
  52. 20090902 - 딜런 에반스, 안소연 옮김, 『진화론』(서울: 김영사, 2007)
  53. 20090906 - A. L. 바라바시, 강병남 김기훈 옮김, 『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서울: 동아시아, 2002)
  54. 20090908 - E. E. 샤츠슈나이더, 현재호 박수형 옮김, 『절반의 인민주권』(서울: 후마니타스, 2008)
  55. 20090911 - F. 코플스톤, 김보현 옮김, 『그리스 로마 철학사』(서울: 철학과현실사, 1998)
  56. 20090921 - F. 코플스톤, 박영도 옮김, 『중세철학사』(서울: 서광사, 1998)
  57. 20090922 - M. 하이데거, 『세계상의 시대』
  58. 20090925 - 레이첼 카슨, 김은령 옮김, 『침묵의 봄』(서울: 에코리브르, 2002)
  59. 20090928 - 루트 모단, 김정태 옮김, 『엑시트 운즈』(서울: 휴머니스트, 2009)
  60. 20090929 - F. 코플스톤, 김성호 옮김, 『합리론』(서울: 서광사, 1998)
  61. 20091003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상)』(서울: 아르테, 2008)
  62. 20091004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하)』(서울: 아르테, 2008)
  63. 20091006 - 질 들뢰즈, 박찬국 옮김, 『들뢰즈의 니체』(서울: 철학과현실사, 2007)
  64. 20091006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I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상)』(서울: 아르테, 2008)
  65. 20091007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I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하)』(서울: 아르테, 2008)
  66. 20091008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 세대 새판짜기』(서울: 레디앙, 2009)
  67. 20091009 - 피터 싱어, 함규진 옮김,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서울: 산책자, 2009)
  68. 20091010 - 제레드 다이아몬드, 강주헌 옮김, 『문명의 붕괴』(서울: 김영사, 2005)
  69. 20091014 - 존 히든, 이두 글방 옮김, 『비트겐슈타인』(서울: 이두, 2001)
  70. 20091015 - 피터 퓨, 정회석 옮김, 『케인즈』(서울: 이두, 1999)
  71. 20091015 - 우석훈, 『생태요괴전』(서울: 개마고원, 2009)
  72. 20091015 - 우석훈, 『생태페다고지』(서울: 개마고원, 2009)
  73. 20091015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영구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서울: 서광사, 2008)
  74. 20091016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칸트의 역사철학』(서울: 서광사, 1992)
  75. 20091018 - 임철규, 『귀환』(경기도 파주: 한길사, 2009)
  76. 20091019 -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김경희 옮김, 『군주론』(서울: 까치글방, 2008)
  77. 20091022 - 가와노 히로시, 진중권 편역, 『컴퓨터 예술의 탄생』(서울: 휴머니스트, 2008)
  78. 20091027 - 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1)』(서울: 나남, 2008)
  79. 20091028 - 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2)』(서울: 나남, 2008)
  80. 20091029 - 조지 레이코프, 나익주 옮김, 『자유 전쟁 - '자유' 개념을 두고 벌어지는 진보와 보수의 대격돌』(서울: 프레시안북, 2009)
  81. 20091030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1)』(서울: 시공사, 2009)
  82. 20091030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2)』(서울: 시공사, 2009)
  83. 20091101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3)』(서울: 시공사, 2009)
  84.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4)』(서울: 시공사, 2009)
  85.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5)』(서울: 시공사, 2009)
  86.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6)』(서울: 시공사, 2009)
  87. 20091103 - 위르겐 하버마스, 한승완 옮김, 『공론장의 구조변동』(서울: 나남출판, 2004)
  88. 20091104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7)』(서울: 시공사, 2009)
  89. 20091104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8)』(서울: 시공사, 2009)
  90. 20091105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9)』(서울: 시공사, 2009)
  91. 20091105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10)』(서울: 시공사, 2009)
  92. 20091108 - 에드문드 후설, 이종훈 옮김,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서울: 지만지, 2008)
  93. 20091110 - 진중권 엮음, 『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서울: 휴머니스트, 2009)
  94. 20091117 - 노르베리트 힌스케, 이엽, 김수배 옮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서울: 이학사, 2004)
  95. 20091119 - 무함마드 유누스, 김태훈 옮김, 『가난 없는 세상을 위하여』(서울: 물푸레, 2008)
  96. 20091123 - 제프리 영, 윌리엄 사이먼, 임재서 옮김, 『iCon: 스티브 잡스』(서울: 민음사, 2005)
  97. 20091123 - 김기창, 『한국 웹의 불편한 진실』(서울: 디지털미디어리서치, 2009)
  98. 20091125 - 밥 우드워드, 김창영 옮김, 『부시는 전쟁중』(서울: 따뜻한손, 2003)
  99. 20091201 - 아우구스트 몬테로소, 김창민 옮김, 『검은 양과 또 다른 우화들』(서울: 지만지, 2008)
  100. 20091204 - 김태권, 우석훈 해제, 『어린왕자의 귀환』(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9)
  101. 20091206 - 밥 우드워드, 김창영 옮김, 『공격 시나리오』(서울: 따뜻한손, 2004)
  102. 20091208 - 조지 몬비오, 정주연 옮김, 『CO2와의 위험한 동거』(서울: 홍익출판사, 2008)
  103. 20091212 - 김학원, 『편집자란 무엇인가』(서울: 휴머니트스, 2009)
  104. 20091218 - 폴 크루그먼, 예상한 외 옮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서울: 한국경제연구원Books, 2009)
  105. 20091221 - E. 캇시러, 유철 옮김, 『루소, 칸트, 괴테』(서울: 서광사, 1996)
  106. 20091223 - 임석재, 『계단, 문명을 오르다: 고대 ~ 르네상스』(서울: 휴머니스트, 2009)
  107. 20091224 - 움베르토 에코, 김광현 옮김, 『기호: 개념과 역사』(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09)

2009-12-30

세대론 메모

아까 모 편집자님과 만나서 식사하던 중 나온 이야기.

'대학생 말하기 강의'라는 책이 있다고 하자. '20대 말하기 강의'라는 책을 또 누군가 낸다고 하자. 두 책을 사서 볼 독자층은 사실상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제목은 다르다. 나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20대 문제'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대학생들이 겪는 문제가 있고,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어쩌면 객관적으로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20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아직도 읽지 않았다면, 당장 검색해서 한겨레21의 '노동OTL' 시리즈를 정독할 것).

특히 조선일보. '386세대'라는 단어를 띄움으로써,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갈등을 화이트칼라 사무직 직원 및 인근 엘리트들 사이의 세대 다툼으로 치환해버렸다. IMF 당시 30대였던, 80년대 학번을 단, 60년생들. 이른바 '58년 개띠'들에게 밀리는 세대들. 이 구조가 지금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386에게 밀리는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세대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를 꺼내면서도 왜 노동문제에 무관심한지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세대론이 유의미한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문화적 담론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특정한 문화 컨텐츠를 함께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위로서의 세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구학적으로 유의미한 지표를 만들어낼 수준이 아니라면, 보편성을 지니는 세대론이라는 것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 나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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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세대론은 '작은 칼'이다. 작은 단위에서는 잘 들어맞는다. 가령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학생들의 세대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는 학부제의 전면적 도입 및 실시였다. 그것이 기존의 학생 조직의 재편을 강요하면서 와해시키지 않았다면 현재 대학가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랐을 수도 있다. 법조인들에게는 곧 들이닥칠 로스쿨 세대가 기점이 될 터이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세대들도 영상원이라는 하나의 교육기관이 생긴 것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세대론은 작은 단위를 분석할 때 유효하다. 문제는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거대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첨언2: 세대론에 한국의 식자층이 우르르 쏠려간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국의 담론 지형이 얼마나 협소하고 위축되어 있으면, 하나의 섹트를 분석할 때에나 맞아떨어질 이야기에 글 읽는 자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세대론을 유지하고 싶다면 세대론을 분해한 후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젊은이들의 빈곤 문제를 다루고 싶다면 '88만원 세대'라는 히트상품을 버릴 각오를 하고 논의를 구성해야 한다. 담론적 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2009-12-29

이건희 사면 문제

이건희 사면 문제의 핵심은 '사면법' 그 자체이다. 제왕적 사법부 운운하는 것은 한국 실정에서 개소리다. 사법부에서 아무리 잡아넣어봐야 뭐하나, 어차피 '사법적 제왕', 즉 대통령이 사면해주면 그만인 것을.

사면법은 건국과 함께 만들어진 후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권력의 칼을 쥔 이에게 너무도 매력적인 절대반지와도 같기 때문이다. 심지어 '권위주의 탈피'를 부르짖은 노무현도 마찬가지였다. 노 정권 당시 '탈권위주의'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한계에 대해서는 내가 지난 블로그에 쓴 이 글을 참조할 것.

2009-12-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올해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올해 취임한 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오직 그 하나의 업적만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취임 즉시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라크에서 병력을 즉각 철수하겠다고 말했으며,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노라 선포했다.

드라마틱한 당내 경선을 헤치고 후보 자리에 올랐으며, 지지자들의 열성적인 팬덤에 힘입어 집권하였고, 그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점 등 너무도 닮은 모습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오바마에게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필자 또한 어느 시점까지는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가령 올해 8월 27일 미디어스에 송고한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중도주의의 덫”을 쓸 당시, 필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 법안들을 집권 초기에 밀어붙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추구하다가 지지 기반을 상실해버린 노무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미국 오바마 대통령  
 
현지시각으로 12월 24일 아침, 기나긴 토론 끝에 미 상원 의회는 건강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 의원 전부와 무소속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져 60표를 확보하였고, 공화당 의원들은 전부가 반대하고 일부는 기권하였으나 39표에 그쳐 법안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였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큰 고비를 넘겼다. 상원과 하원의 찬성표를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더라도, 드디어 미국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 시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바마 취임 1년, 그가 거두어낸 가장 값진 승리이다.

우리는 국제 문제를 바라볼 때 크게 두 가지 오류에 빠지곤 한다. 가장 큰 오류는 세상 모든 일을 대한민국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지구 중심의 오류’이다. ‘빌 클린턴의 방북은 김대중의 뜻에 따른 것이다’와 같은 발상이 그에 해당한다. 클린턴이 납북된 여기자들을 데려온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국민이 외국에서 납치되건 살해되건 ‘사람 하나 죽었다고 파병 안 하는 나라도 있느냐’고 정부 관리가 찍찍 내뱉을 수 있는 것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평범한 시민도 아닌 기자가 취재 도중 납치되었는데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론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감수해야 한다. 클린턴은 김정일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경직된 표정으로 자리에 머물렀고, 기자들과 함께 재빨리 북한을 탈출했다. 클린턴 개인이 김대중을 존경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과 미국의 대외정책은 무관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우물 안 개구리들이나 모든 별들이 자기 머리 위에서 도는 줄 아는 법이다.

과도한 유비추리의 오류’ 또한 피하기 어려운 오류에 속한다. 국제 문제는 각국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발생하고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자국 문제를 바라보던 시각을 고스란히 적용하는 것은 곤란할 수 있다. 가령 올해 이란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를 떠올려보자. 초록색 헝겊과 손수건을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은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며 민주화와 재투표를 요구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우리가 작년에 겪었던 촛불시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2009년의 이란과 2008년의 대한민국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물론 우리의 촛불시위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 어떤 대통령 후보건 이슬람 학자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 민병대가 자국민을 총으로 쏴죽이고도 문책을 당하지 않는 나라에서 발생한 목숨을 건 시위와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올 한해 오바마 미 대통령의 행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필자 본인을 포함해서, 이 두 가지 오류에 곧잘 빠져들곤 했다. 한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미국이 한국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동참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한국을 미국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겠다는 음험한 야욕이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전쟁에 끼어들어 수많은 미국 젊은이가 생면부지의 땅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거니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테러라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위협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12월 26일 오늘 아침에도 한 건의 테러 기도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민항기 안에서 폭약을 터뜨리려다 실패한 한 젊은이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알카에다를 뿌리뽑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고, 그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증파하는 것은 물론 지지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이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처럼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은 아니다. 한국이 이라크에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또 우리가 파병한다고 해서 미국이 자신들의 전략적 필요성을 어겨가며 해야 할 폭격을 안 하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병력을 보내면 그 순간 우리는 해당 테러 단체의 적국이 되며, 민간인과 군인들의 생명이 위협당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안전만을 고려한다면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가만히 있어도 미국인을 겨냥한 테러는 벌어진다. 따라서 해외에 군대를 보내서라도 테러 단체를 무력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은 ‘이해할 수 있는’ 일에 속한다.

오바마가 말하는 ‘초당적 협력’ 또한 노무현 정권에서 추진한 대연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의회 정치의 수준과 문화가 다르고, 여당의 정치적 능력과 목표에 대한 동기 또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상원에서는 수십여 일에 걸쳐 끝없는 토론을 통해 건강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무조건 결사반대로 막아서는 한국의 국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토론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전에,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대한민국 소통법』에서 참여정부의 국가보안법 폐지 실패에 대해 예리한 지적을 내놓았다. 한나라당을 설득하여 폭력적 충돌 없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당은 그렇게 하는 대신 야당을 ‘꼴통’으로 몰아가기에 바빴고, 결국 협상은 벌어지지 않은 채 국회는 다시 파행으로 접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거론했다. 지지자들이 이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지자들이 바라는 만큼의 강도 높은 개혁을 선사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 아직도 노무현과 오바마는 유사하다. 그러나 한 쪽은 ‘현실’의 이름으로 ‘이상’을 폐기처분하면서 스스로의 행보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남긴 반면, 다른 한 쪽은 ‘현실’과 ‘이상’을 은근과 끈기로 조화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바마를 ‘미국의 노무현’이라고 생각하면서부터 우리는 국제 문제를 지나치게 희화하하여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2월 6일 뉴욕타임즈에 실린 “How Obama Came to Plan for ‘Surge’ in Afghanistan”이라는 장문의 기사는 탁월한 조정자이자 경청자로서 오바마가 지니고 있는 조정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보여준다. 그는 끝없는 회의와 토론을 통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최선의 결론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 결과가 반드시 선한 것이 되리라고 보장할 수야 없지만, 부시 정부의 그것처럼 성급하고 개인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오바마가 미국의 노무현이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거친 곳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노무현이 한국의 오바마였더라면 우리는 좀 더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 심리일 수도 있고, 어처구니 없이 떠나버린 전대미문의 카리스마적 정치인에 대한 아쉬움이 아직도 덜 가신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오바마와 노무현은 여러 모로 다르다. 하지만 아직도 오바마를 바라보며 노무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노정태 / 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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