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3-07

안티조선의 세 가지 층위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안티조선'이라고 통칭될 수 있는 운동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었다. ① 이한우가 강준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에 반발하여 홍세화가 한겨레에 「나를 고소하라」는 글을 기고한 사건. 그에 호응한 수많은 사람들이 한겨레에 전면광고 지면을 빌려 덩달아 '나를 고소하라'고 서명한 것. ② 지식인이라면 조선일보에 글을 기고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지를 펼친 강준만 이후 몇몇 지식인들이 그와 행동 보조를 맞추기 시작한 일. 그로 인해 고종석, 김정란, 김규항, 진중권 등 이른바 '안티조선 지식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군의 집단이 인지되었다. ③ 조선일보를 만악의 근원으로 상정하고 친일·매국·독재·수구꼴통 언론인 조선일보와 싸우는 노무현을 무조건 지지하고 밀어주기로 결의한 선거운동·시민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오직 세 번째의 안티조선 뿐이다.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조선일보가 직접 억압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 것이므로 첫 번째 경우는 그다지 보편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경향 사이의 갈등이다. 조선일보를 일종의 마니교적 이분법 하에서 '악'으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지식인이 그 언론과 협조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실행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다양한 폭풍 속에서, 마땅히 있어야 했던 섬세한 구분은 사라져버리고 결국 남은 것은 조선일보에 대한 증오심 뿐이다. 문제는 그 신문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그저 '조선일보는 친일매국독재수구꼴통이야'라는 선언만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단히 놀랍게도 세 번째 조류를 기꺼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수완을 보였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 떼라"고 외쳤을 때 나도 그 중계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이후에도 노무현은 끝없는 대외 발언을 통해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구 언론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면서 지지층을 결집시켜 나갔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수단이며 용인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노무현이 '노무현 대 조선일보'의 구도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그 와중에 유시민은 아예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개마고원)라는 책까지 썼는데),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대단히 큰 착시현상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의 모든 악을 대변하는 조선일보가 있고, 그 악과 싸우는 노무현이 있다면, 노무현은 무조건 옳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이분법적 착오 말이다.

한국 사회를 좀먹는 거대한 기득권의 카르텔이 있고, 그 속에서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거대 언론들이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오직 조선일보만이 한국 사회를 망치는 원인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언론과 재벌 및 정치권의 관계는 대단히 미묘하고 복잡하다. 이른바 '안티조선' 하시는 분들은 조선일보가 언제나 청와대를 쥐락펴락하고, 동아일보는 주정뱅이 사주 때문에 쩔쩔 매고 있으며, 중앙일보는 삼성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수족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페이지를 펴보자.

그러나 중앙일보가 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양심고백 이후, 중앙일보의 보도 태도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삼성, 특히 이건희 일가가 기분 나빠할 내용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왜곡 보도하는 중앙일보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중앙일보가 계열 분리를 선언한 뒤에도, 중앙일보 편집국 내부 정보보고 내용이 하루 두 번씩 삼성 구조본으로 전달됐다. 이걸 보며, '중앙일보는 언론이라기보다, 삼성을 위해 일하는 사설 정보기관이구나' 싶었다.

이처럼 중앙일보가 삼성에 종속돼 있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걸핏하면 삼성에 돈을 요구했다. 1999년, 재미교포 박인회(윌리엄 박)가 전직 안기부 직원인 공운영에게 넘겨받은 도청파일을 중앙일보가 사려고 한 적이 있다. 이른바 '안기부 X파일'이다. 박인회가 중앙일보에게 돈을 갈취하려 했다기보다는, 중앙일보가 도청파일 속 정보를 탐내서 구매하려고 했다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193쪽,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서울: 사회평론, 2010)


여기서 김용철도 '종속'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을 보면 사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김용철이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삼성과 중앙일보는 주종관계라기보다 필요할 때만 찾아와서 돈을 요구하는 질 나쁜 친척에 더 가깝다.

당시 박인회가 부른 가격이 10~20억 정도였는데, 중앙일보는 이 돈도 삼성더러 내달라고 했다. 이학수가 이런 요구를 거절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중앙일보쯤 되는 회사가 고작 10~20억 원 때문에 손을 벌리나'라고 여긴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중앙일보는 수시로 돈을 요구했다. 그래서 구조본 재무팀에 있는 중앙일보 담당자가 몹시 힘들어 했다. 김인주는 사무실 창밖에 내다보이는 중앙일보 건물 끝에 있는 "J"자를 가리키면서 '도둑놈'이라고했다. 그러나 이렇게 욕하면서도 중앙일보가 손을 벌릴 때마다 대개는 돈을 쥐어줬다.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194쪽, 같은 책.


아직 『삼성을 생각한다』와 같은 수준까지 정치권 내부와 조선일보의 결탁을 보여주는 책이 없어서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정치권과 조선일보의 관계도 대략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거래하는 것이지, 한 신문이 나라 전체를 쥐었다 폈다 하는 게 아니다. 조중동이 잘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한 신문과 언론을 '친일수구꼴통'으로 몰아가는 것은 사태를 올바로 해석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세종시 문제를 둘러싸고 박근혜와 조선일보는 대립했다. 만약 '안티조선' 하시는 분들 생각처럼 조선일보가 친일매국수구꼴통신문이라면, 그리고 그 '친일'의 대표주자가 박정희라는 사실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면, 당연히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를 도왔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 조선일보는 끝없이 간을 보면서 줄타기를 하는 듯 했지만 결국 박근혜가 아닌 이명박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안티조선'을 외치는 사람들의 단순한 선악 이분법적 모델로는 이런 복잡한 정치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조선일보를 절대악으로 놓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반대로 노무현과 그의 재임기간에 대한 과도한 찬양과 미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은 '표면적'으로 조선일보와 대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미 FTA를 포함한 숱한 정책적 과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배신하면서까지 조중동이 바라는 바로 그 방향대로 대한민국을 움직여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조선일보에게 굽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신념윤리'뿐 아니라 '책임윤리'에 의해서도 평가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론이 설 입지는 매우 좁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차이는 막스 베버의 마지막 저작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전성우 옮김, 나남출판)에서 정식화된 것으로, 지금도 그 차이에 대해 그보다 더 좋은 설명을 찾기란 어렵다. 해당 부분을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행위결과의 무시, 바로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점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상세히 살펴봅시다.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윤리적으로 지향된 모든 행위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서로 전혀 다른, 화합할 수 없이 대립적인 원칙 가운데 어느 하나에 따라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는 <신념윤리적>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윤리적> 원칙입니다. 물론 이 말이, 신념윤리는 무책임과, 책임윤리는 무신념과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념윤리적 원칙하에서 행동하는가 --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독교도는 올바른 행동을 하고 그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 -- 아니면 책임윤리적 원칙하에서 -- 우리는 우리 행동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하에서 -- 행동하는가 사이에는 심연과 같이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확신에 찬 신념윤리적 생디칼리스트에게 극히 설득력 있게 아래와 같은 설명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즉 그의 행동의 결과는 반동세력의 기회를 증대시키고, 그의 계급의 억압상황을 악화시키고, 이 계급의 상승을 방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설명은 그에게 아무런 효과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수한 신념에서 나오는 행위의 결과가 나쁜 것이라면, 신념윤리가가 보기에 이것은 행위자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의 책임이 며, 타인들의 어리석음의 책임이거나 또는 인간을 어리석도록 창조한 신의 의지의 책임입니다. 그에 반해 책임윤리가는 바로 인간의 이러한 평균적 결함들을 고려합니다. 그는 피히테가 올바로 지적했듯이, 인간의 선의와 완전성을 전제할 어떠한 권리도 자신에게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는 그가 예측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내 행동에 책임이 있다." 그에 반해 신념윤리가는 오로지 순수한 신념의 불꽃, 예컨대 사회적 질서의 불공정성에 대한 저항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만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 불곷을 지속적으로 되살리는 것, 이것이 그의 행동들, 성공가능성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그의 행동들의 목적이며, 이 행동들은 단지 모범의 제시라는 가치를 지닐 수 있을 뿐이며 또 이런 가치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21-122쪽,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 』(서울: 나남출판, 2007)


노무현 본인의 신념이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투쟁하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 신념을 아무리 열심히 말로 표현하고 조중동과 갈등을 빚었다 해도, 그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책임윤리'의 대상이 되며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본인과 그의 지지자들은 임기 말년에 들어서, 임기가 끝난 이후까지 '조선일보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국민들'에게 책임을,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를, 돌리지 않았던가?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다. 조중동을 무턱대고 욕하는 것은 결국 '국개론'을 떠들기 위한 기본적인 포석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조선일보 대 노무현, 거대한 악 대 외롭고 선량한 정치가, 이런 식의 이분법은 정작 우리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해치고 약한 고리부터 끊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데 방해물이 될 뿐이다. 그 결과 '안티조선'을 표방하는 지식인들 중 상당수 역시 자신들이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지, 왜 대립해야 하는지에 대해 망각해버리는 현상이 벌어진 것 같다. 안티조선의 세 번째 층위가 과도하게 범람하면서, 정작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지켜졌어야 할 두 번째 층위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비협조, 비타협 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이 노무현 현상에 휩쓸려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그 결과 우리는 '올바른 언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지도 못한 채 21세기의 초입을 허비해버렸다.

지식인은 책임윤리보다 신념윤리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안티조선을 표방하는 지식인은 당연히 조선일보와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하지만 올바른 결과를 도출해내고 책임을 지는 것이 그의 과제인 정치인의 경우는 어떨까? 노무현은 책임윤리와 신념윤리가 동일한 이상적 정치인상을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써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막스 베버가 말했다시피, 또 우리가 경험을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그러한 이상은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인의 행동을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거악 조선일보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노회찬을 악으로 몰아붙인다면, 우리는 바로 그 '심사숙고'의 기회를 허공에 던져버리게 된다. 노회찬을 깔때 까더라도 그렇게 어설프고 조잡한 논리로 까면, 까는 사람들만 더 손해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듬어내지 못하게 되니 말이다. '좃선'이니 '조쭝똥'이니 하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딱지붙이기 대신, 언론과 권력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서 출발한 정치전략·담론 구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은 노회찬의 조선일보 생파 출석을 '잘' 비판하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지, 지금처럼 '조선일보는 개새끼, 그러니까 너도 개새끼? ㅋㅋㅋ'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안티조선, 그래 계속 하자. 하지만 이제는 좀 섬세하게, 잘 좀 하자.

2010-03-06

'진보신당은 정치할 생각 없나?'라는 비판에 대하여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모순된 요구를 할 경우, 우리는 그 요구를 하는 사람이야말로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가령 '100원 줄테니까 곰보빵이랑 우유 사오고 500원 거슬러와' 같은 소리를 학생 A가 학생 B에게 하고 있다고 해보자. A는 B에게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삥을 뜯고 있다.

진보정당의 '정치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사태가 관찰된다. 인터넷에서 진보정당과 그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이래라 저래라 시리즈를 연재하는 사람들은 곧잘 '너희들은 너무 유연하지 못해, 너희들은 정치적인 행동을 할 줄 몰라'라고 훈수를 두곤 한다. 그들이 말하는 유연성이란 한미 FTA를 토론다운 토론 없이 통과시키거나, 이라크에 파병을 하거나 하는 그런 것이다. 지난 정부의 그러한 행동들, 말하자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행동을 놓고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이 비판할 때, 지난 정부의 옹호자들은 말한다. '너희들은 정치를 몰라. 유연함을 배워야 해.'

그리고 노회찬이 조선일보 9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아예 안 갔다면 모르겠으되, 초청받아서 갔다면 덕담 한 마디 안 해주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정치적 유연함'을 요구하던 자들이, 갑자기 노회찬에게 안티조선의 불굴의 투사가 되라고 요구한다. 노회찬이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에 대해서 나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매우 반대한다.) 다만 그의 '정치적 행동'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들의 모순된 태도에 대해서는 지적해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직접적으로 물어보자. 대체 그들은 왜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실책에 대해서만 '유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한 사람의 정치인이 있고, 그가 진정 정치적인 (혹은 현실정치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하고자 한다면, 죽은 노무현의 과오를 억지로 옹호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선일보 90주년 행사에 참석해서 덕담 한 마디를 해주는 편이 낫다. 앞서 말했듯 나는 노회찬의 저 결정에 찬성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 '정치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며 노무현 정부의 과오를 문제삼지 말라고 말해왔던 자들이, 진짜 '정치적'인 행동 앞에서 비아냥거리는 것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의 판단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조중동과 말로 다투던 노무현은 결국 조중동이 바라던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노회찬은 참여정부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던 삼성과 전면전을 펼쳤고, 그 싸움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정치인이 겉으로는 웃되 속으로는 싸우는 것이 나는 더 옳다고 생각한다. 말로만 대립각을 펼치고 안티조선하면서, 결국 조중동이 바라던 세상을 만들어버린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않을까? 남에게 일관성이 없다고 욕하지 말고, 그 말을 하는 스스로가 과연 일관된 기준을 견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싶다.

2010-03-03

위악적 솔직함 - 김훈의 경우

엮인글: "위악(僞惡)에 관해"(a quarantine station, 2010년 3월 2일)

sonnet 님은 '위악적'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위악은 사전적으로 볼 때 '짐짓 악한 척 하는 행위'로 정의되므로, 그 경우 '왜 짐짓 악한 척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sonnet님은 그 질문의 선후관계가 바뀌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내가 볼 때 그 질문은 출발점이 잘못된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관찰하기로는 위악이라고 지칭되는 사람 중 상당수는 그게 위악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 않다. 그건 그냥 부르는 쪽이 임의로 딱지를 붙여서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왜 누군가를 짐짓 악한 체 한다고 부르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바꾼 후 그는, 누군가를 위악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사실은 "자신과 다른 기준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진다. 누군가에게 '위악적'이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은 때에 따라서 정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히 '위악적'이라는 말에는 어떤 암묵적인 선의 기준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 선의 기준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러한 선의 기준이 어디에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이다.

'위악적 포즈'를 유행시킨 장본인 중 하나인 김훈의 인터뷰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일하던 당시, 경쟁지인 『한겨레21』의 인터뷰 요청에 응해 '여자들은 화초와 같다', '조선일보가 최고다', '내가 전두환 찬양 기사 다 썼다'는 등의 '소신 발언'을 날린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내고 지금 우리가 아는 전업 소설가 김훈이 되었다. 이후 김훈은 지금까지 산문과 소설 등에서 줄곧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무엇이 선하다, 무엇이 악하다고 외치는 거대담론은 무의미하며, 인종 간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등.

최보은: 대학원 졸업한 딸을 두신 걸로 아는데 페미니즘 기질은 없나요?

김훈: 우리 딸? 그런 못된 사조에 물들지 않았어요.

최보은: 어쩌다 김훈 선배는 그런 못된 사조에 물드셨어요. 마초…. <시사저널>엔 여기자들도 많은데 그렇게 말하세요? 페미니즘 같은 것에 물들지 말라?

김훈: 걔들은 가부장적인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 같더라고.

최보은: 네? (웃음) 이런 말 기사화해도 상관없으세요?

김훈: 괜찮아. 아무 상관없어. (웃음)

김규항: 근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훈: 여자들한테는 가부장적인 것이 가장 편안한 거야. 여자를 사랑하고 편하게 해주고. (웃음)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남자가 다 책임지고. 그게 가부장의 자존심이거든.

김규항: 최 선배 열받네.

최보은: 지금 반어법이에요? 진심이에요?

김훈: 난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 안 해.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월하고, 압도적으로 유능하다고 보는 거지. 그래서 여자를 위하고 보호하고 예뻐하고 그러지.

최보은: 그런 이야기하면 <시사저널> 부수 떨어져요.

김훈: 괜찮아. 이제 떨어질 것도 없어. (웃음)

김규항: 후천적인 노력이 아닌 선천적인 요인으로 사람을 나누는 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다는 얘기는 백인이 흑인보다, 독일인이 유대인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인종차별하고 다를 게 없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보는 게 근대적 사고방식의 기본 아닌가요?

김훈: 인종 사이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가 없는 거지.

김규항: 혐오는 단지 서로간에 다르다는 건데. 이건 “어떤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근본적으로 열등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치가 아리안족이 가장 우수하다고 말하는… 근데 선생님께서 여성에 대해 말씀하는 건 그거와 결국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김훈: 난 정돈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거든.

김규항: 선생님 말씀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더라도 경우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평균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낫다는 얘기가 가능하더라도 남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여자도 있을 수 있고, 여자보다 못한 남자도 많고….

김훈: 그건 그렇지.

참고: http://blog.aladdin.co.kr/tomek/tag/%EA%B9%80%EA%B7%9C%ED%95%AD (원문을 찾지 못해 기사가 인용된 블로그를 링크함)


이 경우 김훈의 행동을 '짐짓 악한 척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그것이 '위악'의 사전적 정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김훈은 분명히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양성간의 평등 문제나 인종간의 혐오 등 현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대체로 수긍하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에 대해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표한다. 이 경우에 '짐짓 그런 척' 한다고 말하는 것은 sonnet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사례에서 드러나는 김훈의 발화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표현을 넘어선다. 그는 이러한 '위악적' 표현을 통해 대략 두 가지를 목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진보적 언론'이라는 것들이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헛소리만 하는 얼간이들이라고 선언하고 폭로한다. 둘째, 마찬가지 맥락에서, 상대방을 일종의 '위선자'나 '지사(지사정신 할 때의 그 지사)'로 몰아간다. 이 본문에 인용된 것 외의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그 부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특히 두 번째 기능이 중요하다. 김훈의 거침없는 '취존중 요구'로 인해, 한겨레나 시사저널 같은 당시의 진보적 매체들은 졸지에 남의 취향도 존중할 줄 모르고, 인종 사이의 자연스러운 혐오도 무시하며, 남자가 여자보다 월등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청맹과니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는 '현실'이라는 거대담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상 대 현실', '거대담론 대 인간의 삶' 같은 공허한 이분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 방향으로 논의를 끌고 갈 경우,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난 정돈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이렇듯 '본질적'인 문제, '가치'와 관련된 문제에서 어느 정도 옳다고 잠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가치를 둘러싸고 '위악적'인 제스처는 힘을 발휘한다. 짐짓 악한 척까지 할 필요도 없다. 다들 당장은 불편하지만 옳기 때문에 참는 가치들에 대해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해버리면 그만이 기 때문이다. 가령 장애인을 위한 대중교통의 비효율 감수라던가(솔직히 다리가 안 좋으면 집에 있으면 되잖아, 안 그래?), 시각장애인을 위해 웹사이트에 플래시 도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경우(보기도 좋고, 개발 현실이라는 게 있지...), 등등. 우리는 비슷한 예를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 같지만 아직 공고한 상식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한 도덕적 명제들을 개인적 취향을 명목삼아 부정하는 것, 그것이 가장 대표적인 '위악'의 행태이다. 일부러 싸가지 없는 척하는 신해철 같은 연예인, 저 소녀가 나를 좋아할까봐 괜히 가래침 뱉는 대학교 2학년 오빠 같은 경우도 있겠지만, '위악'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쓰이는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과되고 있는 것 같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10-02-25

사형제 위헌 판결 실패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형제가 폐지되었으면 광화문 광장에서 만세삼창을 하려 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하겠다.

잠시 이글루스를 돌아다녀보니 위헌심판을 청구한 사람이 연쇄살인을 저지른 70대 어부라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분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바로 그런 반응을 우려하여 사형제 폐지 운동에 나선 단체들은 이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가장 최악의 인간이 받는 대우가 바로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이라는 상식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작년 가을 무렵, 이 재판의 공판이 시작되기 전 나는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부탁을 받아 변호인에게 참고자료로 제공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형제 폐지 판결문 중 일부를 번역하였다. Ackermann이라는 이름의 판사는 사형제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필연적으로 자의적인 판결의 가능성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헌으로 판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남아공은 영미 보통법(Common Law) 계열의 국가이므로 그는 미국의 판결을 줄곧 인용한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이런 것이다. 어떤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하자. 그는 어떤 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사형당할 확률이 높지만 (가령 텍사스), 어떤 주에서 체포되면 사형당해도 계속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메사추세츠). 이 경우 법의 집행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왜 동일한 처벌이 동일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말인가? 이것이 법적 평등성에 부합하는가?

Ackermann 판사는 Callins v. Collins, cert. denied, 114 S. Ct. 1127, 127 L.Ed 435 (1994) 판결에서 Blackmun 판사가 제기한 소수의견을 인용한다. 여기서 재인용해보기로 한다.

“경험에 따라 우리는, Furman V. Georgia 사건에서 보았듯이, 사형 행정에서 자의성과 불평등성을 없애고자 하는 헌법적 노력이, 근본적인 평등의 필수적 구성 요소의 함축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행의 개별성이 그것이다. Lockett v. Ohio, 438 U.S. 586 (1978)판결을 보라.”


“형사소송법과 실질적 규제의 조합으로는 사형 처벌을 헌법적 결핍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내게는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 체제가 정확하고 신뢰할만하게 어떤 피고가 ‘죽을만 하다’고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기초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이기 어렵다.”


“공공 여론의 대부분이 원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헌법이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벌로서의 사형은 당연히 사형제 자체가 일관되게 이성적으로 집행될 수 없는 한, 그것은 전체적으로 집행되지 말아야 한다. (강조는 저자)”


정권 바뀔 때 무렵 사형수를 '일괄처리' 해버리는 한국의 기존 법 집행 관습 역시 '비일관적'이고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중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과 정권이 바뀌고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고려와는 아무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형은 사람이 권리를 가지고 있을 권리를 빼앗기 때문에 잔인하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죽음 앞에 노출시킨 채 오랜 시간을 강제로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도 비인도적이다. (현재 언론에 의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형수들의 이야기가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다른 처벌에 비해 자살 기도자들의 숫자가 훨씬 높다는 것은 사형제도가 가진 '대기 기간'의 비인도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인도주의적, 상식적 관점을 견지하는 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당신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을 '정치적 이유'로 한꺼번에 사형 집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기도 하고 (인혁당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등), 어떤 사람은 죽고 싶을 만큼 오래도록 국가에 의한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수 년, 혹은 수십 년을 보낸다. 설령 그가 뱃놀이 하러 온 청춘 남녀를 살해 강간한 흉악범이라 해도, 당신은 그에게 이런 비인간적인 고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2010-02-21

단상

한국의 중산층들은 양심을 놓고 벌이는 가학-피학 놀이에 아직 익숙하지 못하다. '강남 3구에 도시 빈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는 당연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만으로도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대신 그들은 국개론에 빠져들고, 노무현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팽창한 '올바른 정치 의식'을 위무하는 듯하다. 요컨대 아직까지는 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성립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 역시 그렇다. 이른바 '교양'이 아닌, 내면의 부재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