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조선일보가 직접 억압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 것이므로 첫 번째 경우는 그다지 보편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경향 사이의 갈등이다. 조선일보를 일종의 마니교적 이분법 하에서 '악'으로 규정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지식인이 그 언론과 협조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실행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다양한 폭풍 속에서, 마땅히 있어야 했던 섬세한 구분은 사라져버리고 결국 남은 것은 조선일보에 대한 증오심 뿐이다. 문제는 그 신문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그저 '조선일보는 친일매국독재수구꼴통이야'라는 선언만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대단히 놀랍게도 세 번째 조류를 기꺼이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수완을 보였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 떼라"고 외쳤을 때 나도 그 중계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이후에도 노무현은 끝없는 대외 발언을 통해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구 언론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면서 지지층을 결집시켜 나갔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수단이며 용인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노무현이 '노무현 대 조선일보'의 구도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그 와중에 유시민은 아예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개마고원)라는 책까지 썼는데),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대단히 큰 착시현상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의 모든 악을 대변하는 조선일보가 있고, 그 악과 싸우는 노무현이 있다면, 노무현은 무조건 옳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이분법적 착오 말이다.
한국 사회를 좀먹는 거대한 기득권의 카르텔이 있고, 그 속에서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거대 언론들이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오직 조선일보만이 한국 사회를 망치는 원인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언론과 재벌 및 정치권의 관계는 대단히 미묘하고 복잡하다. 이른바 '안티조선' 하시는 분들은 조선일보가 언제나 청와대를 쥐락펴락하고, 동아일보는 주정뱅이 사주 때문에 쩔쩔 매고 있으며, 중앙일보는 삼성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수족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실상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하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한 페이지를 펴보자.
그러나 중앙일보가 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양심고백 이후, 중앙일보의 보도 태도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삼성, 특히 이건희 일가가 기분 나빠할 내용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왜곡 보도하는 중앙일보의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중앙일보가 계열 분리를 선언한 뒤에도, 중앙일보 편집국 내부 정보보고 내용이 하루 두 번씩 삼성 구조본으로 전달됐다. 이걸 보며, '중앙일보는 언론이라기보다, 삼성을 위해 일하는 사설 정보기관이구나' 싶었다.
이처럼 중앙일보가 삼성에 종속돼 있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걸핏하면 삼성에 돈을 요구했다. 1999년, 재미교포 박인회(윌리엄 박)가 전직 안기부 직원인 공운영에게 넘겨받은 도청파일을 중앙일보가 사려고 한 적이 있다. 이른바 '안기부 X파일'이다. 박인회가 중앙일보에게 돈을 갈취하려 했다기보다는, 중앙일보가 도청파일 속 정보를 탐내서 구매하려고 했다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193쪽,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서울: 사회평론, 2010)
여기서 김용철도 '종속'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을 보면 사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김용철이 묘사하는 바에 따르면 삼성과 중앙일보는 주종관계라기보다 필요할 때만 찾아와서 돈을 요구하는 질 나쁜 친척에 더 가깝다.
당시 박인회가 부른 가격이 10~20억 정도였는데, 중앙일보는 이 돈도 삼성더러 내달라고 했다. 이학수가 이런 요구를 거절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중앙일보쯤 되는 회사가 고작 10~20억 원 때문에 손을 벌리나'라고 여긴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중앙일보는 수시로 돈을 요구했다. 그래서 구조본 재무팀에 있는 중앙일보 담당자가 몹시 힘들어 했다. 김인주는 사무실 창밖에 내다보이는 중앙일보 건물 끝에 있는 "J"자를 가리키면서 '도둑놈'이라고했다. 그러나 이렇게 욕하면서도 중앙일보가 손을 벌릴 때마다 대개는 돈을 쥐어줬다.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194쪽, 같은 책.
아직 『삼성을 생각한다』와 같은 수준까지 정치권 내부와 조선일보의 결탁을 보여주는 책이 없어서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정치권과 조선일보의 관계도 대략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거래하는 것이지, 한 신문이 나라 전체를 쥐었다 폈다 하는 게 아니다. 조중동이 잘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한 신문과 언론을 '친일수구꼴통'으로 몰아가는 것은 사태를 올바로 해석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세종시 문제를 둘러싸고 박근혜와 조선일보는 대립했다. 만약 '안티조선' 하시는 분들 생각처럼 조선일보가 친일매국수구꼴통신문이라면, 그리고 그 '친일'의 대표주자가 박정희라는 사실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면, 당연히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를 도왔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와 달랐다. 조선일보는 끝없이 간을 보면서 줄타기를 하는 듯 했지만 결국 박근혜가 아닌 이명박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안티조선'을 외치는 사람들의 단순한 선악 이분법적 모델로는 이런 복잡한 정치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다.
조선일보를 절대악으로 놓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반대로 노무현과 그의 재임기간에 대한 과도한 찬양과 미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은 '표면적'으로 조선일보와 대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난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미 FTA를 포함한 숱한 정책적 과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노무현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배신하면서까지 조중동이 바라는 바로 그 방향대로 대한민국을 움직여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조선일보에게 굽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신념윤리'뿐 아니라 '책임윤리'에 의해서도 평가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반론이 설 입지는 매우 좁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의 차이는 막스 베버의 마지막 저작인 『직업으로서의 정치』(전성우 옮김, 나남출판)에서 정식화된 것으로, 지금도 그 차이에 대해 그보다 더 좋은 설명을 찾기란 어렵다. 해당 부분을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행위결과의 무시, 바로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점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상세히 살펴봅시다.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윤리적으로 지향된 모든 행위는 아래와 같은 두 가지 서로 전혀 다른, 화합할 수 없이 대립적인 원칙 가운데 어느 하나에 따라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는 <신념윤리적>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윤리적> 원칙입니다. 물론 이 말이, 신념윤리는 무책임과, 책임윤리는 무신념과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념윤리적 원칙하에서 행동하는가 --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기독교도는 올바른 행동을 하고 그 결과는 신에게 맡긴다" -- 아니면 책임윤리적 원칙하에서 -- 우리는 우리 행동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하에서 -- 행동하는가 사이에는 심연과 같이 깊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확신에 찬 신념윤리적 생디칼리스트에게 극히 설득력 있게 아래와 같은 설명을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즉 그의 행동의 결과는 반동세력의 기회를 증대시키고, 그의 계급의 억압상황을 악화시키고, 이 계급의 상승을 방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설명은 그에게 아무런 효과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순수한 신념에서 나오는 행위의 결과가 나쁜 것이라면, 신념윤리가가 보기에 이것은 행위자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의 책임이 며, 타인들의 어리석음의 책임이거나 또는 인간을 어리석도록 창조한 신의 의지의 책임입니다. 그에 반해 책임윤리가는 바로 인간의 이러한 평균적 결함들을 고려합니다. 그는 피히테가 올바로 지적했듯이, 인간의 선의와 완전성을 전제할 어떠한 권리도 자신에게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는 그가 예측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할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내 행동에 책임이 있다." 그에 반해 신념윤리가는 오로지 순수한 신념의 불꽃, 예컨대 사회적 질서의 불공정성에 대한 저항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만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 불곷을 지속적으로 되살리는 것, 이것이 그의 행동들, 성공가능성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그의 행동들의 목적이며, 이 행동들은 단지 모범의 제시라는 가치를 지닐 수 있을 뿐이며 또 이런 가치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121-122쪽,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 』(서울: 나남출판, 2007)
노무현 본인의 신념이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투쟁하는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 신념을 아무리 열심히 말로 표현하고 조중동과 갈등을 빚었다 해도, 그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책임윤리'의 대상이 되며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본인과 그의 지지자들은 임기 말년에 들어서, 임기가 끝난 이후까지 '조선일보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국민들'에게 책임을, 전부는 아니라도 일부를, 돌리지 않았던가?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다. 조중동을 무턱대고 욕하는 것은 결국 '국개론'을 떠들기 위한 기본적인 포석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조선일보 대 노무현, 거대한 악 대 외롭고 선량한 정치가, 이런 식의 이분법은 정작 우리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해치고 약한 고리부터 끊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데 방해물이 될 뿐이다. 그 결과 '안티조선'을 표방하는 지식인들 중 상당수 역시 자신들이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지, 왜 대립해야 하는지에 대해 망각해버리는 현상이 벌어진 것 같다. 안티조선의 세 번째 층위가 과도하게 범람하면서, 정작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고 지켜졌어야 할 두 번째 층위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비협조, 비타협 운동으로서의 안티조선이 노무현 현상에 휩쓸려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그 결과 우리는 '올바른 언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지도 못한 채 21세기의 초입을 허비해버렸다.
지식인은 책임윤리보다 신념윤리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안티조선을 표방하는 지식인은 당연히 조선일보와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하지만 올바른 결과를 도출해내고 책임을 지는 것이 그의 과제인 정치인의 경우는 어떨까? 노무현은 책임윤리와 신념윤리가 동일한 이상적 정치인상을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써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막스 베버가 말했다시피, 또 우리가 경험을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그러한 이상은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인의 행동을 어떤 기준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거악 조선일보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 노회찬을 악으로 몰아붙인다면, 우리는 바로 그 '심사숙고'의 기회를 허공에 던져버리게 된다. 노회찬을 깔때 까더라도 그렇게 어설프고 조잡한 논리로 까면, 까는 사람들만 더 손해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듬어내지 못하게 되니 말이다. '좃선'이니 '조쭝똥'이니 하는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딱지붙이기 대신, 언론과 권력에 대한 진지한 연구에서 출발한 정치전략·담론 구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은 노회찬의 조선일보 생파 출석을 '잘' 비판하는 과정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지, 지금처럼 '조선일보는 개새끼, 그러니까 너도 개새끼? ㅋㅋㅋ'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안티조선, 그래 계속 하자. 하지만 이제는 좀 섬세하게, 잘 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