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1

[북리뷰]전염병, 올바른 공공정책 방향

[북리뷰]전염병, 올바른 공공정책 방향
2014.11.11ㅣ주간경향 1100호

바이러스 도시
스티븐 존슨 지음·김명남 옮김·김영사·1만4500원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유행은, WHO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월 1일 현재 1만여명에 가까운 감염자를 발생시켰고 그 중 절반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1974년에 확인된 에볼라 바이러스가 이렇게 많은 감염자를 낳은 것은 처음이다. 그 전에도 몇 차례 유행이 있었지만, 워낙 치사율이 높았을 뿐더러 발병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도시로의 인구 밀집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위기를 안겨준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조건이 맞는다는 전제 하에, 더욱 쉽게 숙주를 찾을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면 그만큼 유전적 변이가 발생하고, 그래서 더욱 그 질병을 퇴치하기 어려워진다. 전 세계적으로 에볼라 바이러스의 대도시 상륙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머전스>로 잘 알려진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은 <바이러스 도시>에서, 19세기 런던을 강타했던 콜레라 유행과 그에 대한 공공의학적 대응에 주목한다. 당시 세계의 수도 노릇을 했던 런던은 무려 300만명의 인구를 수용하고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대소변과 기타 오물을 적당히 모아서 집 근처의 오물 웅덩이에 퍼부었다. 그 오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정화되기도 했지만, 도시의 거주민들이 이용하는 우물에 녹아들어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바로 그렇게 런던 소호의 브로도 거리에서 콜레라가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자는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마취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적으로 개량해낸 것으로 명성을 얻은 의사 존 스노와 브로도 거리를 담당하는 세인트제임스 교구의 목사인 헨리 화이트헤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빅토리아 여왕 재임 시기, 19세기 중반은 의학이 과학으로서 갓 걸음마를 내디딘 시점이었다. 콜레라는 오물의 악취를 맡으면 발생하는 질병인지, 아니면 그것을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게 하는 요소, 즉 ‘감염’의 원인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학적 논쟁이 한창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 즉 ‘독기설’을 취한 반면 존 스노는 후자인 ‘감염설’을 지지했다.

<바이러스 도시>는 존 스노가 10여년에 걸쳐 감염설을 연구하고 있던 중, 자신이 살던 지역의 콜레라 발병을 목격하고, 본인의 연구를 현실에 적용시켜 군집생활을 하는 인류가 겪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를 막아낸 영웅담이다. 그는 사람들이 오염된 물을 마셔서 콜레라에 걸린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확인한 후, 화이트헤드 목사를 설득해 오염된 물이 나오는 펌프의 손잡이를 제거했다. 과학으로서의 의학이 공공정책의 영역에 개입한 최초의 사례이자, 명백한 성공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런던은 상하수도를 갖췄고 콜레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병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올바른 공공정책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국제적·인도적 차원에서 의료진을 에볼라 발병 지역에 파견하되, 병에 걸릴 경우 제3국에서 치료를 받고 오게 하겠다는 대한민국의 야만과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에볼라에 걸린 후 완치된 간호사 니나 팸에게 따뜻한 포옹을 선사했다. 우리는 미지의 질병 그 자체보다는 그 질병에 대한 공포심을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1041406261&code=116

2014-11-02

[별별시선]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어린 시절의 내게 신해철은 넥스트의 신해철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라는 노래를 쓰고 부른 바로 그 신해철이었다. 그는 동성동본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의 인습에 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가 그런 시대이기도 했다. 서태지는 북한을 향해 “시원스레 맘의 문을 열”자고 노래했고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리들을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있는 공교육을 비판했다. H.O.T.의 데뷔곡은 ‘전사의 후예’인데, 학교폭력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아 “그들은 나를 짓밟았어”라고 노래한다. 젊은이들이 소비하는 대중문화는 이른바 ‘기성세대’와 날카롭게 대립했다.

1990년대는 ‘문화 전쟁’이 한창이었다. 연세대학교의 마광수 교수가 소설 <즐거운 사라>를 썼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직을 잃은 것이 1992년의 일이었다. ‘무한궤도’를 통해 혜성처럼 데뷔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마초 사범이라는 딱지를 달게 된 신해철은 1995년에 동성동본 연인들을 위한 송가를 불렀다.

신해철의 저항은 구체적이었다. ‘이 사회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식의 추상적인 내용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동성동본 연인들의 결혼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학생들에 대한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한국 사회는 “대마가 가지고 있는 환각 증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과장함으로 인해서 예술가들에게 인격적 모욕을 주고 인간 쓰레기로 만든다”고,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까지 목청을 높였다. 가수로서, 또 라디오 DJ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것을 기꺼이 자신의 두 번째 이름으로 삼았다.

그의 느닷없는 죽음에 대한 추모 분위기 속에서, 당시 신해철에게 쏟아졌던 온갖 비난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처럼 낭만적인, 요즘 말로 ‘중2병’스러운 가사는, 그가 감당해야 했던 사회적 반감과 비판을 염두에 두고 음미되어야 한다.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로 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다는, 철들지 않는 소년과 같은 순수함이 없다면, 스스로를 동성동본 연인을 앞에 둔 누군가로 상정하고는 “아직 단 한번의 후회도 느껴본 적은 없”다고 외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테니 말이다.

그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구체적인 사안을 두고 사회와 대립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번 구체적인 욕망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비록 동성동본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망. 비록 학생일지라도 학교에서 ‘사랑의 매’를 맞지 않고 싶은 욕망. 비록 법으로 금지된 대마초를 흡입한 사람이라 해도 사회적으로 멸시당하고 싶지 않은 욕망. 소년의 꿈과 희망은 현실의 벽 앞에 자주 부딪쳤다. 우리는 언젠가 그 벽이 깨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어느 날, 그는 얄리를 따라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1997년 7월16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의해 동성동본의 결혼을 금지하는 민법 제809조 제1항이 효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승리를 제외하고 나면, 신해철이 지지했던 구체적인 욕망들은 아직도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2008년 헌법재판소는 한 표 차이로 간통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이미 합법화 혹은 비범죄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대마의 재배와 사용이 엄격하게 처벌되고 있다. 학생들의 인권 보호는 학부모가 선출하는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좌우된다.

한국은 아직도 개인과, 그 개인들이 누리는 행복에 대해, 너그럽지 않은 나라다. 공개적으로 동성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지만 김조광수 감독이 제출한 혼인신고서는 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든 욕망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무죄다. 모든 사랑은 합법이다.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1995년의 신해철이 만들었던 노래를, 그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022043065&code=990100&s_code=ao122

2014-10-28

[북리뷰]무차별 ‘인터넷 사찰’의 막전막후

[북리뷰]무차별 ‘인터넷 사찰’의 막전막후
2014.10.28ㅣ주간경향 1098호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글렌 그린월드 지음·박수민, 박산호 옮김·모던타임스·1만5000원

카카오톡을 사용하지 않는 나는 처음 ‘사이버 망명’ 이야기가 나왔을 때 비교적 무덤덤했다.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텔레그램’이라는 메신저가 있는데, 그것은 국내 서버에 메시지를 저장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지난 9월 이후 텔레그램을 설치한 사람들은 대략 200만 명을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쯤 되면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이렇듯 대중들이 인터넷과 사이버 프라이버시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은 반대로 인터넷을 통해 국민들의 정보를 추적하려 드는 오늘날을 일컫는 용어가 있다. ‘포스트-스노든 시대’(Post-Snowden Era)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 국가안보국 NSA의 전산시스템 관리자였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가디언의 칼럼니스트 글렌 그린월드와 접선하여, 자신이 빼온 고급 정보를 전달하고, NSA가 무차별적으로 인터넷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 바로 그 사건 이후, 인터넷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더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바로 그 역사적 폭로의 당사자 중 한 사람인 글렌 그린월드가 스노든의 폭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행동의 전후 맥락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킨키나투스’라는 익명으로 그린월드에게 스노든이 이메일을 보냈지만 처음에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제보를 받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던 일화에서 출발해, 그린월드는 스노든의 폭로가 이루어진 과정, NSA의 무차별적 도·감청이 수행된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더 안전하고 개방적인 인터넷을 만들 수 있을지 등 다양한 주제로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사실 NSA의 감청과 현재 우리가 처한 문제는 사뭇 다르다. NSA는 적법하게 영장을 발급받는 것이 어렵거나 불가능할 것이라 예상하여 국민들의 메시지를 기술적으로 뚫고 들어갔다. 반면 한국의 검찰과 경찰은 수사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감청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그러한 청구를 받아들여 ‘영장 자판기’ 노릇을 한 듯하다. 미국의 법원이 한국처럼 영장을 남발했다면 NSA는 굳이 스노든 같은 IT 전문가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즉, 한국에서의 문제는 IT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법적 절차의 작동방식 그 자체다.

하지만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을 사찰하는 ‘정보기관’이 움직이는 방식은 동일하다. NSA가 수집한 정보는 테러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수집한 정보 중에는 적어도 ‘미국인’ 한 명의 온라인 성생활과 인터넷 상에서의 ‘방탕한 행위’, 예컨대 포르노 사이트 방문과 배우자가 아닌 여성과의 은밀한 채팅 섹스에 관한 세부 내용이 있었다. NSA는 목표 대상의 명성과 신뢰성을 훼손하기 위해 이런 정보를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한다.”(244쪽) 사생활을 수집해 반체제인사, 혹은 반정부인사를 물밑으로 협박하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다. 검찰은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말에, ‘왜 위축되나, 아무 문제없는 글을 쓴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NSA가 미국인들의 성생활까지 감시하는 데서 알 수 있다시피, 어떤 글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그들’이 정한다. ‘사이버 망명’이 아닌 민주주의의 회복만이 유일하고 확실한 해법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0211421211&code=116

2014-10-14

[북리뷰]성장보다 분배, 조세정의 확립을

[북리뷰]성장보다 분배, 조세정의 확립을


21세기 자본
토마 피케티 지음·장경덕 옮김·글항아리·3만3000원

지난 9월 19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그의 경제정책, 이른바 ‘초이노믹스’를 ‘아베노믹스’와 비교 설명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최근 한국의 경제정책은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등 세계적 경제학자들의 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폴 크루그먼 교수는 진보적, 혹은 ‘리버럴’한 경제정책을 대변하는 이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옹호하는 폴 크루그먼이 대체 어떤 맥락에서 ‘초이노믹스’의 이론적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일까?

다소 분명하지 않게 경제학자들을 그저 성향에 따라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로 나눈다면 토마피케티와 크루그먼은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진보’에 속한다. 하지만 그들 각각이 현재의 문제를 해석하여 내놓는 답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피케티는 <21>에서 대규모 공공부채에 대해 크게 세 가지 해법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자본에 대한 세금, 인플레이션, 긴축재정이다. 민간자본에 대해 파격적인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가장 공정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한다면 인플레이션이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공정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최악의 해결책은 지속적인 긴축재정인데, 이것이 바로 현재 유럽이 따르고 있는 방식이다.”(650쪽)

이것은 비단 공공부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공공부채 문제는 “부의 분배, 특히 공공부분과 민간부문 사이의 문제이지 절대적인 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는 부유하지만, 부유한 국가의 정부는 가난하다.”(같은 곳)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소득 하위 50%는 대부분 자본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므로 결국 부유한 국가의 공공부채 문제는 상류층이 민간부문의 자본을 독점하는 문제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세 번째 해답, 즉 공공자본의 민영화를 골자로 한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이후 역사적 실패로 판명되었으니, 문제는 과세 정책이냐, 아니면 재정 확장을 통한 경기 부양이냐의 선택이다. 최경환이 자신의 경제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인용하는 폴 크루그먼은 미국 내의 재정 축소론자들에게 맞서 ‘돈 뿌리기’를 주장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아베노믹스에 대해 ‘소득세를 높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제언을 덧붙인다는 점이다. 증세 없이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를 살리면 장기적으로 볼 때 경제가 회복되고 불평등도 줄어든다는 일종의 낙관론이다. <21>에서 피케티가 주장하는 바는 그와 궤도를 달리한다. “공공부채에 대한 이러한 ‘진보적’인 관점은 인플레이션이 오래 전부터 19세기보다 그리 높지 않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재분배 효과가 비교적 불분명한데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161쪽) 피케티는 경제성장보다 분배 그 자체를 목표로 삼고, 더욱 확실한 조세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정부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간접세 중심으로 세수를 늘리면서, 동시에 재정 지출을 확대한다. 크루그먼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크루그먼의 말도 듣지 않고, 피케티의 조언에는 등을 돌린 셈이다. <21>에 대한 논의들은 바로 이 각도에서 우리의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정태 ‘논객 시대’저자/번역가>

2014.10.14ㅣ주간경향 1096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0071119071&code=116

2014-10-12

The physical amount of nuclear waste

Nuclear waste has, for many years, seemed an almost insoluble problem, at least politically in the United States. But when seen in relative terms, the problem of nuclear waste starts to look very different. The physical amount of nuclear waste that would have to be managed and injected underground with a mojor carbon-storage program. All the nuclear waste generated by the entire civilian nuclear program would fill no more than a single football field[인용자 주: 120 yards * 53.3 yards = 109.3m * 48.7m = 5322.9m^2]to the height of ten yards[인용자 주: 9.14m]. By comparison, the output of CO2 from a single coal plant, put into compressed form, would require about 600 football fields--and that would be just one year's output. 

Daniel Yergin, The Quest, Chapter 20, Kindle location 6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