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사회, 안전장치인가, 통제 도구인가?
로빈 터지 지음·추선영 옮김·이후·1만3000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발표가 나오자 많은 이들이 탄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CCTV의 해상도가 부족해서, 이른바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용의 차량으로 지목된 흰색 BMW 번호판의 정확한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그 CCTV가 사건 현장의 것이 아닐 수 있음에 주목하고, 이전에 검토하지 않았던 영상을 반복해서 확인한 끝에, 용의 차량의 차종을 윈스톰으로 특정했다. 그러자 범인의 부인이 경찰서에 신고하였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에서 진범을 잡은 것은 과연 누구일까? CCTV가 주인공인가? 그것을 판독해낸 경찰인가? 아니면 이른바 ‘집단지성’을 발휘한 ‘네티즌 수사대’에 그 공을 돌려야 할까?
CCTV 및 기타 감시 시스템에 대한 2015년의 논의는 우리가 10여년 전에 예상했던 것과 사뭇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감시 카메라의 존재 자체를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TV를 틀면 숫제 가정용 CCTV 광고가 나온다.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언제라도 위치 추적 기구로 돌변할 수 있음을 잘 알지만, 20세기 말의 호들갑이 아니라 21세기의 무덤덤함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일각에서는 이번 ‘크림빵 뺑소니’ 사건을 계기로 네티즌들에게 더 많은 CCTV 정보를 공개하라는 상식 밖의 발언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감시 사회’에 대한 역치가 낮아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로빈 터지는 <감시 사회, 안전장치인가, 통제 도구인가?>를 통해 해당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물론 인류는 그 탄생부터 지금까지 쭉 남을 감시하고 감시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모든 죄수들을 효율적이고 과학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판옵티콘을 구상했다. 나치는 게슈타포의 세밀하고 촘촘한 감시망을 통해 독일 국민들의 내면까지 억누르고자 했다. 미국은 9·11 테러를 계기로 오늘날 스노든에 의해 폭로된 무지막지한 인터넷 감시체계를 갖추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과 해외를 오가는 전화통화 내용 가운데 테러리즘에 연루되는 것으로 의심되는 통화 내용을 도청해도 좋다고 승인했다.”(97쪽)]
오늘날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자유와 사생활을 중시하는 서구 국가들부터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서면서 포괄적인 감시체계를 마련하고 나섰다. 둘째, 정보통신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감시가 가능해졌다. 가령 페이스북에 당신과 친구들이 찍은 사진을 올려보라. 컴퓨터가 자동으로 사람의 얼굴을 식별한다. 이러한 기술이 CCTV와 결합하면, 컴퓨터는 행인 중 용의자를 곧장 파악하여 지목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시민사회 자체가 감시에 익숙해지고 있다. 오히려 더 많은 CCTV를 요구하는 것이 오늘날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저자 로빈 터지는 좌파 저널리스트답게 시종일관 비판적인 태도로 오늘날의 감시 사회를 바라본다. 물론 앞서 말한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충족되어 있는 한, 감시 사회로 향하는 경향성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 또한 분명한 일이다. “CCTV가 우리 일상에 항상 끼어 있는 제3자로 자리 잡으면서 일반 시민은 남의 싸움에 끼어들기를 꺼리게 되었고 자기가 사는 지역의 문제에 대한 책임감도 줄어들었다”(270쪽)는 저자의 지적은 그런 면에서 곱씹어볼 만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네티즌 수사대’ 이전에, 서로 챙겨주는 이웃사촌 아닐까.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2091902531&code=116
2015-02-17
2015-02-11
나는 파국을 맞이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 〈말과활〉 6호(2014/10-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부가 수정하지 않은 버전입니다. 〈말과활〉측의 양해 하에 블로그에 공개합니다.
* 정확한 인용을 하고 싶으시면 〈말과활〉 6호를 구입해 주세요.
나는 파국을 맞이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1.
긴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 사실을 먼저 밝혀두도록 하자. '진보'가 무엇인지, '좌파'가 어떤 의미인지 정의내리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좌파로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한다'는 말을 함부로 꺼낼 경우, '네가 무슨 좌파냐'는 식의 비아냥을 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그러니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해두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만약 사회 내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 효율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입장을 '진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의미에서의 '진보파'에 속한다. 한편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에 있어서, 가령 지젝 같은 '이론가'의 논의를 일부러 챙겨 읽으면서 '자본주의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특히 '혁명'을 기대하는 것이 '좌파'의 본질이라면, 나는 결단코 그런 의미에서의 '좌파'에 속하지 않는다. 흔히 하는 말로 '개량주의자'라고 누가 나를 지칭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러한 표현에 수긍할 수 있겠다.
내가 <말과활>에서 뜻밖의 청탁을 받아 쓰는 원고의 목적은, 바로 그런 '개량주의적', 혹은 '수정주의적' 시각에 입각하여, '좌파'들 사이에서 다소 호응을 얻고 있다고 여겨지는 '파국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이른바 '파국'의 이론적 논의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그리 큰 효용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좌파 이론'은 그것을 쓰는 이들과 읽는 이들에게 비실용적인 지적 쾌감을 안겨주지만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진보적 변화'를 견인하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작업이라고, 나는 이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단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미리 욕 먹을 소리를 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가는 분들만 이 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2.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파국',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국에 대한 논의들'이다. 해당 주제로 도서관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면 몇몇 책이 등장한다. 주요 저작들을 꼽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 중 우리는 <파국의 지형학>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며, 필요에 따라 나머지 책들을 조금씩 인용할 것이다. 그렇게 진행해도 이 글의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영화평론을 모은 김소영의 책도 그렇거니와, 문강형준, 이현우, 복도훈, 이택광이라는 네 명의 저자가 논의하는 바는 모두 지젝의 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현우의 책은 기본적으로 지젝에 대한 해설서이며, 여기서 다루는 이택광, 임민욱, 홍세화의 책 역시 한국에 방한한 지젝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취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복도훈이 제목으로 삼고 있는 '묵시록의 네 기사'는 "뒤러가 살던 시대에는 각각 종교개혁의 정치사회적 파장,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위협, 급작스런 인구 증가에 따른 기근, 조만간 벌어질 농민 전쟁과 30년 전쟁에 따른 죽음의 알레고리였"[1]지만, "지젝은 생태 위기, 유전공학 혁명의 결과물들, 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의 불균형(자원 확보를 위한 전쟁, 경쟁의 파괴력 등), 그리고 사회적 분할과 배제의 폭발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의 끝을 가져올 '묵시록의 네 기사'로 설정"[2]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나면, 그의 책 뒤표지에 재인용되어 있는 서문의 내용이 곧 이 책의 지향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지젝의 논의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되, 여타 담론들도 비교적 충실히 소개하고 있는 문강형준의 책을 주된 검토의 대상으로 삼도록 한다. 다른 책들도 고루 짚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면이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책을 다룰 경우 논의의 중복을 피할 수 없기도 할 테니 말이다.
3.
아닌게아니라 '파국론' 자체가 대단한 중복이다. 서사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인류는 언제나 세상이 망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장면을 상상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강형준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위 인용된 문단에 등장하는 사례들만 쭉 훑어봐도, 우리는 '파국론'이 지니는 일종의 내재적 모순이 무엇인지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그 '파국'이 어떤 나라가 망한다거나, 제국이 몰락한다거나, 한 집안이 거리로 나앉는다거나 하는 일이라면, 다시 말해 현실 속에 종종 있어왔고 마치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한번 죽듯이 결국에는 닥쳐올 그런 일을 뜻할 뿐이라면, '파국론'은 그 특유의 비장함을 적잖이 잃게 된다. 국제정치적, 국가적, 사회적, 가정경제적 위기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젝을 읽으며 혁명을 꿈꾸는 게 아니라, 해당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밝히고 해결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파국의 상상은 일상의 불편함을 조금씩 기워나가는 사회공학적 접근이 아니라, 위기와 절멸을 상상함으로써 현재의 질서를 역전시키고 절멸시키려는 근본적인 접근"[4]이라는 문강형준의 설명을 들으면, '파국론'에서 말하는 '파국'이 단순한 사회적 사건들의 집합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적어도 '파국'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파국'이 몇 개의 사회적 현상으로 단순히 분할되고 축소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른바 '파국의 상상'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질서를 넘어서 어떤 인식론적인 단절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모든 것의 토대를 뒤흔드는 사건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앞서 우리가 '묵시록의 네 기사'라는 표현을 전유한 지젝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의 끝을 의미한다. 그러한 거대한 변화 앞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일상의 불편함을 조금씩 기워나가는 사회공학적 접근"이 불가능한 지점으로부터 '파국'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우리는 그 '파국' 앞에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가 마르크스주의를 '토리노 지방에서 발흥한 종말론의 한 형태'라고 비아냥거리기 이전부터, 수많은 좌파들이 봉착한 근본적인 딜레마였다. 만약 역사가 그 자체의 운동 법칙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발달과 혁명으로 치달아 공산주의가 실현된다면, 그 운동 법칙은 철의 법칙이어서 자본가들이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다면, 공산주의 '운동'을 할 필요성은 어디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글을 쓰는 나 뿐만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 오바마 같은 권력자도 막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파국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기왕 지젝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니 영화를 한 편 인용해보도록 하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2011)는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이 붙은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와 충돌하는 이야기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은 언니 클레어(샬롯 갱스부르)의 집에 살면서 조용히 종말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 누구도 살아날 수 없고,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일종의 신통력을 얻은 저스틴은 우주 만물에 대한 진실을 죄다 알게 되는데, 그에 따르면 지구 외에는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조차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생명의 끝이다.
이런 '파국'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없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어떤 '윤리적' 행위가 가능한가? 라스 폰 트리에는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영상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극도의 허무주의를 보여준다. 어차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끝'이라면, 뒷동산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죽으나, 마굿간에서 독약을 먹고 죽으나, 차이가 없는 것 아닌가? 막을 수 없는 '파국'은 막을 수 없는 '파국'이므로, 그러한 사태 앞에서는 인간의 주체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윤리적 판단 기제가 무의미해진다.
요컨대 우리가 '파국론'을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두 개의 선택지 앞에 놓인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다가올 '파국' 앞에서 어떠한 가치에 헌신하며 순교자가 된다. 둘째, 어차피 이래도 끝날 세상이고 저래도 끝날 세상이니, 그냥 기다린다. 예수 본인을 포함해 거의 모두가 종말론자였던 기원후 1세기 무렵의 기독교 신자들의 삶이 바로 그랬다.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거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5.
이러한 평가가 다소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나 또한 본격적인 원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좌파'인데 뭔가 하자는 이야기를 하겠지,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지젝의 논의를 기저에 깔고 진행되는,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파국론'에는 구체적인 실천의 방향과 방법론이 심각하리만치 결여되어 있다.
이렇듯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지젝 본인과는 달리, 지젝을 읽는 사람들 중 일부는 지젝이 제시하는 '파국'의 밑그림 위에서도 저항을 모색한다. 그런데 그 '저항'은 다름아닌 지젝의 책을 읽는 것이다.
지젝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의 이런 저런 문제들을, 적어도 '마음'만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현우와 달리, 문강형준의 시각은 보다 비관적이다. 문학적인 서술을 통해 '파국'에 직면한 주체들의 행위 양태를 묘사하고 있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닥쳐올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심지어 이들이 남긴 '생채기'가 과연 후대의 '시스템'에 의해 제대로 기억될런지 또한 미지수이다.
6.
그러나 우리가 논하는 '파국론'자들이 이토록 무기력한 결론에 겨우 도달하는 것은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지젝의, 그 유명한 '바틀비 정치학' 자체가 지닌 본연적 한계 혹은 특징이 고스란히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내가 아는 지젝은 그렇지 않다, 근본적인 변화와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이 저자들이 지젝을 엉터리로 읽었다'고 화를 내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젝 스스로도 인정하는 그의 주저 <시차적 관점>을 펼쳐보자. 늘 그렇듯 수많은 문학, 영화, 기타 문화 매체에 대한 박람강기를 과시하던 그는, 결론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전개한다.
(1) 폭력이 없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폭력은 본질적인 가치는 없지만 혁명적 과정의 본래성의 기호이며 이 과정이 실제로 기존의 권력관계를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폭력이 없는 혁명의 꿈은 정확히 "혁명이 없는 혁명"(로베스피에르)의 꿈이다."[8]
(2) 주이상스[쾌락]에 대한 폭력적 포기 역시 폭력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가 주이상스의 명령의 악순환에 포획되어 있을 대 그 "자연적" 대극으로 보이는 것, 주이상스에 대한 폭력적 포기를 선택하려는 유혹이 강하게 일어"[9]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식욕이라면, 식욕을 포기하는 것 역시 일종의 '폭력적'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이상스를 포기함으로써 더 큰 주이상스를 얻으라는 '외설적' 명령은 곧 "모든 "근본주의"의 기저에 있는 주제"[10]이므로, 우리는 그 '외설적 주이상스' 또한 '폭력적 포기'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욕망을 억누르는 폭력에 맞서, 욕망을 억누르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르는 폭력을 휘두르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3) 욕망을 억누르는 폭력에 맞서, 욕망을 억누르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르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틀비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나는 선호한다"(I would prefer not to)이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하지 않기를 선호한다(원한다) 고 말한다."[11] '욕망을 억누르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때 그 '외설적' 욕망을 억누르기를 '원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바틀비 정치학'의 요체다. 결국 욕망을 따르겠다는 이야기지만, 이중부정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 논증은 (1)에서 (2)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폭력'의 의미를 아주 넓게 확장시킴으로써 비로소 성립한다. (1)에 등장하는 '폭력'은 로베스피에르가 말하는 바로 그 폭력, 반대자를 끌어내어 린치하고 단두대로 보내는 바로 그런 폭력이다. 하지만 (2)의 폭력은 내 마음 속의 욕망을 억누르는, 혹은 그 욕망을 억누르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르는, 그런 종류의 폭력이다. (1)의 폭력은 사회적 폭력인데 반해 (2)의 것은 개인 혹은 집단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그런 것에 속한다. 주이상스를 억누르는 폭력이건, 그 폭력에 맞서는 폭력이건, (1)의 것에 비하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바 '폭력'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다.
지젝이 이런 이론적 곡예를 하는 이유는, '혁명'과 '폭력'을 함께 말하는 짜릿함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면서도, 정작 그 '폭력'이 사회적으로 쏟아져나오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이 없는 혁명의 꿈은 정확히 "혁명이 없는 혁명"(로베스피에르)의 꿈"이라고 해놓고, 바로 다음 문단이 시작되자 "이 폭력적인 계란 깨기는 또한 폭력의 분출과 직접적으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이 시점에서 지젝이 말하는 폭력은, 그 스스로가 비판하는 바 '디카페인 커피'가 되고 만다. 폭력이 없는 혁명의 꿈을 꾸지 말자고 하지만, 그 폭력은 '폭력적 결과를 낳지 않는 폭력'이니 말이다.
이런 식의 도치된 결론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지젝이 뒤의 문단에서 '폭력'을 '주체가 타자에게 행사하는 물리적 강제'가 아니라 '주체가 타자에게서 쾌락을 얻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는 기제'로 슬그머니 바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을 때리지 마라'는 명령이 어느새 '예뻐지기 위해 밥 굶지 마라'로 바뀌어있는 것이다.
지젝의 대작 <시차적 관점>의 결론을 장식하는, '바틀비 정치학'이 실현되는 사례들을 살펴보자.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800페이지에 달하는 대작(magum opus)을 펴냈다. 어떤 면에서,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7.
이렇게 폭력의 문제와 규모가 급격히 사사화(私事化) 되어있는 탓에, '바틀비 정치학'이 설 구석이 생긴다. 만약 당신이 고민하는 문제가 기껏해야 '착한 소비를 하려면 고기 먹고 싶은 내 욕망을 억눌러야 하잖아, 이것도 폭력이야, 근본주의적이야'에 머물고 있다면, '나는 허울 좋은 명분에 휩쓸려 맛있는 것을 먹지 않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는 분명 멋진 대답이다. 그 경우 "바틀비의 제스처는 외설적 초자아의 내용이 그 자리에서 비워졌을 때 법의 보충으로 남는 것"[13]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초자아의 역사적, 사회적 기능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는 것이다. 선량한 행위를 하기 위해 '내면'을 폭력적으로 억눌러야 하는 삶의 양식은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보편적이지 않다. 초자아의 자리에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를 얹어놓은 사람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러 온 대학생일 수도 있지만 콩고의 군벌 두목일 수도 있다. 양자 모두 '외설적' 초자아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결과는 전혀 상반될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와 달리 후자가 십계명을 초자아로 삼고 있는 것은 그의 이웃들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네 이웃'을 쏘아죽이기 전에 한 번은 고민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날 군벌 두목이 지젝을 읽었고, 사람을 쏘아죽이고 싶다는 나의 주이상스를 억누르는 것 또한 폭력임을 깨달았으며, 그러한 '외설적' 주이상스로부터 벗어나 '나는 십계명에 따라 살인을 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결과는 유혈낭자하게 끝날 것이다.
지젝에 대해, 혹은 현대 철학이나 '이론'에 대해 우호적인 독자라면, 아직까지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이러한 비유 자체를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어디까지나 어떤 종류의 '학문'을 하고 있다면, 학문은 보편성을 띄어야 하므로, 이와 같은 비판을 벗어날 수도 없다. 그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내놓는 기술은, 모든 종류의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그러한 이야기인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 제1세계에 살면서 적어도 대학교 학부 이상의 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으며, 일상의 영역에서 물리적 폭력에 노출될 위험을 크게 느끼지 않고, 다양한 레퍼런스를 이해하거나 적어도 아는 척 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지만 이른바 '기존 정치권'에서 내놓는 해법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아마도 지젝의 독자일 것으로 추측된다.
개인적 편견을 조금만 더 드러내보자. 나는 지젝의 작업과 그로부터 파생된 작업들을 '학문'이 아닌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문학비평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듯이, 지젝의 '이론' 역시 기존의 철학, 문학, 영화비평, 기타등등을 섞어놓은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버마스가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내놓은 다음 코멘트가, 지젝의 작업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주장은 철학적 토론에서 단지 약한 지주들을 발견할 뿐이다. 그것은 주로 심미적 경험들에, 더욱 자세하게 말하면 문학과 문학이론의 영역으로부터 나온 증거들에 의지한다."[14]
8.
우리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몇 권의 책을 새삼 다시 살펴보자. 대부분이 문학비평, 영화비평, 기타 창작물에 대한 비평으로 분류될 수 있다. 문강형준과 복도훈은 모두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이현우는 지젝의 현란한 대중문화 인용을 차근차근 따라간다. 이 모든 논의를 '비평'으로, 혹은 '2차 창작'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더 이상 진지하게 토론할 필요가 없는 취향의 영역으로 넘어갈 것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이미 그렇게 간주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갈갈이 찢어진 '진보정당'들이 각자의 곤궁을 겪고 있는 동안, 130석을 가진 거대 야당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국민들에게 냉정한 현실을 전달하고 설득하기는 커녕, 대중의 파토스에 끌려다니며 '유족들이 원하는 진짜 세월호 특별법'이라는 파랑새를 잡느라 모든 정치적 기회를 탕진해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현실에서의 정치가 이토록 지지부진한데 그 누가 '좌파 정치 이론'에 관심을 기울이겠냐는 말이다.
오히려 문강형준이 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글이 더욱 타당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는 "후쿠야마의 '역사적 종말' 테제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승리라는 샴페인을 터뜨리고 싶었던 미국 헤게모니의 다급함으로 판명"[15]되었다고 단정지었지만, 그 '역사의 종말'이라는 것은 문강형준이 긍정적인 맥락으로 길게 인용하는 바로 이 문단에 잘 표현되어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처한 국내외의 현실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민주주의에 대해 투쟁을 벌이는 자칭 민주주의자들, 자유주의에 대해 투쟁을 벌이는 자칭 자유주의자들을, 우리는 오늘날 서울 시내 도처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군사 독재를 경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독재자를 칭송하고, '민주화'라는 단어를 마치 욕설처럼 사용하며, 호남 사람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 발언을 내뱉으면서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보호를 요청하는 그런 청년들 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은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미국의 종군 사진기자 제임스 폴리를 참수한 ISIS(이슬람 국가) 구성원의 신원은 23세의 영국의 랩퍼 압델-마제드 압델 바리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1백만 파운드짜리 임대 주택에 살던 중산층이었고, BBC1에 자신이 녹음한 랩이 방송된 경험이 있는, 이른바 '서구 사회'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사는 세계의 주요 부분이 평화롭고 번영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의해 규정되어 있"었기에, 그는 "평화와 번영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에 대항하여 투쟁을 펼"친 것이다.
서구에서 태어나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이민자의 자녀들이 테러 조직에 참여하는 문제로 서방 세계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들은 정당하게 여권을 발급받은,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시민'이다. 그러나 외부의 적을 잃고 허깨비가 되어버린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던 그 청년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충족시켜줄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폭력이 없는 혁명의 꿈은 정확히 "혁명이 없는 혁명"의 꿈"이라는 지젝의 말에, 아마 그들은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까.
9.
우리는 '파국'이 그토록 단절적인 사건인지에 대해서부터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복도훈은 "현재=미래라는 등식뿐 아니라, 현재≠미래의 상상력의 기어변속을 감행해야 할 것"[17]이라고 독자들을 향해 주문하지만, 지금까지 검증된 바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를 가장 거칠게 단절시켜준 '혁명'은 자본주의 혁명이었고, 그로 인해 '파국'을 겪은 것은 봉건 사회였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의 역사를 길게 놓고 돌이켜보면, 이전과 이후 사람들의 사회나 문화 뿐 아니라 인식 체계까지 통째로 뒤흔든 진정한 '혁명'중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 뿐이었다. 인간이 출생시의 신분과 무관하게, 화폐를 통해 물건을 사고 팔 수 있고, 그렇게 얻은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고, (어떠한 기준 하에) 모든 사람들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는 발상은, 그러한 관념이 지배적인 것이 되기 이전 시대와 그 후를 본질적으로 경계짓는다.
요컨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파국'을 불러온다는 주장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자본주의가 봉건 사회에 '파국'을 불러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우리는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본주의가 봉건 사회에 가져다주는 '파국'을 가장 잘 묘사한 사람은 다름아닌 마르크스다. "영국의 인도 지배"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그러나 인도의 봉건 사회가 완전한 '파국'을 맞이하였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파괴되어 이전의 모습으로 결코 돌아올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수천년 동안 내려온 카스트 제도는 지금껏 음성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고, 특히 여성들은 성폭력을 포함한 온갖 폭력 및 살해 위험에 시달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분명 사회는 점점 더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만, 이전의 질서, 즉 봉건적 유교적 사고방식과 관습은 쉽사리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외부'를 상상하고, 언젠가 도래할지 모르는 탈 자본주의적 '파국'을 기다리며, 다양한 대중문화의 텍스트를 읽고 감상하며 인용하는 것은, 절대 무가치하거나 부질없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것은 참여자들의 교양을 증진시키고 그들의 여가를 선용하는데 도움을 주니 말이다.
하지만 '파국'에 대한 주장을 진지하게 검토하다 보니, 과자보다 질소가 많은 국산 과자 봉투를 뜯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젝과 그의 '제자들'이 말하는 바만 놓고 보더라도, '파국'은 그 어떤 사회 문제의 해법도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와 봉건 사회의 대립을 놓고 볼 때, '파국'이 일회적이고 전면적이며 이전의 질서를 모두 쓸어버릴 것이라는 가정은 그리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심판의 날이 곧장 닥쳐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비로소 영속성 있는 조직을 꾸려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파국' 그 자체가 아니라 '파국'을 기다리는 동안 망가뜨리게 되는 것들이 더 큰 문제임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에 가겠지만 이승에서의 올바른 삶을 사는 것도,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오늘날의 진보 정치가 상실해버린 가장 중요한 실천적 영역과도 맞아떨어진다. 사람을 만나고,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고, 같이 식사를 나누면서,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견뎌낼 수 있는 조직을 이루는 것. 물론 누군가는 앞으로도 '파국'을 기다릴 테지만, 그런 이들에게 다소 폭력적으로 여겨질지라도, 이렇게 되받아치고 싶다. '나는 파국을 맞이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주--------
[1] 복도훈, <묵시록의 네 기사>(서울: 자음과모음, 2012), 18쪽.
[2]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울: 자음과모음, 2011), 195쪽, 각주 5.
[3] 전게서, 12쪽.
[4] 전게서, 13쪽.
[5] 이택광 외, <임박한 파국>(서울: 꾸리에, 2012), 8쪽.
[6] 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서울: 자음과모음, 2011), 7쪽.
[7]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울: 자음과모음, 2011), 181쪽.
[8] 슬라보예 지젝, 김서영 옮김, <시차적 관점>(서울: 마티, 2009), 746쪽.
[9] [10] 같은 곳.
[11] 전게서, 747쪽.
[12] 전게서, 748쪽.
[13] 같은 곳.
[14] 위르겐 하버마스, 이진우 옮김, <탈형이상학적 사유>, (서울: 문예출판사, 2000), 268쪽.
[15]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울: 자음과모음, 2011), 24쪽.
[16]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p.330.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울: 자음과모음, 2011), 38쪽에서 재인용.
[17] 복도훈, <묵시록의 네 기사>(서울: 자음과모음, 2012), 23쪽.
[18] 칼 마르크스, "영국의 인도 지배", <칼 맑스 프리드리히 앵겔스 저작 선집>, 2권, 416쪽.
* 편집부가 수정하지 않은 버전입니다. 〈말과활〉측의 양해 하에 블로그에 공개합니다.
* 정확한 인용을 하고 싶으시면 〈말과활〉 6호를 구입해 주세요.
나는 파국을 맞이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1.
긴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 사실을 먼저 밝혀두도록 하자. '진보'가 무엇인지, '좌파'가 어떤 의미인지 정의내리는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좌파로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한다'는 말을 함부로 꺼낼 경우, '네가 무슨 좌파냐'는 식의 비아냥을 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그러니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해두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만약 사회 내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 효율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입장을 '진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의미에서의 '진보파'에 속한다. 한편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에 있어서, 가령 지젝 같은 '이론가'의 논의를 일부러 챙겨 읽으면서 '자본주의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특히 '혁명'을 기대하는 것이 '좌파'의 본질이라면, 나는 결단코 그런 의미에서의 '좌파'에 속하지 않는다. 흔히 하는 말로 '개량주의자'라고 누가 나를 지칭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러한 표현에 수긍할 수 있겠다.
내가 <말과활>에서 뜻밖의 청탁을 받아 쓰는 원고의 목적은, 바로 그런 '개량주의적', 혹은 '수정주의적' 시각에 입각하여, '좌파'들 사이에서 다소 호응을 얻고 있다고 여겨지는 '파국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이른바 '파국'의 이론적 논의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그리 큰 효용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좌파 이론'은 그것을 쓰는 이들과 읽는 이들에게 비실용적인 지적 쾌감을 안겨주지만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진보적 변화'를 견인하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작업이라고, 나는 이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단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미리 욕 먹을 소리를 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가는 분들만 이 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2.
이 글이 다루는 대상은 '파국',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파국에 대한 논의들'이다. 해당 주제로 도서관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면 몇몇 책이 등장한다. 주요 저작들을 꼽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울: 자음과모음, 2011)
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서울: 자음과모음, 2011)
복도훈, <묵시록의 네 기사>(서울: 자음과모음, 2012)
이택광 기획, 임민욱·홍세화 취재, <임박한 파국: 슬라보예 지젝의 특별한 강의>(서울: 꾸리에, 2012)
김소영, <파국의 지도: 한국이라는 영화적 사태>(서울: 현실문화, 2014)
이 중 우리는 <파국의 지형학>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며, 필요에 따라 나머지 책들을 조금씩 인용할 것이다. 그렇게 진행해도 이 글의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 영화평론을 모은 김소영의 책도 그렇거니와, 문강형준, 이현우, 복도훈, 이택광이라는 네 명의 저자가 논의하는 바는 모두 지젝의 논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현우의 책은 기본적으로 지젝에 대한 해설서이며, 여기서 다루는 이택광, 임민욱, 홍세화의 책 역시 한국에 방한한 지젝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취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복도훈이 제목으로 삼고 있는 '묵시록의 네 기사'는 "뒤러가 살던 시대에는 각각 종교개혁의 정치사회적 파장,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위협, 급작스런 인구 증가에 따른 기근, 조만간 벌어질 농민 전쟁과 30년 전쟁에 따른 죽음의 알레고리였"[1]지만, "지젝은 생태 위기, 유전공학 혁명의 결과물들, 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의 불균형(자원 확보를 위한 전쟁, 경쟁의 파괴력 등), 그리고 사회적 분할과 배제의 폭발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의 끝을 가져올 '묵시록의 네 기사'로 설정"[2]하고 있다는 설명을 듣고 나면, 그의 책 뒤표지에 재인용되어 있는 서문의 내용이 곧 이 책의 지향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지젝의 논의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되, 여타 담론들도 비교적 충실히 소개하고 있는 문강형준의 책을 주된 검토의 대상으로 삼도록 한다. 다른 책들도 고루 짚어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면이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책을 다룰 경우 논의의 중복을 피할 수 없기도 할 테니 말이다.
3.
아닌게아니라 '파국론' 자체가 대단한 중복이다. 서사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 인류는 언제나 세상이 망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장면을 상상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강형준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예로부터 인류는 자신의 문화적 유산들 속에 이 '파국'의 이중성을 알게 모르게 기입해왔다. 인류의 창조와 종말,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관한 유대-기독교 서사에서부터,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가 끝나고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새 시대가 도래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에 관한 동학의 원리, 자본주의의 과잉 착취가 스스로의 무덤을 파면서 불러올 코뮤니즘에 대한 마르크스의 역사철학, 기후 급변과 자원 고갈, 경쟁 격화로 인해 발생할 근미래의 대참사에 대한 포스트-아포칼립스 문화 텍스트들의 상상력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세상의 끝과 시작, 체제의 격변과 역전에 관한 수많은 서사들을 만들어냈고, 여전히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3]
위 인용된 문단에 등장하는 사례들만 쭉 훑어봐도, 우리는 '파국론'이 지니는 일종의 내재적 모순이 무엇인지 금방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그 '파국'이 어떤 나라가 망한다거나, 제국이 몰락한다거나, 한 집안이 거리로 나앉는다거나 하는 일이라면, 다시 말해 현실 속에 종종 있어왔고 마치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한번 죽듯이 결국에는 닥쳐올 그런 일을 뜻할 뿐이라면, '파국론'은 그 특유의 비장함을 적잖이 잃게 된다. 국제정치적, 국가적, 사회적, 가정경제적 위기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젝을 읽으며 혁명을 꿈꾸는 게 아니라, 해당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밝히고 해결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파국의 상상은 일상의 불편함을 조금씩 기워나가는 사회공학적 접근이 아니라, 위기와 절멸을 상상함으로써 현재의 질서를 역전시키고 절멸시키려는 근본적인 접근"[4]이라는 문강형준의 설명을 들으면, '파국론'에서 말하는 '파국'이 단순한 사회적 사건들의 집합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적어도 '파국'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파국'이 몇 개의 사회적 현상으로 단순히 분할되고 축소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른바 '파국의 상상'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질서를 넘어서 어떤 인식론적인 단절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모든 것의 토대를 뒤흔드는 사건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앞서 우리가 '묵시록의 네 기사'라는 표현을 전유한 지젝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미 확인한 것처럼,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의 끝을 의미한다. 그러한 거대한 변화 앞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일상의 불편함을 조금씩 기워나가는 사회공학적 접근"이 불가능한 지점으로부터 '파국'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우리는 그 '파국' 앞에서 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가 마르크스주의를 '토리노 지방에서 발흥한 종말론의 한 형태'라고 비아냥거리기 이전부터, 수많은 좌파들이 봉착한 근본적인 딜레마였다. 만약 역사가 그 자체의 운동 법칙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발달과 혁명으로 치달아 공산주의가 실현된다면, 그 운동 법칙은 철의 법칙이어서 자본가들이 무슨 수를 써도 되돌릴 수 없다면, 공산주의 '운동'을 할 필요성은 어디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이나 글을 쓰는 나 뿐만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 오바마 같은 권력자도 막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파국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기왕 지젝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니 영화를 한 편 인용해보도록 하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2011)는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이 붙은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와 충돌하는 이야기이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은 언니 클레어(샬롯 갱스부르)의 집에 살면서 조용히 종말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 누구도 살아날 수 없고,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일종의 신통력을 얻은 저스틴은 우주 만물에 대한 진실을 죄다 알게 되는데, 그에 따르면 지구 외에는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조차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생명의 끝이다.
이런 '파국'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없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어떤 '윤리적' 행위가 가능한가? 라스 폰 트리에는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영상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극도의 허무주의를 보여준다. 어차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끝'이라면, 뒷동산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죽으나, 마굿간에서 독약을 먹고 죽으나, 차이가 없는 것 아닌가? 막을 수 없는 '파국'은 막을 수 없는 '파국'이므로, 그러한 사태 앞에서는 인간의 주체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윤리적 판단 기제가 무의미해진다.
요컨대 우리가 '파국론'을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두 개의 선택지 앞에 놓인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다가올 '파국' 앞에서 어떠한 가치에 헌신하며 순교자가 된다. 둘째, 어차피 이래도 끝날 세상이고 저래도 끝날 세상이니, 그냥 기다린다. 예수 본인을 포함해 거의 모두가 종말론자였던 기원후 1세기 무렵의 기독교 신자들의 삶이 바로 그랬다. 예수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죽거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5.
이러한 평가가 다소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나 또한 본격적인 원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좌파'인데 뭔가 하자는 이야기를 하겠지,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지젝의 논의를 기저에 깔고 진행되는,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파국론'에는 구체적인 실천의 방향과 방법론이 심각하리만치 결여되어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문제를 제기해온 철학자이다. 임박한 파국에 대해 어떤 근본 대책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내세우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거시적 차원의 문제의식과 단기적 차원의 문제해결을 이야기한다. 파국에 대한 근본 대책이 없다는 것은 지연시킬 수 있을지언정,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막연한 종말론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주장은 자본주의의 종언에 집중되어 있다.[5]
이렇듯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지젝 본인과는 달리, 지젝을 읽는 사람들 중 일부는 지젝이 제시하는 '파국'의 밑그림 위에서도 저항을 모색한다. 그런데 그 '저항'은 다름아닌 지젝의 책을 읽는 것이다.
'지젝 읽기'는 때문에 '저항'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에 대한 저항이고, '우리 집안만 빼고 다 망해라!'는 유구한 심보에 대한 저항이다.
지젝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의 이런 저런 문제들을, 적어도 '마음'만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현우와 달리, 문강형준의 시각은 보다 비관적이다. 문학적인 서술을 통해 '파국'에 직면한 주체들의 행위 양태를 묘사하고 있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닥쳐올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심지어 이들이 남긴 '생채기'가 과연 후대의 '시스템'에 의해 제대로 기억될런지 또한 미지수이다.
그 [파국:인용자] 속에서 사는 모든 주체에게 이 현실은 철저한 현실로도 철저한 열정으로도 회귀할 수 없는 딜레마적 상황을 부과한다. 누군가는 투항하고, 누군가는 자살하며, 누군가는 망가지고, 누군가는 이용하며, 누군가는 흘러간다. 이 모든 누군가들 사이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애쓴다. 이 그림과 글과 사랑은 자신들이 처한 운명의 시간을 바꿀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들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시간에 작은 생채기를 내며 자신들을 둘러싼 시스템이 결코 뿌리 뽑을 수 없는 기억을 간직한다.[7]
6.
그러나 우리가 논하는 '파국론'자들이 이토록 무기력한 결론에 겨우 도달하는 것은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이 의존하고 있는 지젝의, 그 유명한 '바틀비 정치학' 자체가 지닌 본연적 한계 혹은 특징이 고스란히 발현된 것에 불과하다. '내가 아는 지젝은 그렇지 않다, 근본적인 변화와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이 저자들이 지젝을 엉터리로 읽었다'고 화를 내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지젝 스스로도 인정하는 그의 주저 <시차적 관점>을 펼쳐보자. 늘 그렇듯 수많은 문학, 영화, 기타 문화 매체에 대한 박람강기를 과시하던 그는, 결론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전개한다.
(1) 폭력이 없는 혁명이란 있을 수 없다. "폭력은 본질적인 가치는 없지만 혁명적 과정의 본래성의 기호이며 이 과정이 실제로 기존의 권력관계를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폭력이 없는 혁명의 꿈은 정확히 "혁명이 없는 혁명"(로베스피에르)의 꿈이다."[8]
(2) 주이상스[쾌락]에 대한 폭력적 포기 역시 폭력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가 주이상스의 명령의 악순환에 포획되어 있을 대 그 "자연적" 대극으로 보이는 것, 주이상스에 대한 폭력적 포기를 선택하려는 유혹이 강하게 일어"[9]나기 때문이다. 예컨대 식욕이라면, 식욕을 포기하는 것 역시 일종의 '폭력적'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이상스를 포기함으로써 더 큰 주이상스를 얻으라는 '외설적' 명령은 곧 "모든 "근본주의"의 기저에 있는 주제"[10]이므로, 우리는 그 '외설적 주이상스' 또한 '폭력적 포기'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욕망을 억누르는 폭력에 맞서, 욕망을 억누르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르는 폭력을 휘두르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3) 욕망을 억누르는 폭력에 맞서, 욕망을 억누르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르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틀비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나는 선호한다"(I would prefer not to)이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그것을 하지 않기를 선호한다(원한다) 고 말한다."[11] '욕망을 억누르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때 그 '외설적' 욕망을 억누르기를 '원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바틀비 정치학'의 요체다. 결국 욕망을 따르겠다는 이야기지만, 이중부정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 논증은 (1)에서 (2)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폭력'의 의미를 아주 넓게 확장시킴으로써 비로소 성립한다. (1)에 등장하는 '폭력'은 로베스피에르가 말하는 바로 그 폭력, 반대자를 끌어내어 린치하고 단두대로 보내는 바로 그런 폭력이다. 하지만 (2)의 폭력은 내 마음 속의 욕망을 억누르는, 혹은 그 욕망을 억누르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르는, 그런 종류의 폭력이다. (1)의 폭력은 사회적 폭력인데 반해 (2)의 것은 개인 혹은 집단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그런 것에 속한다. 주이상스를 억누르는 폭력이건, 그 폭력에 맞서는 폭력이건, (1)의 것에 비하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바 '폭력'에 속한다고 보기 어렵다.
지젝이 이런 이론적 곡예를 하는 이유는, '혁명'과 '폭력'을 함께 말하는 짜릿함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면서도, 정작 그 '폭력'이 사회적으로 쏟아져나오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이 없는 혁명의 꿈은 정확히 "혁명이 없는 혁명"(로베스피에르)의 꿈"이라고 해놓고, 바로 다음 문단이 시작되자 "이 폭력적인 계란 깨기는 또한 폭력의 분출과 직접적으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이 시점에서 지젝이 말하는 폭력은, 그 스스로가 비판하는 바 '디카페인 커피'가 되고 만다. 폭력이 없는 혁명의 꿈을 꾸지 말자고 하지만, 그 폭력은 '폭력적 결과를 낳지 않는 폭력'이니 말이다.
이런 식의 도치된 결론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지젝이 뒤의 문단에서 '폭력'을 '주체가 타자에게 행사하는 물리적 강제'가 아니라 '주체가 타자에게서 쾌락을 얻어내기 위해 스스로를 억압하는 기제'로 슬그머니 바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을 때리지 마라'는 명령이 어느새 '예뻐지기 위해 밥 굶지 마라'로 바뀌어있는 것이다.
지젝의 대작 <시차적 관점>의 결론을 장식하는, '바틀비 정치학'이 실현되는 사례들을 살펴보자.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800페이지에 달하는 대작(magum opus)을 펴냈다. 어떤 면에서, 실로 경이롭기까지 하다.
명백한 "여기 새로운 직업의 멋진 기회가 있습니다! 참여하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진정한 자기의 깊이를 발견하세요, 내적 평화를 찾으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역시 마찬가지이다. 또는 "당신은 우리 환경이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 인식하고 있습니까? 생태학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세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또는 "우리 주위에서 목격하는 모든 인종적이고 성적인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더 많은 것을 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12]
7.
이렇게 폭력의 문제와 규모가 급격히 사사화(私事化) 되어있는 탓에, '바틀비 정치학'이 설 구석이 생긴다. 만약 당신이 고민하는 문제가 기껏해야 '착한 소비를 하려면 고기 먹고 싶은 내 욕망을 억눌러야 하잖아, 이것도 폭력이야, 근본주의적이야'에 머물고 있다면, '나는 허울 좋은 명분에 휩쓸려 맛있는 것을 먹지 않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는 분명 멋진 대답이다. 그 경우 "바틀비의 제스처는 외설적 초자아의 내용이 그 자리에서 비워졌을 때 법의 보충으로 남는 것"[13]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초자아의 역사적, 사회적 기능을 전적으로 도외시하는 것이다. 선량한 행위를 하기 위해 '내면'을 폭력적으로 억눌러야 하는 삶의 양식은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보편적이지 않다. 초자아의 자리에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를 얹어놓은 사람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러 온 대학생일 수도 있지만 콩고의 군벌 두목일 수도 있다. 양자 모두 '외설적' 초자아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결과는 전혀 상반될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와 달리 후자가 십계명을 초자아로 삼고 있는 것은 그의 이웃들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네 이웃'을 쏘아죽이기 전에 한 번은 고민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날 군벌 두목이 지젝을 읽었고, 사람을 쏘아죽이고 싶다는 나의 주이상스를 억누르는 것 또한 폭력임을 깨달았으며, 그러한 '외설적' 주이상스로부터 벗어나 '나는 십계명에 따라 살인을 하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결과는 유혈낭자하게 끝날 것이다.
지젝에 대해, 혹은 현대 철학이나 '이론'에 대해 우호적인 독자라면, 아직까지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이러한 비유 자체를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가 어디까지나 어떤 종류의 '학문'을 하고 있다면, 학문은 보편성을 띄어야 하므로, 이와 같은 비판을 벗어날 수도 없다. 그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 내놓는 기술은, 모든 종류의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그러한 이야기인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독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가? 제1세계에 살면서 적어도 대학교 학부 이상의 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으며, 일상의 영역에서 물리적 폭력에 노출될 위험을 크게 느끼지 않고, 다양한 레퍼런스를 이해하거나 적어도 아는 척 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지만 이른바 '기존 정치권'에서 내놓는 해법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아마도 지젝의 독자일 것으로 추측된다.
개인적 편견을 조금만 더 드러내보자. 나는 지젝의 작업과 그로부터 파생된 작업들을 '학문'이 아닌 '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문학비평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듯이, 지젝의 '이론' 역시 기존의 철학, 문학, 영화비평, 기타등등을 섞어놓은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버마스가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내놓은 다음 코멘트가, 지젝의 작업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주장은 철학적 토론에서 단지 약한 지주들을 발견할 뿐이다. 그것은 주로 심미적 경험들에, 더욱 자세하게 말하면 문학과 문학이론의 영역으로부터 나온 증거들에 의지한다."[14]
8.
우리가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몇 권의 책을 새삼 다시 살펴보자. 대부분이 문학비평, 영화비평, 기타 창작물에 대한 비평으로 분류될 수 있다. 문강형준과 복도훈은 모두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 분석하고, 이현우는 지젝의 현란한 대중문화 인용을 차근차근 따라간다. 이 모든 논의를 '비평'으로, 혹은 '2차 창작'으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더 이상 진지하게 토론할 필요가 없는 취향의 영역으로 넘어갈 것이다.
잔인한 말이지만 이미 그렇게 간주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갈갈이 찢어진 '진보정당'들이 각자의 곤궁을 겪고 있는 동안, 130석을 가진 거대 야당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국민들에게 냉정한 현실을 전달하고 설득하기는 커녕, 대중의 파토스에 끌려다니며 '유족들이 원하는 진짜 세월호 특별법'이라는 파랑새를 잡느라 모든 정치적 기회를 탕진해버리고 있는 실정이다. 현실에서의 정치가 이토록 지지부진한데 그 누가 '좌파 정치 이론'에 관심을 기울이겠냐는 말이다.
오히려 문강형준이 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글이 더욱 타당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는 "후쿠야마의 '역사적 종말' 테제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승리라는 샴페인을 터뜨리고 싶었던 미국 헤게모니의 다급함으로 판명"[15]되었다고 단정지었지만, 그 '역사의 종말'이라는 것은 문강형준이 긍정적인 맥락으로 길게 인용하는 바로 이 문단에 잘 표현되어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처한 국내외의 현실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세계가 말하자면 민주주의로 '가득 찼다'고,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맞서서 투쟁할 가치가 있는 폭군과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정의로운 대의大義가 전 세대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말미암아 대의를 위해 투쟁할 수 없게 될 때, 사람들은 그 대의에 맞서서 투쟁하게 되리라는 게 경험이 말해주는 바다. 사람들은 투쟁하기 위해서 투쟁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어떤 권태가 낳은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왜냐면 사람들은 투쟁 없는 세계에 사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사는 세계의 주요 부분이 평화롭고 번영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면 그들은 평화와 번영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에 대항하여 투쟁을 펼칠 것이다.[16]
민주주의에 대해 투쟁을 벌이는 자칭 민주주의자들, 자유주의에 대해 투쟁을 벌이는 자칭 자유주의자들을, 우리는 오늘날 서울 시내 도처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다. 군사 독재를 경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독재자를 칭송하고, '민주화'라는 단어를 마치 욕설처럼 사용하며, 호남 사람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혐오 발언을 내뱉으면서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보호를 요청하는 그런 청년들 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투쟁'은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미국의 종군 사진기자 제임스 폴리를 참수한 ISIS(이슬람 국가) 구성원의 신원은 23세의 영국의 랩퍼 압델-마제드 압델 바리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1백만 파운드짜리 임대 주택에 살던 중산층이었고, BBC1에 자신이 녹음한 랩이 방송된 경험이 있는, 이른바 '서구 사회'에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사는 세계의 주요 부분이 평화롭고 번영하는 자유민주주의에 의해 규정되어 있"었기에, 그는 "평화와 번영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에 대항하여 투쟁을 펼"친 것이다.
서구에서 태어나 서구식 교육을 받고 자란 이민자의 자녀들이 테러 조직에 참여하는 문제로 서방 세계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들은 정당하게 여권을 발급받은, 자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시민'이다. 그러나 외부의 적을 잃고 허깨비가 되어버린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던 그 청년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충족시켜줄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폭력이 없는 혁명의 꿈은 정확히 "혁명이 없는 혁명"의 꿈"이라는 지젝의 말에, 아마 그들은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까.
9.
우리는 '파국'이 그토록 단절적인 사건인지에 대해서부터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복도훈은 "현재=미래라는 등식뿐 아니라, 현재≠미래의 상상력의 기어변속을 감행해야 할 것"[17]이라고 독자들을 향해 주문하지만, 지금까지 검증된 바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를 가장 거칠게 단절시켜준 '혁명'은 자본주의 혁명이었고, 그로 인해 '파국'을 겪은 것은 봉건 사회였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인류의 역사를 길게 놓고 돌이켜보면, 이전과 이후 사람들의 사회나 문화 뿐 아니라 인식 체계까지 통째로 뒤흔든 진정한 '혁명'중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 뿐이었다. 인간이 출생시의 신분과 무관하게, 화폐를 통해 물건을 사고 팔 수 있고, 그렇게 얻은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고, (어떠한 기준 하에) 모든 사람들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는 발상은, 그러한 관념이 지배적인 것이 되기 이전 시대와 그 후를 본질적으로 경계짓는다.
요컨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파국'을 불러온다는 주장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자본주의가 봉건 사회에 '파국'을 불러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우리는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본주의가 봉건 사회에 가져다주는 '파국'을 가장 잘 묘사한 사람은 다름아닌 마르크스다. "영국의 인도 지배"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영국의 간섭은 방적공을 랭카셔에, 직조공을 벵골에 가져다 놓으면서 혹은 인도인 방적공과 인도인 직조공을 일소하면서, 반은 야만적이고 반은 문명적인 이 자그마한 공동체의 경제적 기초를 폭파시켜 버렸고 그리하여 이 공동체를 해체시켰다. 그리하여 영국의 간섭은 아시아 최대의, 아니 실은 아시아 유일의 사회 혁명을 만들어 내었다.[18](강조는 원문)
그러나 인도의 봉건 사회가 완전한 '파국'을 맞이하였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파괴되어 이전의 모습으로 결코 돌아올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수천년 동안 내려온 카스트 제도는 지금껏 음성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고, 특히 여성들은 성폭력을 포함한 온갖 폭력 및 살해 위험에 시달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분명 사회는 점점 더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만, 이전의 질서, 즉 봉건적 유교적 사고방식과 관습은 쉽사리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외부'를 상상하고, 언젠가 도래할지 모르는 탈 자본주의적 '파국'을 기다리며, 다양한 대중문화의 텍스트를 읽고 감상하며 인용하는 것은, 절대 무가치하거나 부질없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그것은 참여자들의 교양을 증진시키고 그들의 여가를 선용하는데 도움을 주니 말이다.
하지만 '파국'에 대한 주장을 진지하게 검토하다 보니, 과자보다 질소가 많은 국산 과자 봉투를 뜯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젝과 그의 '제자들'이 말하는 바만 놓고 보더라도, '파국'은 그 어떤 사회 문제의 해법도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와 봉건 사회의 대립을 놓고 볼 때, '파국'이 일회적이고 전면적이며 이전의 질서를 모두 쓸어버릴 것이라는 가정은 그리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심판의 날이 곧장 닥쳐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비로소 영속성 있는 조직을 꾸려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파국' 그 자체가 아니라 '파국'을 기다리는 동안 망가뜨리게 되는 것들이 더 큰 문제임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에 가겠지만 이승에서의 올바른 삶을 사는 것도,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오늘날의 진보 정치가 상실해버린 가장 중요한 실천적 영역과도 맞아떨어진다. 사람을 만나고,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고, 같이 식사를 나누면서,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견뎌낼 수 있는 조직을 이루는 것. 물론 누군가는 앞으로도 '파국'을 기다릴 테지만, 그런 이들에게 다소 폭력적으로 여겨질지라도, 이렇게 되받아치고 싶다. '나는 파국을 맞이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주--------
[1] 복도훈, <묵시록의 네 기사>(서울: 자음과모음, 2012), 18쪽.
[2]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울: 자음과모음, 2011), 195쪽, 각주 5.
[3] 전게서, 12쪽.
[4] 전게서, 13쪽.
[5] 이택광 외, <임박한 파국>(서울: 꾸리에, 2012), 8쪽.
[6] 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서울: 자음과모음, 2011), 7쪽.
[7]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울: 자음과모음, 2011), 181쪽.
[8] 슬라보예 지젝, 김서영 옮김, <시차적 관점>(서울: 마티, 2009), 746쪽.
[9] [10] 같은 곳.
[11] 전게서, 747쪽.
[12] 전게서, 748쪽.
[13] 같은 곳.
[14] 위르겐 하버마스, 이진우 옮김, <탈형이상학적 사유>, (서울: 문예출판사, 2000), 268쪽.
[15]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울: 자음과모음, 2011), 24쪽.
[16]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p.330. 문강형준, <파국의 지형학>(서울: 자음과모음, 2011), 38쪽에서 재인용.
[17] 복도훈, <묵시록의 네 기사>(서울: 자음과모음, 2012), 23쪽.
[18] 칼 마르크스, "영국의 인도 지배", <칼 맑스 프리드리히 앵겔스 저작 선집>, 2권, 416쪽.
2015-02-03
[북리뷰]왜곡된 종교 원리의 폭력적 적용
누가 무장단체를 만드는가
클라우스 슐리히테 지음·이유경 옮김 현암사·1만8000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대작 <신국론>에서 ‘국가에 정의가 없다면 그것은 무장한 강도떼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누가 무장단체를 만드는가>의 결론도 사실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의 오토 폰 게리케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고 있는 클라우스 슐리히테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하고 또 사라진 수많은 무장단체들의 사례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역작을 내놓았다.
무장단체는 국민국가의 권력에 공백이 생기거나, 적어도 그것이 크게 약화된 경우에 출현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이슬람국가’의 경우, 처음에는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 대통령과 맞서는 반군으로 출발한 조직이다. 내전으로 정부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틈을 타 수니파 무장 조직 중 일부가 세력을 키운 후 스스로를 ‘정통 이슬람 율법에 의한 칼리프 국가’로 선포해버린 것이다.
조금 안정을 얻으면 무장단체는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세금을 걷기 시작한다. 해외로부터의 원조, 마약 재배나 무기 밀매 등에만 의존하면 경제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슬람국가’ 역시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세금을 걷는다. 그들은 또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해줄 이념, 이념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럴듯한 말’을 필요로 한다. 라이베리아를 무력으로 장악했던 요미 존슨은 라이베리아의 전 부통령을 생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잡아들인 최초의 지식인이다. 나는 전투원이니 당신이 나를 도와 무장투쟁의 정치적·경제적 측면에 사상을 접목해 우리 투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194쪽)
이것은 마치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지 않나? 무장단체는 필연적으로 성장 과정에서 이념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고, 많은 구식민지 국가에서 그것은 ‘민족해방’ 등의 이름을 얻는다. ‘이슬람국가’는 종교의 깃발을 들어올리고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이슬람교의 교리를 해석하여 그것을 폭력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중이다.
앞서 나는 요미 존슨과 라이베리아 전 부통령의 만남을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에 비유했다. 이것이 다소 심한 표현 아니냐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독일인인 저자가 옛 독일연방, 즉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일으켜 세운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해 평가한 대목을 읽어보자. “유럽의 최강대국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엄밀히 말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되는 운명을 맞을 만큼 억압적 통치자였다. 그는 강제로 병사를 모집하고 이주와 정착도 강제로 시행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전망 있는 영토를 장악하고자 이웃 국가를 침략하였다.”(356쪽)
이것은 ‘문화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 역시 예전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한낱 무장단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객관적 자기 인식일 뿐이다. 다만 큰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진행 중인 국가 건설 노력에서 어떤 조직이 유럽의 부르주아에 견줄 만한 기능을 수행할지는 불분명”(376쪽)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부르주아는 국가가 민주적으로 기능하도록 압박을 가했다.”(같은 곳) 반면 ‘이슬람국가’의 지배세력들은 오히려 왜곡된 종교 원리를 강요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의 국가는, 정의로워야 한다.
<노정태 ‘논객 시대’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1261842541&code=116
클라우스 슐리히테 지음·이유경 옮김 현암사·1만8000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대작 <신국론>에서 ‘국가에 정의가 없다면 그것은 무장한 강도떼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누가 무장단체를 만드는가>의 결론도 사실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의 오토 폰 게리케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고 있는 클라우스 슐리히테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하고 또 사라진 수많은 무장단체들의 사례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역작을 내놓았다.
무장단체는 국민국가의 권력에 공백이 생기거나, 적어도 그것이 크게 약화된 경우에 출현한다. 최근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이슬람국가’의 경우, 처음에는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 대통령과 맞서는 반군으로 출발한 조직이다. 내전으로 정부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된 틈을 타 수니파 무장 조직 중 일부가 세력을 키운 후 스스로를 ‘정통 이슬람 율법에 의한 칼리프 국가’로 선포해버린 것이다.
조금 안정을 얻으면 무장단체는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세금을 걷기 시작한다. 해외로부터의 원조, 마약 재배나 무기 밀매 등에만 의존하면 경제적으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이슬람국가’ 역시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세금을 걷는다. 그들은 또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해줄 이념, 이념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럴듯한 말’을 필요로 한다. 라이베리아를 무력으로 장악했던 요미 존슨은 라이베리아의 전 부통령을 생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잡아들인 최초의 지식인이다. 나는 전투원이니 당신이 나를 도와 무장투쟁의 정치적·경제적 측면에 사상을 접목해 우리 투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194쪽)
이것은 마치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지 않나? 무장단체는 필연적으로 성장 과정에서 이념적 정당화를 필요로 하고, 많은 구식민지 국가에서 그것은 ‘민족해방’ 등의 이름을 얻는다. ‘이슬람국가’는 종교의 깃발을 들어올리고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이슬람교의 교리를 해석하여 그것을 폭력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중이다.
앞서 나는 요미 존슨과 라이베리아 전 부통령의 만남을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에 비유했다. 이것이 다소 심한 표현 아니냐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독일인인 저자가 옛 독일연방, 즉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일으켜 세운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해 평가한 대목을 읽어보자. “유럽의 최강대국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엄밀히 말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되는 운명을 맞을 만큼 억압적 통치자였다. 그는 강제로 병사를 모집하고 이주와 정착도 강제로 시행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전망 있는 영토를 장악하고자 이웃 국가를 침략하였다.”(356쪽)
이것은 ‘문화상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 역시 예전에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한낱 무장단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객관적 자기 인식일 뿐이다. 다만 큰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 진행 중인 국가 건설 노력에서 어떤 조직이 유럽의 부르주아에 견줄 만한 기능을 수행할지는 불분명”(376쪽)하다는 것이다.
“유럽의 부르주아는 국가가 민주적으로 기능하도록 압박을 가했다.”(같은 곳) 반면 ‘이슬람국가’의 지배세력들은 오히려 왜곡된 종교 원리를 강요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의 국가는, 정의로워야 한다.
<노정태 ‘논객 시대’저자/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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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5
[별별시선]네 최고 존엄에 침을 뱉으마
“내 좋은 친구인 가스파리 박사가 만약 내 어머니를 욕한다면, 그는 주먹질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여러분은 도발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모욕하거나 희화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발언이다. 테러에는 반대하지만 신앙심 역시 존중받아야 하므로, 표현의 자유가 한발 물러서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우리는 이와 같은 의견을 숱하게 접할 수 있었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그들이 테러범이 되도록 만든 구조적 문제가 있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타인의 종교를 모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악의 씨앗을 뿌린 서구 제국주의가 더 나쁘다 등등….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으로 시작하는 이러한 주장들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표현의 자유가 갖는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 첫 번째이다. 이것을 ‘가치 상대론’이라고 하자.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타인이 소중히 하는 무언가를 침해할 경우, 물론 그래도 테러는 나쁘지만, 이른바 ‘원인 제공자’ 역시 비난을 피할 수 없다는 입장이 두 번째일 것이다. 이것을 ‘도발론’이라고 불러보자.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 근거는 함께 작동한다. 앞서 인용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부터가 그렇다. 나의 것이건 타인의 것이건 신앙심은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소중하므로, 그것을 함부로 모욕하는 것은 ‘주먹질’을 불러오는 도발 행위가 된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발생 직후 주요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이 내놓은 성명도 이와 대동소이했다.
이슬람교는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결코 성전으로 부르지 않으며 용납하지 않지만, 종교와 신앙에 대한 도발은 나쁜 행동이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결국은 ‘도발론’으로 향하는 셈이 된다.
종교 지도자가 아닌 사람들이 내놓은 발언들도 같은 틀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신앙심 대신 종교의 자유 혹은 서구 사회의 소수자로서 탄압받지 않을 자유가 ‘가치 상대론’의 저울 위에 올라 표현의 자유와 비교 대상이 된다.
‘도발론’의 경우도 그렇다.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부터 시작해, 값싼 이주노동자를 얻기 위해 문화적 차이가 큰 무슬림들에게 취업 비자를 쉽사리 내주었던 서유럽 국가들의 역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극우적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극우 정당이 모두 ‘원인 제공자’로 간주되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도, 여타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서 제한될 수 있다. 충돌이 발생했을 때 사실관계를 충분히 따져보지 않고 일방의 책임으로만 몰아붙이는 것 역시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두고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든가, ‘종교적 심성을 도발하지 말라’ 같은 말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광경을 보면, 섬뜩하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명백히 퇴행하고 있다는 징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내 어머니를 욕하면 주먹질을 각오하라”고 농담처럼 말할 수 있었지만, 불과 500여년 전의 프랑스인들은 바로 그런 이유를 들먹이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벌였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역시 마찬가지다. 테러범들은 명백히 그들이 믿는 신과 그 신의 말씀을 가져다준 예언자의 이름을 외치며 범행을 저질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에게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는 한국의 ‘샤를리 에브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학살 앞에서 애써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장막 너머의 신성한 권력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이만큼의 시민적 권리를 발견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수많은 선각자들이 많은 것을 바쳐오지 않았던가.
‘신성불가침의 최고 존엄’과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인류 진보의 역사는 종교와 신앙과 권위를 조롱하는 자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온 역사다. 그 희생과 헌신을 배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도 샤를리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1252105075&code=990100&s_code=ao122
지난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발언이다. 테러에는 반대하지만 신앙심 역시 존중받아야 하므로, 표현의 자유가 한발 물러서야 한다는 뜻이다.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우리는 이와 같은 의견을 숱하게 접할 수 있었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그들이 테러범이 되도록 만든 구조적 문제가 있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타인의 종교를 모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 악의 씨앗을 뿌린 서구 제국주의가 더 나쁘다 등등….
‘물론 테러는 나쁘지만’으로 시작하는 이러한 주장들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표현의 자유가 갖는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그 가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 첫 번째이다. 이것을 ‘가치 상대론’이라고 하자.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타인이 소중히 하는 무언가를 침해할 경우, 물론 그래도 테러는 나쁘지만, 이른바 ‘원인 제공자’ 역시 비난을 피할 수 없다는 입장이 두 번째일 것이다. 이것을 ‘도발론’이라고 불러보자.
대부분의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 근거는 함께 작동한다. 앞서 인용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부터가 그렇다. 나의 것이건 타인의 것이건 신앙심은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소중하므로, 그것을 함부로 모욕하는 것은 ‘주먹질’을 불러오는 도발 행위가 된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발생 직후 주요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이 내놓은 성명도 이와 대동소이했다.
이슬람교는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결코 성전으로 부르지 않으며 용납하지 않지만, 종교와 신앙에 대한 도발은 나쁜 행동이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결국은 ‘도발론’으로 향하는 셈이 된다.
종교 지도자가 아닌 사람들이 내놓은 발언들도 같은 틀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신앙심 대신 종교의 자유 혹은 서구 사회의 소수자로서 탄압받지 않을 자유가 ‘가치 상대론’의 저울 위에 올라 표현의 자유와 비교 대상이 된다.
‘도발론’의 경우도 그렇다.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부터 시작해, 값싼 이주노동자를 얻기 위해 문화적 차이가 큰 무슬림들에게 취업 비자를 쉽사리 내주었던 서유럽 국가들의 역사,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극우적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극우 정당이 모두 ‘원인 제공자’로 간주되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도, 여타 기본권과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서 제한될 수 있다. 충돌이 발생했을 때 사실관계를 충분히 따져보지 않고 일방의 책임으로만 몰아붙이는 것 역시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두고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든가, ‘종교적 심성을 도발하지 말라’ 같은 말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광경을 보면, 섬뜩하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명백히 퇴행하고 있다는 징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내 어머니를 욕하면 주먹질을 각오하라”고 농담처럼 말할 수 있었지만, 불과 500여년 전의 프랑스인들은 바로 그런 이유를 들먹이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벌였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역시 마찬가지다. 테러범들은 명백히 그들이 믿는 신과 그 신의 말씀을 가져다준 예언자의 이름을 외치며 범행을 저질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에게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는 한국의 ‘샤를리 에브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학살 앞에서 애써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장막 너머의 신성한 권력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이만큼의 시민적 권리를 발견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수많은 선각자들이 많은 것을 바쳐오지 않았던가.
‘신성불가침의 최고 존엄’과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불편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인류 진보의 역사는 종교와 신앙과 권위를 조롱하는 자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온 역사다. 그 희생과 헌신을 배신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도 샤를리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1252105075&code=990100&s_code=ao122
2015-01-20
[북리뷰]대중문화 ‘돌아온 과거’ 열풍
레트로 마니아
사이먼 레이놀즈 지음·최성민 옮김·작업실유령·1만8000원
복고가 대세다. 영화 <국제시장>이 새해 첫 1000만 관객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모습을 마뜩찮게 여기는 젊은이들조차 MBC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90년대 가요 특집, 이른바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를 보며 어깨춤을 추고 추억에 젖는다.
과거의 전성시대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특히 그렇다. 런던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대중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널즈는 그러한 오늘날을 “바야흐로 팝이 레트로에 환장하고 기념행사에 열광하는 시대”(11쪽)라고 말한다. “2000년대는 맹렬한 재활용 시대이기도 했다. 흘러간 장르는 재탕 또는 재해석됐고, 빈티지 음원은 재처리되거나 재조합됐다. 젊은 밴드의 팽팽한 피부와 상기된 볼 뒤에는 그윽하게 늙은 아이디어의 회색 살이 있었다.”(12쪽)
이 책 <레트로 마니아>는 바로 그런 시대의 대중음악을 포괄적으로 조망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수많은 고유명사들이 문자 그대로 비처럼 쏟아지는데, 나처럼 서구 대중음악에 그다지 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익숙하지만 많은 경우 낯선 이름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레트로 마니아>를 읽는 일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저자 스스로도 직감하고 있다시피 ‘레트로 열풍’은 대중음악에만 국한되는 일도 아니며, 동시에 영미권에만 해당되는 사항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몇 년 전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아파트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길거리 풍경이 내가 태어난 1963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물론 자동차 디자인은 조금 달라졌지만, 우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아니라 연소기관으로 달리는 지상 운송수단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믿음직스러운 주차요금 계량기에서부터 튼튼한 청색 우체통과 상징적인 노랑 택시에 이르기까지, 21세기 맨해튼은 우울하리만치 비미래적이었다.”(349쪽)
20세기의 후반, 인류는 달 탐사를 넘어 미지의 우주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대중문화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미래’를 개척하고 있었다. 저자는 20세기의 팝 음악이 “전자 장치를 통해 소리 공간을 탐구”(376쪽)했으며, 그것은 저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가던 모험정신과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도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화성 너머로 나아갈 것을 꿈꾸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대중문화 역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트로 문화도 결국은 기울어 무너지는 서구의 또 다른 얼굴일 테다.”(376쪽)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90년대의 ‘신세대’들은 당시의 ‘구세대’들을 위한 영화인 <국제시장>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추억을 곱씹는 문화상품 앞에서 여지없이 향수에 젖어든다. 현재 한국 정치는 1930년대에 태어난 노인들이 쥐락펴락하고 있고, 그에 맞서는 것은 이제 은퇴 연령을 향해 달려가는 1960년대생들이다. ‘미래’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청춘’들은 이전처럼 기성세대와 대립하기는커녕, 당장 오늘 내일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미래’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돌아온 과거’들이 꽉 채우는 것은 비단 대중문화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어떻게 ‘현재’를 지켜내고, 최소한의 활기를 잃지 않으며, ‘미래’를 창출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노정태 ‘논객 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1121517511&code=116
사이먼 레이놀즈 지음·최성민 옮김·작업실유령·1만8000원
복고가 대세다. 영화 <국제시장>이 새해 첫 1000만 관객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모습을 마뜩찮게 여기는 젊은이들조차 MBC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90년대 가요 특집, 이른바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를 보며 어깨춤을 추고 추억에 젖는다.
과거의 전성시대다.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특히 그렇다. 런던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대중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널즈는 그러한 오늘날을 “바야흐로 팝이 레트로에 환장하고 기념행사에 열광하는 시대”(11쪽)라고 말한다. “2000년대는 맹렬한 재활용 시대이기도 했다. 흘러간 장르는 재탕 또는 재해석됐고, 빈티지 음원은 재처리되거나 재조합됐다. 젊은 밴드의 팽팽한 피부와 상기된 볼 뒤에는 그윽하게 늙은 아이디어의 회색 살이 있었다.”(12쪽)
이 책 <레트로 마니아>는 바로 그런 시대의 대중음악을 포괄적으로 조망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수많은 고유명사들이 문자 그대로 비처럼 쏟아지는데, 나처럼 서구 대중음악에 그다지 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익숙하지만 많은 경우 낯선 이름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레트로 마니아>를 읽는 일을 주저할 필요는 없다. 저자 스스로도 직감하고 있다시피 ‘레트로 열풍’은 대중음악에만 국한되는 일도 아니며, 동시에 영미권에만 해당되는 사항도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몇 년 전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아파트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길거리 풍경이 내가 태어난 1963년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물론 자동차 디자인은 조금 달라졌지만, 우리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아니라 연소기관으로 달리는 지상 운송수단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믿음직스러운 주차요금 계량기에서부터 튼튼한 청색 우체통과 상징적인 노랑 택시에 이르기까지, 21세기 맨해튼은 우울하리만치 비미래적이었다.”(349쪽)
20세기의 후반, 인류는 달 탐사를 넘어 미지의 우주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대중문화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미래’를 개척하고 있었다. 저자는 20세기의 팝 음악이 “전자 장치를 통해 소리 공간을 탐구”(376쪽)했으며, 그것은 저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가던 모험정신과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도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화성 너머로 나아갈 것을 꿈꾸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대중문화 역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트로 문화도 결국은 기울어 무너지는 서구의 또 다른 얼굴일 테다.”(376쪽)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90년대의 ‘신세대’들은 당시의 ‘구세대’들을 위한 영화인 <국제시장>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추억을 곱씹는 문화상품 앞에서 여지없이 향수에 젖어든다. 현재 한국 정치는 1930년대에 태어난 노인들이 쥐락펴락하고 있고, 그에 맞서는 것은 이제 은퇴 연령을 향해 달려가는 1960년대생들이다. ‘미래’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 ‘청춘’들은 이전처럼 기성세대와 대립하기는커녕, 당장 오늘 내일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미래’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돌아온 과거’들이 꽉 채우는 것은 비단 대중문화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어떻게 ‘현재’를 지켜내고, 최소한의 활기를 잃지 않으며, ‘미래’를 창출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노정태 ‘논객 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1121517511&code=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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