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길, 4만원.
한국 사회의 경우, 20세기와 21세기의 가장 큰 경계선은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에서 나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북한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아 온 국민을 윽박지르던 시절, '자본주의'는 곧 '반공주의'였고, 따라서 실제로는 어떤 식으로도 정의되지 않고 있었다.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나니 순식간에, 21세기 초 인기를 끌었던 한 광고의 유명한 대사처럼,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으로 쓰이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시점에, 한국의 담론계는 '신자유주의'라는 허상만을 쫓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위험 떠넘기기, 임금 착취하기, 투자금 떼어먹기 등 온갖 비윤리적 탐욕을 정상 상태로 용인하는 그런 사회에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들 이렇게 말한다. 이게 자본주의라고.
"자본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개념 규정은 이미 육아실에서 배우는 문화사 수준에서 영원히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무제한적으로 영리를 탐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러한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16쪽)
앞서 인용한 문단에서 저자가 직접 강조하고 있다시피, 자본주의는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탐욕에 그 토대를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탐욕을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자본주의의 성립과 존속이 판가름난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 부를 누리는 게 목표라면, 경제 주체는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 복잡한 회계를 동원해서 그 부를 투명하게 관리해야 할 이유도 줄어든다. 마치 오늘날 한국 기업들의 '오너' 일가들이 하는 것처럼, 자산을 대대손손 물려줄 궁리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게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버는 것. 그래서 그 번 돈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 막스 베버는 되묻는다. 그러한 탐욕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고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했는데, 왜 자본주의는 오직 서구에서만 싹틀 수 있었냐고 말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색하는 책이다.
"자본주의적 기업의 근대적인 합리적 조직은 다음 두 가지 발전 요소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 오늘날의 경제적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가계와 기업의 분리가 그 한 요소이며, 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합리적 부기가 다른 한 요소이다."(21쪽)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20세기 초에 사망한 막스 베버의 눈으로 볼 때, 전체 지분의 몇 퍼센트를 간신히 소유하는 '오너 일가'가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결코 "근대적인 합리적 조직"이 아니다. 가계와 기업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합리적 부기에 따른 투명한 회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자본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념의 시대가 지나고 나니, 그 후에는 '자본주의라도 제대로 하자'는 자조 어린 태도가 한 시절을 풍미하기도 했다. 그 후로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대한민국의 공론장은 아예 작동을 멈추었고, 이제는 남자들이 우르르 나와 낄낄거리고 소리치는 팟캐스트가 '대세'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 '극복'도 못 하고,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의 논의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일단 이 책부터 읽기 시작해야 한다.
2016.07.19ㅣ주간경향 118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