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1

'불쌍한 괴물' 20대, 본인이 자초한 것? '박정희' 부모 세대의 유산?!

'불쌍한 괴물' 20대, 본인이 자초한 것? '박정희' 부모 세대의 유산?!

[세대론의 다음 단계]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노정태 자유기고가  |  2014.01.24. 18:52:39

1.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말이야'라고 누군가 당신에게 말을 꺼낸다고 쳐보자. 이럴 경우, 대부분 그 '친구 이야기'란 말하는 사람 본인의 사례일 가능성이 크다. 그거 실은 네 이야기 아니냐고 캐물었을 때, 절대 아니라고 딱 잡아떼면 더 의심스러워질 뿐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누구냐고, 네 친구 중에 내가 모르는 친구도 있냐고까지 묻기 시작하면 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렇다. 우리는 개인정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약한 존재들이기에,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는 일마저도, 때로는 버거워한다.

〈애완의 시대〉(이승욱·김은산 지음, 문학동네 펴냄)에 대한 서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이 책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펴냄)와 함께 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근거는 전혀 없었다. 당시 내가 두 책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제목과 저자 이름 정도였으니까. 혹은 간간히 트위터를 통해 들려오는 독자들의 단편적인 반응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튼 나는 어느 정도의 위험을 무릅쓴 채(막상 책을 읽었더니 두 책의 거리가 너무 멀거나 하면 곤란하다), 서평을 준비하기 위해 독서에 들어갔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해보자.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는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갖추고 있으며, 오늘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자 시도한 좋은 책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과 단점 너머에서 이 책들은 한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말이야'라면서 말을 꺼내는 바로 그런 화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책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오늘날의 20대, 혹은 대학생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2.

〈애완의 시대〉의 저자인 이승옥과 김은산은 프롤로그에서 "'대물림'에 관해 말하고 싶었"(프롤로그, 〈애완의 시대〉)다고 자신들의 의도를 밝힌다. "한국의 부모가 한국의 아들딸에게 물려준 것, 그리고 또 그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바라보고자 했"(같은 곳)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세대를 호명하고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세대들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지어서 분석적으로 파헤치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 세대들 사이에서 대물림되어가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책 표지에 적혀있는 바와 같이, "길들여진 어른들의 나라"에서,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대물림되고 있는 것인가? 대물림되어 내려온 무언가를 최종적으로 짊어지고 있을 젊은이들, 특히 대학교 졸업 및 취직을 앞두고 있거나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이대의 청년들을 저자들은 우선 살펴본다.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이른바 에코 세대(베이비부머의 자녀)"(16쪽, 〈애완의 시대〉)에게 청진기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들 중 특히 젊은 남성에게서 엿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삶의 중요한 가능성조차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본 후 끝내버린다는 것이다."(같은 곳)

한편 스스로를 '유리 멘탈'이라고 부르는 젊은 여성들이 있다.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분노와 죄책감에 휩싸여, 평생에 걸쳐 정서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입장에만 서는 그 여성들 또한, "모두 베이비붐 세대인 부모 밑에서 자란, 서른 살에서 두어 살 많거나 적은, 이른바 에코 세대다."(36쪽) 이 '유리 멘탈'의 따님들에게, 어머니들은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차별과 고통을 안겨주고, 그리하여 대물림의 역사는 이어진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1장이 끝난 후,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린 우리의 아이들을 성장시킬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는 대리인, 애완견으로 남게 할 것인가. 그들이 성장하기 위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나? 공동체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이것이 애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이다. (71쪽)


3.

그러나 〈애완의 시대〉는 이 책에서 말하는 바 '에코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 않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386, 혹은 486을 중심에 놓고 한국 사회를 읽어내는 책도 아니다.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애완의 시대〉에서 '에코 세대'를 논하는 1장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세 장은 모두 베이비부머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대물림'을 받는 '에코 세대'보다는, '대물림'을 전해주는 위치가 된 베이비부머에게 훨씬 더 큰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분량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저자는 '에코 세대'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고 있지도 않다. 물론 그들에게 만화 〈미생〉의 장그래를 본받아 자신만의 직감으로 세상과 맞서보라는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결국 질문의 형식은 "우린 우리의 아이들을 성장시킬 의지가 있는가"로 돌아온다.

요컨대 〈애완의 시대〉는 '에코 세대'와 베이비부머 사이에서 벌어지는 고통의 대물림을 다루고 있지만, 그 문제 해결의 열쇠는 베이비부머가 쥐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인 셈이다. 혹은, 이 책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청년들을 향해 '애완견이여, 네 목줄을 끊어라!'고 외치는 '뜨거운' 책이 아닌 것이다.

대신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좁은 의미에서의 베이비부머를 벗어나, 박정희가 독재자로 돌변하여 경제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아버지' 행세를 했던 1970년대를 거쳐 간 거의 모든 기성세대를 자신의 독자로 소환한다. 물론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르는 오늘날의 486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언급을 내놓지만, 자신이 본격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의 폭을 함부로 좁히지는 않는다. 부모 세대, 50대와 60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부르며, 저자는 정신과 의사처럼 혹은 정신과 의사로서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베이비부머는 퇴행해버렸다고 말이다.

2012년의 베이비부머는 왜 퇴행할 수밖에 없었을까? 어떤 '과잉'이, 아니 어떤 '결핍'이 그 시절로 퇴행하게 만든 것일까? 그 시절에 넘치던 것은 '잘 살아보세'였고, 씨가 마른 것은 민주주의였다. 가장 센 놈이던 박정희, 그 센 놈이 다시 21세기의 기아를 경험하는 우리를 다시 잘살아볼 수 있게 해주리라고 믿었으리라. (178쪽, 같은 책)

이러한 '의학적' 진단은, 결국 2012년 대선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40대 후반을 포함한) 베이비부머가 주도한 퇴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같은 곳)이라고 저자들은 말하고 있다. 〈애완의 시대〉가 이른바 '20대 문제'를 다루는 다른 책들과 사뭇 다른 어조를 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의 분석의 초점과 비난의 화살은 바로 그 20~30대의 부모 세대인 베이비부머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든 비유를 끌어오자면, 〈애완의 시대〉는 '이건 내 친구가 겪었던 일인데'로 시작하여, '그러니까 나 이제 마음 똑바로 잡고 살아보려고'로 끝나는, 신세한탄이자 반성문인 셈이다.

4.

20대의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실은 베이비부머의 '퇴행'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 〈애완의 시대〉와 달리,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는 스스로가 20대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례들은 대다수 내 강의에서 토론하고 논쟁하는 가운데 특히 학생들의 공감을 많이 받았던 사안들"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의 연구가 아니라 '이십대들 스스로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7쪽)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20대는 그렇다면 (저자의 입을 빌어)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 주제가 잘 요약되어 있는 문단을 인용해보자.

내가 이들에게서 발견한 또 다른 반쪽은 암울하기 그지없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더 암울하게 변해버린 이십대, 다소 과격하게 말하자면 괴물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이십대이다.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란 얘기다. (5쪽,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일 수 있다. 즉, '우리 20대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그 20대는 어떤 차별에 어떻게 찬성하고 있는가? 언론 서평 등을 통해 많이 인용되었던 에피소드가 책의 가장 앞부분에 등장한다.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들이 계약된 2년을 채운 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였고 사측은 거절했다. 그리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는데, 이 사례를 들은 "경영학과 4학년 학생 K(당시 나이 27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답했던"(17쪽) 바로 그 사례 말이다.

다른 학생들이 K를 '수구꼴통'으로 몰아갈까봐 걱정했지만, 도리어 술렁거리며 K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20대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미 이 책에도 나와 있다시피, 애초에 사측은 2년간의 비정규직 고용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20대가 '괴물'이 되었다고 경악하기에 앞서, '바보'가 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이 순서에 부합하는 일 아닐까? 계약을 지키지 않는 회사를 탓하는 것이 먼저지, 그 계약을 이행하라고 주장하는 노동자들을 탓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논점을, 적어도 책의 지면 속에서는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 그 강의실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인성의 문제라기보다 지능의 문제다. 한 사람의 교육자라면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충격과 경악에 빠지더라도, 자신의 '멘탈'을 관리하며 학생들의 부족한 지식을 채워주는 것이 온당할 처사일 터이다.

그러나 오찬호는 당시의 토론 수업을 "노동자들이 그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혹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의 위반에 맞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벌이는 파업에 "도둑놈 심보"와 같은 단어가 붙는 게 과연 타당한가 하는 논쟁"(20쪽, 같은 책)이라고 요약한다. 그리하여 결국, 계약을 지키지 않는 쪽을 먼저 탓해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 문제가, 정규직 자리 날로 먹으려 한다고 비난하는 20대의 '인간성' 문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 토론 수업에서 20대가 '괴물'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싶다면 토론 진행자인 오찬호의 질문이 훨씬 더 정교해져야 한다. 가령 '그렇다면 회사는 비정규직을 뽑을 때에는 2년 근무 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그것을 나중에 안 지켜도 되는 것인가?'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K라는 돌대가리 복학생이 '그렇다, 시험을 안 봤으면 무조건 비정규직이다'라고 우긴다고 해보자. 그 경우 교육자라면, '그렇다면 회사는 정규직 사원의 월급을 2년 후에 올려주겠다는 약속도 안 지킬 수 있는가?'라든가, '2년간 KTX 승무원으로 근무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기간 동안 도서관에 앉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취업준비생 중, 누가 더 KTX 정규직 승무원으로서 일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등의 소크라테스적 문답을 통해 학생의 무지를 깨우쳐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종류의 질문에도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 학생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시장주의자, 아니 '사장주의자'일 것이다. 이쯤 되면 인간의 본성, 혹은 가치관의 문제이며,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로서 '괴물'이라고 불려도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인류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그 어떤 정의의 원칙보다, 시험 봐서 점수 따고 그에 맞춰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존재일 테니 말이다.

5.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등장하는 사례가 부족해서, 혹은 그에 대표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사례들을 저자가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인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책이다. 가령 오찬호는 고려대학교에 다니지만 자신의 학벌을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학교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는 '승원이'라는 학생의 사례를 들며,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그런데 승원이의 이런 자제심에 감춰진 속내는 은근한 우월감이다. '너희들 안 부끄럽게 내가 대학 이름 안 말할게'라는. 그 배려의 기저에는 '무시'라는 감정이 당당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114쪽, 같은 책)

헌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소설가 공지영이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에서 한 표현을 빌리자면, 80년대 학생들은 "연·고대라는 타이틀로 사람이 평가받는 것이 싫어서 그 뱃지를 한강물에 던져버리고자 했고" 지금은 이를 노골적으로 유지하려 한다."(150쪽, 같은 책) 80년대 대학생이 뱃지를 한강물에 던져버리는 그 자의식이야말로, "은근한 우월감" 뿐 아니라, 저자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연·고대생, 연·고대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보장되는 것이 워낙 많았"던, '실질적 우월감'에 바탕한 행동 아닐까?

앞서 우리가 검토해본, 어떤 실패한 토론 수업 이야기가 지나가고 나면, 요즘 대학생들의 학교 차별 문제가 주요 소재로 부상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을 봤고, 그렇게 얻은 성적표로 얻어낸 학교의 학벌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뿌듯한 나머지, 그것으로 남을 평가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길 뿐 아니라, 마치 공작새가 깃털을 뽐내듯 '과잠'을 입고 돌아다니게 된다고 오찬호는 주장한다.

단체로 돈 내서 맞춘 학교 과 점퍼라면, 일종의 교복 역할을 해서, 소득이 낮은 학생일수록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옷이 된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저자가 '옛날의 학벌주의'와 '지금의 학벌주의'를 굳이 분류하여, 후자를 비판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전자에 막연한 긍정적 뉘앙스를 덧붙이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준다는 데 있다.

공지영 소설에 나오는 80년대 대학생과, 오찬호가 만나본 2000년대 대학생은, 모두 은근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오직 후자만을 비판한다. 요즘의 학벌주의는 "동문들끼리 끈끈한 정이 부활해서도, 구성원들끼리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도 아니다. 동문들이 서로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과거의 '학벌' 행태와도 결이 완전히 다르다"(162쪽, 같은 책)고 그는 단언한다. "과거엔 학벌이란 말에 약간의 공동체적 측면이 있었지만, 바로 그 점에서 학력위계주의는 약간 궤를 달리한다"(167쪽)는 말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대학 정원도 적었고, 같은 과 학생이라면 모두 얼굴을 알고 생활을 함께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좁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사이니만큼 당연히, 좋건 싫건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반면 지금의 대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한 학과 내에서도 몇 반 몇 조 같은 식으로 단위를 쪼개야 겨우 얼굴을 익힐 수 있을만한 숫자가 된다. 그나마도 한 두 해 지나면 전공이 결정되며 헤어질 운명이다. 학내 동아리 등은 모두 파탄이 났거나, '운동권 냄새'가 나서 선뜻 택하기 어렵다. '학내 사회'가 사라진 상태에서, 대학생들이 '대학의 이름'에 더욱 집착하는 것은, 어쨌건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모든 문제는 최근의 것이요, 과거에는 문제가 있었어도 이렇지 않았다는 선입견이 이 책을 지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입학한지 6년이 지났어도 "저 친구와는 수능점수 차이가 상당하다"(156쪽, 같은 책)는 식으로 말하는 '석준이'라는 학생의 사례를 들며 오찬호는 '괴물이 된 요즘 대학생'을 성토하지만, 입학한지 30년이 지났어도 학력고사 점수와 전국 석차를 외우고 있는 사례도 존재하는 것이다. 대학의 학벌주의가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1980년대, 서울대 외교학과 82학번 강철 김영환 씨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학력고사 점수 기억하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던 것이다. "340점 만점에 318점. 문제가 어렵게 나왔다. 문이과 합쳐서 전국 25등."([심층인터뷰] “북한서 민중봉기 일으키겠다 내 방식 주체사상 포기 안 해”, 〈신동아〉, 2012년 9월 25일)

6.

나는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가 모두, 20대 혹은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등 젊은이들의 문제를 통해, 결국 저자 자신 혹은 그가 속한 세대의 문제를 실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 서평을 시작했다.

〈애완의 시대〉의 경우 그 점을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베이비부머를 향해 저자들은 '정신 속의 아버지'인 박정희를 떠나보내라고, 자식뻘 되는 '에코 세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놓아주라고, 간곡한 어조로 호소한다.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다음 문단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만약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면 그때는 언제일까? 혹자는 거슬러 거슬러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나 광복 전후의 혼란기 또는 남북 분단이나 6·25 전쟁을 그 시기로 거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주체가 누구인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 시기는 아마도 1970년대와 IMF 때일 것이다. (232쪽, 〈애완의 시대〉, 강조는 인용자)

1970년대의 경제성장에서 '산업역군'으로, 혹은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자식들 낳고 어느 정도 키웠다 싶을 무렵 IMF를 맞은 후, 이후 20여 년간 급격히 '다시 가난'해져버린 한국 사회를 보고 '멘붕'하여 '퇴행'하는 베이비부머들에게, 〈애완의 시대〉의 저자는 '당신이야말로 오늘날의 문제를 바로잡을 주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970년대 박정희 시대의 실패를, 박정희가 갑자기 죽어버리며서 비판받지도 않고 성역에 올라버렸다는 그 사실을 비판하고 곱씹으며, IMF 이후 급격히 각박해진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저자들은 베이비부머를 향해 호소한다.

반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좀 더 깊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의 저자 오찬호는 자신이 '20대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는 것을, 사실상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20대 문제'로 어떻게든 못 박으려 한다. 이것은 다소 까다로운 논의가 될 것이므로 길게 인용해보자.

사실 지방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문제 삼는 것은 쉽지 않다. "인서울 대학 학생과 지방대 학생 간에 역량 차이,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누구라도 되물을 듯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차별은 해서는 안 되지만 차이는 있다'는 식으로 대학교의 역량차를 인정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어떤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오십대 경영자나 기업의 사십대 인사담당관은 대학서열과 업무 능력의 객관적 차이를 나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설명할지도 모른다. 물론 업무 능력에 한정된 것이지만, 어쨌든 학교별 차이에 대한 어떤 경험이 분명히 존재해서 (그것이 편견이든 아니든) 나름의 근거를 갖는 이야기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직생활을 하는 보통의 삼사십대 직장인이라면 어떤 업무를 수행할 때 높은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 많다는 것을 경험하고서,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학 출신들을 낮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누군가의 경험들이 이십대에겐 처음부터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전해진다. 쉽게 말해, 이십대들이 대학교의 위계화된 질서를 받아들이는 이유에는 어떤 특정한 자신만의 직접적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 기성세대의 '살아보니까, 그렇더라!'는 식의 평가를 그저 수용하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거꾸로 보자면, 이제 고작 고교를 졸업한 이십대 대학생들이 '별로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 셈인데 말이다. (116쪽,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강조는 인용자)

'그럼 충분히 살아본 사람이 학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괜찮다는 말이냐'는 식으로 말꼬리를 잡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하다. 왜냐하면, 일부러 운동권에 투신하거나 하지 않았던 이상, '좋았던 시절'에 '인 서울' 졸업한 후 대기업의 관리직 등으로 입사한 사람이라면, 그가 '전문대 출신'을 만나서 뭘 해보고 어쩌고 했을 경험의 폭이 그렇게까지 넓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사람의 경험이라는 것을 살아온 시간과 삶의 범위를 곱해서 나오는 면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취업하기 전부터 치열하게 '스펙 다툼'을 하면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이력서에 넣기 위해 공모전도 넣고 하는 요즘 대학생들이야말로 더욱 경험의 폭이 넓을 수도 있다.

시대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리고 학벌 등 제반 사회 신분적 조건이 더 '좋아질'수록, 그보다 더 '나쁜' 환경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늘날의 20대, "이제 고작 고교를 졸업한 이십대 대학생들"이 별로 경험한 게 없을 것이라고 단정짓는 오찬호의 화법은, 아주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그저 '꼰대질'이라고 비난받지 않을 여지가 별로 없다.

단 한 번의 시험, 혹은 그 시험 이후 몇 차례의 시험을 더 거쳐, 만나는 사람들의 폭을 좁혀가며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문화적, 제도적 전통이다. 별로 겪어본 것도 없는, 고작 수능 한 번 봤을 뿐인 학생 여러분이 '지방대'를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오찬호가 비난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학력을 통한 인간 차별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상식'임을 거꾸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우리'는, 이 책의 소재가 되는 20대라기보다는, 맞아 맞아 20대가 다 그렇지 뭐,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 책의 잠재 독자층 전부가 아닐까.

7.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모두, 저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결국 외환위기 이후 아노미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준다. 역사의 큰 목표가 사라지고, 더 이상 기업과 국가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은 이미 산산조각 나버린 상태다.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펴냄) 이후 그토록 많은 책이 나와서 20대에 대해 이런 저런 분석을 내놓고 해답을 제시하며 '힐링'까지 해준 것은 바로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아직 사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청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자화상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깔려있었을 수도 있겠다. 20대를 향해 '싸우라'고 외치는 과거의 386은 결국 자신이 싸우고 싶었던 것일 테며,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고 내뱉던 이는 본인이 깊은 절망에 빠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애완의 시대〉는 주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어낸 작품이다. 젊은이들의 고난이 기성세대로부터 비롯하였다고, '대물림'되었다고 인정할만한 용기를, 이제서야 비로소 한국의 기성 세대들이 꺼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1970년대의 고통이 어떻게 IMF의 고통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분석 등에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젊은이들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그 말을 하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라는 당연한 진실을 인정하는 책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30대가 된 오늘날까지 종종 '20대 논객'으로 불리는 내 입장에서는 특히 흡족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다. 모든 차별적 구조는 그 참여자를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상황'으로 몰아간다. 대한민국이 능력주의에 중독되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공정한 시험의 판타지에 기대 차별을 정당화하는 그런 사회라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것은 20대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20대 또한 '순결한 피해자'가 아님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화자가 얼마나 명료한 자기 인식을 보여주는가는 별도로 판단되어야 할 문제인데,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그 지점에서 실망스러운 면을 여러 차례 노출하고 있다.

20대가 됐건 30대가 됐건 386 세대가 됐건, 특정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삼아 분석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조롱하기도 하는 그런 책은, 앞으로도 많이 나와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작업을 통해, 그 집단을 포함하고 있는 한국 사회 전체가 얼마나 제대로 드러날 수 있는가, 그 과정 또한 저자의 또렷한 자기 인식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가일 것이다.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함께 읽는 것은, 그런 면에서 더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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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북스에 실렸던 서평입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3127

2020-06-29

믿어라, MBTI가 아니라 너 자신을

검색창에 '심리테스트'라고 입력하면 수없이 많은 결과가 쏟아진다. 대부분 간단한 퀴즈와 오늘의 운세 같은 내용을 조합해놓은 심심풀이용 아이템이다. 하지만 종종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근본적인 고민에 답을 주겠노라는 것들도 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MBTI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다.

독자들 중 상당수는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그 검사를 해보았을 것이다. INTP니 ENFJ니, 또는 논리적인 사색가니, 모험을 즐기는 사업가니 하는 결과를 내놓는 바로 그것 말이다. 그건 단순한 인터넷 퀴즈가 아니다. 미국의 인터넷 매체 <Vox>의 보도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매년 200만명 가량이 회사 인사과, 대학, 정부 기관 등을 통해 MBTI 검사를 받고 있다. 테스트의 저작권자인 CPP사는 매년 그 2천만 달러 이상의 검사 비용을 벌어들인다. 말하자면 거대한 '심리테스트 산업'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대체 왜 사람들은 이렇게 심리테스트를 좋아하는 걸까? 곰곰히 따져보면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심리테스트를 풀고 있을 때만큼은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없이 중요하고 심각한 고민이다. 하지만 남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은 몹시 피곤한 고역이다. 비싼 돈을 주고 예약을 해야 누울 수 있는 심리상담사의 안락의자에서나 털어놓을 수 있다. 나 혼자만 관심 있을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러니 클릭 몇 번으로 '나'의 마음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는 말에 우리는 쉽게 유혹을 느낀다. 그 결과를 SNS에 공유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엇비슷한 심리테스트를 찾아 클릭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삶을 원한다면 MBTI를 포함해 거의 모든 심리테스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융의 분석심리학과 신화론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은 그의 스승인 프로이트처럼 정신의학자였다. 히스테리나 발작 등 병적 현상의 원인이 정신적인 것에 있을 수 있다는 발상 하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으로 억눌린 성적 억압을 해소함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융은 사람이 속한 문화 내의 집단무의식이 존재한다는 발상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집단무의식은 문화권 내에서 일종의 '원형'을 이루며, 개인은 그 '원형'을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등 상호작용 속에 성장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 다수의 심리테스트가 바로 이 논의 구조에서 출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MBTI가 대표적이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 나눈 후, 심리적 기능에 따라 감각과 직관, 사고와 감정으로 나누어 16개의 성격 유형을 도출하는 논의는 융의 1921년작 <심리 유형>에 그 근거를 둔다. 이렇게 자아의 유형을 확인하면 본인의 장점과 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융이 죽기 전부터 심리학의 중심은 실험과 통계로 이루어진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융이 남긴 집단무의식과 원형이라는 개념은 신화학, 민속학, 종교학 등에 큰 영감을 주었다. 특히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그랬다. 어린 시절 접한 미 대륙 원주민의 신화에 감명받았던 그는 성인이 된 후 알게 된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캠벨에 따르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신화는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위기에 빠진 영웅이 통과의례를 거치며 자아를 되찾고 한 단계 나은 존재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통해 주장한 이 내용은 시나리오 작가들에 의해 헐리우드 영화의 표준 서사 구조로 자리잡았다. 캠벨이 <스타워즈> 시리즈의 초기 구상부터 조지 루카스와 함께 논의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영향을 받은 영웅 서사 구조를 보고 들으며 성장하게 된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융의 분석심리학은 오늘날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심리학'과 매우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담론의 힘은 여전히 세다. 심지어 조던 피터슨처럼, 자신이 오늘날의 대중문화에 대항하는 인물인 양 떠벌이는 사람조차 융의 분석심리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우리는 분석심리학과 신화 구조론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스터 요다의 알쏭달쏭한 말씀을 곱씹을 때조차, 융이 개척하고 캠벨이 가공한 온갖 신화의 가르침을 배우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니 '나에게 딱 맞는 심리테스트'라던가, '나를 가장 잘 설명해줄 어떤 이론' 같은 것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도착할 곳은 정해져 있고, 그 가르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실천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너 자신을 믿어라. 그러나 네 자의식에 갇히지 마라. 네 한계를 인정하되, 극복하라. 다른 이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잊지 마라.

이렇게만 끝내면 서운할 것 같다. 나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자.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것부터. 일기를 써야 한다. 내가 기억하는 나와 내가 기록한 나는 다르다. 그 간극을 보며,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어떤 존재일지 반추하고 내일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좀 더 '매운맛'을 원한다면 신용카드 명세서를 꼼꼼히 읽는 습관을 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무슨 이유로 어디에 돈을 쓰는지 알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마치 확진자 동선 추적하듯 스스로를 뒤쫓아보자. 무턱대고 본인의 소비생활을 비난하라는 뜻이 아니다. 충동구매라고 생각했지만 요긴하게 쓰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요점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는 것이다.

심리테스트는 결국 '영웅'(Hero)의 길을 찾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여정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핸드폰을 보는 대신 스트레칭을 하는 것 같은 작은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주인공(Hero)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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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스> 2020년 5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잡지사에서 교정하지 않은 원고입니다.

2020-06-20

[노정태의 시사철] 삶은 소대가리, 요사스럽게 처먹… "이게 결국 北의 본성!"

삶은 소대가리, 요사스럽게 처먹… "이게 결국 北의 본성!"

이마누엘 칸트와 '영구 평화론'


강물을 앞에 두고 전갈과 개구리가 마주쳤다. 전갈은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개구리에게 등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개구리는 거절했다. 너는 독침으로 다른 동물을 쏘는 전갈인데,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등에 태워주겠니? 전갈은 답했다. 강물을 건너는 중에 너를 독침으로 쏘면 나도 빠져 죽을 텐데 내가 너를 쏠 리가 있니?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쯤 물살이 거세지자, 그때까지 얌전히 있던 전갈은 불현듯 개구리의 등에 독침을 쏘았다. 전갈과 개구리는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개구리가 물었다. 이제 우리 둘 다 물에 빠져 죽게 됐다. 왜 날 독으로 쏘았니? 전갈은 답했다. 나는 전갈이야. 이게 내 본성이라고.

프랑스의 시인이며 우화 작가인 장 드 라퐁텐이 쓴 '전갈과 개구리'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아내에게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라든가, 술이나 도박 따위를 끊겠다고 다짐하면서 끊지 못하는 중독자 등, 도무지 고쳐 쓰지 못할 사람의 사례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좀 더 시각을 넓힌다면 라퐁텐의 우화를 통해 대북 문제 및 국제정치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읽어볼 때다.

칸트의 말년은 혁명의 시대이자 전쟁의 시대였다. 프랑스에서 왕의 목을 치고 민주정을 세우는 혁명이 벌어졌으며, 인근의 군주국은 프랑스를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이다가 역습을 당하는 등,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를 떠난 적이 없지만 온 세상의 흐름을 꿰고 있었다.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은 프로이센과 스페인이 바젤에서 프랑스와 강화조약을 맺었던 1795년의 일이었다. 그는 이듬해 내용을 추가하고 다듬어 2판을 내놓았다. '영구 평화론'은 이렇게 탄생했다.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위해 일단 전제되어야 할 예비적 사항들이 있다. 평화조약에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비밀 조항이 포함되어서는 안 되고,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할 만한 상비군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며, 전쟁 비용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정부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행동도 당연히 해서는 안 된다. 모두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철학적·정치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그 후에 등장한다. 칸트가 볼 때, 전쟁 없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가 시민적 공화국이어야만 한다. 자유로운 시민들이 동일한 법의 지배하에 평등한 나라가 바로 시민적 공화국이다. 그런 나라의 시민들은 전쟁의 비용과 책임을 자신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전쟁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칸트의 생각이었다.

반면 공화제가 아닌 나라, 즉 전제정에서는 전쟁을 벌이는 게 너무도 쉽다. 칸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왜냐하면 이때 지배자는 국가의 한 구성원이 아니라 소유자이며, 전쟁으로 인해 식탁의 즐거움이나 사냥, 궁전의 이전, 궁전의 연희 등등에 최소한의 지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적국을 향해 비난의 말을 쏟아내고 전쟁을 벌이지만 그 고통을 직접 감당하지는 않는 왕이나 귀족들이 다스리는 한, 전쟁의 위험은 늘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지난 주말부터 연이어 쏟아지고 있는 북측의 폭언과 위협에 대해 생각해보자.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통해 들여다보면 그 내막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을 지배하는 자들은 북한의 '구성원'이 아니라 '소유자'인 것이다. 그들은 북한 전체의 행복과 번영, 평화와 발전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들이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국민이 아무리 못살고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삶은 소대가리'니 '국수를 요사스럽게 처먹는다'느니, 북한에서 쏟아내는 온갖 폭언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을 비롯한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는 평화를 위해 외교적 수사를 동원한다. 반면 북한의 언어는 전쟁의 언어다. 당장 상대의 무력 도발을 이끌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의 모욕을 선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애초에 가지고 있는 목적 자체가 다르니 말본새부터 같을 수가 없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이어받아 일부 미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은 '민주평화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으니 타국의 민주화를 돕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군사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우려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타국을 '해방'시킨 후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미사일을 퍼붓고 독재자를 처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난제다. 내정간섭이나 공작을 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전제와 어긋난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대의제를 통하지 않는 인민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법치주의에 따른 대의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왕이 제멋대로 폭권을 행사하는 전제정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그런 주장이 싫다는 이유로 '영구 평화론'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북한의 공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임을 놓고 볼 때 칸트의 혜안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 그리고 소수의 특권층이 2500만 북한 주민을 공포와 폭력으로 지배하는 한, 북한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민의 권력을 합법적·민주적으로 이양받은 지도자가 아니라 폭군이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 죽을 줄 알면서도 전갈이 개구리에게 독침을 쏘듯, 그들은 한반도가 어떤 아수라장이 되건 핵을 개발하고 무력 도발을 저지르며 폭언을 퍼부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북한의 권력은 김씨 일가가 아닌 북한 주민에게 주어져야 한다. 북한 주민 스스로 자신들의 삶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대표를 선발하며, 공정하고 평등하게 법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끔 하는 방향을 국제사회와 함께 모색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확고하게 지켜야 하겠다. 느리더라도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원문: 조선일보 주말판(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9/2020061903042.html)

2020-06-14

근속별 임금격차가 차별의 핵심

"근속·성·학력별 임금격차, 한국이 유럽보다 훨씬 커", 한겨레, 2017년 7월 4일.

한국의 근속, 성, 학력별 임금격차를 살펴보자. "근속별 임금격차는 근속 20~29년과 근속 1년미만 비교"한 값인데, 무려 4배 차이가 난다.

한국 다음으로 심한 시프러스가 2.44배이고 그 다음으로 포르투갈이 2.09배. 이 그래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한국의 근속별 임금격차는 독보적인 것이다.

한국 정규직과 공무원의 '자동 상승하는 연봉 시스템'이 낳는 누적효과. 일단 정규직 트랙에 올라가서 연차를 쌓으면 걍 연봉이 올라가고, 그 연봉 위에 또 연봉이 올라가고, 하다보면 근속 20년에서 29년차가 되었을 때 신입사원의 4배를 받는 것.

우리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 중에 그런 나라는 없음.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도 같은 논리로 설명 가능. 일단 대기업 뿐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도 여성을 정규직으로 잘 안 뽑음. 그런데 여성은 정규직으로 입사해도 출산 육아 과정에서 퇴직(당)하는 반면, 남성 직원들은 쭉 남아서 연차를 쌓는다. 저 '4배 월급'의 사다리에 올라가지 못하고 굴러떨어진다는 것.

이것이 한국의 '10대 90' 격차의 핵심. 10퍼센트 안에만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여자라서 애 낳느라 쫓겨나지 않는 한, 버티기만 하면 됨. 그러면 퇴직을 앞두고는 신입사원의 4배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으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음.

참고로 포르투갈은 소위 '이중국가화'가 심각한 것으로 자주 언급되는 나라. 그런데 그 포르투갈보다 대한민국의 상태가 더 안 좋은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 그런데 그와 같은 임금 구조는 대기업 뿐 아니라 공무원 등 소위 '좋은 일자리'의 핵심이어서 아무도 감히 손댈 수 없을 것.

2020-06-12

[신동아] 조국·윤미향·최강욱 공통 QR코드 마오쩌둥 ‘모순론’

조국·윤미향·최강욱 공통 QR코드 마오쩌둥 ‘모순론’

帝国主义要的矛盾国家内部各阶级的一切矛盾要和服从的地位(마오쩌둥)
*제국주의가 주요 모순일 때 국가 내부 각 계급의 모든 모순은 부차적 복종적 지위로 추락한다

●반미주의자 딸의 미국 유학, 형사 피의자의 큰소리
●국가보안법보다 악랄한 민주당 ‘역사왜곡금지법’
●“주요 모순 결정적, 기타 모순 부차적”…졸작 ‘모순론’, 운동권 원리로
●‘토 달지 말고 따르라’는 권력투쟁 레토릭
●‘모순론’ 번안물 조성오 ‘철학에세이’는 스테디셀러
●불변의 주요 모순 “‘쟤들’이 더 심하지 않아?”
●‘친일파가 친미파 거쳐 지금도 기득권’이라는 역사소설

한때 순수했던 청년들이 나이를 먹고 권력을 잡으니 타락하고 말았다. 그들 스스로가 외치던 정의로운 도덕과 윤리를 내팽개친 채 자신들이 싸우던 상대와 다를 바 없는 기득권이 됐다. 현 정권이 들어선 후 너무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비판이다.

가령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모두가 개천에서 벗어나 용이 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가재·붕어·개구리로 살아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본인들의 자식만큼은 어떻게든 스펙을 쌓아주고 의학전문대학원에 부정 입학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2015년 위안부 협상을 뒤집어엎은 반미 성향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기 딸을 미국에 유학 보내놓고 있었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는 조 전 장관의 아들에게 허위로 인턴 증명서를 발급해 준 혐의로 형사 고발을 당한 피의자인데, 재판 중 당 대표로서 기자회견에 참석해야 한다며 퇴정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물론 판사는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민주당과 ‘열린 사회의 적’


그 정도는 약과다. 현재의 여권은 야당 시절 국가보안법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라고 비판하며 폐지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제21대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자 양향자 의원을 대표로 한 여당 의원 31명이 ‘역사왜곡금지법’을 발의했다.

그 내용을 보면 국가보안법보다 더 악랄하다. 일제 식민통치 주장에 동조하거나 그들을 찬양·고무한 경우 징역형을 때리겠다는 거다. “일제 식민통치 옹호단체”를 대통령령으로 정해 판단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철학자 카를 포퍼가 말한 ‘열린 사회의 적’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사람들을 옹호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60%를 넘나들고 40% 이하로 떨어진 일이 드물다. 여당 지지율 역시 야당과는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경제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던 구(舊)여권과 달리 현재의 집권 세력은 민주주의와 인권, 공정 사회 같은 가치를 자신들의 핵심 어젠다로 내걸고 있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그런 가치를 내팽개친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층은 여전히 굳건하다.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중 잣대를 휘두르며 상대방을 겁박하는 여당과 청와대, 그리고 그 지지자들의 행태는 단순한 ‘내로남불’이 아니다. 그 내역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대학 시절 배웠거나 적어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 철학, 특히 마오쩌둥(毛澤東)의 ‘모순론’을 발견할 수 있다.

‘모순론’은 마오쩌둥이 1937년 8월 옌안 항일군사 정치대학에서 한 강연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군을 물리친 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적은 안팎으로 있었다. 소련에서 교육받고 온 다른 공산당원들과 노선 투쟁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사물의 모순 법칙, 즉 대립물의 통일 법칙은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변증법의 본래 의미는 대상의 본질 자체에 있는 모순을 연구하는 것이다.’”

‘모순론’의 첫 문장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보편적으로 모순이 내재하고, 그 모순 각각은 개별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특수성을 지닌다. 하나의 사물이나 과정에 모순이 하나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여러 모순이 있을 테고, 그중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유명한 ‘주요 모순’과 ‘기타 모순’의 구분법이 여기서 등장한다. 마오쩌둥의 말을 직접 읽어보자.

“따라서 어떤 과정이든지 그 속에 여러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중에 반드시 주요 모순이 있어 지도적·결정적 작용을 하며, 기타 모순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과정이든지 모순이 두 개 이상 존재하는 복잡한 과정을 연구할 때에는 주요 모순을 찾아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주요 모순을 파악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해 보면 딱히 반박할 구석이 없는 지당한 말처럼 들린다. 가령 자동차가 여러 군데 고장 났다고 가정해 보자. 와이퍼가 작동하지 않고 블랙박스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며 엔진이 툴툴거린다. 엔진이 고장 나면 자동차가 멈춰버릴 테니, 카센터에 가면 엔진을 가장 유심히 살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면 와이퍼 고장이 주요 모순으로 등극할 수도 있고, 접촉사고라도 난다면 블랙박스가 안 켜진 것이 가장 뼈아픈 일이 될지도 모른다.

운동권 원리와 독재자 논리 사이
마오쩌둥이 이런 논리를 개발한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당과 내전을 벌이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국공합작을 펼쳤고, 일본군을 쫓아내고 난 후 다시 국민당과 싸우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한발 더 나아가, 공산당이 점령한 지역 내에서는 계급 해방을 앞세우지 말고 당면한 주요 모순인 국민당과의 전쟁에 집중하라고, 내부 분파들을 단속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모든 모순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며, “주요 모순과 부차적인 모순 양자를 구별하고, 주요 모순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모순론은 이후 거의 모든 운동권 담론의 바탕에 깔린 원리가 됐다.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구성체 논쟁’을 떠올려보자. 한쪽은 대한민국의 성격을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로 보았고 다른 쪽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파악했다. 전자는 미군 철수 및 통일운동을 주요 모순으로 보았고, 후자는 신식민지 주변부 파시즘의 극복을 주요 모순으로 설정한 셈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전자는 NL(민족해방), 후자는 PD(민중민주)의 세계관이다.

모순론은 운동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타 모순은 잠시 미뤄두고 주요 모순에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는 내부의 이견을 묵살하려는 독재자에게 악용될 여지를 늘 안고 있다. 국내외로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은 반일주의를 무기 삼아 야당과 시민사회를 탄압했다. 박정희와 그 뒤를 이은 군사정권은 반공주의를 대한민국의 주요 모순으로 설정하고는 인권, 민주주의, 법치주의, 경제적 평등 따위는 기타 모순으로 취급하거나 그런 요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 본토의 사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쫓아내더니 ‘내부의 모순’을 찾겠다며 눈을 번뜩거렸다. 학자마다 추산이 다르지만 공산당이 집권한 1949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7000만~8000만여 명이 정치투쟁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의 인구를 합한 숫자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모순론이 내용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요 모순을 파악하고 그에 집중하라는 말은 ‘중요한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라’는 소리와 사실 다를 바 없다. 평범한 자기계발서, 가령 스티븐 코비의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같은 책에서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차이가 있다면 마오주의(Maoism)는 모순의 해결 방법 중 하나로 폭력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마오쩌둥은 “적대는 대립을 해결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라고 돌려서 말하고 있다. 폭력이 갈등 해결 방법 중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뒷주머니에 꽂은 홍위병들이 죽창을 들고 설친 건 우연이 아니다.

철학 텍스트로서 ‘모순론’은 졸작이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미완성작이다. ‘무엇이 주요 모순이고 무엇이 기타 모순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판단의 원리를 전혀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모순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둥, 사물을 구체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둥, 중언부언이 이어질 뿐이다.

그 허술함은 의도된 것이다. 무엇이 주요 모순인지 미리 정해서 글로 써놓으면 마오쩌둥 본인의 권위가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주요 모순을 결정하는 것, 일관성 없이 뒤바꾸는 것, 기타 모순에 집착하는 분파주의자를 지목해 숙청하는 것, 그것이 마오쩌둥이 휘두른 권력의 본질이었다. 결국 ‘모순론’이라는 텍스트는 ‘내가 제시하는 모순이 주요 모순이고, 네가 주장하는 의제는 기타 모순이니, 토 달지 말고 지도부를 따르라’는 뜻이다. 영화 ‘곡성’의 유명한 대사처럼, “뭣이 중헌디!”를 외치며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레토릭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쟤들은?”


문제는 이 내용 없는 형식이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유통되면서, 이제는 대학가를 넘어 일반 교양 차원에서 비판 없이 소비되고 있다는 데 있다. 1983년 초판 출간 이후 지금껏 꾸준히 팔리고 있는 조성오의 책 ‘철학 에세이’가 대표적이다.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송건호 등이 지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영화 ‘변호인’을 통해 한층 더 유명해진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과 더불어 386세대의 정신세계를 규정지은 대표적인 저작물로 꼽히는 이 책은, 마오쩌둥주의를 구어체로 풀어쓴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셋째 마당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모순론’의 번안물에 가깝다. 주요모순이라는 개념이 소개되고, 중국혁명과 만주사변, 국공내전 등이 사례로 제시되기까지 한다. 그 결과 도출되는 결론은 앞서 인용한 마오쩌둥의 말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이처럼 우리는 주요 모순을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모순을 일시에 전부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분산되어 문제의 해결이 극히 어려워질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애초 익명으로 출간됐던 ‘철학 에세이’는 1993년 저자 조성오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다시 나왔다. 동구권의 몰락과 북한의 경제적 붕괴로 인해 기존의 운동권 사상은 힘을 잃는 듯했고 사회구성체(사구체)와 혁명을 논하던 왕년의 이론가들은 노마드(nomade·유목민)와 탈주를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로 탈바꿈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철학 에세이’는 내용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새롭게 열린 논술 사교육 시장의 주요 입문 서적으로 소화됐고, 오늘날까지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며, 모순론은 철학적으로 완성도가 낮은 권력투쟁의 레토릭에 더욱 가깝다는 사실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자유주의를 내 삶의 신조 중 하나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철학 에세이’의 판매와 유통 등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특정한 성향의 출판물을 비판 없이 수용해 왔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며, 그 내용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86세대, 혹은 그보다 더 젊은 고학력층에서 흔히 관찰되는, 여당과 청와대에 대한 ‘묻지마 지지’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결국은 ‘모순론’의 사고방식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직 감성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극렬 지지층이 아닌, 지적이고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있는 교양인이면서도 선거 때마다 현 여권에 표를 던지는 사람과 정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상대방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걸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도 쟤들 찍을 수는 없잖아.” 여기서 ‘쟤들’이란 당연히 현재의 미래통합당, 그 이전의 자유한국당, 과거의 새누리당, 그보다 앞서 존재했던 한나라당 등이다.

현 정권의 핵심 지지층에게 저 계보로 이어지는 ‘쟤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고 가능하다면 존재 자체를 말살해야 마땅한 절대악으로 간주된다. ‘쟤들’을 이기는 것이 주요 모순인 셈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요소는 기타 모순으로 격하된다. 정경심 교수가 표창장을 위조했건 말건, 청와대가 울산시장 선거에 개입했건 말건, 김경수 경남지사가 드루킹과 댓글 조작을 했건 말건, 윤미향 의원이 위안부 할머니를 앞세워 자기 통장으로 성금을 모아놓고 어디에 썼는지 오리무중이건 아니건, 다 눈감아버린다. 아무리 입 아프게 떠들어봐야 돌아오는 건 이런 반응뿐이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쟤들은 더 심하지 않아?”

‘쟤들’의 어떤 부분이 문제냐고 물어보면, 광주에서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군사독재 세력이기에 용납할 수 없다는 답이 가장 흔히 등장한다. 이미 김영삼 정권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웠고,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김대중이 두 사람을 사면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판단을 바꾸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친일파가 미군정 시기를 거치며 친미주의자로 탈바꿈했고, 그 친미주의자들이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했으며, 오늘날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는 일종의 역사소설을 주요 모순의 주춧돌로 삼고 있기에, ‘쟤들’은 뭘 해도 나쁘고, 우리 편은 뭘 해도 ‘쟤들’보다는 낫다. 선악 이분법에 근거한 사고방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말이 안 통하는 상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철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두 가지 해법이 있다. 첫째, 주요 모순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로 대표되는 일군의 현대 철학자들이 구좌파에 가까운 철학자들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택한 경로이기도 하다.

돈이 썩은 나라는 다 썩게 돼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앞서 말했듯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갈 곳을 잃은 왕년의 운동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장식 삼아 둘러대는 일이 많았다. 애초에 서양 현대철학의 복잡한 논쟁으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인 만큼 노력에 비해 소득이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테다.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연의 비리 혐의가 터져 나온 이후의 상황을 복기해 보자. 한국 운동권의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에 그토록 비판적이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가 팔을 걷고 나섰다. 윤미향과 정의연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을 부추기는 한미일 동맹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주요 모순인 반미주의를 위해 횡령 같은 기타 모순은 잠시 접어둬야 한다는 소리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 저런 소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윤미향의 ‘내로남불’을 아무리 지적해 봐야 소용 있을 리가 없다.

여론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보하는 의제를 선점하고 지켜내야 한다. 이 경우는, 결국 돈 문제다. 2020년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땀 흘려 번 한 푼의 가치를 안다. 등산 소모임을 해도 회비 걷고 쓴 내역을 정리해서 카카오톡으로 공유하는 게 일상화된 나라다. 돈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분위기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시민들은 돈 문제가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논의돼 자신이 낸 세금과 기부금 등이 좋은 곳에 소중하게 쓰이는 나라에 살고 싶어 한다.

개인적인 삶에서는 그토록 탐욕스럽게 재산을 긁어모으면서도 공적인 발언의 장에서는 청빈과 자본주의 극복 따위를 떠들어대는 저들이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은 공산주의도 전민(全民) 항쟁도 원치 않는다. 도덕을 사유화한 특권 계층만 잘사는 위선과 모순의 나라가 아닌,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하고 여유로운 자본주의 국가를 원할 뿐이다.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고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오늘날의 백성에게는 돈이 곧 밥이고, 밥이 곧 돈이다. 돈이 썩은 나라는 다 썩게 돼 있다. 건강하고 투명한 회계에 바탕을 둔 좋은 자본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싸움, 그것이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이 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문: 신동아 2020년 7월호(https://shindonga.donga.com/3/all/13/20887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