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0

[노정태의 시사철] 삶은 소대가리, 요사스럽게 처먹… "이게 결국 北의 본성!"

삶은 소대가리, 요사스럽게 처먹… "이게 결국 北의 본성!"

이마누엘 칸트와 '영구 평화론'


강물을 앞에 두고 전갈과 개구리가 마주쳤다. 전갈은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개구리에게 등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개구리는 거절했다. 너는 독침으로 다른 동물을 쏘는 전갈인데,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등에 태워주겠니? 전갈은 답했다. 강물을 건너는 중에 너를 독침으로 쏘면 나도 빠져 죽을 텐데 내가 너를 쏠 리가 있니?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쯤 물살이 거세지자, 그때까지 얌전히 있던 전갈은 불현듯 개구리의 등에 독침을 쏘았다. 전갈과 개구리는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개구리가 물었다. 이제 우리 둘 다 물에 빠져 죽게 됐다. 왜 날 독으로 쏘았니? 전갈은 답했다. 나는 전갈이야. 이게 내 본성이라고.

프랑스의 시인이며 우화 작가인 장 드 라퐁텐이 쓴 '전갈과 개구리'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아내에게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라든가, 술이나 도박 따위를 끊겠다고 다짐하면서 끊지 못하는 중독자 등, 도무지 고쳐 쓰지 못할 사람의 사례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좀 더 시각을 넓힌다면 라퐁텐의 우화를 통해 대북 문제 및 국제정치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읽어볼 때다.

칸트의 말년은 혁명의 시대이자 전쟁의 시대였다. 프랑스에서 왕의 목을 치고 민주정을 세우는 혁명이 벌어졌으며, 인근의 군주국은 프랑스를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이다가 역습을 당하는 등,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를 떠난 적이 없지만 온 세상의 흐름을 꿰고 있었다.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은 프로이센과 스페인이 바젤에서 프랑스와 강화조약을 맺었던 1795년의 일이었다. 그는 이듬해 내용을 추가하고 다듬어 2판을 내놓았다. '영구 평화론'은 이렇게 탄생했다.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위해 일단 전제되어야 할 예비적 사항들이 있다. 평화조약에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비밀 조항이 포함되어서는 안 되고,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할 만한 상비군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며, 전쟁 비용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정부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행동도 당연히 해서는 안 된다. 모두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철학적·정치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그 후에 등장한다. 칸트가 볼 때, 전쟁 없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가 시민적 공화국이어야만 한다. 자유로운 시민들이 동일한 법의 지배하에 평등한 나라가 바로 시민적 공화국이다. 그런 나라의 시민들은 전쟁의 비용과 책임을 자신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전쟁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칸트의 생각이었다.

반면 공화제가 아닌 나라, 즉 전제정에서는 전쟁을 벌이는 게 너무도 쉽다. 칸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왜냐하면 이때 지배자는 국가의 한 구성원이 아니라 소유자이며, 전쟁으로 인해 식탁의 즐거움이나 사냥, 궁전의 이전, 궁전의 연희 등등에 최소한의 지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적국을 향해 비난의 말을 쏟아내고 전쟁을 벌이지만 그 고통을 직접 감당하지는 않는 왕이나 귀족들이 다스리는 한, 전쟁의 위험은 늘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지난 주말부터 연이어 쏟아지고 있는 북측의 폭언과 위협에 대해 생각해보자.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통해 들여다보면 그 내막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을 지배하는 자들은 북한의 '구성원'이 아니라 '소유자'인 것이다. 그들은 북한 전체의 행복과 번영, 평화와 발전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들이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국민이 아무리 못살고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삶은 소대가리'니 '국수를 요사스럽게 처먹는다'느니, 북한에서 쏟아내는 온갖 폭언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을 비롯한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는 평화를 위해 외교적 수사를 동원한다. 반면 북한의 언어는 전쟁의 언어다. 당장 상대의 무력 도발을 이끌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의 모욕을 선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애초에 가지고 있는 목적 자체가 다르니 말본새부터 같을 수가 없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이어받아 일부 미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은 '민주평화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으니 타국의 민주화를 돕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군사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우려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타국을 '해방'시킨 후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미사일을 퍼붓고 독재자를 처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난제다. 내정간섭이나 공작을 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전제와 어긋난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대의제를 통하지 않는 인민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법치주의에 따른 대의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왕이 제멋대로 폭권을 행사하는 전제정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그런 주장이 싫다는 이유로 '영구 평화론'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북한의 공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임을 놓고 볼 때 칸트의 혜안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 그리고 소수의 특권층이 2500만 북한 주민을 공포와 폭력으로 지배하는 한, 북한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민의 권력을 합법적·민주적으로 이양받은 지도자가 아니라 폭군이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 죽을 줄 알면서도 전갈이 개구리에게 독침을 쏘듯, 그들은 한반도가 어떤 아수라장이 되건 핵을 개발하고 무력 도발을 저지르며 폭언을 퍼부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북한의 권력은 김씨 일가가 아닌 북한 주민에게 주어져야 한다. 북한 주민 스스로 자신들의 삶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대표를 선발하며, 공정하고 평등하게 법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끔 하는 방향을 국제사회와 함께 모색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확고하게 지켜야 하겠다. 느리더라도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원문: 조선일보 주말판(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9/20200619030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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