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엘리트는 '내 탓이오'인데, 韓 586은 왜 '네 탓이오'인가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1.28. 03:08 수정 2020.11.29. 17:02린 닐텝. 가난하지만 천재적 두뇌를 가진 태국 소녀다. 목표는 해외 유학. 아버지가 그 학비까지 대줄 수는 없지만 상관없다. 장학금을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전학 첫날부터 친해진 단짝 친구에게 호의로 커닝을 시켜줬다가 점점 판이 커졌고, 결국 걸렸다. 가까스로 퇴학은 면했지만 장학금은 받을 수 없다.
내 유학비 내가 벌겠다는 마음으로 린은 커닝 비즈니스를 더 키우기로 한다. 미국 유학을 가고자 하는 금수저 수험생들이 고객이다. 미국 대학 입시에 필요한 STIC라는 시험은 전 세계에서 같은 날 치르는데, 그러니 태국보다 시간이 앞선 호주에 가서 먼저 문제를 풀고 답을 알려주는 계획을 세웠다. 린은 또 다른 천재 소년 뱅크와 함께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2017년 개봉한 태국 영화 ‘배드 지니어스’의 내용이다.
‘배드 지니어스’는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범죄 영화, 즉 ‘케이퍼 무비’에 시험이라는 요소를 절묘하게 섞었기 때문이다. 보석 대신 정답을 훔치는 천재 소녀 린의 활약을 보며, 우리는 문득 능력주의(meritocracy)의 허와 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The Rise of Meritocracy)’라는 소설을 썼다. 어느 날 혁명을 통해 신분이나 재산이 아닌 능력에 의해서만 사람을 평가하는 공정한 세상을 만들었는데, 결국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어째서 그럴까? 시험을 통한 능력 평가는 안정적으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는 계층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시험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엘리트는 자기들끼리 결혼하여 지능이 높은 아이를 낳아 좋은 여건을 제공한다. 온갖 제도 역시 자녀에게 유리하게 바꾼다. 대학교 학벌 같은 ‘능력 인증’을 받고 나면 다시는 그 밑으로 내려가지 않게 된다. 실제로는 더 나쁜 신분제가 되는 것이다.
‘배드 지니어스’에서 린이 목격하는 부잣집 아이들의 인생을 생각해보자. 머리가 나쁘지만 돈 많은 집 자식들은 기부금을 내고 명문 사립고에 들어간다. 머리 좋은 누군가를 시켜 커닝까지 한다. ‘보스턴에 있는 대학교’ 간판을 따기만 하면 아무도 그들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능력주의 문제는 현실이다.
2017년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인 리처드 리브스가 ’20대 80의 사회'(Dream Hoarders)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후, 미국 지성계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뒤이어 나온 예일대 로스쿨 교수 대니얼 마코비츠의 ‘엘리트 세습’, 하버드 철학과 교수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도 같은 맥락이다. 사회, 정치, 윤리철학의 최신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2016년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이라는 충격으로 인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 전까지 미국의 리버럴은 상위 1%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게 문제이며, 자신들처럼 능력 있는 중상층 엘리트가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위 20%가 나머지 80%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 진짜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능력주의 비판은 미국 지성계의 자기반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능력주의 비판을 수입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퍽 이상하다. 미국에서는 기성 엘리트가 ‘내 탓이오’를 외치고 있는 반면, 한국의 중장년 진보 엘리트는 청년들을 향해 ‘네 탓이오’라며 손가락질하는 분위기랄까. 20대와 30대 사이에서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그 대항마로 능력주의 비판을 끌어들인다. 인천국제공항 사태, 공공의대 논란 등에서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청년들에게 ‘공정충’ 같은 모멸적 딱지를 붙이고는, ‘너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자체가 특권’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식이다.
그런 비판은 학력고사 봐서 대학 간 다음 데모 좀 하더니 정치권의 주류가 된 586 기득권층에 돌아가야 한다. 학력고사나 수학능력시험이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다른 입시 제도에 비해 부모의 정보력, 인맥, 문화적 자산 등의 영향을 덜 받는다. 만약 1980년대의 한국이 2020년대와 같은 방식으로 대학 입시를 치르는 나라였다면 지금 586세대 상당수는 대학 문턱을 밟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쌓은 학벌과 인맥으로 평생을 먹고살면서 그들은 능력주의의 혜택을 철저하게 누린다.
그들이 만들어낸 오늘의 모습은 어떤가. ‘컨설팅’을 받아야 대학 갈 수 있는 나라, 물려받은 재산 없으면 살아 생전 집 한 채 살 수 없는 나라 아닌가.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사회 전체의 꿈을 긁어모아 제 자식에게만 물려주는 탐욕스러운 기득권자들. 수십 번씩 부동산 정책을 내놓아도 집값을 못 잡는 무능력자들. 그들이 무슨 염치로 능력주의 비판을 입에 담는 걸까.
능력 중심 사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류를 봉건적 신분제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준 자유주의 혁명의 근간에 개인의 능력에 대한 존중이 깔려 있으니 말이다. 능력 중심 시장주의는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단, 학벌을 능력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며, 진정한 능력을 갖출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해야 한다. 특히 인적 자본 형성기, 즉 유년 시절 가정 환경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리브스는 강조한다.
‘배드 지니어스’는 능력주의의 맹점을 배경으로 한 범죄 스릴러 영화다. 있는 집 자식들은 돈 써서 커닝하고, 없는 집 자식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남 좋은 일 시켜주는 세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긴장감 넘치는 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딘가 서글퍼진다. 그래도 시험은 공정한 조건에서 자기 실력으로 경쟁하여 평가받아야 하며, 커닝은 누가 뭐래도 나쁜 짓이다.
12월 3일,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이제는 수능 하나만 잘 봐서는 대학 가기 어려운 세상이라고 한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그 기간에 집중해서 비대면 학원 수업을 받아 공부를 더 잘하게 되었다는 말도 들려온다. 올겨울은 몸보다 마음이 더 추울 것 같다. 모든 수험생의 건강과 건투를 빈다.